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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1-37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성경본문 : 다니엘 4: 1-37
1. 느부갓네살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찌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3.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4.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5. 한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였으되 곧 내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을 인하여 번민하였었노라
6. 이러므로 내가 명을 내려 바벨론 모든 박사를 내 앞으로 불러다가 그 꿈의 해석을 내게 알게 하라 하매
7.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가 들어왔기로 내가 그 꿈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나 그들이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느니라
8. 그 후에 다니엘이 내 앞에 들어왔으니 그는 내 신의 이름을 좇아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자요 그의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자라 내가 그에게 꿈을 고 하여 가로되
9. 박수장 벨드사살아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은즉 아무 은밀한 것이라도 네게는 어려울 것이 없는줄을 내가 아노니 내 꿈에 본 이상의 해석을 내게 고하라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13.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14.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15.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18. 나 느부갓네살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박사가 능히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니라
19.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이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지라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을 인하여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
20. 왕의 보신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은 그 아래 거하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더라 하시오니
22.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 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하더라 하시오니
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줄을 아시리이다 26.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쌔
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33.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36.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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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생애에서 대전환점이 되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서 4장의 주역은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의 사건들 이전의 느부갓네살 왕
지금까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해서 살펴본 내용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시다. 1장에서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대(對) 유대인 융화 정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왕은 유대인 포로들 중에서 유능한 자들을 발탁하여 교육을 시킨 후 바벨론 제국의 요직에 등용시키는 탁월한 정책을 썼습니다.
네 명의 유대인 청소년들이 공직을 맡기 위한 프로그램에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지정하는 음식을 우상에게 바쳤던 것이라는 이유로 먹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을 우선시했듯이 하나님도 그들을 크게 높이셨습니다. 이 네명의 유대인 포로들은 다른 동급생들보다 뛰어났고 그들의 스승들보다도 우수하였습니다!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 없으므로 그들로 왕 앞에 모시게 하고"(단1:19).
왕은 이 유대인 청소년들보다 더 총명한 수련생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17세에 불과했지만 왕의 고문들보다도 더 현명하였습니다. 이 네명의 젊은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로서의 특징도 두드러졌습니다.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 속에 깊은 감명을 끼쳤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신자들과 접촉을 가졌다고 해서 그 자체로 개종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네 명의 유대인 포로들과 같이 탁월한 인물과 접촉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서 2장의 사건들이 이 점을 증거해 줍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 당시 이방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알리지도 못하고 해몽도 못하는 박사들에게 노발대발하면서 전국의 재사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경건치 못한 자들은 그런 식으로 처신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왕의 꿈을 해몽해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의 지상 왕권이 차례로 다른 왕권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네번째 대제국 기간에 영원한 한 왕국이 건설될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남은 자들이 함께 기도하자 이방 제국의 자문관들도 알 수 없었던 왕의 꿈이 다니엘에게 계시된 것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종교가 무익함을 깨닫고 2:47절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왕이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불신의 상태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나온 셈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가 유일신이라고는 아직 믿지 않았지만 여호와가 참신이며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크신 분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잊기를 잘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대단히 중차대하게 보이던 것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만 흐지부지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12장 끝부분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깊이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3장에서 드러난 것처럼 전혀 영적인 변화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3장의 느부갓네살 왕은 해괴한 신상을 세우고 경배를 강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신 신(神)이라는 그의 굳은 확신은 어디로 간 것일가요? 그는 최근에 자기의 입으로 고백했었던 진리와 모순되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술의 말이 그의 가슴에는 와 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의지가 자신의 고백에 굴복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행위를 예외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듣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복음의 진리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흥분케 합니다. 그들은 복음에 의해서 깨어납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복음의 진리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 무엇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여기며 고집을 부립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의 진리가 그들의 삶 속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휴가를 갔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가 빌린 어떤 방을 가보니까 증기 엔진을 24시간 내내 가동하는 공장옆이었습니다. 그는 도착한 첫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어찌나 시끄럽고 진동이 심한지 침대까지 흔들릴 지경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잠깐씩이나 눈을 붙일 수가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못가서 그는 거의 깨지 않고 잘 수가 있었고 휴가가 끝나기 직전에는 그 동네에서 늘 살아온 사람들이나 다름없이 숙면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토록 시끄럽던 소음이 더 이상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장의 스팀 엔진은 여전히 돌아가지만 그에게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된 사람들의 경우도 흔히 이와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처음 들을 때에는 경각심을 일으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던 것은 옛 일이 되어버리고 한치의 영적 전보도 없는 상태에 머물고 맙니다. 다니엘서 3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일깨워 주어야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부리는 노기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맹렬한 용광로 속에 내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는 눈 앞에서 세 명의 유대인 관리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아무 상함이 없이 불 속에서 걷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3:28-29절의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2장에서 여호와가 최대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한 사실을 더욱 확인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신도 여호와와 같이 구원을 해 줄 수 없다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여호와 이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의지가 꺾여졌다는 증거는 본문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께 진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경배할 단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여전히 완강하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듣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하였지만 자신을 투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에 자신을 맡기지도 않았고 그 진리를 신뢰의 기반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 분인지를 역설해 줍니다. 하나님은 1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접적으로 말씀하셨고 2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으며 3장에서는 그를 흔들어 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셨습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마냥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4장에서 다시 한번 왕의 마음문을 두드리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와으이 마음문이 문짝채로 떨어져 나가도록 세차게 두드리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반드시고 말 것이었습니다.
