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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 공생활 둘째해
245. 안식일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1945. 8. 7.
우리는 다시 나자렛의 회당에 있다. 오늘은 안식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비멜렉에 대한 우화를 읽으셨는데, ‘가시덤불에서 불이 나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버리게 하라’162) 판관9,15)라는 말씀으로 마치신다. 그 다음에 그분은 두루마리를 회당장에게 돌려주신다.
“당신께서는 나머지를 읽지 않으시겠습니까? 우화를 알아듣게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할 텐데요.”
회당장이 말한다.
“그것은 필요 없습니다. 아비멜렉와 시대는 아주 옛날입니다. 나는 옛날의 우화를 현시대에 적용합니다.
나자렛의 주민 여러분, 들으시오. 여러분은 회당장이 가르쳐 준 대로 아비멜렉에 대한 우화의 교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회당장은 라삐에게서 배웠고, 그 라삐는 다른 라삐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렇게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항상 같은 방법으로 같은 결론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다른 교훈을 들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지성을 사용하고, 낡아서 못쓰게 될 때까지 도르레에서 물로, 물에서 도르레로 왔다 갔다 할 뿐 결코 변하지 않는 우물의 도르레에 맨 밧줄처럼 되지 않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사람은 밧줄도, 기계장치도 아닙니다. 사람은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와 상황에 따라 스스로 그것을 활용해야 합니다. 말씀의 문자는 영원하지만, 상황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지혜의 말씀이 항상 품고 있는 영(spirit)인 새로운 가르침을 매번 추출해내는 수고와 그로 인한 만족을 원치 않는 선생은 보잘것없는 선생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것은 단 한 마디도 보태지 못하고,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할 줄 밖에 모르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숲은 인류를 상징하는데, 그 숲에는 온갖 종류의 나무들과 관목들과 풀들이 모여 있습니다. 인류는 누군가에게 지도받을 필요를 느낍니다. 그 지도자는 모든 영광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광과 함께 자기의 신민들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훨씬 더 큰 책임도 지고 있습니다. 그는 신민들과 이웃 나라들과, 더 두렵게도 하느님께 책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위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지지만 하느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 그분의 승인이 없다면 어떤 인간적인 힘도 무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왕조나 불가침인 것처럼 보이는 권력의 갑작스러운 상상할 수 없는 교체는 이것으로 설명됩니다. 그것들은 백성들에 대한 처벌이나 시련을 겪게 하는 것이 한계를 넘을 때에는 하느님의 허락 하에 같은 백성들에 의하여 전복되어 먼지나 때로는 하수구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맙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백성들은 자기 신민들과 이웃 나라들과 하느님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질 사람을 뽑을 필요를 느낍니다. 그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역사의 심판은 두려운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해관계로 역사의 심판을 바꾸어놓으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미래의 사건들과 백성들이 그 심판을 최초의 무서운 진실을 회복시켜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분이나 의견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는 일이 너무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기분이나 의견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므로 그분의 정의는 훨씬 더 가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지도자, 역사의 창조자가 되도록 뽑힌 사람들은 성인들의 영웅적 정의를 가지고 행동하여 미래 세기들에 불명예스럽게 되지 않고 그분께 영원히 벌 받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아비멜렉의 우화163) 판관9,7-15)로 돌아갑시다. 나무들은 왕을 가지고 싶어 올리브나무를 찾아갔습니다. 올리브나무는 주님 앞에서 타는 기름을 내기 때문에 신성한 나무이고 초자연적인 용도로 축성되어, 십일조와 제사에서 두드러진 요소이고 제단과 사제들과 왕들에게 바르는 데 쓰이는 거룩한 향유를 산출하고, 말하자면 거의 기적적인 특성을 가지고 건강하거나 병든 몸에 그렇게 쓰입니다.올리브나무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내 임무를 소홀히 하고, 세상의 일로 나를 비천하게 할 수 있겠소?’
오! 올리브나무의 대답은 얼마나 온유합니까! 하느님께서 거룩한 임무를 위하여 뽑으신 모든 사람들이 왜 최소한 이 대답을 배워 이와 같이 대답하지 못합니까? 사실 마귀의 제안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왕이고, 영혼을 가지고 있고 초자연적인 운명으로 부름 받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제단이자 집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아들이고 신민인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려고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제단이자 집입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각 영혼은 제단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제, 제단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자신을 더럽히지 마라.’
164) 레위21,1) 그러므로 사람은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유혹에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영적인 존재이기를 그치고 물질적인 죄스러운 일에 몰두할 수 있단 말이냐?’
