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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갈등의 깨달음 (Aware of the Struggle)
죄가 납득이 안 가는 것을 이해하는 자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1990년 7월 8일 스티븐슨과 지멀만이 케냐의 나이로비 시내를 통하여 운전하고 있었다. 그 때에 사람들의 데모가 일어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정치적 정당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제부터 시작했던 폭도들의 실제적인 이유는 평균 17세는 도시의 1/3이며 미고용 상태에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나이로비에 있는 도시 교회 세미나를 인도하려든 참이었다. 그래서 도시에 구원(measure of redemption)을 가져오려는 희망을 가졌었다.
우리들은 폭동이 다음날 까지 끝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회 도로를 돌면서 마침내 일방통행 도로를 만나게 되었을 때 돌과 몽둥이를 든 약 50 여명 가량의 사람들이 차를 전복시키고 불을 지르려고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1차선 도로에서 감탄할 만한 구출을 통하여 U 턴을 할 수 있었고 폭도들이 차를 붙잡으려는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큰 돌 하나가 창을 통하여 집어던졌고 나의 목을 스쳐서 그리고 바람막이를 깨트렸다. 만일 내가 1 센티미터 왼쪽이었다면 나는 의식을 잃어 버렸을 것이며 우리들의 도주는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분노의 실제적인 이유는 흑백 간의 문제가 아니라 빈부의 문제였다. 우리들은 차를 운전하므로 분명히 부자였던 것이다. 도우려 왔던 많은 폭도들의 대부분은(교회의 일원이기도하며) 정의를 완성하는 그들의 파트로서 그러한 부정의 상징에 대하여 옳지 않는 시스템에 관하여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두 부자 부부가 시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 일이 일어나자 우리들의 가정교회가 이러한 충돌에 마주치는 바로 그 순간에 기도를 하고 있었다. 2년 전에 교회의 일원 중의 한 사람이 아프리카 도시로부터 도망한 부부 중의 한 사람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2년 동안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타락한 사람들의 본성과 그 충돌의 문제는 ? 부정과 비-구성원적 사회, 경제적과 정치적 구조인가? 사탄에 의한 직접적인 공략인가? 천사- 우리에게 안 보이는 - 우리의차를 둘러싸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자매가 2년 넘게 우리를 위하여 드린 중보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가? 약간의 잘못 인도된 선생들의 요구가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며 여러분이 마지막 하늘의 축복으로 들어갈 때까지 노력 없는 행복과 문제를 없게 만드는가? 그러나 그것들은 거짓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승리의 전투를 하였으나 성공적인 삶은 아니다. 그리고 갈등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는 어떤 사람들을 조심하자. 그들은 아마도 잘못이 있다. 정말로 인식의 은사가 오늘 날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사) 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혼란스러운 메시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이 죄 없는 완전함과 총체적인 승리의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유지해왔다. 스펄전(Spurgeon)은 전에 한번 회의에서 사람이 그가 죄 없는 완전함과 평화의 제한받지 않는 체험에 들어갔다는 것을 들었다. 스펄전은 당시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식사에 밀크가 그의 교리를 시험하는 연사에게 엎드러졌다. 실제는 아직도 선한 성인들도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상은 우리들은 기도문집이 정의한 대로 육과 악마의 세상인 다면 전방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 이러한 다면전면전쟁(多面前面戰爭)을 위하여 신약성경은 다면전방승리를 제시(제안)하고 있다. 우선 세상에서 말이다.
세상 : 분쟁의 바깥면
어떤 카나다 상업 미술인이 고객들이 받아드리는 여러 종류들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통제를 유지하고 있는 유명한 광고회사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회사의 중견 간부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그들은 도덕적인 사람들로 인간 생활에 유해한 광고물을 포함하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또는 그들의 관점에서 명백히 교묘한 광고 방법을 사용하거나 또는 추진을 호소하고 어떤 이성적인 의사 결정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욕 때문에 이러한 회사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일년 내내 간이음식을 위한 광고하기를 즐기거나 음식체인의 신상품의 상상을 풍부하게 하는 표현 때문에 여러 차례 수상을 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제품과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어떤 새로운 투자에 가지를 펼친다. 그 제품의 공인된 높은 수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음식 체인 뒤에 마피아 돈이 있다는 것이 사무실에서의 풍문이다. 이러한 큰 영향을 주는 일은 고객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상업 화가는 사회의 도덕적 조직을 그들이 믿는바 파괴하는 제품(상품)임을 광고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보스(주장)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을 더 이상 한-두 거래선과 교역할 수 없고 모든 분야에서 다중적 네트워크로 해야 한다. 비지니스 세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시스템으로 일하는 것이며 돈이 어디서부터 굴러들어오는지를 묻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속 사회에서 삶(인생)이란 영적 전쟁이다.
