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아 목사
도입
우리가 믿음 없이 세상을 살 때와 신앙의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지혜와 상반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인생을 사는데 역설적인 7가지 지혜를 얻는 방법을 인생을 달관한 전도자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까? 어디에서 지혜를 얻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서 지혜는 주어집니다. 보다 더 좋은 것 보다 나은 선택을 통하여 우리는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은 누구나 보다 나은 직장을 찾습니다. 보다 좋은 대학을 가기를 원합니다. 보다 나은 환경 보다 나은 배우자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택 기준은 신앙적 가치관으로 보느냐 세상 적인 불 신앙적인 가치로 보느냐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삶의 방식과 신본주의인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는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그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하나님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존재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다. 그것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허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특권을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신분의 변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족속이요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기업을 무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입니다. 없는 자 같으나 있는 자요 가난한 자가 같으나 부유한 자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무능한 자 같으나 능력 있는 자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신 자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그 존재 자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실 때 아름다운 이름을 계시함으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장 존귀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 책에 기록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아브람 "높은 아버지" 아브라함 "많은 사람의 아버지" 이젠 많은 사람의 아버지 열 국의 아버지가 된다는 아름다운 주님의 약속이 있는 이름입니다.
사래 "다투는 여자" 사라 "여주인" 남과 함께 살지 못하는 여인 시샘하여 다투어 함께 살 수 없는 여인이 공동체의 주모로서 사명을 다하는 이름을 주십니다.
기름은 히브리사람들의 재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기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선택한 여인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소비를 나무랐지만 주님은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이 기억되리라" 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우리의 아름다운 이름을 위한 삶인가? 이세상의 잠시 잠깐인 기름을 위하여 땀흘리며 수고하는지?
당신은 진정한 지혜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까? 어리석은 세상의 지혜에 속고 살고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 사건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이 없지만 거지 나사로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 하나님의 도우심" 이란 뜻입니다. 부자는 자기 힘으로 살면서 세상의 기름을 숭배하고 살았지만 나사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 왔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과 관계된 시간 물질 일들이 아름다운 이름을 위한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삶 이것이 아름다운 이름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삶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교회에서 얻는 직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순장 목자 교사 성가대원 모든 이름이 아름답습니다.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도 이 영적 가치를 최고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이 지혜자의 삶입니다.
2.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죽음을 예찬하는 말처럼 들리는데 이 말은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세상과 죽은 후에 살게 될 세상을 비교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슬픔과 문제와 고통이 있는가 하면 주님과 함께 사는 세상은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랍니다. 그 나라는 눈물도 한숨도 죽음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머무는 곳이지만 그 나라는 영원한 곳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며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남은 날을 계수하면서 그 시간을 주를 위하여 쓰고 보화를 이 땅에 쌓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으면서 사는 것이 더 지혜 있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주안에서 거듭난 자들의 결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지옥가 있을 영혼들은 해당사항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믿으시면 이 땅에 것에 미련 두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날은 축제의 날이요 천국으로 이사하는 날입니다.
이 땅의 수고와 슬픔을 졸업하는 날입니다. 지혜 자는 본향을 그리면서 사는 삶입니다. 이 땅에 잠깐 거쳐갈 나그네 인생입니다.
3.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잔치 집은 우리 자신을 잊고 흥분하여 들뜨게 합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우리 자신과 인생을 진지하게 묵상하게 합니다. 모두가 철학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 지는 것입니다.
첫째, 초상집에는 잔치 집에 없는 눈물이 있습니다.
잔치 집에는 웃음이 있고, 초상집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수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땀과 피와 눈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고귀한 것입니다. 피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땀도 귀한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려는 군인은 훈련에 땀을 많이 흘리면 전쟁에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물은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상집에는 진정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 집보다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느끼게 하는 눈물입니다.
둘째, 초상집에는 잔치 집에 없는 자기반성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잔치 집에서는 먹고 즐기기에 들뜬 분위기에 잔치 집에 자기 성찰이 없습니다.
욥의 열 명의 자녀는 잔치하다가 바람으로 집이 무너져 다 죽어버렸습니다.벨사살 왕은 귀인 1000명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하였습니다.예루살렘 성전에서 훔쳐온 금 은그릇으로 술을 퍼 마실 때 그 날 밤에 메데와바사군이 쳐들어 와서 대리석 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같이 잔치하며 술먹고 즐기다 죽은 사람은 많아도 눈물로 회개하다가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셋째, 초상집에는 잔치 집에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죽음은 엄숙한 것입니다. 부자도 죽고,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도 죽어야 하며, 잘난 척하는 사람도 죽으니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인생이 과연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지를 묻게 됩니다.
