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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추가
"저 槐山중·고 문예반장였다구요!"
신복룡 - 호는《답괴》(踏槐)
글방 식구들 두루 평안하시기를 바라며,
손옥철 선생님의 "호수는 어디에"의 댓글을 보내 드립니다.
쓰는 김에 홍경삼 선생님과 신윤석 선생님의 글에 대한 답서도 동봉합니다.
신복룡 드림
어, 벌써 새벽 3시 반이네....
.......................
"호수는 있다"
우리 나라에서 역사 공부를 막는 세 가지의 금기가 있습니다.
첫째로 문중(門中)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형법 308조 사자명예훼손죄에 걸립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징역 2년형을 치러야 합니다. 친고죄로서 공소시효는 3년입니다.
나는 이 송사에 하도 많이 시달려 전기를 쓰기가 두렵습니다.
법리상으로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것이 역사의 비극이며,
따라서 이성계는 역사의 죄인이다.”라는 글을 발표하면 그 후손이 사자명예훼소죄로 고소할 수 있고,
승소/패소와 관련 없이 일단 소송이 성립됩니다.
특히 학술 논문일 경우에는 고소가 그리 쉽지 않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은 yellow paper나 언론지의 경우에는 피소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저는 500년 전의 황윤길(黃允吉)을 거론했다가 피소 직전에 합의로 끝낸 적이 있습니다.
둘째로는 종교 문제입니다.
연전에 예수 믿는 어느 비뇨기가 의사가 “부처님의 사리는 무슨 사리냐, 요도 담석이지.”라는 글을 썼다가
피소된 적이 있습니다. 합의로 끝났지만, 나는 그 의사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대하여 나쁜 글을 쓰면 순교자의 정신으로 달려듭니다.
제가 도서관장 시절에 겪은 일인데, 예수를 나쁘게 쓴 책은 면도칼로 난자를 당합니다.
세 번째는 지방색인데, 이 점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호남” 문제이기 때문에 참 조심스럽습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제 박사학위논문이 전봉준(全琫準)이어서
그의 선대가 살던 곳에서 시작하여 그가 일생을 산 산간 고을에서 죽은 자리까지 “모두” 답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호남 문화에 대해서는 쬐끔 알며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무장 객사의 고개 비뚤어진 비석 얘기를 썼더니 “옆동네 사는 나도 모르는데 무슨 말씀이신가?” 해서
양종석 회장이 고창 군청에 확인했더니 사실이더라며 편지를 했더군요. 징해요.
하여간 위의 세 문제에 대해서 말 잘 못하면 칼 빼들고 대드는데,
무슨 팔자인지 제 공부의 주제는 이 세 가지에 모두 걸려 있어 많이 힘들었습니다.
“호수는 없다”는 이영훈 교수와 손옥철 선생님의 글에 대한 댓글을 쓰면서,
저는 바로 그 지방색에 부딪히기 때문에 좀 멈칫거렸습니다.
장 보뎅(J. Bodin)의 글에도 지방색이 나오며, 미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하게는, 오늘 '조선일보'(3/22)에서 보셨듯이 마포 사람과 뚝섬 사람이 말투가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문제는 지방색이 결코 호의적이 아니라 비하와 멸시와 심할 때는 적의를 품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현대에 들어와서 정치하는 인간들이 이를 표(票)로 계산한 뒤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서로를 비하하는 예를 들어보면, 함경도 사람을 “덤배”라 부릅니다. 걸핏하면 덤벼들기 때문이지요.
홍경래의 말을 빌리면 평안도 사람은 꼭 “평안도 놈”이라고 부릅니다.
경기도는 “깍쟁이”라 부르고, 충청도는 “멍청도”라 부르고, 경상도는 “문둥이”라 부르고,
전라도는 “전라도치”라 부르고 강원도는 “감자바위”라고 부릅니다.
또한 “전라도 사람”이라는 어감과 “호남 사람”이라는 어감이 다르고,
“경상도 사람”이라는 어감과 “영남 사람”이라는 어감이 다릅니다.
거듭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지방색의 최대 피해자는 호남인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능주의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고, 에세이 스타일의 이 글에서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는 “도(道)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제 평생의 주장이지만
도지사 몇 자리에 목을 매는 정치인들 때문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정치인들에게는 지방색이 좋은 즐김 거리이며, 꽃놀이 패와 같습니다.
화개장터에서 만나 의좋게 막걸리 한잔에 꼬막 국수를 나누며 형제처럼 다정하던 하동 사람과 구례 사람이
내(川) 하나를 사이에 놓고 헤어지면 너는 전라도, 나는 경상도가 됩니다.