세상과의 투쟁
큰 회사이건 조그마한 경영이든 일이란 믿는 자들을 하늘나라의 원리에 의하여 살기 어려운 사회 안에서 붙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일과 그들의 표준을 내리는 구조, 능력, 권위, 영향과 시스템 등이나 또는 그들을 보상하기를 꾀하는 환경의 통제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우수성 또는 작업 동료에 의하여 자유를 사용하지만 악용한 개인들은 세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복잡성을 고려하는 것 같지 않다. 문제는 개인적인 죄 또는 육신보다 더 심각하다. 정말, 바울은 ‘우리의 전쟁은 육과 혈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엡 6;12) 라고 말한다. 단지 죄성의 모든 것과 사람들의 행위는 모두 합친 것보다 세상에 우리가 직면한 반대편에 더 많은 어떤 것(무엇)이 있다. 그것은 시스템을 포함한다.
예수님은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요 14:7) 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믿는 자들을 미워한다(요 15:18). 믿는 자들은 세상 밖으로 선택함을 받았다(요 15:19)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서가 아니다(요 17:14). 비록 그들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더라도(요 17:15)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요 16:33) 고난은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고난은 다면성이며 부정 또는 사랑하지 않는 구조 기업의 시스템과 재정 신봉의 원리 사회적 패턴, 여백, 믿음 생활의 부족한 습관과 전통 또는 의도적인 반대이다. 그래서 항상 있는 매개체의 영향을 통하여 우리에게 왔다.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대학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는 나의 친구는 광고 세계가 7가지 죽을 죄: 곧, 분노, 정욕, 탐욕, 폭음과 과식, 게으름과 태만, 시기와 질투, 자랑을 호소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학자다운 논문을 썼다.
평균 북미에서는 매일 1400편의 광고물이 (‘1400 메시지 다른 면에서 노출’) 있다는 것을 연구한 조사가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신(이교도, 괘락주의, 무종교 주의) 적 사회에서 인생의 복잡성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잘못 인도된 사람에게 오직 안전한 피난처는 교회 또는 교회 조직(기구)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들이 발견한(극도로 실망해서) 것은 비록 더 한층 영리하게 위장한다고 할지라고) 더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단체/신학교가 구속(속량)되고 성령의 인도를 소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할 수도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의 고난을 이해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분가피한 틀을 마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참 좋았더라’(창 1:31)에 관하여 창조 질서(창조명령)을 기록한 세계를 사용한다. 그러나 세상을 만드는 것에 더 포함되어야 할 것보다 더 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시간(7일), 공간(거룩한 정원), 관계(언약 결혼과 가족), 구조(선과 악)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동물과 뱀)을 포함한다. 구조적 우주 안에 인류를 포함 시켰다. 결혼, 가족, 정부와 국경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시오!
(행 17:26)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에 의미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하셨다.
성경에서 불리워지는 통치, 권력, 덕, 지배, 보좌 그리고 이름(롬 8:38, 고전 15:24, 엡 1:21, 3:10, 6:12, 골 1:16, 2:10, 15)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구조적이고 명령적인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정부, 인권, 국가 구조, 가족, 부족 구조, 동료 동등한 사람의 관계의 우선순위 그리고 천사 세계를 내포한다. 타락의 결과 존재(본질)과 자신으로부터 인류를 보호(방어)하기 위한 인간의 육적 본질의 필요한 제한으로부터 떠난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부분이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사악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라고 주창(단언)하였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헨드리크 벌코프(Hendrik Berkhof)는 창조의 보이지 않는 배경으로 이것을 빛나게 기술하였다.
곧, 하나님이 그의 참 좋은 창조를 둘러싸고 있는 제방 뚝은 친교로 지키며
혼돈으로부터 보존하시려는 것이다.(각주)
하나님의 이처럼 좋은 선물(골 1:16)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틀을 형성하기 위한 의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죄와 전쟁을 통하여 이제 깨어져서 적을 가지며 하나님의 율법에 반항하며 그리고 타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권세의 어떤 것이 그들 자신의 생활에 취하여 졌으며 인류 존재(본질)에 대하여 우상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곧, 정부, 종교, 문화, *** 주의 그리고 데모, 뉴우스를 지배하는 이름과 표제들(엡 1:21)에 의하여 상징화되고 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권력과 권능의 상태를 말한다.
