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李賢輔) : 영천이씨.1467년(세조13,丁亥)~1555년(명종10,乙卯),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壟巖)․설빈옹(雪賓翁), 시호는 효절(孝節)로 증조부(曾祖父) 휘 파(坡), 조부(祖父) 휘 효손(孝孫), 외조부(外祖父) 휘 권겸(權謙), 처부(妻父) 휘 권효성(權孝誠), 현감인 父 휘 흠(欽)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다. 경북 예안에서 출생하여 중구 주자동에 거주했으며,
1495년(연산군1,을묘) 28세에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급제하시고,
1498년(연산군4,戊午)에 31세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셔 한림에 뽑혀셨고, 교서관(校書館)의 벼슬을 지내셨다. 예문관검열(檢閱:정9품), 춘추관기사․예문관봉교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10,甲子) 37세때 사간원정언(正言:정6품)이 되셨으나,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安東)으로 유배 되셨다.
1506년(중종1,丙寅) 39세때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헌부지평(持平:정5품)에 복직, 밀양(密陽)․안동(安東)의 부사(府使:정3품), 충주목사(忠州牧使:정3품)를 지내셨고,
1523년(중종18,癸未) 56세에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로 재직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 받으셨다. 그후 병조참지(兵曹參知)․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홍문관 부제학(副提學:정3품)등을 거치시고, 대구부사(大邱府使:정3품)․경주부윤(慶州府尹:정2품)․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을 지내셨고,
1542년(중종19,甲申) 75세때 호조참판(戶曹參判:종2품)에 이르러 은퇴를 청하셨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온천욕(溫泉浴)을 핑계로 낙향하셨다.
1545년(인종1,乙巳) 78세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셨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중추부사 등의 명예직에 제수 되셨고, 기로소에 들어 가셨다.
1546년(명종1,丙午) 79세에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오르셨고, 청백리(淸白吏)에 녹훈(錄勳)되셨으며,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이며 후배인 이황(李滉)․황준량(黃俊良), 월연 이태(月淵李태:1483년,成宗14년~1536년,中宗31년)등과 교유하셨다. 자연을 사랑하고 음율에 밝아 강호(江湖)의 서정을 노래한 시조를 많이 지어,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 구전하던〈어부가(漁夫歌)〉를 정리하여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만들어 지어신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효빈가(孝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등 시조 8수가 전한다. 저서로《농암집(聾巖集)》이 있다. 할아버지는 1612년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셨다가, 숙종26년(1700)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祭享)되셨다
이현보(李賢輔)
성명(姓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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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李賢輔) |
본관(本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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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永川) |
시대(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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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세조13)~1555(명종10) |
자(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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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비仲) |
호(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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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聾巖) |
이력(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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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李賢輔) 1467(세조13)~1555(명종10)
조선의 문신. 자는 비중(비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翁), 시호는 효절(孝節). 현감(縣監) 흠(欽)의 아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벼슬을 지내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安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지평(持平)에 복직, 밀양(密陽)·안동(安東)의 부사(府使),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지내고, 1523년(중종18) 성주 목사(星州牧使)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그뒤 병조 참지(兵曹參知)·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대구 부윤(大丘府尹)·경주 부윤(慶州府尹)·경상도 관찰사·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1542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러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온천욕(溫泉浴)을 핑계로 낙향했다. 1546년(명종 1)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1545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時調)를 지었고, 10장(章)으로 전하던 「어부사(漁父詞)」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한다.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현보(李賢輔) 시대 : 조선전기
국적 : 한국
생몰년 : 1467(세조 13)∼1555(세조 13∼명종 10)
의 :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장가
생 애
자는 비중(?中)이고,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翁)이며,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이흠(李欽)의 아들이다. 이황(李滉) 등과 교유하였다. 1498년(연산군 4)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들고 사관(史官)이 되었다.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경연관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安東)에 유배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지평·동부승지·부제학·대구부사·경상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1546년(명종 1) 상호군(上護君)·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이황과 서신 문답을 통해 영향을 주었고, 언로(言路)의 개방을 주장하여 성왕(聖王)의 도(道)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례(祭禮)를 도식(圖式)으로 풀이하였으며, 중용(中庸)의 도를 강조하였다.
영 향
그의 가사문학(歌詞文學)은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저 서
저서에 『농암집(聾巖集)』이 있다.
기 타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현보(李賢輔) 영천인
농암선생문집(聾巖先生文集)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시문집(詩文集)으로 1665년(顯宗 6) 외손(外孫) 김계광(金啓光)이 간행했다. 이현보의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1498년(燕山君 4) 문과에 급제, 한림원에 들고, 사관이 되었다. 동부승지(同副承旨), 부제학(副提學), 대구부사(大邱府使),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를 지냈으며,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노후에는 예안(禮安)에 퇴거, 귀거래도(歸去來圖)을 벽에 그려 붙이고, 시문과 봉양에 힘썼다. 이현보(李賢輔)에 관하여는 농암집(聾巖集) 부록 이황(李滉)의 행장(行狀), 홍섬(洪暹)의 비명(碑 銘),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등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권3}:잡저록(雜著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농암(聾巖)이 노모를 모시고자 지은 애일당(憂日堂)에 관한 문장 및 양심지서발(養心志序跋) 등과 주례(酒禮), 제례(祭禮), 등이 있다. 또 가사(歌詞) 5편(效嚬歌 幷序, 聾巖歌幷序, 生日歌幷序, 漁父歌九章, 漁父短歌五章)이 있고 주로 한글로 되어 있으며 시가 문학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어부가(漁父歌)」는 국문학사상 문학적 가치를 지닌 중요 자료로 후에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명곡문고>
聾巖先生文集續集 (古明 810.819 이94遁)
李賢輔 (1467-1555) ; 字 搭仲, 號 聾巖, 雪?翁, 本貫 永川.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隆熙4(1911)跋.