4장의 사건들 이후의 느부갓네살 왕
4장은 분명히 사건 발생 이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사건들의 시종(始終)을 훑어봄으로써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4장은 왕의 조서 선포로 시작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른 바벨론 왕들처럼 자신을 천하만국의 대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2절이 우리들의 주목거리입니다. 왕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생애에 역사하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이적'은 기적적인 사건을 가리키고 '기사'(奇事)는 큰 영향을 끼친 놀라운 사건을 의미합니다. 환언하면 느부갓네살 왕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에서 기적적인 일을 행하셨는데, 이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3절도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 구절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의 위대성과 그것들이 백성들의 삶에 미치는 두드러진 영향들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반절을 보면 새로운 겸비(謙卑)한 측면과 함께 일종의 외경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權柄)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느부갓네살 왕은 진리를 깨달은 자였습니다. 그는 또 진리를 시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는 듯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더 이상 견주지 않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다른 신들이 있다는 생각이 포함 되지 않은 듯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본 장의 끝에 가면 이 점이 더욱 크게 강조됩니다. 34절에 기록된 왕의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런데 왕의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5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총괄적인 진술입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기 없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마지막 절에 가서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 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이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37절).
다니엘서 4장은 왕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면으로 끝맺습니다. 왕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여호와가 참되고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인정합니다. 왕의 경배에는 열심과 겸손이 드러나보입니다. 그의 믿음이 비록 매우 약할지 몰라도 진실된 믿음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의 지식은 작을지 몰라도 그것은 참된 지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달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된 자였습니다. 그는 회심하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회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왕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영적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사건들이 느부갓네살 왕을 회심케 하였을까요?
4장의 사건들 -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본 장의 이야기를 하나씩 상술하기에는 우리들의 지면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중요한 사항들만 골라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사항은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에게는 만사가 순조롭고 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에게 무서운 한꿈을 주셨습니다. 왕은 이번에도 해몽을 할 수 있는 자들을 불러들였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그 전에도 박사나 점쟁이들이 자기의 꿈을 해몽치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처음부터 다니엘을 부르지 않았을까요? 그 까닭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 상당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꿈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왕은 다니엘을 부르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분명히 일러줄 것이므로 회피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문학에서는 왕을 나무에다 견주어 말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에서 본 나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한편 나무 밑에 있는 동물들과 잎사귀와 가지에서 노는 각종 새들은 그의 권세와 보호 아래서 사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는 나무가 베어졌을 때 자신이 낮추어질 것을 알았습니다. 17절로 미루어 볼 때 왕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하나님의 역사(役事)임을 확신하였던 것 같습니다.
왕은 회심(悔心) 이전에는 자신이 야인(野人)이 되는 것을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지금 그런 사실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은 혹시나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을까 하면서 바벨론의 재사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하야(下野)시킨다는 말에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해몽을 못하자 왕은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을 불러들여 그동안 회피해 온 진리를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10절에서 16절까지는 왕의 꿈에 대한 서술입니다. 한 나무가 있는데 점점 크게 자라서 하늘에 닿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지, 또 아무리 멀리 있든지 이 큰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내려와서 이 나무를 베어버려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가지들이 꺾이고 잎사귀들이 떨어지며 열매들이 거두어질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거목은 결국 벗겨져서 짐승들과 새들의 거처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나무는 그루터기만 남게 되는데 그나마 쇠줄로 땅에 묶여질 것입니다.
원래의 거목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그루터기는 들판에 남아서 들짐승들과 함께 살아야 할 터인데 이슬이 그 위에 내릴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나무의 이성은 배앗겨지고(16절) 그 대신 짐승의 마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무는 이런 상태로 '일곱 때'를 지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일곱 때'란 확정적인 일곱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7개월인지 혹은 7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천사들의 선포에 의해서 발생될 것이었습니다.