때때로, 우리들은 그들이 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신 같은 요구를 하는 약함과 비천한 권능으로 이러한 과장과 폭군적인 권력에 관하여 듣고 있다(갈 4:8-9)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우리들의 투쟁이 인간적인 문제 곧, 육과혈기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사단의 영적 능력이라고 말하며 그리고 악마/사단 자신은 이 권능을 흡수하거나 자기 자신의 종말을 위하여 그들을 식민지 노예화 했다고 제시하였다(엡 6:10-13). 이러한 습관적이며 낡은 패턴, 곧, 경쟁에서의 경험, 복종을 강요하며 그리고 가장 나쁜 형태인 마술이나 사탄 주의를 통하여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의 방어망 없이 이 세상에서 인류가 생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그리스도인 저자는 신약성경 저작을 우리들의 유익한 삶의 구조로서 능력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악마 또는 천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다른 저자들은 사탄과의 전쟁을 배타적으로 압축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를 취급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체계화된 사탄의 복잡성을 증거 한다. 곧, 구조, 영적 주체, 그리고 마지막 적인 죽음- 영적 전쟁의 모든 분야(고전 15:24-27).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전쟁에서 무능력한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권세를 넘어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힘없는 힘
오스카 쿨먼(Oscar Cullmen)은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차버리는 쇠사슬에 매인 짐승을 능력과 비교하였다. 예수님의 부활과 다시 오심 사이에 로프로 묶여 있다. 아직도 그들이 묶여 있음 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특성을 증명(evince)하는 자유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박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의 마지막 계시록에 확실하게 조망되어 있다(계 18장, 19장).
그리스도의 권능의 관계는 평신도 영성의 매우 중요한 점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인간의 십자가형에의 죽음을 감수했을 때 능력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희생당하셨다. 권능의 보이는 승리는 그의 십자가에 3개 언어로 상징되었는데 즉, 라틴(로마)는 정치적으로, 헬라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히브리는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들의 장소에서 통치권과 힘을 가하였다. 그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이긴 승리뿐만 아니라 또한 능력의 승리였다. 십자가는 정치적 행위나 우주적 승리였다. 무장 능력의 해제를 당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공공연한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그래서 얼마나 그들의 자만이 있었는가를 보여 주였으나 그들을 이기고 승리하셨다(골 2;15). 이것을 말하자면 벌곱(Berkof)는 ‘십자가는 언제든지(언제나) 가면을 벗고 무장해제 되는 곳이다.‘ 라고 말한다(각주)
믿음의 눈 없이는 이러한 능력은 거의 전능자로 보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들이 비록 그들의 주장을 억지 부리기를 계속하여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까지도 이 세상에서 곤란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복당한 것이다.
우선 능력의 거짓 주장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복음서를 설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임무는 그들의 무릎에 능력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임무)이다.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다(엡 6;10-18). 그리고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이 능력을 많이 시도하더라도 우리들은 복음의 설교를 빠뜨리지 말아야 하며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껴 않도록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일부는 그리스도인의 충성스러운 복종을 조장한다(롬 13:1). 그들의 얼마쯤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는 것과 창조적인 임무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즉, 교육, 정치, 그리고 사람을 섬기는 문화(하나님의 의도에 의하여 정의된) 안에 세상의 자원을 복종케 하는 것이다.
어떤 능력은 믿음직한 신자들이 순교에 의하여 가면을 벗게 되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계 12:11).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환각 아래 있어서는 안 된다. 마르카스 바르트(Markus Barth)는 말하기를
채움, 정복, 모든 일을 통치하는 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홀로 유보 되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을 보여 주는 기능은 교회의 몫이다. 교회는 은혜와 연합의 공적 설명되어야 할 약속과 장치이다.
- - -- 새 하늘과 새 땅- - - -
제자도의 능력
사탄을 이기고 죄와 죽음을 이긴 주권과 능력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는 우주 안에 어느 곳이나 사단화 되는 곳이 없음을 우리에게 확신 시켜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을 섬기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이긴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가능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능력을 그리스도화 해야 한다. 교육, 정부와 사회적 행동을 포함을 통하여 능력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능력을 복제케 하는 임무는 유보되어야 한다(엡 1:10, 빌 2:10-11). 우리들은 오염 공해, 식품분배, 불의 , 유전공학, 그리고 위법과 무기의 확산 등의 문제에 대해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목회와 거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짧게 보면 이러한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성공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피조물)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는데 동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권세는 하늘이나 땅에서 나에게 주어졌다(마 28:18)는 것을 아는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한 동안 여기에서 짐승이 주인(계 13:1-18)이지만 사회 조직의 모든 차원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완전히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주권과 권세가 우리들의 보편적 생명과 사역을 위한 구조가 준비될 것이다(계 21:24).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에서 고투가 단순히 세상에서 모든 죄지은 인류 존재의 결과의 총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 왔다. 우리는 체계적인 악과 체계화된 악이 우리가 영광스럽게 성직(직임)을 준비해야 할 영적 전쟁을 위한 부름에 목회(봉사)로 대처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조건, 악을 향한 우리 자신의 경향(의도) 우리의 육신으로서의 조건으로 돌아와야 한다. 지. 케이. 체스테르톤(G. K. Chesterton) 에 기인한 말씀 또한 예리하게 정확하다. 즉, ‘세상에 속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나는 세상과 더불어 잘못됐다.