4卷2冊 : 年譜 ; 31.7cmx20.9cm.
四周雙邊. 半匡 ; 18.7cmx16cm.有界.10行18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黑魚尾.
目錄.
卷之 1. 詩.
書 ; 與退溪(3), 答退溪(2), 與金綏之(綏).
墓碣 ; 宣敎郞行通禮院引儀安公.
卷之 2. 附錄 ; 送李搭仲歸永川, 李輔德重陽壽親詩, 永陽別章.
卷之 3. 年譜.
附錄 ; 敎書, 汾江書院上梁文, 奉安文, 文集告成文, 請 宣額疏, 續誌, 神道 碑閣移建時告由文.
<국조 문과 방목>
이현보(李賢輔) More Info.
연산군(燕山君)4년(1498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0(丙科20)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67년, 정해
자(字) 비경(斐卿)
호(號) 농암(聾岩)
본관(本貫) 영천(永川)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효절,청백리(孝節,淸白吏)
>>> 가족사항
부(父) 이흠(李欽)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효손(李孝孫)
증조부(曾祖父) 이파(李坡)
외조부(外祖父) 권겸(權謙)
처부(妻父) 권효성(權孝誠)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495(을묘)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한림&(翰林&) |
묘(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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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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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흠(李欽) 현감(縣監)
이흠(李欽):1440(세종 22, 경신)~1537(중종 32, 정유).
본관 永川. 자는 경지(敬之). 孝孫의 子. 1483년(성종 14)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에 就任, 진보현감(眞寶縣監)을 거쳐 인제현감(麟蹄縣監)을 지내고 연산군(燕山君) 때 체직(遞職)되어 돌아와서는 다시 사로(仕路)에 나가지 않음. ▣참고:永川李氏譜 |
모(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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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 호군(護軍) 권겸(權謙)의 女
권겸(權謙):1413(태종 13, 계사)~1505(연산군 11, 을축).
본관 安東. 시조(始祖) 행(幸)의 20세손.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부호군 역임(歷任). 安東에서 부나촌(浮羅村)으로 이거함. |
본(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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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보(李賢輔) |
배(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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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女
자는 明達(명달), 조선 때 崇政大夫(숭정대부)를 거쳤고, 孝(효)로써 旌閭(정려)가 세워졌다. |
자(子) |
이석량(李碩樑) 장사랑(將仕郞) |
자(子) |
이문량(李文樑)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 1498년(연산군4,戊午)∼1581년(선조14,辛巳)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농암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영양군 11세손)이시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딸이시다.
1520년(중종 15) 이후 장사랑·통사랑·종사랑·적순부위(迪順副尉)·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의 많은 음직(蔭職)이 내려지고,
1559년(명종 14)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제수되었다. 특히, 이황(李滉)과는 이웃에 살면서 절친하였는데,
1564년(명종 19) 이황(李滉)과 함께 청량산(淸량山)을 유람하면서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셨다. 뒤에 이황의 고제가 된 휘 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 등을 초년에 가르치신 적도 있다. 효성이 지극하시고 우애가 독실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중국 삼국시대의 백미(白眉) 마량(馬良)에 비유하였다. |
자(子) |
이희량(李希樑) 현감(縣監)
이희량(李希樑):1501(연산군 7, 신유)~1565(명종 20, 을축).
본관 永川. 자는 가허(架虛). 호는 호암(虎巖). 賢輔의 第三子. 음보(蔭補)로 彦陽 奉化縣監 역임. 보충:禮安 汾川으로부터 ?基 逸園의 寶盖亭에 옮겨와 살면서 외조부(外祖父) 權公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함. ▣참고:安東鄕土誌 |
자(子) |
이중량(李仲樑) 감사(監司)
이중량(李仲樑) : 1504년(연산군10,甲子)∼1582년(선조15,壬午).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간(公幹). 증조부 휘 효손(孝孫), 조부 휘 흠(欽), 외조부 충순위(忠順衛) 휘 권효성(權孝誠), 처부(妻父) 휘 반세형(潘世형), 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다.
1528년(중종23,戊子) 진사시에 합격하시고,
1534년(중종29,甲午)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시어, 권지승문원정자에 임명되시고, 곧 예문관에 선임되시어
1536년(중종31,丙申)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셨다.
1537년(중종32,丁酉) 세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인 아버지 현보의 관하 수령이 명사를 위한 지대물(支待物)진상을 상찰(詳察)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파면되셨다.
1539년(중종34,己亥) 어머니의 상을 마치신 뒤, 예문관봉교에 복직되시고, 곧 성균관전적에 승진, 이후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하셨다.
1541년중종36,辛丑) 11월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셨고, 곧 병조정랑·경기도도사를 거쳐, 1542년(중종37,壬寅) 황해도도사에 개수되셨으며, 이듬해 양친(養親)을 위하여 영천군수를 자원하셨다.
1549년(명종4,己酉) 종부시첨정으로 입조하신 뒤 삼척부사로,
1550년(명종5,庚戌) 청송부사에 체직되셨으며,
1554년(명종9,甲寅)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시면서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셨다.
