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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패자부활전
34: 1-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9.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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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고등학교야구가 인기가 많았는데, 그 경기에는 패자부할전 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기에서 진 패자들끼리 경기를 해서 이기면 다시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미 한번 패배를 해서 탈락할 뻔했던 팀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 그때는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서 경기를 하기 때문에 경기가 아주 스릴이 있었고, 실제로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팀이 우승을 한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패자부활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시작했지만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이미 한번 실패했다 할지라도 재기해서 처음보다 훨씬 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은혜로 주어집니다.
신앙에서 패자부활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고집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나 축복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의 모두가 자기 힘이나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자기 힘이나 지혜는 의지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때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큰 힘과 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도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사람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배운 학문과 무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려고 했을 때는 애굽의 공사감독관 한 명을 때려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서 그의 꿈은 깨어지고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미디안의 목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디안에서 목동생활 40년 동안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낮아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능력의 사람으로 사용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그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사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죄를 범하고 엄청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부르셔서 다시 율법을 새 돌비에 새겨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한번 크게 실패한 후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만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해서 무사히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도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서 율법을 돌 판에 새겨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그들을 철저하게 책임져 주신다는 일종의 계약서였습니다. 그것을 돌 판에 새겨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해주신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약속에 철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돌에 당신의 약속을 새겨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은 글이 지워지지는 않지만 깨어질 수는 있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모세가 돌 판을 집어 던졌더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무리 확고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완악함 앞에서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변치 않는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려 하신다 할지라도, 그들이 끝내 외면하고 죄를 지으면 어쩔 수 없이 그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드린 말씀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모세는 화가 나서 율법을 새긴 돌 판을 깨뜨려 버리고, 율법이나 기적을 뛰어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변치 않는 언약을 주실지라도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어기면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을 뛰어넘는 은혜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에게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심으로 모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의 등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영광입니다.
율법은, 밖에서 ‘이렇게 해라. 그러면 이렇게 해 주마’ 하시는 약속이지만, 복음은 믿는 사람 안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복음은 얼굴의 영광입니다.
돌비 자체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단지 그 돌비를 보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확실하게 약속해 주셨구나, 그런데 우리의 완악함은 이 돌비보다 더 단단하구나.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다 지켜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항복하고 순종해야 이 돌비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갈3:24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안내자라 하였습니다.
율법만 가지고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습관과 고정관념과 정욕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법을 정하고 도장을 찍고 그것을 돌비에 새겨 넣는다 할지라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고집과 육정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우리 안에 새 마음을 만들어 주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아직 복음은 주시지 않지만 본문에는 그 영광된 복음의 암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다시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너는 처음 것과 똑같은 돌 판을 준비해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 전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1-2)
다시 율법을 주겠다는 말씀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지난번의 반역을 용서해주신다는 의미이고, 다시 약속을 맺어주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왕에 하나님이 율법을 다시 주시려면 처음처럼 돌 판까지도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면 좋았을 텐데, 왜 이번에는 모세에게 돌 판을 만들어가지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모를 때는 하나님이 다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언약을 세울 때에는 이미 그들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난번에 받은 돌 판이 몇 개이며, 그것의 크기와 두께 정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첫 번 것과 같은 돌 판을 만들자면 만들어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네가 만들어 오라고 하신 것은, 알고 있는 것만큼은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약을 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제 너희는 아는 것만큼은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는 못해도 우리가 알게 된 것 만큼만 순종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이 되지 못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을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
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조차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신의 신앙이 클클하고 답답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이 갈라지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해야 믿음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적을 기대하거나 부흥회를 열어주기를 바라거나 기도원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이 살아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우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작은 것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신앙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삶에는 체험이 있을 수가 없고 순종하지 않는 삶에서는 기적을 날마다 본다 할지라도 그 영혼은 막막한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기적을 행하시던 날,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쳤을 때 그것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다면 그날의 기적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하기에 앞서 아는 것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돌 판을 만들어가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날, 하나님은 첫 번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산에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산에 인적을 금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3)
왜 접근금지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우리가 짐승과 함께 생활할 수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짐승들은 먹는 것과 배설물을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존재이고 시시때때로 더러운 것을 쏟아내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는 악하고 더럽고 추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의 입에서는 악독이 뿜어져 나오고, 행위에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악이 생산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짐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착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더럽고 추악한 탐욕으로 얼룩져있습니다. 우리는 어디 누구를 돕는다고 구호물자를 가지고 가서도 그것을 칭찬받기 위해서 신문에 내려고 사진을 찍는데 마음을 둡니다.