육신: 안에서 전쟁
설교를 좋아하는 목사님이 그의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할 때 그의 눈이 특히 회중 가운데서 매력 있는 부인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녀가 동일한 의도로 반복하는 것을 느꼈다. 어떤 신비한 것이 그들 사이에 발생하였다. 그가 웅변적으로 그리고 확신 있게 설교를 하는 동안 어떤 전기적인 것이 그와 이 부인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배우자가 있는 결혼한 사람으로서 그는 다른 부인에 대하여 환상적인 것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녀는 그의 꿈에 자주 나타났으며 그래서 그들은 매주일 눈 맞추는 사건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비서가 그에게 그녀가 오늘 오후 결혼 상담 때문에 올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죽는 날까지 고통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부분은 육신과 혈기이다. 인간의 본질인 그 갈등은 인간의 죄로부터 왔다.
육신(Flesh)이란 말인 사르크(Sarx)는 바울의 서신서에 있는 복합어이다. 그래서 짧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성령에 대항하는 육체(육신)
지나간 것 중에 우리들은 바울이 때때로 싸르크(sarx)를 단지 우리에 관하여 무엇이 인간일 것인가를 설명하여 인식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한번 우리들이 인간의 견해로부터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자(고후 5:16). 인간의 기준으로서 고린도인들은 많이 현명하거나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전 1:26). 바울은 세상적인 방법(고후 1:17)의 의미인 육신을 따라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때때로, 육신(Flesh)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종이거나 적어도 중용인 사람의 육체적 생명(롬 2:28)을 나타낸다. 바울은 장애물로 헬라의 육체관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믿는 자들이 그들의 몸으로 그리고 몸 안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드려야 하는 성경관을 고수하였다. 우리들의 최종 미래는 영원성 둘레를 떠도는 거룩한 영혼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현존 안에서 완전하며 개인적이며 육체적이며 인간 생활을 체험하는 부활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계 21-22장). 그래서 ‘육체’란 그리스도 또는 성령 안에 언제나 생명에 대항하는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기술한 육체의 일이 크게 비육체적인 물질적인 것으로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질투, 당 짓는 것, 분리 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으로 정신적, 영적 그리고 이성적인 것들이다. 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은 주로 우리들의 육신적인 몸과 우리 인간의 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항하는 갈등 같은 어떤 것 사이에 있는 것들이다(갈 5:17).
육체의 일 네 가지는- 성적 부도덕, 호색, 술 취함 그리고 방탕 - 육체적 몸에 포함된 것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적인 활동의 뿌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성경에서 말하는 심령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성적 문제는 기본적으로 육체적 문제가 아니다. 무엇인가 더 깊고 더 한층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많은 현대의 번역물에서 인간의 본질이란 말로 사르크(sarx)로 번역하여 사용하나 그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두 부분 곧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나쁜 것이며 하나는 보다 높고 다른 하나는 보다 낮으며, 하나는 하나님에게 다른 하나는 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은 우리 전체의 몸인 -몸, 혼, 영- 그리스도의 통치와 성령 안에서 살기 위하여 갈등하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비록 우리가 한 운반체에 세부분의 개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한 몸, 한 영혼, 그리고 한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집합된 전체로서 육, 혼, 영이다. 만일 성적일로 어떤 사람의 몸을 건드리면 그 사람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적인 일로 기록된 성적 죄는 개인적인 죄이며 우리의 몸에서 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인 안에서 잘못된 것이다. 우상 숭배와 마법(악령 숭배)은 비록 마약 또는 마술을 통하여 사탄의 악의 능력(권세)와 함께 비밀한 기질을 포함하는 것이다. 증오, 불화(반목), 분노, 관계적 죄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동시성이 없는 개인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존경을 받을 때 그들 자신의 유익한 점을 찾거나 아니면 고통을 간직한다. 술 취함과 흥청망청은 마침내 육체적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화학 물질에 그들의 의식을 주는 것이며 넉넉히 개인적인 일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의 일은 우리들의 육체적 시도에 위치하고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삶의 기본적인 방향에 관계된 어떤 것 안에 있다. 이것이 바울이 때때로 그의 편지 서신에서 사용한 특별한 길(방법)을 가 져 온다. 예를 들면, 로마서 7장 18절(내 안에 선한 것이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의 죄된 본질(sarx)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죄 된 본질(sarx)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다) 육체(flesh)는 그것이 죄를 통하여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을 예표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즉, 죽었고 살아날 것이다) 사는 삶이다. 그것은 밖에 있는 삶이며 성령에 대항한다.