※19절에서 27절까지는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 왕의 꿈을 풀어드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건안을 기원하고 나서 하나님이 왕에게 내리실 심판의 가중성을 보고는 크게 놀랍니다. 그는 해몽을 주저하다가 왕의 권고를 받고 용기를 냅니다.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22,25절).
다니엘은 계속해서 왕에게 진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시르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다"(26,27).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는니라"(28절).
다니엘이 해석하고 적용한 꿈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성취의 내용이 28-33절까지 실려 있습니다.
왕의 교만이 절정에 이른 순간이 바로 왕이 낮추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은 왕이 궁전 옥상에서 거닐며 바벨론 성을 내려다 보고 스스로 이렇게 자부할 때였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0절). 왕의 폐위가 예고된 지 12개월이 경과된 후였습니다. 왕은 꿈이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비록 사람의 눈에 더딘 듯해도 선포하신 말씀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역사와 고고학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이 대건축 애호가였음을 압니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여러 곳에다 대신전들을 지었고 수도에는 훌륭한 공공 건물들을 축조하였습니다. 그의 업적 중에는 세게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유명한 공중 정원(Hanging Gardens)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왕의 업적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내가 다 이룬 일이지. 나의 막대한 세력으로 성취한 것이지. 나는 이 대제국의 대왕이야. 나와 같은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겠는가?"
하나님이 치신 자는 교만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인간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약속된 운명의 날은 하늘의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32절).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이 말씀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32절).
바벨론의 대왕은 심한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성을 앗아가시고 짐승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왕의 머리털은 길게 자라서 엉키고 접혀 마치 새털과 같았고 깎지 않은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들에서 동물처럼 풀을 먹으며 소처럼 아침 이슬을 맞고 살았습니다.
고대 이방 기사들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왕은 큰 전쟁들을 치르고 바벨론으로 돌아온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궁전 옥상에서 거닐고 있었는데 그곳에선 바벨론 성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마지막 모습인데 그는 상당한 기간 도앙ㄴ 보이지 않았다가 죽기 전에 나타났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고대 집필가들은 왕이 어떤 신령한 자에 의해 붙잡혀 갔다고 하거나 혹은 그가 이상한 괴질에 걸렸었다고 보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을 수광병(獸狂病, lycanthropy)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환자가 자신을 동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이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기억할 정도의 내적 의식은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수광병 환자는 자신이 상상하는 동물처럼 행동하면서 그 동물의 특유한 소리를 냅니다.
이 질병의 한 종류로서 우광병(牛狂病, boanthropy)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 질병의 실례는 매우 많은 편입니다. 특히 19세기 영국에서는 우광병의 환자수가 아주 높았다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자신을 소라고 생각하고 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환자는 자신의 원래의 신분을 기억하고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자를 이런 무서운 질병으로 치시고 그의 교만을 벌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이같은 방법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이 회심하도록 영적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왕의 대신들은 정신병에 걸린 느부갓네살 왕을 몰아내고 그가 풀을 먹고 이슬을 맞으며 깎지 않은 머리털과 손톱으로 야생(野生)하는 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았습니다. 대제국인 바벨론의 대왕이 그런 몰골이 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던 대왕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항상 두려움으로 바라보아야 했던 대왕이었는데 이제 끝없이 남의 동정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느부갓네살 왕이 받은 심판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들이 살폈듯이 24절과 25절에는 왕의 심판이 가져온 영적 열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이성을 회복시키시고 그의 왕국도 다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의 부재시에 제국을 다스려 왔던 재상들이 옛날처럼 왕에게 나아와 조언과 지시를 받았습니다. 왕위를 되찾은 느부갓네살 왕은 37절의 말씀처럼 신앙고백을 하였고 경건한 왕으로서 잠시 동안 바벨론제국을 통치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4장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온전히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들이 주목할 사항은 하나님이 바벨론 왕을 높이지 않고 끌어내림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심히시키는 방법입니다!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찬란한 바벨론 도성을 바라보며 자신의 업적에 도취도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긍심에 가득 찬 눈으로 아름다운 공원들과 신전들 그리고 훌륭한 건축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력으로 대성(大成)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그의 말 한마디로 즉시 실현되었습니다.
그런 느부갓네살 왕이 졸지에 땅을 기면서 소처럼 풀을 뜯었습니다!
