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
회복의 강가로 / 이윤재 목사
일년중 가장 무더운 계절입니다. 이런 때는 시원한 산이나 강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우셨나요? 어떤 화랑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림은 넓은 캔버스에 작은 새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파란 하늘이었습니다.
관람객 하나가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그림은 넓은 하늘에 새 몇 마리 밖에 없군요. 이렇게 그린 이유가 있습니까?”
그때 화가가 말했습니다.
“새들도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지요”.
비어 있는 공간은 쓸데없는 공간이 아니라 새가 날아다니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수록 우리 속에 채운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짐이 됩니다. 그러면 그 짐 때문에 힘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짐을 적절하게 덜어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에레미아 애가를 읽다가 좋은 말씀을 읽었습니다.
애가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이 말씀이 새 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참 좋은 번역입니다.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는 잠자코 있으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라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일하면 힘들다는 것입니다.
휴가가 무엇입니까?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자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림에는 새만 많고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휴가는 새가 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릇은 너무 많이 차 있습니다. 휴가는 우리의 그릇을 비우는 것입니다. 비워야 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 여름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시원한 이스라엘 그릿 시냇가로 모시겠습니다.
그릿시냇가가 어딘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엘리야가 길르앗 사람이기 때문에 요단 동편 어느 계곡을 지칭한 곳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형이 비슷하고 엘리야가 여리고 근처에서 승천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릿 시냇가를 여리고 근처에 있는 “와디 켈트”로 봅니다(사진). 이곳은 초대교회 때부터 수도원이 세워지고 예루살렘쪽에서 물이 흘러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계곡입니다. 이곳에 동굴이 하나 있는 데 사람들은 이 동굴을 “엘리야 동굴”이라고 부릅니다. “그릿”이란 말은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과 깊히 단절된 곳, 그래서 이곳에 숨으면 사람이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는 곳입니다.
3절 보시겠습니까? 왕상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곳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하여 숨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마자 “앞으로 수년동안 이 땅에 비가 오지 않으리라”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까?
왕상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아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니라”.
엘리야가 이렇게 폭탄선언을 하며 혜성같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엘리야에 대하여 관심갖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모처럼 대단한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것은 매우 불길한 예언입니다. 수년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백성들은 아우성치고 폭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설령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그런 말을 하고 다녀서는 안됩니다.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말이요 정권을 불안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힘엘리야를 잡고자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흠모해서 만나고자 하고 한 쪽에서는 잡으려고 쫓아오고 엘리야는 어디론가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릿 시냇가로 가서 거기 숨어 있으라”.
역사적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한 상황은 비슷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쫓기고 있고 무엇인가 눌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은 많지만 우선 몸이 피곤합니다. 마음이 무겁고 영혼이 지쳐서는 세상 일도,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회복을 원하셨듯이 우리의 회복도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호하셨듯이 우리도 보호하실까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휴식을 위해 그릿시냇가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그릿 시냇가는 어디입니까?
우리는 왜 휴식해야 하며 어떻게 휴식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케 되기 위해 휴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엘리야와 비슷한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히12:1을 볼까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대로 우리에는 얽매이기 쉬운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짐이며 매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 짐은 처음에는 나쁜 짐이 아닙니다. 필요한 짐이요 살다보니 생긴 짐입니다. 그러나 그 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 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짐 자체를 안 질 수는 없습니다. 잠시 내려 놓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 집사님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유별나게 짐이 많았습니다. 교회를 나오지만 교회에서도 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힘들어 했습니다. 한번은 잠을 자는 데 꿈에서도 자기가 무거운 짐을 지고 언덕을 오릅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자나깨나 이 무거운 짐에서 헤어날 수 없구나. 아, 힘들다. 조금 가벼운 짐은 없나?” 그리고 두리번 거리는 데 아주 작고 반짝이는 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가까이 가 보았더니 금으로 만든 짐입니다. 너무 좋아서 그것을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짐은 보기에는 좋지만 무겁기는 훨씬 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구”하고 탄식하는 데 저 멀리 또 하나의 짐이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예쁜 장미로 된 짐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 짐을 짊어졌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이 짐은 예쁘긴 예쁜 데 가시가 있어서 등을 콕 콕 찌릅니다. 도저히 짊어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려놓고 다시 보니 처음 지고간 짊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짊어 졌습니다. 알고보니 그 짐이 그에게 가장 알맞는 짐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짐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짐을 자주 풀어 내지 않으면 중독이 됩니다. 중독은 우리가 짊어진 가장 큰 짐입니다. 중독을 영어로 “어딕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 “어디신”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에 양도하거나 굴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중독은 어떤 일에 자신을 굴복시켜 노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차음에는 자기가 좋아서 그 일을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자기 마음대로 안할 수 없게 됩니다. 이미 노예가 된 것입니다. 웹스터 사전은 중독을 “어떤 일에 습관적으로 몰두하여 자신을 그 일에 항복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이미 2천만명의 알코올 중독자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25%는 십대입니다. 전체 술마시는 사람의 10% 정도가 중독자입니다. 그 10%중 3분의 1은 교회다니는 사람입니다. 성중독은 더 심합니다. 미국 교인의 60%가 성생활에 죄의식을 느낀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음식 중독이 있습니다. 어떤 특정 음식에 중독된 것입니다.