육체(flesh)는 전혀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을 알지만 그것을 하는데 소용이 없는 것으로 느끼는 반복되는 상황을 설명한다(롬 7:18). 로마서 7장 15절에서 -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에서 바울의 부디 치고 고통의 고백의 해석에는 커다란 범위가 있다. 그들은 바울이 그의 그리스도인 이전 상태를 말하는 하나의 극단적인 견해와 또 다른 견해인 그가 그리스도인(결국 우리 자신의 갈등의 표현인)으로서 갈등하는 현재의 체험을 고백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 문장의 논박(토론)은 아마도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데니(James Denney)는 이러한 말 가운데서 도움이 되는 목회적 언급을 제안하였다. 곧, 그것은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전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안전한 것이 아니라 표어로서 그의 실패를 설명하였다. 내가 아니라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 -진정한 성인(聖人)에게 그것은 지나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죄인은 그것을 원칙으로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4)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16-26절에서 엄밀하게 제시한 강조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육체를 대항하는 성령
바울의 서신서 안에서 언급한 대문자 ‘S'(때때로 번역의 문제 때문에)를 사용한 성령(Spirit)과 ‘영적(Spiritual)’ 이란 바울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을 주목한 바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내적 전쟁은 낮은 본질(육체)과 높은 본질(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flesh)과 성령(Spirit) 사이와 하나님의 목적(의도)에 대항하여 구성된 전체로서 인간 본질과 이것이 내면으로 전이(내면화)되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사이의 전쟁이다. 육과 성령이 서로 싸워 ‘그러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갈 5:17)라고 말하는 바울의 지적은 전쟁이 내면에서 고조되고 믿는 자가 소망이 없어 전쟁이 끝나서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들은 율법의 사역에 의한 의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바울에 의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 생활(삶)을 인간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관하여 들은 것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은 것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임을 마음에 두었다(갈 3:2-3).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그들은 그리스도인 삶(생명)의 목표를 종교적으로나 또는 다른 방편으로 아직 행함으로는 얻지 못했다. 복음은 우리를 하늘에 데려 갈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승리의 삶을 살도록 무장 시킨다! 그것이 모든 면에서 일관성 있는 믿음과 성령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따라서 살아야 할 의무 아래 있으며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않아야 한다(갈 5:16). 여기에서 ‘육신’이란 단지 인간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의 실재(실체)의 밖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이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괴롭힘과 고통스러운 그리스도인 내면에서 다투는 두 가지 파당이 아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지속성 없이 그리고 조화할 수 없는 삶의 두 가지 길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시작한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살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가 부인한 것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골든 피(Gordon Fee)는 본문(성경)의 부담은 내면에서 육체의 화산 같은 힘 앞에서 믿는 자는 소망 없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지적했다. 피(Fee)는 로마서 7장의 빛 가운데서 갈라디아서를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다. 우리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이와 같은 잘못 인식된 믿는 자들에게 주장한 것은 성령이 그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행함은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을 위한 규정을 만드는 것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전 삶의 소욕을 만족하게 한다. 성령의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나 행하지 않는다. 자유는 육신을 위한 자유가 아니다. 곧 그것은 성령을 위한 자유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 안에서 섬긴다(주 5)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항복하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육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육신을 따라서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각자(그나 그녀)가 구원, 양자,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하신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지속할 수 없다. 우리가 투쟁을 계속 한다는 사실은 다툼의 본질을 이해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방법을 배우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인가의 방법과 육체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않는 방법을 물어보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행함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승리적인 삶을 사는가가 아니라 전쟁의 두터움 안에서 어떻게 승리적인 삶을 사는 것인가? 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로 시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로부터 유익한 목록을 주었다. 어떤 존재의 실험적으로(이를테면 기쁨), 어떤 개인적 태도로(이를테면 인내) 그리고 행위적(이를테면 자제)으로 이다. 이 목록에 관하여 놀랄만한 것은 바울이 규정이나 행동적 요구 등에 의한 수단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을 조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열매(갈 5:23)에 대립하는 법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한 음식, 의복, 종교적 훈련, 오락과 레크리에이션을 규제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규범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도리어 바울이 제안한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이 자신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육신의 일의 반대로 성령의 열매(실제로 7가지 열매)가 자주 일컬어졌다. 일은 완수되어야 한다. 곧 열매는 생명 내부의 침투가 있을 때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매우 적은 노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풍자적으로 육신으로 살기를 거절하기 위한 처음이면서 가장 최선의 전략은 간접적인 것이다. 곧, 육신의 집중으로부터 돌아서고 성령에 집중하는 것이다.
쇼킹한 것은 작가 불명의 내적 전쟁, 곧 ‘정욕의 해부학’을 어느 한 미국의 영적 작가가 포르노와 관음증과의 그의 길고도 긴 투쟁을 그려냈다. 그는 정욕은 정말로 즐겨야할 것이며 훔쳐볼만한 것이며 보상을 재촉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는 이따금 그가 기도 가운데서 후회하며 하나님에게 그의 소욕을 제거하여 달라고 울부짖었을 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고 실망하였다. 그때 그는 모리악(mauriac)과 연결되는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단순히 순수함을 찾기 위한 이유였다. 모리악은 말하기를 ‘순수는 보다 높은 사랑을 위한 조건이다 곧, 모든 소유보다 최상의 소유는 하나님 자신이다.’ 정욕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논쟁과 바꿀만한 힘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범위들에 대하여 이곳에 이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정욕을 제어하기를 계속하므로 이전의 나를 잃게 되었다는 처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의 익숙했던 습관들을 억제했다.