나무들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내 달콤함과 대단히 맛있는 내 열매를 버리고 당신들의 왕이 될 수 있겠소?’
많은 사람들이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이 자기들의 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의 친절함을 우러러보아서가 아니라, 결국 그 왕의 친절함을 조롱할 수 있고, 자신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얻어내고,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그를 조종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친절은 나약함이 아닙니다(kindness is not weakness). 그것은 선(goodness)입니다. 그것은 올바르고(just), 지적이고(intelligent), 확고합니다(firm).
결코 친절을 연약함으로 오해하지 마시오. 친절은 미덕이지만, 연약함은 결점입니다. 친절은 미덕이기 때문에 그 소유자에게 올바른 양심을 가지게 하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들의 운명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인 하느님의 이익이 아닌 세속적인 이익 쪽으로 그들의 마음을 쏠리게 하려는 인간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저항할 수 있게 합니다.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질책을 결코 신랄하게 물리치지 않을 것이고,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박절하게 물리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는 호의적으로 미소 지으면서 항상 말할 것입니다. ‘나를 내 평화로운 운명에 그대로 내버려두시오. 나는 당신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여기 있지만, 당신이 바라는 대로 왕이 될 수는 없소. 나는 당신과 나의 영혼의 복지를 위하여 유일한 왕권 즉 영적인 왕권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소,’
나무들은 포도나무를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포도나무가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기쁨과 힘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당신들의 왕이 될 수 있겠소?’
왕의 자리에는 책임감과 가책으로 인하여 항상 영적인 우울함이 있습니다. 죄짓지 않고 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임금은 검은 금강석보다 더 드물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등대처럼 멀리서 빛날 때는 유혹적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것은 별빛이 아니라 개똥벌레의 빛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나아가 권력이란 왕의 주위에서 일어난 수천 가지의 이해관계들의 밧줄로 결박된 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신들, 동맹자들, 친척들과 왕 자신의 이권 따위 말입니다.
축성되는 동안에는 ‘나는 공평무사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나서 나중에 그렇게 되지 못하는 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연하고 가는 담쟁이넝쿨이 맨 처음 포옹할 때 ‘저놈은 너무 연약하여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 장식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기어 올라올 때 지탱해 주는 보호자가 되기까지 하는 강한 나무처럼 왕도 조신, 동맹자, 자기 자신이나 친척들의 이해관계의 최초의 포옹이 자기를 향하여 올 때는 너무 자주, 아니 항상 양보하고, 그들의 너그러운 보호자가 되는 것을 기꺼워합니다.
자기의 양심이 그에게 ‘조심해라!’ 하고 소리쳐도 그는 ‘이건 아주 사소한 거야!’ 하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이 자기의 권력이나 명성에 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담쟁이넝쿨이 힘과 길이가 자라나, 토양의 진액을 점점 더 게걸스럽게 빨아먹고 점점 더 기어 올라가 태양빛을 받고 이 가지, 저 가지, 그 힘센 나무 전체를 칭칭 감고 그것을 압도하고, 숨 막히게 하고, 마침내 죽이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그놈은 그토록 연약했었는데! 그 나무는 그토록 강했었는데!
똑같은 일이 왕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찬사가 듣기 좋고, 인기 있는 보호자가 되는 것이 신나기 때문에 자기의 직무와 최초로 타협하고,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대하여 최초로 어깨를 들썩인 다음… 왕이 통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대신 다스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왕을 가두고, 그에게 재갈을 물려 질식시키고, 그들이 왕보다 더 강해지게 되면, 왕이 빨리 죽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는 순간이 옵니다.
