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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5:1-4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 칼빈
이 시편은 택한 백성에게 특별히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 세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또 이 시편은 헛된 신의 상징에 불과한 우상들과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섬겨져야 한다고 주장한 이스라엘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백성으로 더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통치에 순응하게 합니다.
1. 본문 1-3절은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여 (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입니다.
이 시의 앞이 134편과 거의 똑같은 형태로 시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이 레위인만을 선별하여 찬양할 것을 말하지 않고 일반 백성에게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똑같이 합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밤을 세운다거나 계속 서서 찬양하는지의 여부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특별한 직무의 수행시에 앞장서며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 제사장들의 임무였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제사장들을 먼저 언급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용기를 북돋워 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백성들이 제사장들 다음으로 찬양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세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이 성전에 서있는 하나님의 종들에 이어 “하나님의 전정에 선” 자들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134편에서는 전정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정’ 이 복수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제사장이 그들의 구역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즉 백성들을 위한 다른 구역이 따로 있어서 율법에 기록한 대로(레16:17) 그들은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이 권면이 대단히 자주 반복됨으로서 생길지 모르는 어떤 권태감을 막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미 우리가 관찰한 대로, 어떤 제사건 우리의 감사의 표현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제사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시편에서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50:14)라고 했고, 116편 12,13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로 돼 있습니다.
시편 135 편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예배에 대하여 그토록 고상하게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 대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일에 빠져 사소한 일에 힘을 낭비할지도 모르며 이런 점에서 어쩌면 정작 가장 중요한 다른 모든 것들을 소홀히 하며 반대로 하나님 예배에 대한 부수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는데 우스꽝스러운 시도를 함으로 지쳐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본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토록 반복하여 찬양의 의무를 열거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이런 헌신적 단련을 과소평가하거나 부주의하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 의무를 계속함에 있어 게으른 것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듯한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책임을 늘 준비하며 행동한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이러한 훈계를 되풀이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 나오는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라는 표현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용납합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호와는 선하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는 말이거나 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름답고 즐거운 이리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נעים (나임)이 ‘아름다운’을 뜻하는 것은 적절하고, 또 이와 같은 일반적 의미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2. 본문 4절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다른 이유들이 곧이어 나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당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뿐이었고 그들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기에 시인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로 향하게 함으로서 감사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호의를 입어 택함을 받고 반대로 모든 이방세계는 버림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은 명확히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으며 그들을 감동시켜 열렬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을 선택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명백한 증거는 그들이 자신의 어떤 탁월함에 의해 구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풀어 주신 값없는 인자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예외없이 자기를 예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연결시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그의 교회에 받아들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독생자의 몸에 연합시키기 때문입니다.
시편 135 편
시135:5-7 내가 알거니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하면서 찬송해야 할 이유도 밝힙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택하여 주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4-5).
둘째는 하나님은 위대하시어서 자연계에서 큰 일을 행하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6-7).
1. 본문 5절은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광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보다 높으시도다” 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일반적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경배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점과 그밖에는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안다고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시켜 이 주제에 참여케 하고 풍성히 관찰되도록 펼쳐있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경우를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이 적절하게 드러나는 한, 무지를 핑계 삼을 수 없을 정도로 온 세계에 충분히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광경을 만끽한 사람이 깊이 죄에 물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늘을 창조하신 분을 간과할 만큼 그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 같은 생각은 우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자극시킵니다.
곧 시편 기자는 자신과 관련시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지식으로 초대하고 있거나, 혹은 그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충분히 활기 있게 생각하지 않는 부주의를 책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구절의 하반절은 우리가 이에 관찰하여 언급했던 진리를 보다 명백히 합니다.
곧 시편 기자의 의도는 선조들과 언약했던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취지를 선포함으로서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경배하고 두려워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덧붙입니다.
시편 135 편
따라서 필연적인 결과는 하나님을 떠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칭호도 주장하지 못하는 신을 더 좋아하는 셈이며, 예를 들어 오늘날의 유대인과 터어키인들처럼, 그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척하면서 다만 경박한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율법과 복음에서 떨어져 나간 곳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경건의 모습도 참된 하나님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하나님께 특별한 칭호로 옷 입혔을 때, 그의 안중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 말씀하시던 저 하나님께 묶어 두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אלהים (엘로힘) 이란 말을 이방의 거짓 신들로 이해한다면, 다만 특별히 양보하여 이 칭호를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이 말을 헛된 것들에게 돌리는 것은 합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하나님 비슷한 것도 모두 무색케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천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한데 천사들은 하늘의 정사와 권세이기에 그들에게는 얼마간 신성의 반영이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 높여졌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할 수 없는 종속적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2.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데서 다 행 하셨도다”입니다.