이영훈 교수가 쓴 “호수는 없다”는 글을 제가 직접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분도 호남 phobia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호수가 없다.” 따라서 “호남/호서는 없었다.” 논리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면
그분은 맥을 잘못 짚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호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호남과 호서를 가르는 호수는 어디인가? 금강(錦江)입니다.
이에 대하여 금강이 강이지 왜 호수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호(湖)는 서구의 개념에서 말하는 lake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한국인이 호라 할 때 무조건 lake로 보는 고정 관념에서부터 오해가 생겼습니다.
파로호(破擄湖)는 호수가 아니라 한탄강의 너른 나루이며, 청펑호, 팔당호도 북한강의 너른 나루입니다.
청주의 미호천(美湖川)은 무심천이 넓어진 곳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가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동정호(洞庭湖)나 파양호(鄱陽湖)는
장강(長江)이 넓게 퍼진 본류이지 호수가 아닙니다. 저는 공부 삼아 중국의 노구교(蘆溝橋)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그곳을 노구호(蘆溝湖)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은 분명히 호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호남(湖南)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나오는 것은 언제일까?
기록에 따르면 《세종실록》 29년(1447) 11월 17일 기사에 하위지(河緯地)의 상소문에
“호남”이라는 용례가 처음 나오고, 직함으로는 임진왜란 직후에
호남수군(1592. 5. 1.)과 호남병마우후(湖南兵馬虞候)라는 직함이 최초로 나오는데
이것이 전쟁의 격화와 함께 전라병마사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통칭하여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른 것은 세종 때이고,
직함이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도
임진왜란을 설명하면서 호남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왜 호서/호남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금강을 그려 보면알 수 있습니다.
금강의 원류는 전북 무주이지만 이곳은 샛강이었고, 이 물줄기가 충북으로 북상하여 본격적으로 강을 이루며
진천-청주-공주-부여를 거쳐 2시에서 7시 방향으로 비스듬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을 기준으로 볼 때 북쪽은 호북(湖北)이라 말할 수 없고,
호서(湖西)라고 부르는 것이 기하학적으로 합당했고 금강 이남은 호남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부연할 것은 그러한 작명에는 중국의 지명에서 암시받은 바가 크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한문 지명은 거의 모두 중국에 있습니다.
이상의 글을 요약하면 호남이니 호서니 할 때의 호(湖)는 Lake가 아니라 넓은 강이며
그것은 금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세종조에 등장하여 임진왜란을 치르는 고장에서 직명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왜 금강을 그토록 주목했느냐의 문제인데
이는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이 커져 이 글에서는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분의 저의 부족한 글인
《한국정치사상사》의 하권 23장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호남 출신이 많은 우리 글방의 식구들에게 이 글이 조금이라도 앙금을 남겼다면
그것은 저의 본심이 아니니 양해하시기를 바라며,
제딴에는 이 문제를 오래 다루면서 깊이 고민하여 쓴 글이니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2021. 5. 23.)
추기(1) : 지난번 홍경삼 선생님의 질문, 곧 길주 대과를 쓰면서 황망 중에 빼먹은 글이 있기에 추기합니다.
그러면 식년시 과거는 몇월에 보았는가? 기록에 따르면 “느티나무의 꽃”(槐花)이 떨어져
사람들이 그것을 밟게(踏)되는 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철을 답괴화(踏槐花)라 하였습니다.
소동파가 첫 임지인 봉상부(鳳翔府) 참판(簽判 : 이때는 첨판이라고 읽지 않습니다)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장안에서 만난 친구 동전(董传)과 헤어지며 지은 시로 《和董传留别》이 있는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粗缯大布裹生涯 腹有诗书气自华
厌伴老儒烹瓠叶 强随举子踏槐花
囊空不办寻春马 眼乱行看择婿车
得意猶堪夸世俗 诏黄新湿字如鸦
조잡한 두루마기를 걸치고 사는 형편이지만
가슴속에는 시서(詩書)가 스스로 피어오르는데
늙은이가 호박 삶아 먹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
어쩔 수 없이 추천을 받아 과거 길에 올랐구려
주머니는 비어 봄놀이 갈 마차를 마련할 형편은 못되지만
사위 태울 가마 얻어 세상 사람 좀 놀라게 해 보게나.
과거에만 합격하면 오히려 세상에 뻐길 수 있으니
황제의 조서에 그대 이름이 가마귀처럼 검은 먹물로 적셔지길...