음식중독된 여성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음식 중에서도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등 열량이 높은 음식을 먹어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키에 비해 엄청나게 과체중입니다. 다이어트를 여러번 시도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신경이 너무 불안해져서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녀의 문제는 십대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열네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과자나 사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음식중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나 초코렛을 선택해서 먹지만 그녀는 아이스크림과 초코렛이 그녀를 먹습니다. 음식에 대한 자유와 선택권이 없습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중독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일중독입니다.
일중독은 일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일에 노예가 된 부자유한 영혼입니다. 일 중독자는 잠시도 놀지 못합니다. 조금만 빈둥거려도 죄책감이 생깁니다. 일중독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는 없습니다. 일을 잘해서 성공하는 것, 오락도 취미도, 봉사도 없습니다. 일증독자는 일을 하나님으로 믿는 일종의 신훙종교도입니다. 알콜둥독자가 술에, 성중독자가 성에 노예가 되듯이, 일중독자는 일에 노예가 됩니다. 일중독자는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성도가 아닙니다. 자기 일에 관한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기다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휴식이 필요합니까?
이것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휴식이 필요합니다.
휴식은 중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일에 중독되는 것은 다릅니다.
일에 중독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과감하게 일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갈5: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휴식은 자유를 위한 탈출입니다.
자기를 얽매이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휴식을 노는 것이 아닙니다. 탈출입니다. 저항입니다. 자유선언입니다. 그래서 휴식이 필요합니다.
둘째 비워야 채우는 법을 배우기 위해 휴식이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보냄을 받고 그릿 시냇가로 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입니다. 왕상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내를 마셨으나“.
지금 엘리야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불황기에 부름받았습니다. 국토의 2/3가 광야인 이스라엘은 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광야 지역은 일년에 많이 와야 2-300미리, 요즘 우리 나라 하루 비오는 양이 150미리입니다. 일년 내내 다 합쳐봐야 요즘 하루 이틀정도 오는 양에 불과합니다.
엘리야가 등장하던 시대는 그나마도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핍절의 시대에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6절,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다같이 “저녁에도 아침에도”. 비가 없고 먹고 살 수가 없던 시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침, 저녁으로 공급하셨습니다. 까마귀를 통하여 공급하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합니까?
휴식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못 먹고 삽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 것도 안 했는 데 하나님이 아침, 저녁으로 먹이셨습니다. 자신을 비우자 하나님이 채우셨습니다.
언젠가 신학교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물었습니다. “큰 그릇에 물을 많이 채울까요? 빈 그릇에 물을 많이 채울까요?” 답은 무엇입니까? 크면 많이 채우겠지만 그 그릇에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물을 채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릇이 작아도 비어 있어야 물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급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비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아이들에게 엄마가 무엇을 주려고 하는 데 입이 흙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입에 무엇을 넣어줄 엄마는 없습니다. 입에 흙을 씻은 다음에 먹을 것을 넣어 줍니다.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비어 있는 그릇이냐 가득차 있는 그릇이냐가 문제입니다. 작은 그릇이라도 비어 있기만 하면 무엇인가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하지만 우리 손이 항상 가득차 있어서 그것을 받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하면서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목회자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자로 부름받은 목회자가 육신의 피곤 때문에 자주 쉰다면 불충성한 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열심히 일하는 내 마음 속에 우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상이란 깍아만든 형상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나”라는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충성스런 일꾼과 자신을 위해 일벌레로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벌레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성공을 위해 줄달음치는 자기 중심의 사람입니다.
그는 일에 매몰되어 그 일을 주신 하나님과 그 일을 통해 나눌 사람들과의 사랑을 잊은 채 홀로 자기 성공에만 매진합니다. 일벌레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란 곧 자기 사랑과 자기 성취입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직 “자기”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의 건강이 나빠질 뿐 아니라 그의 인격과 신앙도 파괴됩니다. 그때부터 저는 휴식과 안식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다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속도를 늦추라
일벌레는 쉬지 않고 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시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욥33:31에서도 말합니다. “욥이여 내 말을 귀담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 “잠잠하라”는 말의 헬라오는 “바가테”입니다. 이 말은 ”휴가를 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vacation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휴가를 떠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말과 내가 일한다는 말은 다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일 뿐입니다. 우리가 속도를 늦추는 이유는 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자신이 하시는 일에 방해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고 가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게 해야 합니다.