자기의 영혼 안에서 여전히 왕인 보통사람도 교만이나 탐욕으로 인하여 더 낮은 왕권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는 파멸합니다. 그는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영적인 평화를 잃습니다. 그것은 마귀와 세속과 육신이 허망한 권력과 향락을 줄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영적인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 영 안에서(in spirit) 가난한 사람들의 기쁨과 힘,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과 제휴함으로써 나의 내적인 힘과 기쁨, 하늘과 그 참된 왕권을 잃는다면, 내가 어떻게 열등부분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또한 하늘나라를 소유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 아닌 다른 모든 재물을 업신여기는 영 안에서 가난한 복된 사람들은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성의 메마른 사막에서 살고 있어 죽지 않기 위하여 갈증을 풀고, 유모 없는 어린이처럼 생명유지에 필요한 액으로 영양을 얻을 필요가 있는 우리 형제인 인류를 위하여 건강에 유익하고, 기쁨을 주는 즙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임무를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품을 잃은 인류의 유모입니다. 만일 인류가 모든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유쾌한 활동을 수행하는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생명, 기쁨, 자유, 평화가 있다는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황량한 땅에서 방황하고, 병들고, 결국 절망이나 가장 어두운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고통당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하여 그러한 사랑을 주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가시덤불에게 갔습니다. 가시덤불은 나무들을 물리치지는 않았으나,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나를 너희의 왕으로 삼기를 원한다면, 너희는 내 밑으로 와야 한다. 그러나 나를 뽑은 다음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모든 가시들로 불타는 고통을 만들어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포함하여 너희 모두를 불살라버리겠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왕권입니다. 타락한 인류는 거만과 잔인성을 참된 왕권으로 보는 반면, 온유함과 선함은 어리석고 연약한 감상으로 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악에 순종합니다. 사람은 악에게 유혹되고, 마침내 악에 의하여 불탑니다.
이것이 아비멜렉의 우화입니다. 나는 다른 우화 하나를 내놓겠습니다.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고 먼 옛날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고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짐승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놈들은 영악하기 때문에 힘이 세거나 거칠어서 자신들을 두렵게 하지 않을 짐승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놈들은 사자와 모든 고양이과의 동물들을 배제했습니다. 그놈들은 부리가 있는 독수리나 기타 맹금류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놈들은 말도 믿지 않았는데, 말이 빠르기 때문에 자신들을 따라잡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승들은 심지어 나귀도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귀가 참을성이 많다는 것은 알지만, 갑자기 성질을 부린다는 것과 강력한 발굽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승들은 원숭이를 자기들의 왕으로 삼는다는 생각에 겁에 질렸는데, 원숭이는 너무 영리하고 복수심이 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놈들은 뱀의 멋진 색깔과 우아한 몸놀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꾀는 일에 사탄에게 동의했다는 구실 하에 뱀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사실 그놈들은 소리 없는 뱀의 움직임과 강력한 근육 그리고 무서운 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뱀을 원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놈들이 황소나 뾰족한 뿔이 달린 다른 짐승을 왕으로 뽑을까요? 절대로 아니지요! 마귀에게도 뿔이 있어’ 하고 짐승들은 말했습니다. 짐승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날 반란을 일으키면, 그놈은 뿔로 우리를 몰살시킬 거야.’
짐승들은 그토록 많이 걸러내다가 푸른 풀밭에서 즐겁게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어미의 둥근 젖통을 들이받는 포동포동한 흰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어린양은 뿔이 없고 눈은 4월의 하늘처럼 온순했습니다. 어린양은 온순하고 순진했습니다.
그놈은 모든 것에 만족했습니다. 분홍빛 작은 주둥이를 박고 물을 먹는 작은 개울의 물, 그놈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는 다양한 맛을 가진 꽃들, 배부를 때 누우면 기분이 좋은 푹신한 풀, 파란 풀밭 저 위에서 뛰놀며, 자기네가 하늘에서 하는 것처럼 풀밭에서 뛰놀라고 권하는 다른 어린양들처럼 보이는 구름들, 특히 아직 따뜻한 젖을 빨아먹도록 허락하고, 그 동안에 분홍빛 혀로 흰털을 핥아 주는 어미의 애무도, 바람을 막아주는 안전한 양 우리, 어미 곁에서 자면 기분이 좋은 부드럽고 향긋한 잠자리 짚 따위 모든 것에 말입니다.
‘저놈은 만족해하는구나. 저놈은 무기도 없고, 독도 없네. 순진하기도 하고. 저놈을 우리 왕으로 삼자.’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그 어린양이 아름답고, 착하고, 이웃나라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그 참을성 있는 온유함 때문에 백성들과 신하들에게서 사랑받기 때문에 그 왕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린양이 숫양이 되었는데, 그 양이 말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내가 다스릴 때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내 임무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내가 왕으로 뽑히는 것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은 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나를 길러주셨고, 나에게 다스릴 능력을 주셨다. 나는 그분의 선물을 소홀히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내 통치력을 완전하게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왕은 자기의 신민들이 윤리도덕, 사랑, 친절, 충실성, 절제, 순종, 존경, 신중 따위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신민들은 고양이과 동물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나, 먹잇감을 덮치려고 수직낙하하며 지르는 독수리의 소리나, 뱀이 쉭쉭거리는 소리나, 무서운 개의 짖는 소리와 달리 자기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 양의 지혜롭고 친절한 울음을 비웃었습니다.