동전은 소동파의 친구였는데 너무 가난하여 호박죽으로 연명하다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보러 가는 것을 보면서 소동파가 지은 이별의 시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박식해서가 아니라 제 고향이 괴산이기 때문에 얻어들은 이야기입니다.
괴산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槐)가 많아 이름이 괴산입니다.
아깝게도 사라호 태풍 때(1959) 많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위의 내력은 지금으로부터 63 전에 제가 괴산고등학교 문예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문예지를 만들어 놓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제호를 《답괴》(踏槐)로 지은 연유를 들려준 것입니다.
소동파의 시는 그 뒤에 제가 찾아 적어 놓은 것입니다.
18의 나이에 소동파를 배웠다면 괴산중고교도 전주북중에 그리 밀리지 않는 명문임을
알만하지 않습니까? 어험!
제가 만든 교지입니다(1960)
추기(1-2)
오늘 밤에 도착한 홍경삼 선생님의 글을 보고 또 추기합니다.
김승웅 방장은 방장(房長)입니다. 글방의 어른이라는 뜻인데,
조폭이 들으면, 같은 깜빵의 최고 오야붕도 방장이라 하여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찰의 방장(方丈)은 방의 한 모서리(方)의 길이가 한 장(丈) 곧 10척(尺, 3미터)인 방에 사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부처님의 제자로서 글이 “경(經)”의 칭호를 듣는 두 분(다른 한 분은 육조단경을 쓰신 惠能) 가운데
한 분인 유마거사의 방이 그토록 검소했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승이긴 하지만 유마거사나 혜능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스님이 글을 남기면 ○○○론(論)이라 합니다.
이를테면 원효의 《십문화쟁론》이 그에 해당합니다.) 丈은 우리 말로 “길”이라고 번역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길길이 뛴다” 할 때의 그 길입니다.
방장은 단순한 주지나 어른이 아니라 본디 총림(叢林)의 최고 어른을 방장이라 합니다.
총림이라 함은 그 사찰 안에 강원(講院 : 불경을 가르치는 학당), 율원(律院 : 불교의 계율을 가르치는 학당),
선원(禪院 : 참선을 수행하는 학당) 세 기구를 모두 갖춘 대가람을 의미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 승주 송광사, 예산 수덕사, 장성 백양사만을 총림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현직 방장은 다섯 분인데
전직 방장과 총림에는 못 들더라고 큰 가람의 고승을 방장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 듯 합니다.
선달(先達)이란 무과에 급제하고도 합격자를 남발하여 취업이 안 된 합격자(요즘 말로 취준생)를 뜻합니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건달” 노릇을 했습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생원이 많은 것은 일단 생원 초시에 합격하면 평생 생원이니까
갑오년 이후에도 그냥 생원으로 부른 것입니다.
추기(2) 신윤석 선생님께
먼저 답장이 늦었음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백부이신 신재돈(辛在敦) 선생에 관하여 알아본 바에 따르면,
신 선생님은 전북 고부군 공독면 송곡리에서 1923년에 신몽선(辛夢善) 씨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5월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1936년 3월 16일자의 기사), 아들 인승(仁丞)을 낳았습니다.
저로서는 그 뒤의 행적을 알 수 없으며, 1946년 7월부터 1948년 1월까지 19회(?)에 걸쳐
장지학(張志鶴 : 1905-1938)과 님 웨일스(Nym Wales)가 쓴 Song of Ariran을 번역하여 연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장지학이 왜 장지락(張志樂)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잘못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산으로 알려진 장지학이 1905년 생으로 1938년에 이미 죽었고, 그때 신재돈 선생은 학생이었으며,
그 책의 초판이 1941년이니까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재돈 선생이 23세 때 《아리랑》을 번역했으니 영어 실력이 남달랐다고 볼 수 있고,
이미 그때 공산주의를 가까이했다면 사상적으로 조숙했던 것 같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신 이후의 행적을 찾아보았으나 평양에서 발간한 해방정국의 인명사전이나
최근의 인명사전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치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상이 제가 알아본 바입니다. 후손의 입장에서는 흡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합니다.