사람들끼리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고 교제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의 속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대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도 하나님처럼 상대방의 마음속을 훤히 다 볼 수 있다면, 실망과 증오가 가득해서 함께 살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추악한 것이 속에 가득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신4:24에서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길 이외에 하나님께 접근하는 자는 소멸될 수밖에 없고,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으로만 그분 앞에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내 생각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악하고 추잡한 생각을 가진 우리가 더럽고 악한 행실을 저지른 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기도하거나 예배할 때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7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선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 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5-7)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선포하십니까? 하나님은 두 가지 면을 가지셨습니다.
그중 하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인자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 때문에 우리가 죄인임에도 죽지 않고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자’라는 것은 죄인이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올 때 얼마든지 용서해주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죄를 깨닫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죄를 자기가 책임지려 하다가 결국은 감당하지 못해서 자포자기하고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또한 면은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악용하여 거짓으로 회개하는 체 하고, 계속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속이려 할 때 그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며 그의 자손에게 삼사 대까지 갚으시는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자비로울 사람에게 자비로운 분이지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후손들에게까지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자비로우십니까? 일단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며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죄가 크고 많다할지라도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 눈처럼 희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다시 묻지도,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사람은 철저하게 심판하여 망하게 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국물도 없으십니다.
자기의 죄를 감추고 계속 죄에 머물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는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져간 돌 판에 율법을 다시 새겨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그들과 언약을 다시 맺고 그 언약에 얽매이겠다는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굳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지키시고 복 주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들이 죽든지 망하든지 말든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그들과 약속을 맺으셔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는 한,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지켜주셔야 하는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너무나 고마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패자부활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만 지키면 그들은 안정을 얻고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보다 더 큰 보장은 없습니다.
어떤 약소국이 강대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으면, 그때부터는 나라의 안전이 보장되기 때문에 대단히 다행한 일입니다.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개입하여 책임지고 그들을 돕게 됩니다. 강대국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런 책임을 져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방위조약을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구상의 어떤 민족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기적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출애굽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는 광야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계속될 것이며,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살고 있던 우상 숭배하는 민족들인 일곱 족속이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있고 아무리 강력한 무기들로 무장했다 할지라도 당신의 능력으로 다 쫓아내실 것이며, 그들이 섬기던 신들이 거짓임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리스도가 그들 중에서 태어나 천하 만민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성령이 친히 동행하실 일을 일컬어 이 상에 그 누구에게도 베풀지 아니한 기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이 주신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그 은혜 안에서 살려고만 한다면,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지 못하고 실패한 적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 결심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12)
이방인이 섬기는 신들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약속이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가짜 신을 섬기는 일에 동참해서 하나님이 너희와 세워주신 언약을 파기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려고 애쓰는 일들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갈 때에만 하나님이 보장하신 동행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 유효한 것입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주님의 말씀만 따라가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세상이나 다른 종교의 것을 배우고 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접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뜨려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패자에게도 패자부활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다시 언약을 맺어 주시고 기회도 주십니다. 그동안 실패했다면 다시 주시는 이 은혜의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가롯 유다는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리어 주님을 팔아먹은 패자였습니다. 그는 자살함으로 영원한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을 받고서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는 패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다시 주님을 섬기되, 복음을 위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충성해, 패자부활전을 통한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잘못 했다는 자책감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려먹고 내 마음대로 신앙생활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였고 자신도 고난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비하고 인자하심이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용서를 빌고, 이제부터는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삽시다. 약속으로 주신 말씀만 순종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결승에 올라가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단 한분도 신앙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