이 구절이 앞서 말했던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넓고 크신 풍성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천지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음에 만물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통치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할 일 없이 앉아 계셔서 세상의 일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불경건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능력을 중상 모략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인간들 가운데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무시고 계신 사실을 믿는다고 많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연이나 운명에 내맡기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떤 효과도 없는 능력의 단순한 그림자만을 하나님께 남겨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실제 능력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시인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배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시편 135 편
시인은 어떤 것도 우연히 그것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또 시인은 하나님의 예정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대단히 평범한 견해에 따르면, 어떤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필연적으로 돌려야 할 모든 능력은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고 고백 못하는 전 우주를 섭리하시는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가 구별된 것은 특별한 통치를 가리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알맞은 계획 없이 다만 세상 질서를 유지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지라는 말에는 그 자체에 계획과 방법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이든 아무도 이유를 밝히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 여러 부분을 통치함에 있어 수행되는 특별한 섭리가 있습니다.
또한 우연과 같은 것은 결단코 없습니다.
아주 우연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 있어서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에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건을 의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스리셔야 할 것이 우리의 지각에 반대된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물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앙의 깊은 토대를 흩어버리고 싶지 않는다면 어떤 사실을 마땅하다고 여기고, 또 그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작정 없이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신비스럽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모든 정의와 정직의 근원으로 마땅히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 볼 것도 없이 우리의 최고의 경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면 시편 115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7절은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손과 뜻이 아니고는 어떠한 것도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한두 가지 예로 특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로는 하나님 역사의 수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섭리 교리를 증거할 때는 다만 그가 보여주신 몇 가지 예로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름을(안개 -한글)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땅에서 오른 수증기가 좀 더 압축될 때 구름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5 편
우리가 보는 수증기가 위로 올라가 곧 하늘을 어둡게 만들고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
이러한 엉성한 수증기가 땅에서 올라와 온 대기를 뒤덮을 정도의 물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본질상 정반대되는 것, 즉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라는 말씀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이러한 광경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물과 불이 섞이는 현상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언명했을 것입니다.
바람 부는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의 요인은 자연 현상으로 돌려졌을 것이며 철학자들도 그렇게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바람의 흐름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자연질서를 창조하신 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비와 천둥과 바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더 나아가 비가 내리는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구름으로 하늘을 어둡게 하시며 또 어떤 때는 햇빛으로 하늘을 밝고 빛나게 하시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인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편 135 편
시135:8-12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본문은 하나님이 행하신 출애굽을 인하여 찬송하도록 권합니다.
1. 본문 8-9절은 “(8)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 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 징조와 기사를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복에게 임 하게 하셨도다” 입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께서 과거에 많은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서 자기 교회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유일하게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기에 찬양해야 할 주제는 비록 숫자상으로는 적지만 많은 인류 가운데에서 그들을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강하고 힘센 나라를 대항하여 자기 백성을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역사는 모두 그들을 택한 백성으로서 어버이같이 사랑하여 주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치셨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에 엄밀히 말해 역사적 순서는 아니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이 강하고 부유한 국가라도 인정을 베풀지 않는 정도로 큰 관심을 보여주신 기억할 만한 실예입니다.
이 구절의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의 능력과 은혜를 충분히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본문 10-12절은 “(10) 저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노예에서 구원하신 마지막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그들 마음대로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약속의 땅에 그들이 정착할 때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또 그들에 대한 끊임없는 자비의 증거로서 언급하였습니다.
시편 135 편
일단 아브라함의 자녀로 택하신 이상 그들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능력으로 역사하사 그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나라를 평화스럽게 소유하게 된 것은 많은 원수들을 무찌른 후였다는 상황에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찮은 사람들의 무리였으나 그 원수들은 강력한 왕과 힘센 국가였음에도 그것은 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좋은 예였습니다 시흔과 옥 두 왕이 언급되었는데 그들이 강한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갈 때 앞을 막았으며 이스라엘이 만난 가장 강한 원수였기에 언급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신 더없는 행동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고 시인은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것은 취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소유하여 계속 지키는 것이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구대천의 원수들로 둘러싸였을 때 하나님의 능력은 아주 현저하게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이 근절되고 다시 추방되는 일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땅을 확고히 정착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건은 계속 일어나야 했을 것입니다.