저도 유념하고 더 살피겠으니, 좋은 기록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아리랑》을 입력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꿈을 이루시기 바라며
신복룡 드림
<전 건국대 석좌교수·한국정치사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수료(정치학 박사). 중앙도서관장·대학원장, Georgetown대학 객원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건국대 정외과 석좌교수 역임/저서: "한국분단사연구(2001)", "한국정치 사상사(2011)", "전봉준평전(2019)",
"해방정국의 풍경(2016)",(역서) "외교론(2009)", "군주론(2019)", "한말외국인기록 전 23권(2020) 등" (신간) "삼국지">
6년전 오늘(2015.5.23·24)
글방에 실린 글 재록
말코글방을 생각한다 <중>
임철순
말코글방의 무엇이 3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각계 남녀들을
忘年(망년)의 사귐과 교류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
홈페이지나 카페가 아니라 이메일을 통해 운영되는 말코글방은
방장이 직접 선별, 교정, 편집한 글을 배달하는 체제입니다.
그 잘난 서울대 문리대의 가까운 동기들과 안부 글을 주고받으면서 시작된 말코글방은
이른바 이런 형태의‘부챗살 소통망’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능상 온라인 편집국장이라 할 방장의 캐릭터에 매력이 없거나 문제가 있다면
지속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먼저 강조합니다.
말코방장의 매력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정과 낭만과 푼수 기질입니다.
대체로 인간관계에 여리고 계산에 어둡고 시와 술과 노래에 쉽게 취하고
걸핏하면 질질 우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멋과 흥을 통해서 그는 나와 남의 경계를 이내 허물고
이른바 얼음을 깨어 서로 길들이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지나쳐 주책으로 흐르거나 필요 이상의 마초 기질을 보이거나 편집에서의 실수를
빚는 단점이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모두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머니라는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방장의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요즘도 그는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삐쭉삐쭉 울곤 합니다.
저는 아직도 편모슬하에서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는데,
글방 사람들은 이미 대부분 고아이므로 그가 울면 함께 울게 됩니다.
그는 소년가장처럼 우리 대신 울고 우리 대신 노래하곤 합니다.
술에 취해 그 다음날 기억을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는 게 문제인데,
올해 우리 나이 일흔인 분이 요즘도 매일같이 담배 피우고 술 퍼마시고 있으니
그 정열과 체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ㆍ서양을 수시로 넘나드는 文史哲의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
영어 불어에다 독어 일어(심지어 전라도 말까지!)를 잘 구사하는 어학실력,
1주일 동안 짐짓 탕자 흉내를 내다 새벽기도와 일요 예배를 통해 착실하게
하나님과 늘 따로 만나는 신앙생활과 성경 지식, 아직도 레이저를 쏘아대는 눈빛,
이런 아우라까지 두루 갖추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30여 년 전 그가 한국일보사 앞의 신우라는 술집 2층에
검은 트렌치 코트 차림으로 계단을 올라서 나타나면
프랑스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들 했습니다. 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는 아예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댄디즘 이그조티즘
딜레탕티즘, 또 거시기 뭐시기 이즘, 이런 모든 것들이 말코글방을 유니크한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회원들은 이런 말코글방에서 함께 어울려 놀고 있고,
다양한 사고와 삶을 담은 풍부한 글을 읽으면서 말코글방을 놀고 있습니다.
논다는 것은 즐긴다는 뜻입니다. 즐기는 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행위의 가장 정점에
올려 놓을 만한 몸짓과 모습입니다.
공자님도 이미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다는 것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좋아한다는 것은
좋아는 하지만 완전히 얻지 못한 것이며 즐기는 것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얻은 것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유사 이래 인간의 모든 크고 빛나는 성취는 바로 이렇게
놀고 즐기는 마음과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말코 호모 루덴스피아
- 말코글방을 생각한다 <하>
임철순
어쭙잖은 글을 몇 회에 걸쳐 쓰면서 한 주일이 바뀌도록 끝을 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제 맨 처음에 말한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
이른바 놀이하는 인간 이야기로 돌아가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ㆍ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호모 파버(Homo Faberㆍ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람)처럼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라는 말을 만들어 내면서 놀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놀이의 본질과 의미를 캐기 시작해
인류문명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에서부터 놀이개념을 찾아본 하위징아는
구체적 사례 설명을 통해 인류의 삶이 놀이로부터 시작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놀이를 통해 계속 발전해 나간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의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놀이는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가장 자유롭고
해방된 활동이며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일과 놀이는 분리되고 단순히 놀기를 위한 놀이는
퇴폐적인 것, 반사회적인 것, 문화와 문명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재미없어지고 세상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은
놀이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의무감과 사명감 속에서 삶의 재미를 잃고 살다 보면 재미와 즐거움을 삶과
일에 접목할 수 없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하위징아는 고대의 신성하고 삶이 충만한
‘놀이 정신’을 회복해야 하며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호모 루덴스를 인류 생성과 발전사를 통해 생각해 보면 하위징아의 주장은
너무도 옳고 당연해 보입니다. 현생인류의 화석에는 호모, 즉 사람 屬(속)을 뜻하는
학명이 들어갑니다. 가장 오래된 현생인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손을 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이른바 ‘똑바로 선 사람’입니다.
