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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세계인들의 놀라운 평가
https://youtu.be/d6iyxB7vMZw?si=lngLQy57bQAZfO-T
● 육영수 여사
https://youtube.com/shorts/xy6P7997XMI?si=Gubhbd3FdhTtEK6w
■ 육영수 여사 서거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10분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제29주년 광복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연단에 올라섰다. 각계 인사 1000여명은 객석에 자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권총을 발사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풀썩 단상 의자에 쓰러졌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총구를 겨눈 채 연단을 향해 계속 달려가던 23세 청년을 객석에 있던 공무원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오전 10시30분쯤 경호원은 현장에서 넘어진 청년을 체포했다.
박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누다 실패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23세 청년의 이름은 문세광이었다. 신장 180㎝, 몸무게 80㎏의 거구에 지독한 근시이며 권총 사격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그는 1972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 포섭됐다.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사건 당일 아침 문세광은 조간신문을 읽고 광복절 기념식장으로 향했다. 미제 38구경 권총에 실탄 5발을 장전하고 조선호텔을 나섰다. 호텔 택시 차를 타고 식장 앞에 도착한 그는 출입 허가 비표가 없었지만 일본어를 구사해 VIP로 위장, 경호팀에게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식장에 들어섰답니다.
그는 박 대통령이 축사를 읽는 동안 총 5발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객석에 앉아있던 합창단 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양이 경호원에 의해 피격돼 숨졌다. 문세광은 경호원과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검거됐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에 긴급 이송돼 응급치료받았지만 저녁 7시쯤 끝내 사망했다.
조사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 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암살 시도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24일 문세광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됐다. 이어 9월12일 내란목적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됐답니다.
검사 출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 사건 수사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세광 사건에 관한 외교문서가 공개된 2005년 1월21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그는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서 당시 자신이 문세광의 자백을 끌어냈다고 주장했답니다.
1974년 12월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문세광은 법정에서 "사형이 진행되는 겁니까" 라고 묻더니 1~2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알겠다" 는 말과 함께 흐느꼈다고 한다.
12월20일 오전 7시30분 서대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건 발생 127일, 형 확정 뒤 3일 만이었다. 사형되는 날 입회했던 이들이 전한 그의 마지막 말은 "와따시와 빠가데시다"(나는 바보였습니다)였습니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현행범 문세광이 범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고 이건우 당시 경감이 입을 연 것이다. 문세광은 소지한 5발용 권총으로 4발을 발사했다. 마지막 4탄을 놓고 수사발표는 육 여사가 맞았다고 했는데 이 경감은 천장에 맞았다며 다른 주장을 내놨다.
경호원의 오발이거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
또 당일 비표도 없이 출입한 점, 권총을 국내 반입한 점, 위조여권으로 비자를 받은 점, 일본과 한국의 수사 결과가 다른 점을 두고 의구심이 나타났다. 그 해 8월29일 외무부 정보보고에는 "일본경시청은 한국 수사 발표가 짜맞추기며 육 여사 저격사건은 과실살인으로 본다"고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답니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가 수교 10년 만에 단절되기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는 정황이 2005년 1월20일 공개된 이 사건 관련 외교 문서에서 드러났다.
일본 측의 사건 공동정범에 대한 수사 부진과 조총련에 대한 단속 문제가 갈등 요인으로 떠올랐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의 수사 협조를 위해 미국에까지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단교 방침은 박 대통령이 당시 일본 특사와 만난 자리에서도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회동에서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나 무시한 태도 "라며 "만약 불행하게도 이런 사건이 재발할 시 양국의 우호관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조총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 박정희 대통령 서거
■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 애도 / 23.10.28.
오늘이 10. 26 박대통령이 비명에 서거하신 날입니다. 애도를표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리고개를 없애 국민을 배부르게 하고
나라를 이렇게 부강하게 만든 업적은
인류 기원이래
그 누구도 흉내낼 수없는 일이기에 ...
그의 생각만으로 눈물이 나오고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데 ...
비방하는마음이 생기는사람은
어떤 인간들인가요 ... ?
🇰🇷🇰🇷 그리운 사람🇰🇷🇰🇷
그 車가 네 車냐-?
네 아버지 車냐-?"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김병희 전 인하공대 학장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5.16 혁명시절 최고회의 의장실에 무상출입하게 된 나는 박정희와 30년 지기였건만, 그때 나는 인간 박정희의 새로운 편모(片貌)를 보게 되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의 첫 인상은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장식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특별한 기물도 없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그가 앉는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손님용 나무 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 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품인 "청자" 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
바이스로이" 를 피웠는데 ...
그가 그것도 저것도 아닌 "아리랑" 을 피우는 것을 보고 놀랐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또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점심을 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 !?
단돈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단무지 서너 조각이 그날 "食單" 의 전부였다.
마침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 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良心)의 가책(呵責)을 받았다.
"동서고금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집권자가 이렇게 험한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깊은 감명(感銘)을 받았다.
朴의장의 애국심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는 당시 장충단 공원에 있는 의장공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
국민학교 6학년인 장녀 근혜양을 운전병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朴의장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車)가 니(네) 차냐,?
그 차가 아버지 車냐?" 하고 힐책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네)가 감히 등교용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 !"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오른다.
박물 시간에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보아가며 크고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 를 "朴" 군이 차지했었다.
그는 일찍 경북 선산군 구미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들 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의 9 : 1 이라는 입시경쟁을 돌파한 엘리트였고 ...,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 라는 평점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는 비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천군만마를 질타하는 작전계획이라면저 미국 육사 출신의ㅔ 엘리트들 조차 우리 朴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기에 쓰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 강 도강작전(漢江渡江作戰)" 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정희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에 입학해서 본관 2층이었던1년 2조(組)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던 "희(熙)"를
우리 둘은 공유 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꼈었다.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다.