열매 맺는 것은 또한 바울의 두 번째 전략이었다. 그 전략은 또한 긍정적으로 동기 부여가 있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우선이 아니고 부정적인 일이 맨 먼저이다. 그것은 회개와 같은 것이다. 루이스(C. S. Lewis)는 ‘회개란 하나님이 여러분을 뒤로 물러서게 하고 혹시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면(곧, 그것은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처럼의 단순한 처방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내려놓으시기 전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반복적으로 권고한 이러한 방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봇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러한 성명은 마치 음성적 선행이 양성적 선행보다 더 많이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사람의 신체(육체)적 삶의 금욕 또는 자신을 미워함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들의 자율적인 자체 의의 생명(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완전하고 지속적인 일치(동의)를 호소했다. 그것은 죽음의 가치가 있으며 곧, 그것은 하나님을 죽음으로 처하게 하며, 그리고 그를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서 살해한다.
죤 스곳트(John Scott)는 십자가형은 동정심 없고(그리고 우리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 고통스러우며(비록 육체의 쾌락이 순간적이라고 해도) 그리고 결정적인(헬라의 과거 시제에 의하여 제안된) 완전하게 성취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 삶에서 어느 곳에서나 우리들이 직설법(존재하는 것으로)으로부터 명령법(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전환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육체를 부수적으로 이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체에 십자가 투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굴욕은 승리적인 전투를 사는 절반 이하의 것이다. 다시 한번, 바울은 복음을 설교한다. 우리들은 패배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여기서 다시 우리들이 직설법에서 명령법으로 바뀐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령에 의하며(롬 8:14-15)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다(소를 인도하는 농부, 또는 죄수를 감옥으로 호송하는 군인과 같은 이미지)
우리는 지속적으로 선을 향한 부드러운 압력을 받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로 행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행한다는 두 가지 단어의 의미는 걷다. 라는 기본단어 스토이케오(stoikeo)이며 그 뜻은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다 또는 성령의 강권(명령)으로 자신을 세운다. 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모두 우리의 편에서 어떤 행동을 제시하거나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지속적이고 창조적인 시작(발동)의 응답(반응)의 한 행위이다. 반대로 육체를 심으면 멸망을 성령으로 심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갈 6:7-8). 부정적으로 성령을 따라 걷는다(행한다)는 것은 육체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롬 8:5) 혹은 육체의 행위를 하는 것(갈 5:19-21)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욕망과 행위를 성령에 의하여 죽음에 두었다(롬 8:13, 갈 5:16-18,24-26)
이것 안에 포함된 것은 우리 인간의 성취의 자랑, 인간의 지혜 또는 의를 달성하는 방법으로서 인간의 법을 지키는 것을 부인(거부)한다. 긍정적으로 성령을 따라 걷는다(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따라 이미 행한 것(갈 5:25)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령의 일에 사람의 마음을 두는 것을 포함한다(롬 8:5). 그리고 성령으로 그의 열매를 우리 안에 생산하도록 (갈 5:22-23)허락하며, 거룩한 일(사역)을 위한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롬 12:9-21, 사 58).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개하실 때까지 우리들은 결코 긴장과 투쟁(갈등)을 체험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패배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께서 오셨음이 분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들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말로 우리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신약 성경 영성은 영성-영적(Spirit-Uality)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만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성령으로 살면 여러분은 육신의 욕망을 이루지 않을 것(갈 5:16------은 저자) 그러나 육체를 이기는 것보다 승리(성공)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있다.
사탄(악) : 보이지 않는 전쟁
어떤 그리스도인 구강 외과 의사가 1년 내에 연속적으로 이상한 사고들을 당한 세 명의 환자의 죽은 외상을 꼼꼼하게 조사하였다. 각 경우에 외과 의사가 아닌 마취사가 환자의 생명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래서 주무 의사가 책임을 논하고 있었다.
첫 번째 경우는 환자가 일반적인 마취 과정아래 정상적인 구강 절차를 취하는 동안 진단하지 않았던 심장 문제로 죽었다.
두 번째 경우는 결함 있는 장비가 대상이었다. 각 부검은 구강의사가 전문적인 능력으로 그의 절차를 수행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특수한 사업은 전적으로 의사에 관련된 선한 뜻에 달려 있으며 이것은 매체가 이야기를 보류할 때 깨어졌다. 타블로이드 신문과 지방 방송으로 보도되자 의사로서의 그의 기록은 공공연한 화제 거리가 되었다. 구강 외과 의사들이 면허증을 조사하고 그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이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사고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의과 친구들은 그의 환자들을 그에게 넘기는 것을 자유롭게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일이 보다 더 나빠지자 그는 마침내 마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그러한 경험이 그와 그의 가족을 보다 깊게 하나님에게로 밀고 갔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공의 의견에 괴로웠고 막다른 골목에 숨어버린 언론인들을 무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력이 망쳐진 이 의사는 어쩔 수 없이 혹시 이것이 사탄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인지가 의심스러웠다. 여기서 무엇이 진행되었는가?