숫양이 된 어린양은 우는 데 그치지 않고. 범죄자들을 그들의 임무에 복귀하게 하려고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뱀은 양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사라졌고, 독수리들은 높이 날아올라 양을 내팽개쳐버렸습니다. 고양이과의 동물들은 앞발로 양을 떠밀면서 위협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우리 부드러운 앞발이 당신을 떠밀기만 하지. 근데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볼래? 발톱들이 들어 있어.’
말들과 그와 비슷한 잘 달리는 짐승들은 양을 놀리면서 그를 에워싸고 마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코끼리들과 다른 후피동물들은 코로 양을 밀치고, 원숭이들은 나무 위에서 양에게 물건들을 던졌습니다.
숫양이 된 어린양은 마침내 화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내 뿔이나 힘을 쓰기를 원치 않았다. 내 목은 정말로 힘이 세니, 사람들은 전쟁할 때 장애물을 쳐부수기 위하여 내 목을 본 따 무기를 만들 것이다. 나는 사랑과 설득을 통하여 일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그 힘을 쓰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너희가 사랑과 설득에 굴복하지 않으니, 나도 힘을 쓰겠다. 너희는 나와 하느님에 대한 너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지만, 나는 하느님과 너희에 대한 내 의무를 불이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정의와 선으로 인도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와 하느님에 의하여 이 자리에 뽑혔다. 그래서 나는 정의와 선, 즉 질서가 이 곳을 다스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뿔들로 처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착하기 때문에 가볍게 처벌했습니다. 그 다음에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돼지가 다른 짐승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식량을 쌓아둔 우리의 문을 자신의 힘센 목으로 부수었고, 음란한 원숭이 두 마리가 그놈들의 부정한 사랑을 위하여 고른 칡넝쿨이 우거진 덤불도 부수었습니다.
‘이 왕은 너무 강력해졌다. 그는 진짜로 통치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지혜로운 동물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리의 취미가 아니야. 우리는 왕을 폐위시켜야 해.’ 짐승들은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그놈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명분이 없으면 우리가 이웃 민족들에게 나쁘게 보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싫어하시게 될 거야. 그러니 숫양이 된 어린양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여 우리의 반란이 정의인 것처럼 보이게 하자.’
‘내가 염탐하는 일을 맡을게.’
뱀이 말했습니다.
‘나도.’
원숭이가 말했습니다.
한 놈은 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한 놈은 나무 꼭대기에 남아 있으면서 어른 양이 된 어린양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감시했습니다. 매일 저녁 양이 감시를 풀고 쉬면서 백성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들의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조치와 사용할 말을 숙고하려고 자기의 방으로 돌아갈 때 몇 마리 안 되는 정직하고 충실한 놈들만 제외한 모든 짐승들이 두 첩자 겸 반역자의 보고를 듣기 위하여 모이곤 했습니다. 사실 뱀과 원숭이는 첩자이고, 반역자였으니까요.
뱀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다닙니다. 혹시 당신께서 공격당하신다면, 제가 당신을 방어할 수 있기를 저는 바랍니다.’
원숭이가 왕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당신을 우러러봅니다! 저는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서 저는 목장 너머에서 누군가가 죄짓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로 달려가세요!’
그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도 양은 어떤 죄인들의 잔치에 참석했다. 양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간다고 가장하고 그리로 갔지만, 사실 그는 그들과 함께 주지육림에 빠졌다.’
뱀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양은 자기의 백성의 경계 밖으로 나가 나비와 파리와 끈적끈적한 달팽이들과 어울려 지낸다. 양은 충실하지 않다. 그놈은 부정한 외국인들과 거래한다.’
그놈들은 죄 없는 양의 등 뒤에서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놈들은 양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양의 사명을 다하도록 그를 양성하셨던 주님의 영은 백성들의 음모의 실상도 그에게 밝혀주셨습니다. 양은 분개하여 짐승들을 저주하며 도망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은 온순하고 겸손했습니다. 어린양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잘못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훨씬 더 큰 잘못은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하여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끝까지 자기 임무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오! 사람들에게 그것은 얼마나 큰 잘못들이었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그로 인하여 양은 유죄선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놈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놈의 압제에서 풀려난다.’ 뱀이 어린양을 죽이는 일을 자임하였습니다. 뱀은 항상 배반자니까요…
이것이 둘째 우화입니다. 나자렛 주민 여러분, 이 우화를 이해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반감을 가진 사람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 그 밖으로 나가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렸을 때 와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이 땅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반감을 가지는 이상의 일을 하지 마시오. ‘그를 넘겨준 배반자와 그의 불공평한 재판관들이 나자렛 출신’이라고 역사가 말하게 하지 마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판단에 있어 의롭고, 의지를 발동하는 데 있어 확고하시오. 내 동향인 여러분, 첫째 우화의 미덕은 여러분 모두에 관한 것입니다. 둘째 우화는 여러분 중에서 올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마음이 흐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갑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예수께서는 비통한 침묵이 흐르는 중 서글프게 고개를 숙이신 채 나자렛의 회당에서 나오신다. 찬동을 표하는 두세 사람의 목소리만이 그 침묵을 깬다.