더 이상 기어 다니지 않고 똑바로 섬에 따라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인류는 그 뒤부터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연장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그 손으로 수음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절망과 불안 속에서 두 손으로 살인을 하거나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호모 파버가 중요해졌습니다.
호모 파버는 무엇인가 쓸모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1957년 스위스의 소설가 막스 프리쉬(1911~1991)가 발표한 <호모 파버>의 주인공
발터 파버는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싶어 합니다.
‘기계인간 파버’는 인간보다 로봇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측 불가능한 운명에 휘말려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의 딸을 사랑하게 되고,
일어나서는 안 되거나 일어날 수 없었던 일에 계속 부딪히다가
세계를 방랑한 끝에 예측하지 못한 위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9세기 이후 바람직한 인간형처럼 받아들여졌던 호모 파버가 죽은 세상에
호모 루덴스가 나타났습니다. 호모 루덴스는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놀이는 개인의 취미활동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므로
집단을 전제로 합니다. 호모 루덴스와 말코글방의 접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코글방이라는 공동체는 어떤 이익이나 이즘에 의해 결성되거나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해온 분들이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교류하는 마당, 본질적으로 세대 초월 직업 초월 남녀 초월의 놀이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말코글방을 ‘말코 호모 루덴스피아(Marco Homo Ludenspia)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하지만 게임의 룰에 잘 따르고 상대를 존중하며
놀이 또는 게임의 결과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독선적이거나 교조적이거나 남을 배려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이 글방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입니다.
내조때로(in my own way)라거나 멋있어서 환장적(환상적의 바른 말)이라거나
분위기가 상당히 가축적(가족적의 바른 말)이라거나 그 잘난 고등학교라고 말하는 것,
이런 것들 모두가 말코글방의 놀이문화 중 중요한 언어놀이입니다.
이미 머리와 마음이 굳은 사람들은 이런 언어유희를 할 수 없습니다.
놀이의 중요성과 흥겨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잘 보면 말코글방의 회원들은 대부분 일정한 푼수들입니다.
이제 그만 쓰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미진한 기분이 들긴 하는데, 사실 이 글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말코글방 운영을 좀 더 원활히 하고 방장님의 수고를 덜어 주자는 차원에서
발기문(임종건 교수의 표현)으로 주문 제작된 것입니다.
“말코글방은 이렇고 이런 의미가 있으니 우리 모두 합심하고 서로 선동해서 돕고 키우자”는
취지입니다.
사실은 지난 연말부터 간헐적으로 논의돼온 사항입니다.
이미 22일의 허브나라 소풍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바람에
이 글이 더욱 쑥스러워졌지만, 당초 취지대로 많은 분들의 동참을 촉구하면서
김승웅 글방 운영위원회의 5월 2일 결정사항을 아래에 요약, 부기합니다.
운영위원이 아니라고 삐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많이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이 너무 길었습니다.
<(당시)한국일보 논설고문/이사 대우/전 주필, 편집국장/저서:"노래도 늙는구나"/
보성고~고대 독문학과 졸/공주 産>
8년 전 오늘(2013.5.23)
글방에 실린 글 재록
숭문고 글짓기 특강
"독자를 네 노예로 만들라!"
김승웅 - 글의 리드(Lead)는 암사자의 눈!
지난 글짓기 시간에 공부했던 것을 간단히 복습하자.
너희들이 “나의 4월”에 관해 글짓기 하던 바로 그 시간에
이 선생님 역시 “한 번쯤 슬픈 4월”에 관한 글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한 바 있지?
또 내가 글의 리드를 노래로, 그 것도 하필이면 유행가 “봄날은 간다”로 정했던 이유,
구체적으로 4월이 되면 그 노래를 애창하던 작가 김훈의 창법(唱法)을 리드로 골랐던 이유에 관해서도
이미 설명했다.
자, 그러면 오늘은 무얼 배운다?
지난 시간에 예고했던 대로 내 글에 대한 축조심의다.
축조심의...어? 이 말이 뭔지 모르는 게로구나.