적을 알자
우리들은 갈등의 보다 더 큰 차원에 와있다. 우리가 갈등하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서방 사회는 인생의 영적 해석을 크게 부정하고 있다.
교회가 어떻게 진행되고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사회적 분석으로 알기위하여 영적 실제를 뒤로 남겨두고 보이는 현실적인 것으로 돌아섰다. 몇 년 전에 제임스 스튜워트(James Stewart)는 우리들의 성경적 틀에 대한 이러한 종식의 지성적 역사를 추적했는데 이러한 번지르르한 말 가운데 성 바울의 권세와 권능 - 사람의 영혼에 악하게 붙잡고 있는 마귀의 권세와 싸우며 구원하기 위하여 둘째 아담을 소환했다. 라는 사실이 우리가 들은 바대로 잘 알려 졌으며 묵시적 상징이 되었다.
이 결과에서 뉴턴, 다윈, 그리고 프로이드는 확실히 공헌했다. 그래서 악마는 필연적으로 비이성적이며 기술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성 요한이 분명하게 명명하였고(요일 3:4) 성 바울이 불법의 비밀이란 구절(살후 2:7)이 있음에도 뉴턴의 일은 비이성적인 원리가 자연에 있을 자리가 없고 그래서 악마는 필연적으로 비이성적 기술적으로 정의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존재의 생물학적 갈등에 대한 다윈의 그림이 사탄과 주님의 왕국 사이의 우주적 갈등인 성경적 그림을 근본적으로 대체하여서 갈채를 받아왔다.
마침내, 프로이드는 정신적 콤플렉스인 노이로제로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므로 영혼을 굳게 잡고 있는 이 어둠의 권세를 몰아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은 다만 내적 개인의 조정의 일로 해결된다(주 7)
최후의 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악의 있는 영적 존재이다. 그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 곧, 이세상의 임금(요 14:30), 마귀(마 4:1), 커다란 붉은 용(계 12:3, 9), 옛 뱀(계 12:9), 사단(계 12:9), 참소자(계 12:10)이다. 그의 전략은 교역자들과 그리스도 교회를 어리석게 만들어서 조롱거리로 삼고 신자들을 괴롭힘으로 파괴시키며 기쁨으로 그들을 옷 입히며(계 12:10)
쾌락주의, 세속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신랄함(고후 11:30)을 전환시키며, 하나님의 백성(가족)을 갈라서게 하며, 가끔 농담(야 3:14)을 하며, 지도자들을 의존하도록 사람을 속이거나(갈 4:17) 혹은 약속된 인생 양식을 받아드림으로 신자들을 꾀임(벧전 5:8)을 통하여 조롱한다.
다음 장에서 엑소시즘의 사역을 취급하면서 저자는 영적 전쟁(투쟁)의 다른 개념을 여기서는 제한 하고자 한다.
기도를 통한 영적 무장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8절에서 로마 군인(병사)들이 입은 무장의 부분들을 인용하여 정교한 은유법을 사용한다. 아마도 그가 쓴 대로 그것을 사람에게 연결 시켰다. 진리의 띠는 청렴결백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의의 흉배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그리고 의롭게 사는 것을 포함한다. 복음의 신발은 우리들이 준비되었으며 복음의 소식을 나누는 길에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수동적(방어적)인 것 이상이 있다! 믿음의 방패는 적의 공격을 반영하며 구원의 투구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속한 마음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읽고 순종하며 전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의 믿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성취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기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이다. 곧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기도이며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인 것이다(엡 6:18).