4.슬픔이 웃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는 웃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웃기시는 분입니다. 사라가 나이가 많아 경수가 다 끊어졌는데 아들을 낳는다고 하니까 웃었습니다. 그러나 웃음이 다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의 웃음 배후에는 가면이 있고 음모가 있고 속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필요 없이 억지로 웃어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웃음은 삶의 진실에서 우리를 도피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웃음보다는 슬픔이 차라리 났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정직합니다. 눈물 속에는 인생의 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슬픔은 위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 우리 심령이 치료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울고 싶을 때 실 컷 울도록 도와야 합니다.
눈물은 치료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마를 때 나는 삶의 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눈물로 마음의 창을 닦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정신과 의사는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을 실컷 울립니다. 그것이 치료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 주님도 나사로의 무덤 가에서 우셨습니다. 멸망 받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눈물은 우리 진실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마음과 영혼을 치료하는 청량제입니다.
5.지혜자의 책망이 우매자의 노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책망이란 바른 말을 말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란 아부를 말하는 것이고 미사여구로 노래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매자의 노래는 우리를 비애로 우리를 절망으로 낙심으로 몰아 넣기도 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는 세상 노래들입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노래하고 배후는 갔습니다.
충고나 책망이 그 당시에는 즐겁지는 않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양약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고 채찍하십니다. 우리에게 연 단하여 정금같이 쓰시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저속한 유행가나 부르고 즐겨 듣는 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족한 점을 책망해 달라고 하면서도 정작 책망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떤 네 친구가 모여서 서로의 약점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 약점을 서로 고쳐 주기로 결심하고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지만 줄담배를 끊을 수가 없어서 교회에 갈 때마다 담배를 피우고 입을 닦고 가네"
"나는 어떤 사실을 말하려고 하면 자꾸만 거짓말이 내입에서 튀어나오네, 나도 어쩔 수가 없다네"
"나는 교인이면서 도벽을 버리지 못하고 있네. 자꾸만 손이 가는 걸 어떻게 하나"
그런데 네 번째 삶은 전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야 너는 약점이 없니? 너도 자백하라고!"
"실은 남의 약점을 들어 알기만 하면 그것을 불고 다니는 것이 나의 약점이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망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나 달콤한 칭찬보다 따끔한 책망 한마디가 삶의 지혜를 더한다고 말씀합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6.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은 거창하게 시작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교회이름을 보면 세계 중앙교회 아시아 교회 한국중앙교회 제일교회 너무 거창하게 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사람이 지혜의 삶이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나라는 겨자씨 같이 작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이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어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드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했으면 분명하게 끝을 내는 것이 시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모든 일에 마무리를 소중하게 여기면 그는 신용을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인생도 말년을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처녀 때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지금이 중요하고 끝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종말적인 신앙 관을 가지고 사는 자가 지혜 있는 삶이란 것입니다. 직분을 맡아도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마무리를 잘 짓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무리가 의미 있게 끝나는 것입니다. 좋은 시작 좋은 과정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성도들의 삶이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많은 설계를 가졌으면 이젠 시간을 안배하여 어떻게 그 일들을 잘 마무리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최종 결산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지혜자라는 것입니다.
7.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참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끝을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일은 내가 아니면 안되지" 라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내가 해야지 더 잘하지" 하는 마음도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일을 끝내지 못합니다. 차라리 입꾹 다물고 참는 쪽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내의 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참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신 이유는 인내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
성경은 감정을 폭발하는 것 보다 인내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결론
미국의 20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가휠드가 취임을 하고 그의 백악관 생활의 첫 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관 하나가 와서 말을 합니다. '각하 이번 일요일 아침 10시에 각료회의(장관회의)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꼭 참석해 주십시오.' 그러자 놀랍게도 대통령은 그 날 선약이 있어서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회의는 국가의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는 위기의 시기에 심각한 회의였습니다. 그 선약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변경될 수 없다고 대통령은 주장, '각하 도대체 그 약속한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렇게 중요한지 말해 주십시오.' 가휠드는 '나는 주일 아침 나의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교회당에 가서 뵙는 시간입니다. 나는 그분과 오래 전부터 만나기로 약속하였습니다.'그에는 주님과의 만남이 다른 어떤 만남보다 가장 좋은 것이었기에 그것을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아름 이름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 기름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지나간 생일을 즐기고 살고 있습니까? 죽은 뒤 주님 앞에 결산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잔치 집의 들 뜬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초상집에서 엄숙한 진리를 깨닫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의미 없는 웃음 속에서 자신을 속이면서 살고 있습니까?
진정한 눈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세속적인 노래에 감정을 맡기고 삽니까? 아니면 책망을 들으며 자신의 삶을 교정하면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시작의 찬란한 세레모니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미완성인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쉽게 감정에 포로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인내하면서 견디며 살고 있습니까?
지금 지혜의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