시편 135 편
시 135:13-14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옛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능을 맛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 은총의 표본입니다.
이와 같이 후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특별 은총을 베푸십니다(13, 14).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은혜를 주시는 제도가 없다면, 성도들이 세상의 악인들에게서 구별된 의로운 생활을 힘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시125:3).
본문 13-14절은 “(1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기념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리로다” 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항상 좋게 여겨져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특별히 교회와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그에게 영원한 찬양을 드려야 함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리라’는 이유가 부연됐습니다.
전 세계는 하나님의 선하심, 지혜, 공의 그리고 능력이 나타나는 극장입니다.
또 한편 교회는 그것의 가시적(可視的) 부분과 같은 오케스트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시며 또 하나님의 은혜의 교통을 더욱 밀접하게 하실수록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판단하시며” 라는 말은 의롭고 합법적인 통치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다 표현하는데 미래 시제는 항상 그러하듯이 계속적인 행위를 가리키기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백성들을 주시하며 보호하셨기에 하나님의 보호아래 그들은 안전하게 되리라는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시인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방관하시며 버리신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소망을 갖고 낙담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비록 늦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겸손해짐을 보시고 적당한 시기에 심판자로서 방패로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좀 더 가까운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모세가 한 표현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신32:36).
시편 135 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었을 때 모세는 그들의 심판자로서 그들을 고난에서 건져주시며 도와 주시기 위해서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이건 그는 하나님께서 교리를 결코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망함에 따라 그도 왕의 직을 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동사의 시제를 과거 시제로 바꾸어 하나님이 애굽에 대항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자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약하게 되고 이 시의 문맥이나 모세가 말한 문맥 중의 어느 것에도 적합지 않은 의미가 됩니다.
נחם(나함)은 ‘회개하다’나 ‘위로받다’ 인데, 두 의미가 모두 충분하게 답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때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어떤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자체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의로운 심판의 진노를 나타내는 대신에 그들에게 긍휼을 보여주시기 시작한 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게 될 때’ 는 자기 백성을 향해 화해될 때란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면서 한 순간 자기 백성들을 징계하시기는 해도 영원한 긍휼을 베푸심을 뜻합니다(사54:8).
그 의미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일시적이며 그들의 죄를 갚으실 때에는 하박국이 말한 것처럼 진노 가운데서 긍휼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3:2).
이렇게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보여주시며 버려져 마땅한 자녀들을 회복시키는 분처럼 말해지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몸이 찢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그의 자녀이기에 그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며 스스로는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귀중한 자들처럼 관대하시며 자기 자녀처럼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시편 135 편
시135:15-21 열방의 우상은
본문은 하나님과 열방의 우상은 대비될 수 없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본문 15-21절은 “(15)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18)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19)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 레위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의 송축하라
(21) 예루살렘에 거하신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입니다.
이 시편의 본문 전체는 다른 곳에서 설명했었습니다.
여기서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신자들도 지루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인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단 몇 마디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상 숭배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면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받았던 특별한 은혜를 상기하게 하며 단순하고 순전하게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이방 미신을 버리게 합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우상을 더욱 더 열심히 숭배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무거운 심판을 자기들 위에 내리고 있을 뿐이라고 시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거짓신을 섬기는 자들 위에 내려져야 하는 무서운 심판을 통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 자들에게는 공포감을 없애는 것이 시인의 의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 115편에서 우리에게 주는 권면은 ‘여호와를 바라고 신뢰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를 송축하라’ 는 것이 주제입니다.
아론의 집 외에도 레위 족속이 언급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두 반열에 제사장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시편의 모든 것은 같습니다.
다만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모든 백성과 더불어 자신을 포함시켜 여호와를 송축하게 합니다.
시인은 “시온에서” 라고 말함으로서 그들이 시온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135 편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시온에서’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시온에서 하나님 자신의 은총을 보여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거하신다’고 언급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좁은 곳에 국한되었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엄이 하늘과 땅에 충만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만하게 거하는 반면 하나님의 은총과 경험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할 이유가 많은 중에도 특별히 열방의 우상들은 헛된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우리가 참된 것의 가치를 알려면 그것을 참되지 않은 것과 대조할 때에 알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기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 종교와 대조하게 될 때에 기독교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고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상 종교를 믿는 자들은 그 헛된 종교처럼 저열(低劣)하기 그지없지만, 그와 반면에 기독교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기독교처럼 참으로 고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만 생각하여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