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0-21
오해 / 김낙춘 목사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론 오해받기도 하고 때론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받았을때는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오해를 했을 때는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어떤 오해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 있지만 어떤 오해는 평생을 두고 풀리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오해는 큰 상처를 주지 않지만 어떤 오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원재길 씨가 쓴 [오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번역하는 일을 하는 남편 한영섭과, 교육자인 아내 강유정은 서울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며 서울근교로 이사하면서, 중학교 배정을 받아놓은 6학년 짜리 장녀를 서울의 할아버지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딸이 가출을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딸의 가출이 이웃의 유괴임이 분명하다고 믿고 서울의 할아버지 집 근처의 가겟집 청년과 옆집 부인인 정여진을 유괴범으로 지목했습니다. 청년은 실연의 슬픔으로 음독했다가 깨어난 적이 있었고, 정여진은 칠 년 동안의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남편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심리적인 상태가 자기 딸을 유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여진이 경찰의 혐의 선상에서 풀려나자 아내 강유정은 정여진의 옷가지를 훔쳐와 불에 태우고, 남편 한영섭 역시 자기가 번역한 영화나 소설에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무혐의로 경찰서에서 풀려난 가겟집 청년을 고문해서 마침내 허위 자백서를 받아냅니다.
이일로 인해 청년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런데 딸 예림은 얼마 뒤 폭주족 단속에서 발견되었고, 부모의 무관심과 이중성에 넌더리 때문에 가출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오해라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일어나고, 또 그 오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오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서 7년 동안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두 지파와 므낫세 지파 중의 반은 이미 땅을 분배받았지만, 그곳에 그냥 머물지 않고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해서 함께 싸웠습니다. 이 세상 전쟁역사에서 7년 동안이나 싸운 예는 별로 없습니다. 전쟁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 사이에만 생길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인 전우애로 지난 7년동안 똘똘 뭉쳐서 가나안 땅을 함게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서로 아쉬워하면서 헤어져 두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는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갔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발단은 요단 동편으로 건너간 2 지파 반이 큰 단을 요단 강 가에 세웠기 때문입니다(10절). 이 사실을 알게 된 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평화를 이제 막 누리기 시작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나안 정복을 위해 함께 싸웠던 동족을 향해 싸우려고 다시 무기를 집어들었습니다(12절).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전쟁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싸우는데 지쳐 있었고 또 서로 동지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싸우려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단강 서쪽에 있는 형제들은 이 단이 하나님을 거역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실로에 회막을 세웠을 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로 말고 다른 곳에 단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 예배하는 것을 버리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것은 배교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동쪽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싸움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서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편 백성들의 심정은 단을 쌓은 일은 분명히 여호와를 거역하고 배역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죄는 단지 단을 쌓은 동편 형제들에게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것이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16-18절). 그들은 지난 45년 역사를 통해서 이것을 뼈아프게 체험했습니다.
17절에 언급된 브올의 죄악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브올의 죄악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사람들의 우상 예배 의식에 참여하고, 이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진노하셔서 24,000명이나 죽었던 것을 말합니다.
20절에 나오는 아간의 죄는 아간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그의 가족과 가축이 죽고 아이성을 칠 때 군인 36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서편 지파들이 싸우려했던 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이었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언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흥분하고 화내고 싸우려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잘못돼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들의 범죄가 우리 교회에, 신앙 공동체에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까 걱정이 돼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주로 어떤 일에 흥분합니까? 나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때, 나에 대해서 좋지 못한 말을 했을 때,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 나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나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화가 나고 흥분하고 싸우려하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나 자신의 이름 때문에 흥분하고 싸우려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흥분하고 싸우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적어도 순수하게 거룩한 열심에서 비롯돼야 합니다. 우리는 서편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이점을 배워야 합니다.
서편 지파들은 동편 지파 형제들이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했는데 22,23절을 보면 결코 여호와를 뱐역하기 위해서 제사하기 위해서 단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 후손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24,25절).
그러니까 서편의 형제들이 같은 단을 두고도 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오해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같은 표현, 같은 몸짓을 두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오해가 자주 생깁니다.
만약 오해를 한 채 서쪽 형제들이 동쪽 형제들과 싸웠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즉시 싸우러 나가지 않고 10 지파에서 1명씩 10명의 대표들이 가서 먼저 진상을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대표들은 가서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솔직히 말했고(16-18절) 동쪽의 2 지파 반이 자기들이 단 세운 목적을 제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에 있는 제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며, 자기들 후손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22.23절). 이렇게 해서 요단강 양쪽에 있는 형제들 사이에 오해가 풀렸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진상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잠18:13절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18:13) 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부, 부모와 자녀, 성도들 사이에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 싸우기 전에, 화내기 전에, 흥분하기 전에 먼저 진상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내용을 알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흥분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남녀가 약혼을 하면 40일간은 결혼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약혼을 하면 소속된 교구의 교회입구에 약혼 사실을 공고하여 40일 동안 교구민으로부터 그 혼약에 이의가 제기되면 이를테면 숨겨 놓은 여자가 있었다면 결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40일이면 모든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는 결착론(決着論)은 비단 약혼의 경우 뿐만이 아니라, 귀족간에 결투에서도 선전포고 한지 40일 동안은 국왕의 명령에 의해 결투를 할 수 없게 돼 있었는데 정말로 결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무슨 오해나 성급함이 개재되지 않았는가, 냉각기간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한 번 오해가 생기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서로 오해해서 미안하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결말이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강 양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의 오해를 완전히 풀었고 서로 좋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서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상을 말합니다(32,33절). 진상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야말로 happy ending이었습니다. 이것은 두 형제들 사이에 아무 일 없었던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영적인 유익을 얻었을 것입니다. 양편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각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이나 우상은 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더욱 새롭게 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서로 오해를 풀고 좋은 결말을 가져올 수 있었던 중요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19절에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겻은 만약에 강 건너편 땅이 좋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당하지 않으면 강 이편으로 건너와서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던 땅 중에서 상당 부분을 이들 형제들을 위해서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입니다. 강 서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열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사랑도 있었습니다.
형제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기꺼이 나누겠다는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리 강 서편의 형제들이 옳은 것을 지적했다 하더라도 기분이 나빴을지 모릅니다. 만약 강 서편의 형제들이 와서 '왜 이런 단을 쌓았느냐? 이것은 여호와를 배역하는 것이다' 하면서 마치 죄인 취급하듯 말했다면 기분이 나빠서 '당신들 무슨 소리하느냐?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해라. 당신들만 하나님 잘 믿는 줄 착각하지 마라. 당신들이나 잘 믿어라' 이렇게 나왔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진짜 동족간에 전쟁이 났을지 모릅니다. 사랑은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부부 사이에 마치 수사관처럼 서로의 잘못을 찾고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 부모들 중에도 자녀가 잘못한 것만 찾고, 성도들 사이에도 잘못과 실수를 잘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관심을 가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지적을 하더라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엡4:15에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라고 하였는데 옳은 것만 가지고는 효과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성도들 사이에,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 진심이 통하고 오해도 풀리고, 모두가 함께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전혀 오해받지 않고 살 수 없고 또 전혀 오해하지 않고 살기도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오해하면서 오해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우리는 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말 한 마디, 표정 하나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는 가능한 내 관점, 내 기준, 내 생각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대신 진상을 먼저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랑 안에서 오해를 풀어가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풀리지 않는 오해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이 있으면 가능한 이 해가 지나가기 전에 다 풀어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