사도들이 그분을 뒤따라 나온다. 맨 끝에 알패오의 아들들이 있는데, 그들의 눈은 분명히 온순한 어린양의 눈은 아니다… 그들은 적의를 품은 군중을 응시한다. 유다 타대오는 서슴지 않고 그의 형 시몬의 앞에 똑바로 서서 말한다.
“나는 형이 더 성실하고 기개가 있다고 생각했었어.”
시몬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러나 다른 형은 나자렛의 다른 사람들에게 고무되어 말한다.
“너는 네 형을 모욕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니야, 나는 당신들 모두를 부끄럽게 생각해. 나자렛은 메시아에 대하여 보통의 계모가 아니라 심술궂은 계모야. 내가 예언하지. 당신들은 샘에 물을 대어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 거야. 그러나 그 눈물도 역사책들에서 이 읍내와 당신들의 진정한 이름을 지우는 데에는 부족할 거야.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 ‘우둔함’이야. 안녕.”
야고보는 그들에게 지혜의 빛이 비춰지기를 바라며 더 부드럽게 인사한다. 그들은 사라의 알패오와 두 젊은이들과 함께 나온다. 내가 맞는다면, 그 젊은이들은 임종 직전에 있던 쿠자의 요안나에게 마중 나가는 데 쓰인 나귀를 몰고 갔던 두 나귀몰이꾼들이다.
어안이 벙벙해 있던 군중이 소곤거린다.
“그는 어디서 그 많은 지혜를 얻었을까?”
“그는 어떻게 기적을 행하지? 그가 진짜로 기적을 행하기는 하니까 말이야. 팔레스티나 전체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잖아.”
“그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그가 나자렛의 목공소에서 탁자와 침대를 만들고, 수레바퀴와 자물쇠를 맞추는 것을 보았어. 그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어. 그의 어머니만이 그의 유일한 선생이었어.”
“그것도 우리 아버지의 비난거리들 중 하나였어.”
알패오의 요셉이 말한다.
“하지만 자네의 아우들도 요셉의 마리아의 학교를 졸업한 거잖아.”
“그러게! 우리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한테는 약했어…”
요셉이 다시 대답한다.
“그럼 자네의 작은 아버지도 그랬어?”
“그럼.”
“그런데 저 사람은 정말로 목수의 아들이야?”
“자네는 보면 모르나?”
“아! 서로 닮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저 사람이 실제로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면서 목수의 아들로 자처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럼 요셉의 아들 예수는 어디 있어?”
“자네는 저 사람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저 사람의 형제자매들이 여기서 사는데, 그들 모두가 저 사람을 자기들의 친척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렇지 않은가, 자네 두 사람?”
알패오의 두 아들이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미쳤거나 마귀 들렸어. 노동자에게서는 저 사람이 말하는 것 같은 말이 나올 수 없으니까 말이야.”
“우리는 저 사람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해. 저 사람이 주장하는 가르침은 망상이거나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이니까 말이야.”
예수께서는 광장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라의 알패오를 기다리신다. 그분께서 기다리시는 동안 회당 문 곁에 남아 있었던 나귀몰이꾼 중의 한 젊은이가 회당에서 사람들이 내뱉은 중상을 예수께 말씀드린다.
“슬퍼하지 마라. 예언자는 대체로 자기의 고향과 집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사람은 예언자가 거의 이 세상 밖에 있어야 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다. 그런데 모든 동향인들과 친척들은 어느 누구보다 그 사람의 인간적 성격을 더 잘 알고 기억한다. 그러나 진리는 항상 승리한다.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평화가 너와 함께.”
“선생님, 제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는 믿었기 때문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여기 믿음이 없기 때문이 이곳의 내 백성들이 무기력한 것이다. 친구들아, 가자. 우리는 내일 새벽에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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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스도의시 넘 좋고 우화들 재미있어요.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