2) 홀로 있으라
휴식의 또 하나의 의미는 홀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홀로 있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막6:46-47,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예수님은 막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할 기미가 보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 혼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워서 혼자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홀로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홀로 있슴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휴식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있는 것입니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에서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 홀로 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흔들리는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듯이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홀로 있어 마음이 깨끗한 물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를 학교 보낸 후 집에서 조용히 앉아 성경을 읽습니까? 직장에 출근하여 피곤할 때 잠시 회사 옥상을 거닙니까? 운전하다가 피곤할 때 잠시 차를 옆에 세우고 쉽니까?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 아침, 새벽기도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탄천을 한 바뀌 걷습니까?
3) 잘 쉬어라
가끔 우리의 생활에 방해받지 않도록 프러그를 뽑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도, T.V도 끌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인터(서로)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인터넷 자주하면 “인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가 됩니다. 몸을 너무 피곤하게 하지 말고 일찍 일찍 들어와 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고 늦게 까지 사람만나고 다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늦게 까지 밖에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쉬세요. 밤에도 못쉬면 어떻게 삽니까?
전2:22-23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힘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옵니다. 집에 와서 쉬고 집에 와서 가족과 함께 놀고 혹시 술마셔도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마십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나라입니다. 특별히 토요일 저녁은 주일을 위해 일찍 주무십시오. 평소에도 새벽기도를 위하여 일찍 일찍 주무십시오. 비워야 채웁니다. 많이 비울수록 많이 채웁니다. 휴식은 다만 노는 시간이 아니라 채우는 시간입니다.
셋째.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릿시냇가에서 엘리야를 회복시킨 하나님의 세 번째는 자연을 통한 휴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연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옷이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입은 옷이 이 꽃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또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합니다.
시19편에 나옵니다.
시19:1-4절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는도다”.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렇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합니다.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자연세계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몇 주전 짬을 내서 숲을 걸었습니다. 황토빛 길 좌우로 하늘높히 솟아있는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까마귀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평소에 까마귀소리가 그렇게 큰 지 몰랐습니다. 숲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있었습니다.
말없이 걷는 숲은 얼마나 행복한 자연과의 동행입니까? 여러분, 주보 2면에서 “자연과 함께 가족과 함께”를 보셨습니까? 우리 교회 자연과 식물 전문가 정덕연 집사가 우리 나라 최고의 자연을 10군데를 소개한 것입니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굳이 돈들여 외국까지 갈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 나라도 너무 좋습니다. 울창한 자연 휴양림, 고즈넉한 해수욕장, 둘레길, 올레길, 숲길,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 최고로 좋은 곳입니다. 찬송가 69장을 아십니까?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 금빛나는 밝은 해, 저 은빛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성 프란치스코의 찬양입니다.
깊은 숲, 맑은 물, 조용한 해변에서 바라보는 노을, 일출,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 줍니다.
그릿 시냇가는 뛰어난 경관과 아름다운 자연이 있습니다. 우선 물이 있습니다. 이 물은 계곡의 북쪽 에레미아의 고향인 예루살렘 아나돗근처에서 발원합니다. 여기에 파라샘이라는 근원이 있고(사진) 그 물은 헤롯이 만든 수로를 따라 흘러옵니다(사진).
그 물이 몇 년씩이나 가뭄이 계속된 땅에 흐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 물은 피곤에 지친 엘리야에게 생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맑은 음성을 엘리야에게 들려 주었을 것입니다.
“엘리야야, 보아라. 목마르지? 사람들이 누구를 찾느냐? 생수를 찾지 않느냐? 내가 곧 생수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하면 내가 생수의 강이 되리라. 지치고 피곤한 인생, 사람들은 무엇을 갈망하느냐? 마음껏 물을 마셔 소생함을 얻는 것이 아니냐? 내가 바로 생수다. 내가 너희를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 인도하며 네 영혼을 소생시키리라”.
시원한 그릿 시내가의 물은 생수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했습니다.
그릿 시냇가는 산이 있습니다. 물론 지형상 산에 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 있고 바위가 있습니다(사진). 그 바위를 볼 때 엘리야는 무슨 음성을 들었겠습니까? 시18:2, “여호아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안에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동굴은 하나님이 견고한 바위라는 것, 누구든지 그에게 숨으면 그는 언제나 그들의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릿 시냇가에는 엘리야의 동굴이 있습니다(사진). 엘리야가 들어가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는 동굴입니다. 상당히 넓습니다. 언젠가 한번 들어갔는 데 4-50명은 족히 들어갈 동굴이었습니다. 그 동굴에 앉았더니 사방이 침묵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말이 많았구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의 통다”. 그리고 제가 기도를 너무 말로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청기도>를 쓴 잰 존슨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며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든 마음만 열고 듣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언제나 들려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휴가에 높은 산에 가십니까?
견고한 바위 같은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바다로 가십니까?
물이 바다덮음같이 풍성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시원한 계곡으로 가십니까?
우리의 영혼까지 소생케 하는 생수이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자연은 치료의 현장이요 회복의 강입니다.
이 여름에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자유케 하십니다.
이 여름에 마음을 비우십시오.
하나님이 채우십시오.
이 여름에 자연앞에 침묵으로 서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이 여름에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