1557년(명종12,丁巳) 아버지의 상을 마치시고, 사헌부장령에 복직되셨고, 이후 사간·집의를 거쳐,
1559년(명종14,己未) 특명으로 홍문관에 선임되시어 교리·전한·직제학을 역임하셨다. 그해 11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하시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이후
1561년(명종16,辛酉)까지 우부승지·예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5위장을지내셨고,
1562년(명종17,壬戌) 상주목사로,
1563년(명종18,癸亥)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신 뒤, 경주부윤에 체직되셨고,
1564년(명종19,甲子) 경주부의 군액이 많이 결핍되었다 하여 파직되셨다. 1567년(선조즉위년,丁卯) 행영해부사로 복직되시고,
1570년(선조3,庚午)공조참의, 곧 강원도관찰사에 체직되셨으나,
1572년(선조5,壬申) 병사(兵事)를 소홀히 하였다고 파면되셨다. 이후 승지(勝地)를 유력하면서 유유자적하시다가 돌아 가셨다. 성품이 과묵하시고 겸손하셨으며, 효행과 학행이 뛰어 나셨다. 20여년간 외관으로서 선정을 베푸셨고, 특히 영해부사로 계실때는 유민정착에 힘써 칭송을 받으셨다.
【참고문헌】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
자(子) |
이계량(李季樑) 현감(縣監)
이계량(李季樑):1508(중종 3, 무진)~?.
본관 永川. 농암(聾巖) 현보(賢輔)의 第五子. 彦陽 咸昌 義興縣監 역임. 부친상(父親喪)을 마친 뒤 李滉의 천거로 거창군수(居昌郡守) 역임. ▣참고:永川李氏譜 |
자(子) |
이숙량(李叔樑)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 : 1519년(중종14,己卯)∼1592년(선조25,壬辰),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으로 농암선생(聾巖先生)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여섯째 아들이시고,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학문이 깊고,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셨다 한다.
1543년(중종38, 癸卯) 24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셨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만 치중하셨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시기도 하셨으나 난중에 돌아 가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림당(六休堂) 또는 태암(苔巖)으로 부르는 이주(李狼) 할아버지와 함께 연경서원의 건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셨다. 예안(禮安)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祭享) 되셨다.
【참고문헌】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東儒師友錄 |
녀(女) |
김부인(金富仁) 광산인
23세 (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전직공파/산남공) (1512∼1584) 73歲.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학자. 字는 백영(伯榮), 호는 산남(山南),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유(綏)이며, 어머니는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순천김씨(順天金氏)로 증판서(贈判書) 수홍(粹洪)의 딸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일찍 향시에 두 번 장원했고 1549년(명종 5) 무과에 나아가 좌씨춘추를 강하여 장원하니 명예가 높았다. 선전관에 뽑혀 비변사 낭청을 겸했고 곧이어 해주, 강릉 통판이 되었다. 1563년(명종 19) 낙안군수가 되고 1567년 호조정랑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창성부사에 옮겨 병사 김수문과 함께 서해평을 정벌한 공으로 통정에 승진되고 인산첨사가 되었다. 1571년(선조 5) 길주목사, 1573년 정주목사를 역임하고 1576년 진주목사를 거쳐 경상좌도병사가 되었다가 제주목사와 경원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그 후 영해부사가 되었는데 1582년 변방 오랑캐가 경원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안변으로 전보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문무를 겸전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선정을 베풀었다. 유고가 있으며 후인이 사우를 지어 향사한다. (見朝鮮王朝實錄, 故事大典) |
자(子) |
이윤량(李閏樑) 내의원판서(內醫院判書)
이윤량(李閏樑):1516(중종 11, 병자)~1589(선조 22, 기축).
본관 永川. 자는 자구(子構). 호는 행암(杏巖). 賢輔의 子. 李滉 문인(門人). 문과(文科) 급제. 內醫院正 판사(判事) 역임. 의학(醫學)에 두루 통함. 일찍이 명(明)나라에 가있을 때, 황제(皇帝)로부터 관작(官爵)과 상(賞)이 내려지는 영예를 입었으나 이를 받지 아니하고, 다만 盆松 몇 그루만을 가지고 돌아와 이것을 집 남쪽 암대(巖臺)에다 심어 만년(晩年)의 嘯詠거리로 삼음. 金富仁 黃俊良 吳守盈 琴蘭秀 등과 교계(交契)가 깊었음. ▣참고:退溪門人錄 |
자(子) |
이연량(李衍樑)
이연량(李衍樑):생몰년 미상.
본관 永川. 윤량(閏樑)의 弟. 李滉 문인(門人). 효행(孝行)이 卓異하고 글씨에 능함. 司僕正 역임. 스승 李滉의 考終時에 여러 자제들과 함께 한결같이 그 곁을 지킴. ▣참고:退溪門人錄 |
형제(兄弟) |
제(弟) 이현우(李賢佑) 습독(習讀)
이현우(李賢佑):1470(성종 1, 경인)~1560(명종 15, 경신).
본관 永川. 자는 국경(國卿). 호는 광헌(廣軒). 賢輔의 弟. 훈련습독(訓鍊習讀)을 지냄. 1537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해 형 賢輔와 더불어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함. 川沙에卜居함. 증직:禮曹參判. ▣참고:永川李氏譜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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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聾巖先生年譜(奎12461), 李昺淵(朝鮮)編.
2卷1冊(63張) 木板本 31.6×20.7cm.
四周雙邊 半郭:18.7×16.1cm.
10行18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朝鮮 中宗 明宗때의 文臣 李賢輔(1467∼1555)의 年譜로 12대손 昺淵이 1911년에 간행했다. {권1}은 年譜이고 {권2}는 附錄이다. 附錄에는 敎書, 汾江書院上樑文(趙德隣), 奉安文(金??), 文集告成文, 請宣額疏, 祭文 13편, 續誌, 神道碑閣移建時告由文 등이 들어 있다. 책머리에 世系圖가, 책끝에 後學 李晩燾와 昺淵의 跋文이 있다. 李賢輔의 字는 비仲, 號는 聾巖·雪빈翁, 본관은 永川, 麟蹄현감 欽의 아들. 禮安출신. 洪貴達에 受學. 1495년(燕山君 1) 生員이 되고 1498년 式年文科에 丙科로 급제, 校書館權知 副正字, 永興訓導, 檢閱兼春秋館記事官, 奉敎, 典籍 등을 지냈다. 1504년 正言으로 있을 때 書筵官의 비행을 논했다가 安東에 流配, 1506년 中宗反正으로 典籍에 다시 기용된 후 內外의 요직을 역임하고, 1523년(中宗 18) 星州牧使로 興學 등 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表裏를 하사받았다. 그뒤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李彦??, 李滉 등과 교제했다.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를 지었고 10章으로 전해오던 「漁父詞」를 5章으로 고쳐 지은 것이 《靑丘永言》에 전한다.