한문으로는 逐條審議라 쓴다. 말 그대로 조항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추는 법률용어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판사나 검사 또는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법사상임위원회에서
이 축조심의를 하게 되어있다.
참고로 알아둬라. 국회에서 만들어지는 법은 그 물줄기가 두 군데다.
국회의원 스스로가 입안(立案)한 법안이 그 하나이고 이를 의원입법이라 부른다.
또 하나는 정부 부처에서 만든 법안으로, 이를 정부입법 또는 정부발의입법이라 부른다.
국회에 넘어온 이 법안은 국회전체회의에서 통과되면 일단은 전문율사(律師)출신 의원들로 구성된
법사위원호에 넘겨져 축조심의를 하게 되어있다.
내 글 “한번쯤은 슬픈 4월”을 축조심의하자는 내 말...알아듣겠지?
내가 쓴 글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심의하는 거다. 구체적으로, 내가 왜 그런 구절, 그런 표현을 썼는지를
너희들에게 설명, 앞으로 너희들의 글짓기에 도움과 참고를 주기 위해서다.
글의 첫 구절을 읽자.
“그의 창법은 특이했다. 음정도 곧잘 틀리고, 부르는 중간 중간 나름의 음운론을 폈다.
끝 대목이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를 즐겨 불렀는데,
그 노래의 핵심은 첫 대목 '연분홍 치마…'의 '∼마' 에 있다며 '마!'소리를 거듭 크게 발음했다.”
우선 여기까지.
이걸 글의 리드(Lead)라 부른 다는 건 너희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 해줬다.
자 보자, 첫 문장으로 내가 ‘그의 창법은 특이했다’라 썼는데, 여기 등장하는 ‘그’는 누구인가. 너희들부터 궁금하지?
그게 궁금할 걸 내 미리 알고, 일부러 누군지를 숨기고 있는 거다.
이렇게 궁금증과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독자들은 다음 대목의 글에 빠져들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독자 유인(誘引) 술의 하나다.
여기서 나는 유행가 “봄날은 간다”도 함께 등장시켜,
‘그’와 만나도록 했다. ‘그’의 음악적 수준도 함께 높여,
노래의 핵심이 구체적으로 ‘~마’에 있다는 음운론을 펼 정도의 인물로 시켰다. 왜 그랬냐고?
앞에서 이미 설명했잖나...‘그‘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과 관심을 배가시키기기 위해서다.
다음대목으로 넘어가자.
“이어 '알뜰한 맹세' 대목으로 넘어갔다. 노래 속의 사내자식은 분명 못난 3류였다며
그 못난 놈이 작별하며 내년 봄 이맘 때 꼭 데리러 올 테니… 어쩌고 저쩌고 했다는 것이다.
여자는 오직 그 맹세 하나를 지키느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밤 제비 날아드는 서낭당 길'만 허발 나게 오가며 사내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봄날은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래를 이렇게 마감했다.
"형! 참 이상해요, 잘난 년일수록 이런 3류한테 잘 빠진단 말이에요."
‘그’의 정체가 슬슬 풀려지는 대목이다. ‘그’가 글을 쓴 필자인 나에게 “형! 참 이상해요...”소리까지 내지르는 걸 보면,
너희들은(다시 말해 독자들은) ‘그’와 필자인 나와의 관계가 형 동생 하는
(어려운 말로 呼兄呼弟하는) 친한 관계임을 알게 된다.
‘그’에 대한 궁금증을 더 높이려는 나의 계략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노랫말(가사)을 ‘그’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다시 말 해 ‘그’의 평소 노래 수준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려는 글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에 대해 압축된 궁금증은 내 글의 다음 문장
“이순신을 소재로 쓴 소설 <칼의 노래>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기 앞서 작가 김훈이
‘시사저널’의 창간시절을 나와 함께하며 폈던 봄의 해석이다.”를 통해 독자들에게 일시에 분출되도록 썼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야 독자들은 “아, 그게 바로 김훈이였구나!”라 탄성을
지르도록 말이다. 김훈 하면 웬만한 독자들이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하는 인기작가임을
내 익히 알고 쓴 소리였지.
그냥 무턱대고 김훈을 글 속에 등장시킬 경우 생소하고 자칫 뜬금없는 글로 바뀔 위험이 있는지라,
나는 노래 “봄날은 간다”에 대한 김훈의 시론(詩論) 형식을 내 글 속에 살짝 도입, 글을 이어가고 있다.
이걸 글짓기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 부른다. 영어로는 Story Building.
다음 글을 읽자.