기도의 생활로 산다는 것과 그리스도로 끊임없이 옷 입는 다는 것이 우리가 볼 수 없는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때때로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어떻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초두에서 저자가 나이로비에서 우리들의 구원(구출)을 언급한바 있다. 우리들은 차 주변에 있는 천사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의 뜻대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천사들을 소유하고 있다. 일년 전에 리젠트 대학에 있던 한 학생이 영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대학 캠퍼스를 가로 질러 걷고 있었는데 한 초췌하고 위협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홀로 걷고 있는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주님을 부르면서 ‘도와 주세요’ 라는 기도로 무장하였다. 그녀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 와서 텔레비전을 켰을 때 그녀가 캠퍼스에서 본 바로 그 남자를 확인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남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을 괴롭힌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즉각 자신을 밝히고 시키고 그 사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왜 저를 건드리지 않았나요? 라고 그녀가 물었다. 그 남자는 ‘나는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두 건장한 남자가 한 사람은 오른편에 다른 한 사람은 왼편에 당신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영적 전쟁은 사단과의 직접적인 대면에 있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 잠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 그러나 보다 보편적으로 그것은 매일 매일 예수님으로 옷 입고 복음으로 사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의 중대한 차원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사람조차 심지어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와 중재의 실천
용서는 지옥을 약탈하며 덮으려고 움켜지는 사단의 무리들을 보내 버린다. 용서는 영혼에게 화평을 가져온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평화롭게 한다. 용서는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고 사람들로 현재에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은 가장 괄목할 만한 영혼의 치유이다. 우주 전쟁에서 가장 깊은 승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용서할 때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 대한 범죄의 근본적인 치명적인 의미를 잊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지금과 같이 대접한다.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의 몸의 상처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믿음의 의미로서 ; 곧 우리에게 빚진 자의 부채를 탕감하며 쉬운 재지불 일정 또는 거래의 거절 ; 남을 해롭게 하는 행동보다 관계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죄로 인하여 방해가 없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요 8:11)
루이스 스메드(Lewis Smedes)는 미래의 창조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오직 토론은 용서의 기적뿐이다.(8)
바울은 이처럼 간단한 요구로서 무장하는 엄청난 비유를 마친다. 곧,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엡 6:19). 칼 바르트(Karl Barth)는 기도에서 손을 잡는 것은 세상의 무질서에 대하여 상승의 시작이라고 한번 말한 적이 있다.(9) 우리가 다른 사람과 그리고 자신 안에서 무질서에 대하여 상승의 시작이 또한 있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서 23절과 3장 14절에서 21절의 훌륭한 사례의 중보기도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에 사람들을 붙잡은 다음 그들을 우리들의 기도하는 심정에서 하나님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는 새 예루살렘의 조망으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개인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상을 받았거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붙잡고 있는 환경이다. 둘째로, 가장 웅변적인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단지 신음하고 성령의 웅변적인 것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성령의 중보(중재)를 등에 짊어진다(롬 8:26). 셋째로, 세속적인 마음 결정에 거슬리는 신비한 방법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는 보다 깊은 단계에서 다른 개인들과 접촉하는 것이다. 본 훼퍼(Bonhoeffer)는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은 손을 각자에게 올려놓으시고 함께 초대한다. 그래서 우리의 형제들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파스칼은 기도란 인과관계의 위엄으로 사람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했다.(10). 피. 티. 포르쉬트(Forsyth)는 땅이 매일 성도들의 기도에 의하여 흔들린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역사 가운데서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은 그리스도가 머리로서의 단체(연합)의 기도의 연속 사격이 아니라 구세주와 중보자 그리고 그의 공동체, 성령 안에서 와 성령이 창조하신 교회 안에서 조직된 기도의 양과 에너지로서 협력적 행위인 것이다(11). 영적 전쟁에서 매력적인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로서 시작하는 것이될 것이다. 우리의 동료이자 친구인 제임스 휴스턴 박사(Dr. James Houston)는 갈등에 대한 기도를 제안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에게 부르짖는다. 나의 심령의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나를 인도 하소서. 나의 체질의 유혹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나의 자신의 개성의 악한 경향들을 변화시켜 주소 서. 인생에서 나 자신의 세대의 유혹으로부터 보호 하소서. 곧, 젊었을 때 정렬, 중년 때의 냉소(비꼼), 늙고 외로울 때 자신의 측은함으로부터 보호하 여 주소서.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문화의 유혹으로부터 구원 하소서, 이 러한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나의 죄스러운 심령 위에서 나는 유혹에 빠진 다(12)
세상, 육신과 마귀 - 각각은 다르게 싸운다. 우리는 세상과는 부조화스럽게 다루고 하나님의 뜻으로는 순종으로 세상을 다룬다(롬 12:2). 우리는 고난(그리스도의 십자가)과 열망(성령으로 숨쉬는 것)으로서 육신을 다룬다. 우리는 저항과 달아남으로서 마귀를 다룬다(야 4:7, 계 12:11) 그것은 삼면에서 싸우는 전투이다. 곧, 세상, 육신 그리고 마귀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세 가지 측면 각각에서 우리를 대면하신다. 그분은 내면으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롬 12:2)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과 사명 안에서 세상에 침투하여 적응시키게 하는 것보다 도리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신다(갈 5:22, 25). 마치 우리가 성령 안에서 동행하기로 결정하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여기므로 그리고 마치 우리가 모든 종류의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무장으로 옷 입음으로 (엡 6:13-18). 그분은 악한 것을 이기시고 마귀를 이기셨다(계 12:10).
케냐에 여러 번의 여행 중의 하나로서 저자가 통제된 지역 안에서 목사님과 같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언제나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배우기를 열망하였다. 왜냐하면 크기로서는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믿었으며 실제로 천사와 마귀를 믿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승리의 삶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사역의 일환으로서 귀신을 집어 던지지 않느냐? 라고 저자는 천진낭만하게 물었다. 그는 오직 주 예수님만 하실 수 있어요 라고 이어서 놀란 듯이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