2.聾巖先生文集(奎1685,奎4012), 李賢輔(朝鮮)著.
5卷 2冊 木板本 34×20.8cm.
四周雙邊 半郭:21×16.6cm.
有界 10行 20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聾巖 李賢輔(1467∼1555)의 詩文集으로 1665년(顯宗 6) 外孫 金啓光이 간행했다. 李賢輔의 자는 비仲, 호는 聾巖, 본관은 永川이고, 1498년(燕山君 4) 文科에 급제, 翰院에 들고, 史官이 되었다. 뒤에 正言을 拜하자 書筵官의 所失을 논박하다가 安東에 推配되었다. 中宗 靖國後持平을 拜하고 이후 同副承旨, 副提學, 大邱府使, 慶尙觀察使를 지냈으며, 刑曹參判에 이르렀다. 노후에는 禮安에 퇴거, 歸去來圖을 벽에 그려 붙이고, 시문과 봉양에 힘썼다. 李賢輔에 관하여는 聾巖集 부록 李滉의 行狀, 洪暹의 碑銘, 李昺淵의 聾巖年譜 및 海東名臣錄에 자세한 기록이 있다. {권1}:주로 五·七言近體詩 약 140首가 있으며, 그 중에는 退溪, 松齋, 慕齋, 思齋, 黃俊良, 晦齋 등과의 和唱이 있다. 또한 3편의 賦(洛中眞率會賦, 天下中庸賦幷序, 笏賦)가 있다. {권3}:書로 거의가 다 退溪와의 與答書다. 특히 이 書에서 年長인 聾巖의 退溪에의 영향을 알수 있으며, 퇴계연구에도 종은 자료가 될 것이다. {권3}:雜著錄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聾巖이 노모를 모시고자 지은 憂日堂에 관한 문장 및 養心志序跋 等과 酒禮, 祭禮, 圖式歌 등이 있다. 또 歌詞 5편(效嚬歌 幷序, 聾巖歌幷序, 生日歌幷序, 漁父歌九章, 漁父短歌五章)이 있고 주로 한글로 되어 있으며 시가 문학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권4}:附錄으로 行狀은 1556년(明宗 11) 李滉이 지은 것이고, 碑銘은 1566년 洪暹이 撰했다. 이어서 賜祭文 및 祭文, 挽章 등이 있다. {권5}:附錄二로 諸人士들의 詩文이 있다. 끝으로 趙絅의 聾巖先生集序가 있다. 「漁父歌」는 國文學史上의 중요 자료로 문학적 가치를 지니며 書에는 退溪와 禮安에서 교유했던 관계로 與答의 書가 많다.
3. 聾巖先生文集續集(奎12462), 李賢輔(朝鮮)著.
1冊(28張) 木板本 31.4×20.5cm.
四周雙邊 半郭:18.9×16cm
有界 10行 18字.
版心:上下花紋魚尾.
聾巖 李賢輔의 詩文集의 續集. 李賢輔[저자에 대해서는 위 ≪聾巖先生文集≫ 참조]의 후손들이 예전에 나온 ≪聾巖先生文集≫(5卷 2冊)에 빠진 것들을 모으고 부록을 붙여 1911년(?)에 간행한 것으로, 目錄, 卷{1}詩 21, 書 6, 墓碣 1, 卷{2}附錄, 卷{3}年譜, 附錄, 跋文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卷{3}은 목륵에만 나와 있을 뿐 실제로는 없으므로 이 책은 2卷 1冊의 零本이라 하겠다. 卷{1}에 실린 書의 5편은 退溪와 주고 받은 것이며, 1편은 金綬之에게 보낸 것이다. 墓碣文 「宣敎郞行通禮院引儀安公墓碣」은 安普文(1427?∼1514?;본관은 慶州, 자는 彬周)에 대한 것이다. 卷{2}에 부록으로 실린 글은 李希輔의 「送李비仲歸永川序」, 朴祥의 「李輔德重陽壽親詩序」(1526년), 李자, 沈義, 江陽百順, 徐福慶들의 「永陽別章」 4편, 李?의 「見비仲書」, 金縯, 李彦迪, 琴元貞, 權希益, 李滉, 安珽, 鄭世虎, 金光準, 金緣, 蔡紹權, 任虎臣, 沈通源, 李文楗, 周世鵬 들의 詩 16首, 黃俊良의 「龍山高效歐陽永叔廬山高壽聾嚴李相公生辰」 1편이다. 이책의 간행 연대를 추정한 것은 끝에 「辛亥年」이라고만 밝힌 두 편의 跋文에 따른 것이다.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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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이현보 1467-1555 ?중 농암 영천 예안 성주목사호조참판 농암집
李賢輔 1467-1555 ?仲 聾巖 永川 禮安 星州牧使戶曹參判 聾巖集
2.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현보(李賢輔)
#경상도(慶尙道) 예안(禮安)
*분강서원(汾江書院) 영천인
광해계축건향현사 숙종임오승위서원(光海癸丑建鄕賢祠 肅宗壬午陞爲書院).
제향. 이현보(호농암 지중추 시절효 본영천).