“그의 시론은 다음이 압권이다. 형, 실은 여자도 익히 알고 있었어요.
사내의 그 잘난 맹세가 얼마나 허황되고 알량한 것인지를.
기다림은 그러나 직접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지요.
기다림에 지치다 보면 그 알량한 맹세마저도 알뜰한 맹세로 바뀌고 만다는 걸… 바로 거기에 슬픔이 있다며,
김훈은 예의 슬픈 눈빛을 지었다. 그 노래를 제대로 부르려면 따라서 '알뜰한 맹세'를 '알량한 맹세'나
'그 잘난 맹세'로 해석해서 부를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글의 리드 역할을 한 김훈의 용도는 여기서 그친다.
리드는 여러 번 이야기했듯, 한번 쓰면 잽싸게 그리고 과감히 버려야 한다.
내가 김훈을 버리는 이유? 내가 글을 통해 정작 말하려는 건 김훈이 아니기 때문이지.
김훈 다음에 따라 올 아래 문장을 말하기 위해나는 김훈을 잠깐 차용(借用)했을 뿐이다.
김훈을 빌렸다는 말이다.
“그 4월이 간다. 슬프게 간다. 창간의 괴로움과 외로움에 말리면 나는 김훈을 데리고 정동 술집을 찾아,
거기 창 밖 길바닥에 질펀한 한낮의 봄을 내다보며 노래를 시켰다.
그 때마다 나는 안다. 김훈이 단순히 봄날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봄날을 타령하되 정작 말하려는 건 그가 이미 버리거나 아니면 제게 버림을 준 여인들을,
그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는 삶 그 자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글은 여기서부터 내가 말하려는 핵심으로, 흡사 구렁이 담 넘듯,
아주 교활하게 그러나 정직하게 다음과 같이 넘어간다.
글의 주제가 되는 4월, 바로 ‘나의 4월’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바로 이 ‘나의 4월’을 말하기 위해, 또 이왕 말할 바에야 남과는 다르게 나만의 방식으로 화통하게 말하기 위해
나는 김훈, 유행가 두 곡, 술, 여인(나의 여인이 아닌 김훈의 여인 말이다!) 등의 소도구를 빌렸을 뿐이다.
글은 다음의 긴 구절로 끝난다. 자, 함께 읽어보자.
“만나고 헤어지는 게 어디 여자뿐이랴.
격주로 실리는 '토요에세이'에 지금 내가 고정 타이틀로 달고 쓰는
‘전 한국일보 특파원’의 그 한국일보와도 나는 예의 4월에 헤어졌다. 파리특파원 5년을 마치고
편집국으로 귀사했던 그해 4월, 친정집 정문을 떠나던 슬픔을 나는 지금도 못 잊는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주지스님으로부터 쫓겨난 파계승처럼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던 산사여!
절 쪽을 기웃거릴 때마다 절간은 수목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겨울철이 돼 나목(裸木)들로 바뀌면 먼발치로나마 절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려니…. 그렇게 이십 수년을
나는 객지로 객지로 돈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 중학동 산사마저 헐려 새 건물이 들어섰고,
소멸한 산사에 생각이 미칠 때 마다 꼭 유행가 부르는 기분이 든다.
특히 고복수의 유행가 '타향살이', 그 중에도 2절 가사에 나오는 '하늘'이 떠오른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너무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 쪽…’ ”
여기서 읽는 걸 잠깐 멈추자.
오늘 너희들에게 가르치려는 글짓기 강의의 핵심은 글의 ‘리드’다.
글의 리드가 갖는 중요성과 마력에 관해, 이 선생님은 지난 2년 동안
니놈들에게 꾸준히 강의한바 있다.
다만 그 리드 강의가 탁상훈련에 불과했던지라지라,
오늘은 실제 글쓰기 글짓기를 통해 이 리드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다시 말해 ‘리드’의 실습을 위해 내 글을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이 리드에 관해 복습도 겸해서 오늘 다시 한 번 이야기 한다.
리드는 너희들이 쓰려는 글 전체의 최대공약수를 뽑자는 말이 결코 아니야.
내 여러 번 이야기 했듯, 살인사건의 수사에 나선 형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 했지? 그렇지, 바로 단서(端緖/영어로는 clue) 아니더냐!
그 단서가 바로 리드다.
이 리드에 관해 너희들이 잊어서 안 될 또 한 가지를 기억하는가?