여러 주일이 지나고 여러 달이 흘렸습니다. '일곱 때'가 얼마나 긴 세월이었는지는 몰라도 지정된 기한이 채워져 갔습니다. 왕은 땅에 엎드려 풀을 뜯어먹으면서도 조금씩 무엇인가를 의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은 비록 자신이 상상하는 짐승의 흉내를 내는 정신병 환자였지만 그가 여러 해 전에 인지했어야 했던 진리들을 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내적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자기가 듣고 동의했던 진리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일순에 다 개달은 것은 아니지만, 왕은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하나님이 유일하게 신(神)이시며 하늘의 왕이시라는 것을 깨우쳐 갔습니다. 그는 드디어 믿음에 이르렀고 자신에게 계시된 진리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다시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거나 세상이 자기를 축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참된 왕의 종으로서 살아가게 되고 한 사람의 탄워자로서 하늘 왕의 보좌로 나아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하듯이 하나님께 달려가 안기울 것입니다. 사람이 어린아이가 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마18:3).
드디어 느부갓네살 왕은 모든 남녀들이 있어야 할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티끌을 쓰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그의 이성은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인간으로 복귀되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왕과 함께 영원한 교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은 하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높이지 않고 낮추심으로써 그를 회심케 하셨습니다.
두 가지 교훈들
방금 우리들이 훑어본 역사적인 기록들은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어떤 사람의 회심에 대해서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억지로 우상숭배에 참여시키는 등 핍박을 서슴지 않았던 권세 있는 대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될 줄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주전 605년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고개를 숙여야 했던 대상이 바로 이 철저한 이교도 느부갓네살 왕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왕이 노발대발하면서 바벨론의 박사들을 다 죽이라고 엉뚱한 불호령을 내릴 때에는 아무도 그가 여호와를 믿는 신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괴이한 신상을 세우고 자기 백성들에게 경배를 요구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회심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용광로에 집어 던지라고 명령했던 자가 그런 남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 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한 작은 아이가 되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는 한 사람의 종과 간구자로서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이 계속 하나님으로 계시는 한, 우리는 누구의 회심에 대해서도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단하고 싶은 유혹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너무도 마음이 닫혀 있고 무관심한 듯합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일만 제외하고는 다 중요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보아야 무시만 당하고 비웃음만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무지 회심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으면 완전히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사람까지 변화시키셨는데 회심시킬 수 없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사람이 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런 일들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자는 마침내 회심한다는 사실을 믿고 복음 전파에 진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행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회심에 대해서도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우리가 본 장에서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은 불신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에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 까닭은 당신이 덜 낮추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께 어린아이로 나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당신은 한 사람의 종으로서 신령한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 때문에 하늘의 왕께 거지의 입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나가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자신을 예수님께 양도한 적이 없는 불신자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의 체면을 동시에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잃게 하지 않고는 당신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이미 앞서간 자들이 밟았던 것과 동일한 길을 다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오는 세리는 감히 하늘을 올려다 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18:13)고 호소하였습니다. 탁월한 지성인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맹인이된 후 몸을 떨며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22:10)라고 물었습니다. 냉혹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도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이 이를 예시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회개하는 죄인을 찾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막2:17).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하실 수 있는 가장 자비하신 일은 그들을 치셔서 낮추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낮추어진 상태에 있을 때에 가장 안전합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낮은 처지에서는 눈을 위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닥에까지 내려간 자가 호소할 수 있는 곳은 하늘뿐입니다.
마지막 경고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기를 주저하는 자들은 한 가지 마지막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된 초대와 경고를 당신이 한사코 거절할 떼에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 실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고칠 수 없도록 꺾으실 지도 모릅니다(잠29:1).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성을 앗아가시고 회복시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당신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에 왜 투신하지 않습니까? 내일이 되면 하나님은 "이제 다 끝났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이성을 회복시키기는 커녕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보거나 긍정할 수 있는 능력까지 거두어 가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꺾여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꺾으신 것을 새롭게 고치십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습니다(시51:17).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일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신실하며 그 방법은 공의롭습니다(37절).
이제 본 장을 닫으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의 무가치성을 인정하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무엇이 된 줄로 여기는 자들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직 빈 손으로 나와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을 결코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귀는 고자세(高姿勢)로 올리는 기도에 대해서 멀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심연에서 부르짖는 절망의 탄성은 하나님의 귀에 크게 울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이전에 완전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벌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모든 형벌을 받으셨기 대문입니다. 모든 교만들은 이 원대한 진리와 모순됩니다. 오직 티끌 속에서 부르짖는 호소만이 구원의 대진리들과 일치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낮아진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를 맺기를 앞서 자신을 나주추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다음 구절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이름을 빼고 당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나 ○○○은(는)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심이니라"(4:37).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