祭享. 李賢輔(號聾巖 知中樞 諡節孝 本永川).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임오건(肅宗壬午建).
제향. 유방선(호태재 유일 주부 본서산). 이보흠(호대전 부사 증이판 시충장 본영천). 곽 순(호경재 사간 본현풍). 이현보(호농암 지중추 시효절 본영천). 심지원(호만사 영의정 본청송). 윤봉오(호석문 우참찬 시숙간 본파평)
祭享. 柳方善(號泰齋 遺逸 主簿 本瑞山). 李甫欽(號大田 府使 贈吏判 諡忠莊 本永川). 郭 珣(號警齋 司諫 本玄風). 李賢輔(號聾巖 知中樞 諡孝節 本永川). 沈之源(號晩沙 領議政 本靑松). 尹鳳五(號石門 右參贊 諡肅簡 本坡平).
#경상도(慶尙道) 영천(榮川)
*우계서원(迂溪書院)
현종을사건(顯宗乙巳建).
제향. 이덕홍(호간재 현감 증참판 본영천). 이현보(호농암 지중추 시효절 본영천).
祭享. 李德弘(號艮齋 縣監 贈參判 本永川). 李賢輔(號聾巖 知中樞 諡孝節 本永川).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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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종실록 명종10년(1555년) 명종10년 6월
28일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가 졸하였다.【이현보(李賢輔)는 영천(永川) 사람이다. 약관(弱冠)에 글읽기를 시작했는데 글을 지으매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연산조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는데, 사관은 임금의 언어와 동작을 기록하므로 엎드려 멀리 있음은 불편하다는 것을 들어 조금 가까이 있게 하기를 계청하였다.
폐주(廢主)는 마음에 거슬리면서도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일을 말하다가 뜻을 거슬러 귀양갔다.
중종조에는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에 이르렀고 그뒤에는 여러 차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으로 나갔는데 가는 데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고 호조 참판으로 있다 은퇴하여 고향에서 지내었다.
중종조와 인종조에 그의 조용히 은퇴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품계를 올려 소환했지만 모두 오지 않았다.
금상조(今上朝)에도 명소(命召)했지만 또한 극력 사양하고 이어 상소하여 일을 논했는데 당시의 병폐를 아주 잘 맞추었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李賢輔)를 으뜸으로 친다.】
2. 이현보(李賢輔)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梅巖先生文集 (古枕 810.819 이57?.이)
李叔樑 (1519∼1592) ; 字 大用, 號 梅巖, 本貫 永川.
木板本. - 慶北安東 : 花樹齋, 昭和13(1938).
2卷1冊 : 遺墨 ; 30.9x20.5cm.
四周雙邊. 半匡 ; 18.5x15.5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숙량의 시문집이다. 이숙량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아들인데 예안에서 살았다. 타고난 바탕이 온화하고 일찍 퇴계 선생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다. 필법이 독보적이어서 금보(琴輔), 오수영(吳守盈) 두 선생과 더불어 예안의 세 명필이라 일컬었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70년 오천(烏川) 칠군자(七君子)와 조목(趙穆), 몽제(蒙齊)와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에 모여 심경(心經)을 강론하고 이어서 농암의 고사(故事)를 추모하여 구노회(九老會)를 열고 《강호록(講好錄)》을 저술하였으며, 추천을 받아 왕자사전(王子師傳)이 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격문을 지어 동지에게 고하여 향병(鄕兵)을 일으켜 토벌에 힘썼다. 퇴계 선생이 정문봉(鄭文峯)에게 준 글에 이르기를 "우리 고을 문학하는 선비가 모두 거업(擧業)에 얽매이는데 오직 이대용(李大用)만 주서(朱書)에 힘써서 진실로 도저(到底)함을 얻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대용(李大用)은 타고난 바탕이 심히 아름다우니 더욱 기대하고 촉망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연경서원(硏經書院)의 묘(廟)에 입향 하였는데 퇴계 선생의 사당 곁이다.
이 문집은 1938년 후손 명철(明澈)이 편집, 간행하였다.【枕澗亭文庫】수장본은 경북안동의 화수재에서 간행된 것이다. 시(詩)의 「분천사호가(汾川四晧歌)」는 저자와 그의 형 문량(文樑), 중량(仲樑), 계량(季樑) 등 4형제가 모두 70∼80의 나이로 함께 모여 돌아가면서 읊은 것인데 화락과 장수를 소재로 노래한 작품이다. 기(記)의 「연경서원기(硏經書院記)」은 경북 달성군 공산면 연경리에 있는 연경서원에 대한 기문(記文)으로 1564(명종 19)년 대구부사(大邱府使) 박응천(朴應天)의 협조를 얻어 창건한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잡저의 「분천강호록(汾川講好錄)」은 매월 1월과 15일에 종족을 모아놓고 강론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밖에 「유묵(遺墨)」은 당시 선성삼필(宣城三筆)의 하나라 일컬어졌던 저자의 글씨를 판각한 것으로 필법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目錄.
卷之 1. 詩(48首).
書 ; 答趙士敬(穆)(2), 與金惇?(2), 答金惇?(4), 答南景祥.
記 ; 硏經書院.
祭文 ; 祭退溪先生.
墓碣 ; 朝奉大夫行平陵道察訪李公, 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李公.
雜著 ; 汾川講好錄.
卷之 2. 附錄 ; 輓詞, 祭文, 遺事, 行狀.
贈遺 ; 詩, 答李大用(3), 與李大用.
跋 ; 金東鎭.
遺墨.
3. 이현보(李賢輔)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賀淵先生文集 (古西 810.819 이77큁) (古明 810.819 이77큁)
李仲樑 (1504∼1582) ; 字 公幹, 號 賀淵, 本貫 永川.