어? 모르고 있네...잘 들어라. 리드는 한 번 사용하면 잽싸게 버려야 하되,
이담에 너희 놈들이 익숙한 글쟁이가 된 후 가르쳐 주고 싶다만,
글의 맨 마지막에 가서 그 버렸던 리드를 다시 한 번 살짝 불러와
글의 대미를 장식하면 썩 좋은 글이 된다.
자, 바로 그 대목도 실습하자. 글에서 그 리드가 어떻게 다시
부활하는지를, 다음 내 글의 종지부를 통해 습득해야 한다.
“이 대목에 이르면 노래는 이미 유행가가 아니다. 김훈이 부른 '봄날은 가~안다'처럼 빼어난 시다.
가객(歌客)이 '하늘 저 쪽'에서 보는 건 과연 뭘까.
그러고 보니 그 신문의 창업주 '왕초' 장기영을 잃은 것도,
내 둘도 없는 불알친구 건축가 김기웅을 잃은 것도,
또 그의 유작(遺作) '천안 독립기념관'을 사후 1년 만에 이렇게 찾은 것도 모두 4월이다.
더더욱 슬픈 건, 이 모든 4월의 헤어짐이 자크 프뢰벨의 시구처럼
'이렇다 할 소리 없이'치러졌다는 사실이다.
정말이다. 그 4월이 간다. 한번쯤 슬픈 4월을 말할 나이도 됐잖은가.
김훈의 말마따나 '그 잘난' 4월이 잘도 간다.”
이 리드에 관해 너희가운데 한 학생이 이 선생님한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기에
거기에 대한 설명도 보태마.
1학년에 재학 중인 석민규 군의 리드관련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같이 읽자.
“안녕하세요.
글쓰기 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석민규, 학번은 1714입니다.
선생님께서 e메일을 보내라고도 하셨고 질문할게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선생님께서 오늘 ‘리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셨잖아요.
리드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독자를 내 글에 빠지게 하는 역할이라 하셨잖아요.
저희가 요즘 국사 수행평가로 나의 역사에 대해서 10쪽이나 쓰는 게 있어요.
그런 자서전 같은 진지한 글에서도 흥미를 유발하게 쓰기위해 리드를 사용해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만약 설명문 같은 글에서도 리드를 그렇게 써도 되는 건가요?”
석민규 군, 잘 물었다.
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짧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암, 리드가 필요하고말고!”다.
더 확대해서 말할까? 모든 글에 리드를 사용하라!
신문 기사를 쓰는 데 리드가 필요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판사의 판결문에도, 의사가 검진결과를 쓰는 데도 리드가 따르면 글이 살아난다.
허다 못해 니들이 일기 쓸 때나 중간고사 답안지 쓰는 데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지만,
고3은 반년 후, 고2는 1년 반 후,그리고 너 석민규 군처럼 2년 반 후 대학 논술고사를 치를 학생들은
꼭 이 리드를 연습해 두라!
글의 사활을 가르는 절대 절명의 관건이 바로 이 리드다.
이 리드를 네가 잘 살리면 네 글을 읽을 독자(논술고사를 채점할 대학 교수가 네 독자다!) 모두가 네 노예로
바뀌고 만다.또 너희가운데 이담에 대학 졸업 후 신문기자가 될 녀석들이 있다면 잘 들어라.
깃똥 찬 리드 깃똥 찬 기사 하나로 너는 독자들을,
흡사 수십만 마리의 들소 떼를 쫓는 한 마리의 암사자처럼, 한곳으로 딥다 몰아 부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수십만 마리의 초식동물 떼가 무서워하는 것이 뭐더냐? 그 암사자의 눈 아니더냐?
기사로, 그 기사의 리드로 번쩍이는 맹수의 눈 말이다.
다음 글짓기 강의는 6월 1일과 8일, 22일 이렇게 세 번이다.
8일 강의(11사~12시 30분/숭문고 5층 일본어 교습실)의 강사는 이 선생님의 대학 후배 되시는
박찬욱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님<사진>이시다.
30분 강의 듣고, 너희들이 내게 써내야 할 글짓기의 주제는 “나는 왜 서울대학에 가야 하는가!”다.
그 글을 짓기 위해 너희들은 김 교수님께 벼라 별 질문을 다 퍼부어야
한다. 질문 없이는 어떤 좋은 글도 나오지 않는다.
22일 강의 주제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외교란 무엇인가? -한국외교관의 책무”를 강의하실,
역시 이 선생님의 후배 되시는 최병효 대사님(사진/현 우석대 교수/노르웨이 대사, LA총영사 역임)이시다.
오늘 강의는 이걸로 끝!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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