어느날은 박물교실의 뒤뜰에서 대구출신 S 군과약골(弱骨)인 주재정君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는 주 군을 단숨에 때려 눕혀 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유혈이 낭자(狼藉)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朴군만이 뛰어들어
그 S를 때려 눕히고 주 군을 구출했었다.
그 용기와
그 지모와
그 애국심이
朴군의 그날(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
그에게 넘겨진 대한민국은
GNP 83弗의 세계 153개국 중 152번째로
정말 못사는 나라였다.
헐벗은 백성들이
4月남풍에 대맥(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悲運)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 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長壽煙)이나 희연(囍煙) 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하면,
그 "아리랑" 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朴正熙-!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어찌 나의 이 추모의 情을 알리오.
오늘에 와서
그를 비방(誹謗)하는 일부 인사들도 많지만,
진정 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
나는 그 당시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만사에 청렴결백 했던 그를 보았지만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후일의 가족을 위해서
어느 구석진 곳에 그들의 생활비 정도는 나올
무엇인가는 마련해 두었으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 세상에 그처럼 결백한 집권자가
또 어디 있었을까???
박대통령의 비리를 찾아보려고
26년간 뒤지고,
까고,
파고,
훑어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
그가 쓴 광화문,
화령전,
운한각,
현판도 뜯어내고,
그 시절에 심어졌다 해서
나무까지 뽑아낸 좌파 개역적놈들!!!,
장관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제 자식 취직자리부터 챙기는 썩어빠진 것들이
박대통령을 매도하려 발버둥친다.
똑바로 알아라!!
당신들 제 아무리 폄훼하려 지랄 발광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은
대한민국 중흥의 시조로써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것임을 ...
박정희는 비록 비명에 갔지만 ...
그는 죽어서 진정 그 가치를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높이 평가받게 될 것임을!!
_ 김병희 前 인하공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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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구미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기 추도식 1천여명 참석 / 23.10.25.
● 박근혜 통, 10·26 앞두고 부친 묘역 참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인 10월 26일을 하루 앞두고, 25일 오전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24일 대구 달성군 사저로 내려가기 전에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도 같은 날,
2023년 예산안 통과 후, 국립현충원을 찾아
박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고 밝혔습니다.
참배에는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 성일종 정책위의장, 김석기 사무총장, 김대기 비서실장, 김성한 안보실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등 국민의힘 지도부와 함께 대통령실 인사, 정부 관계자들이 함께 참석했습니다.
한편, 정 비대위원장은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차례로 참석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제43주기 추도식' 일정은 취소했습니다.
정 비대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취재진들에게 "어제 윤 대통령과 공식 참배를 갔다왔기 때문에 연이틀 가는 것은 좀 안 맞는 것 같다"며 "오늘 오후 노태우 전 대통령 1주기 추모식에는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마찬에서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그 후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43주기 [구미]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43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구미 상모동 생가에서 열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생가 보존회가 주최한 이 날 행사에는 1천 여명 이상의 추모객이 참석했습니다.
추모식에 앞서 추모제례에서 김장호 구미시장은 초헌관을, 안주찬 구미시 의회 의장은 아헌관, 박동진 이사장은 종헌관을 담당했습니다.
_ 26일 오전 구미 상모동 생가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기 추모제례가 열리고 있다.
지난 3년간 지속된 거리두기 제한이 해제된 결과로,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추모객들을 위해 상모사곡 모로실 회원 10여 명은 시루떡을 나누어 주었으며, 차인연합회 헌다 봉사와 대한서포터즈에서 추모객에게 차를 제공했습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 구자근 및 김영식 국회의원은 추도사를 낭독했습니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 파독광부 간호사협회 대표 등도 헌화했습니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첨단 산업 도시의 명성에 누가 뒤지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고인의 원대한 의지를 새기고, 그에 걸맞는 숭모관을 세워 고향 도시의 책무와 도리를 이어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대통령님의 청렴하고 검소한 삶,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강한 애국심이 그리워진다"며 "낙동강과 동해안의 기적을 만들며 경북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에 경북 선산(현 구미 상모사곡동)에서 태어났으며, 1979년 10월 26일에 서거하였고, 11월 3일에 대한민국 국가원수 최초로 국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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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41주기 추도식 … 김종인 참석에 朴 지지자들 '고함' / 2020.10.26.
● 현충원 추도식에 김종인ㆍ주호영 참석
_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1주기 추도식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41주기 추도식이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진행됐다.
26일 민족중흥회 주관으로 서울 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는 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 등이 참석했다.
정재호 민족중흥회 회장은 "세월이 수상하니 세상 물정이 물구나무 선 오늘"이라며 "님의 따님(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과 명예회복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고 했다.
함께 자리한 강창희 전 국회의장은 "지금 권력자들은 이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전쟁에서 구해낸 큰 어른들의 묘를 이곳 현충원에서 파내자는 패륜적 언동까지 서슴 없이 나오고 있다" 고 정부ㆍ여당을 비판했다.
이날 추도식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 표명 의사를 밝힌 김종인 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에게 고성을 지르며 잠시 소동을 빚기도 했다. 이들이 김종인 위원장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김종인 위원장은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_ 26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에서 박 전 대통령의 41주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같은 시각 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도 추도식이 열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는 매년 1000여명의 추도객이 발걸음을 했지만 이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위해 50명의 제례 관계자들만 참여할 수 있도록 제한됐다.
추도식을 찾은 200여명의 외부 추도객들은 생가터 주차장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를 통해 제례를 지켜봤다. 40여분간 진행된 제례가 마치고 난 뒤 추모객들은 생가 터로 들어가 박정희 전 대통령 영정 아래 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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