石印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1961.
2卷2冊 ; 30x20.7cm.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중량의 시문집이다. 이중량은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1534(중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문집은 1961년 후손 상교(祥敎)가 편집, 간행하였다. 부(賦)의 「망자재배부(芒刺在輩賦)」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항상 등에 가시를 짊어지고 사는 것과 같아서 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고, 「운부(雲賦)」는 사람의 생활이 제도에 얽매여 있어 자유롭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구름과 같이 생멸과 변화가 자유롭게 형성되는 세계를 동경한 글이다. 「열산유심정(熱散由心靜)」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읊은 것으로, 마음이 고요하면 온갖 번뇌가 사라진다고 설명하였다. 「관부여승사(官府如僧舍)」는 관청에 사건이 없으니 조용하기가 절과 같다고 하여 자신의 성정으로 관아가 한가롭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다. 「관동행록(關東行錄)」은 관동지방을 돌아보며 풍물·인심·풍속·교육 등을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 「답퇴계(答退溪)」·「제퇴계상공문(祭退溪相公文)」등이 있어 이황(李滉)과 친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록의 「국조실록초략(國朝實錄抄崙)」은 1543(중종 38)년부터 1561(명종 16년까지 저자에 관계된 부분을 수록하였다.
序 ; 權相圭.
目錄.
卷之 1. 賦(2首), 詩(64首).
卷之 2. 詩(107首).
書 ; 答退溪(2), 上碧梧兄, 上碧梧及兄諸弟, 與金伯榮(富仁).
箋 ; 辭謝 召命.
啓辭 ; 請遞刑曹佐郞成詢黃海都事尹果.
祭文 ; 祭退溪李相公, 祭虎巖兄.
跋 ; 書家君酒祭二禮說後.
年譜.
附錄 ; 贈遺, 輓詞, 墓碣文, 家狀, 行狀, 墓誌銘, 墓碣銘.
後? ; 李文鉉, 白淳愚.
跋 ; 金榥.
國朝實錄抄崙. |
문헌(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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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 聾巖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聾巖先生文集(原集)
판심제 聾巖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65年刊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16.6(㎝)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685
총간집수
권수제 聾巖先生文集續集(續集)
판심제 聾巖先生續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911年刊
권책 續集 2권�年譜 2권 합 2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9.8×15.7(㎝)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D3B-212a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7
저자
성명 이현보(李賢輔)
생년 1467년(세조 13) 몰년 1555년(명종 10)
자 ?仲 호 聾巖, 雪?翁
본관 永川 시호 文節 소명 有慶
가계도
조부(祖父) 이효손(李孝孫) 봉례(奉禮)
부(父) 이흠(李欽) 현감(縣監)
모(母) 안동권씨(安東權氏) 호군(護軍) 권겸(權謙)의 女
본(本) 이현보(李賢輔)
배(配) 안동권씨(安東權氏)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女
자(子) 이석량(李碩樑) 장사랑(將仕郞)
자(子) 이문량(李文樑) 찰방(察訪)
자(子) 이희량(李希樑) 현감(縣監)
자(子) 이중량(李仲樑) 감사(監司)
자(子) 이계량(李季樑) 현감(縣監)
자(子) 이숙량(李叔樑) 진사(進士)
여(女) 김부인(金富仁)
자(子) 이윤량(李閏樑) 내의원판서(內醫院判書)
자(子) 이연량(李衍樑)
제(弟) 이현우(李賢佑) 습독(習讀)
기사전거 : 年譜와 行狀(李滉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1 7월 29일, 禮安縣 汾川里에서 태어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18 부친을 따라 任所인 眞寶에 가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19 鄕校에 나아가 修學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0 洪貴達에게 경전을 배우다. ○ 가을, ?堂文會에 나아가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21 安東 龍壽寺에서 독서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22 안동 권씨와 결혼하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24 4월, 조부의 상을 당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25 가을, 龍山 地藏菴에서 李?와 함께 독서하다.
성종 23 1492 임자 弘治 5 26 基城의 伊川村에 우거하다.
성종 25 1494 갑인 弘治 7 28 가을, 鄕試에서 장원하다.
연산군 1 1495 을묘 弘治 8 29 봄, 생원시에 합격하다.
연산군 2 1496 병진 弘治 9 30 성균관에 들어가다. 7, 8년간 李希輔와 교유하다.
연산군 3 1497 정사 弘治 10 31 8월, 館試에서 장원하다.
연산군 4 1498 무오 弘治 11 32 3월, 文科 丙科에 합격하다. ○ 校書館 權知副正字에 選補되다.
연산군 6 1500 경신 弘治 13 34 4월, 永興訓導가 되다.
연산군 7 1501 신유 弘治 14 35 4월, 金世弼의 천거로 예문관검열 겸춘추관기사관이 되다.
연산군 8 1502 임술 弘治 15 36 史官으로 하여금 가까이에서 왕의 言動을 기록하도록 계청하여 허락받다.
연산군 9 1503 계해 弘治 16 37 藝文館 待敎를 거쳐 奉敎가 되다.
연산군 10 1504 갑자 弘治 17 38 성균관 전적, 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다. ○ 4월, 일 때문에 安奇驛에 유배되다.
중종 1 1506 병인 正德 1 40 9월, 中宗의 즉위로 방면되어 典籍이 되다.
중종 2 1507 정묘 正德 2 41 호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다. ‘燒酒陶甁’으로 불리다. ○ 예조좌랑으로, 王命을 받아 대사헌 楊?止의 祭文을 짓다. ○ 봉상시�상의원판관이 되다.
중종 3 1508 무진 正德 3 42 4월, 형조정랑이 되다. ○ 9월, 봉양을 위하여 永川郡守가 되다.
중종 4 1509 기사 正德 4 43 2월, 鄕校에서 釋奠을 행하다. 鄕飮酒禮를 행하다.
중종 5 1510 경오 正德 5 44 1월, 휴가를 얻어 省親하고, 明農堂을 짓다. ○ 監司 宋千喜의 계청으로 褒賞받다. ○ 雙淸堂을 짓다.
중종 7 1512 임신 正德 7 46 愛日堂을 건립하다.
중종 8 1513 계유 正德 8 47 8월, 軍資監僉正, 司諫院司諫, 軍器寺僉正이 되다.
중종 9 1514 갑술 正德 9 48 3월, 密陽都護府使가 되다. ○ 겨울, 歸省하여 明農堂에 題詩하다.
중종 10 1515 을해 正德 10 49 가을, 災傷에 대한 현지답사 보고의 과실로 파직되다.
중종 11 1516 병자 正德 11 50 9월, 繕工監副正이 되다. ○ 10월, 충주목사가 되다.
중종 12 1517 정축 正德 12 51 겨울, 봉양을 위한 배려로 안동부사에 제수되다.
중종 14 1519 기묘 正德 14 53 監司 金克成과 暎湖樓(安東)를 유람하다.
중종 15 1520 경진 正德 15 54 歸來亭(安東)을 유람하다.
중종 16 1521 신사 正德 16 55 겨울, 禮賓寺副正, 司僕寺正이 되다.
중종 17 1522 임오 嘉靖 1 56 봄, 사헌부 집의가 되다. ○ 軍資監副正이 되다. ○ 10월, 봉양을 위하여 星州牧使가 되다.
중종 21 1525 병술 嘉靖 5 60 成均館司成, 軍資監正, 侍講院輔德이 되다.
중종 22 1526 정해 嘉靖 6 61 2월, 掌樂院正이 되다. ○ 경상도 鎭海 등지에 推鞫敬差官으로 가다. 이어 兵曹參知가 되다. ○ 9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다.
중종 23 1527 무자 嘉靖 7 62 3월, 折衝將軍龍?衛大護軍으로 좌천되다. ○ 4월, 義興衛上護軍을 거쳐 大丘府使가 되다. 德興書塾에서 諸生들을 모아 講禮하다.(뒤에 後學들이 이곳에 德興書院을 건립하여 享祀하다.)
중종 24 1528 기축 嘉靖 8 63 겨울, 平海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봉양을 위하여 榮川郡守로 옮겨 부임하다.
중종 26 1530 신묘 嘉靖 10 65 1월, 모친상을 당하다.
중종 28 1532 계사 嘉靖 12 67 3월, 형조참의가 되다. ○ 7월,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가 되다. ○ 11월, 우부승지가 되다.
중종 29 1533 갑오 嘉靖 13 68 2월, 봉양을 위하여 慶州府尹이 되다. ○ 玉山의 獨樂堂으로 李?迪을 방문하다.
중종 31 1535 병신 嘉靖 15 70 여름, 사직하고 귀향하다. ○ 9월, 李滉과 함께 愛日堂에서 遊賞하다. ○ 10월,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11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중종 32 1536 정유 嘉靖 16 71 2월, 파직되다. ○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5월, 부인상을 당하다.
중종 34 1538 기해 嘉靖 18 73 三世의 贈牒을 받아 焚黃告由하다. ○ 가을, 金正國이 明農堂을 내방하다. ○ 10월, 琴元貞�權希益과 함께 會老菴에서 노닐다. ○ 형조참판이 되다.
중종 35 1539 경자 嘉靖 19 74 4월, 「棠陰比事」 1책을 하사받다. ○ 10월, 호조참판이 되다.
중종 37 1541 임인 嘉靖 21 76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7월, 휴가를 얻어 豆毛浦�三田渡�驪興�伊川 등지에 머물다. 10월, 고향에 돌아오다.
중종 38 1542 계묘 嘉靖 22 77 1월, 禮安縣 靈芝山에 精舍를 짓다. ○ 겨울, 이황과 芝山精舍에서 노닐다.
인종 1 1544 을사 嘉靖 24 79 耆老所에 들어가다.
명종 1 1545 병오 嘉靖 25 80 4월, 「皇華集」 1책을 하사받다.
명종 2 1546 정미 嘉靖 26 81 鄕人들과 結夫에 따라 부세를 의논하여 정하다. ○ 酒禮及祭禮圖를 만들다.
명종 4 1549 기유 嘉靖 28 83 6월, 〈漁父詞〉를 찬정하다. ○ 〈淸心樓記〉를 짓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84 3월, 愛日堂 東岸에 있는 臨江寺에 우거하다.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87 4월, 性理群書 1部를 하사받다. ○ 李希樑�李仲樑�李季樑 三子가 모두 乞養하여 近邑(奉化�靑松�連山)의 수령으로 부임하다.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89 2월, 臨江寺에 우거하다. ○ 6월 13일, 肯構堂에서 卒하다. ○ 8월 28일, 道谷先塋에 묻히다.(靑?山 산록에 移葬) ○ 9월, 명종이 祭文을 내리다.
명종 11 1556 병진 嘉靖 35 - 이황이 행장을 짓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 ‘孝節’(慈惠愛親曰孝 好廉自克曰節)의 시호를 받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 神道碑(洪暹 撰)를 세우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 鄕賢祠(禮安)에 봉안되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 외손 金啓光이 문집을 간행하다.(趙絅의 序)
- - 1911 신해 - - - 후손 李在明이 續集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와 行狀(李滉 撰)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1665년(현종 6)에 외손 金啓光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여러 차례 난리를 거치면서 遺稿의 태반이 산실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간행을 의논하여 家藏하고 있던 시문 약간 편을 수습하였다. 이에 金啓光이 編次를 考證하고 6대손 李?弼이 繕寫하여 1663년 겨울에 시작, 1664년 3월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原集 初刊本인데, 권1~3은 저자의 시문이고 권4~5는 附錄이며 趙絅의 序를 뒤에 붙여 5권 2책의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續集은 1911년에 胄孫 李在明에 의해 간행되었다. 續集은 저자의 詩文과 附錄, 年譜 2권을 合한 4권 2책이다. 年譜는 저자의 子 李叔樑이 처음 만들었으나 내용이 소략하여 여러 대를 거쳐 수정�보완되었다. 7대손 李復馨, 9대손 李祥?, 11대손 李文鉉�李奎鉉, 後學 李野淳�李家淳의 訂正을 거쳐 1882년(고종 19)에 완성되어, 胄孫 李進淵이 그의 아들 李羲肇에게 1통을 淨寫케 하고 附錄文字를 붙여 간행하고자 하였다. 이 연보는 1911년 李在明 등이 續集을 간행할 때 함께 간행하였는데, 속집에는 저자의 시문 약간 편과 원집 附錄에 빠져 있는 당시 諸賢의 唱酬詩章을 넣고 서원 창건 시의 여러 글과 緬禮 시 제문 등을 年譜의 附錄에 첨부하였으며 후학 李中轍�李康鎬가 지은 續集跋文을 수록하였다. 또한 目錄을 卷首에 붙였는데, 目錄에는 年譜와 附錄을 권3에 포함시켰다. 續集 4권 2책 完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성암고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성암장본에는 李?燾의 年譜跋 외에 1911년에 지은 12대손 李昺淵의 跋文이 첨부되어 있다.
原集은 1935년에 李彰淵에 의해 安東 肯構堂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이것은 1665년 간행된 金啓光本을 後刷하면서 내용을 첨가하여 追刻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1935년 간본은 조경의 序를 권수에 편차하고 권2에는 疏�箋�啓辭와 經筵記事 등 17板을 追刻하였고, 권3에는 이황이 지은 〈書漁父歌後〉 2板을, 권4에는 敎書와 賜祭文�祭文 4板을 追刻하여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위의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을 증보하여 6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目錄이 추가되고, 권1에서는 〈天下中庸賦〉의 幷序가 삭제되고 賦 2편을 追刻하였다. 권3에는 저자의 글 1편이 첨가되었으며, 전체가 新刻된 권6은 甲子推配事實을 비롯, 諭書�批答�傳敎�史論�敎旨�贈諡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本을 간행 당시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目錄 끝의 小註에 의하면, 疏�箋�啓辭 등은 國朝實錄에서, 書�賦�祭文은 家藏本稿에서, 跋文 1편은 「陶山文集(退溪集)」에서 각각 뽑은 것임을 밝혔다.
본서의 저본은, 原集은 5권 2책의 1665年刊 金啓光本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며, 續集은 4권 2책의 1911年刊本으로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趙絅 撰), 續集跋(李中轍�李康鎬 撰)�年譜跋(李?燾 撰)�文集告成文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5권�續集 2권�年譜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의 권1~3은 저자의 시문이고 권4~5는 부록이다. 권1에는 詩와 賦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詩는 오언�칠언의 율시와 절구로서 창작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많은 작품에 저자가 창작 시기�배경을 기술한 幷序 또는 小註가 붙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유배를 당했던 1505년 이후 中年�?年期의 작품이고, 乞養하여 外職에 있는 동안 혹은 歸鄕 時 지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酬唱詩의 경우는 諸家들의 시도 함께 실려 있다. 권2에는 이황에게 쓴 편지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은 雜著로서 記�跋�序�祭禮 등의 글과 歌詞가 수록되어 있는데 각 歌詞에는 창작 배경을 기술한 幷序가 附記되어 있다. 특히 〈漁父歌〉 두 편은 旣存 노래를 저자가 刪改한 작품이다.
권4는 附錄으로서, 1556년(명종 11)에 이황이 지은 〈行狀〉과 1566년(명종 21)에 洪暹이 짓고 宋寅이 쓴 〈碑銘〉을 비롯하여 賜祭文�贈諡狀 그리고 權轍�李滉�黃俊良이 지은 祭文과 安玹�鄭士龍�趙士秀 등 11人이 지은 挽章이 실려 있다. 권5는 附錄으로서, 1508년에 乞養하여 永川郡守로 나가는 저자를 送別하면서 交遊한 文人들이 지은 別章을 모은 〈永陽別帖〉과 저자의 詩에 次韻한 諸家들의 詩章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665년(현종 6)에 지은 趙絅의 序가 실려 있다.
續集은 目錄을 권수에 싣고 권1에는 詩�書�墓碣이 수록되어 있다. 詩는 原集에 있는 詩 가운데 빠진 부분도 실려 있으며, 書는 李滉에게 보내거나 답한 것 외에 金綏에게 보낸 편지도 1편 실려 있다. 묘갈 1편은 安普文에 대한 글이다. 권2 附錄에는 李希輔�朴祥이 지은 序 2편과 〈永陽別章(帖)〉의 詩, 次韻詩 등 諸家들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911년에 쓴 李中轍�李康鎬의 續集跋 2편이 실려 있다.
年譜는 2권으로서 권수에 世系圖를 실었고 권1은 年譜이다. 권2는 附錄으로 敎書 1편과 〈汾江書院上樑文〉�〈奉安文〉, 현손 李榮運 등의 〈文集告成文〉, 〈請宣額疏〉, 陶山�三溪書院과 寒泉精舍儒生 및 여러 後孫들의 〈祭文〉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 1882년 李?燾가 지은 〈年譜跋〉이 실려 있다.
필자 : 吳世玉 |
기타(其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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