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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1) 법계통화분 제19분
제17강-(1) 법계통화분 제19분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아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이 甚多니다
須菩提야 若福德有實인댄 如來가 不說得福德多어니와 以福德無故로 如來가 說得福德多니라
수보리야 약복덕유실인댄 여래가 불설득복덕다어니와 이복덕무고로 여래가 설득복덕다니라.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약유인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이용보시하면 시인이 이시인연으로 득복다부아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차인이 이시인연으로 득복이 심다니다.
제19, 법계를 모두 교화하다[法界通化分,법계통화분]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한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이 많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얻은 복이 매우 많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그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얻는 것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복덕이 본래 없으므로 여래가 ‘복덕을 얻는 것이 많다’고 말하느니라.”
자기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금강경이 특효약
금강경은 그 대지(大旨)가 파이집현삼공(破二執 顯三空)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我執,아집]과 나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法執,법집]을 깨뜨리고, 텅 빈 허공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때 우리는 보다 더 큰 나[大我,대아]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취지가 되겠습니다.
물론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집착과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써 영위됩니다. 그러나 거기 너무 치우치다 보면 상처를 입게 되고, 사람으로서 사는 의미와 보람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떤 관념이든 염두에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을 통해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이다’‘상없음으로써 으뜸으로 삼는다 ’고 가르치십니다.
자기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에 대한 집착과 그에 따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금강경만한 특효약이 없습니다. 자고로 모든 선사들이 금강경을 그렇게 좋아하셨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복덕 아닌 복덕
법계통화(法界通化分)라는 제목이 어렵습니다만, 법계, 즉 진리의 세계라는 것은 불교에서 ‘온 세상’을 지칭합니다. 세상 어디에고 진리의 세계 아닌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그냥 세계라 쓰지 않고 법계라고 쓰면 우리들이 더 쉽게‘ 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구나’하고 알 수 있습니다.
통화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교화한다’라는 뜻입니다. 법계통화란 법계를 한꺼번에 다 교화한다는 뜻이지요.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若有人이 滿三千大千世界七寶로
以用布施하면 是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多不아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약유인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로
이용보시하면 시인이 이시인연으로 득복다부아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차는 일곱가지 보물로써 보시하는데 사용하면 그 인연으로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는가’ 물었습니다.
삼천대천 세계라는 말을 불교에서 많이 씁니다. 다른 소승 교리에서는 이것을 해석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삼천대천 세계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인 ‘지구’ 라고 생각하면 제일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지구에 가득차는 일곱가지 보물로써 보시를 했다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는가.’ 우리가 1억만 보시 하더라도 복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 지구에 가득차는 많고 많은 칠보로써 보시를 했다면 그 복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如是니다 世尊이시여 此人이 以是因緣으로 得福이 甚多니다
須菩提야 若福德有實인댄 如來가 不說得福德多어니와 以福德無故로 如來가 說得福德多니라
여시니다 세존이시여 차인이 이시인연으로 득복이 심다니다.
수보리야 약복덕유실인댄 여래가 불설득복덕다어니와 이복덕무고로 여래가 설득복덕다니라.
그러니까 수보리도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순리대로 대답했습니다.
‘이 인연으로써 복을 얻은 것이 심히 많습니다.’
이 대답은 우리의 상식대로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대목에서 부처님은 ‘그 복이 많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복덕구족이라고 해서 복덕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복을 염두에 두고 불교를 믿고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망할 때 망하더라도 일단 유루복이라고 하는 것, 물질적인 복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은 누구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복이라는 것이 우선하는 것이니까요.
금강경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복덕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얻은 것이 많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로 복덕이 없는 까닭에 여래가 말하기를 복덕을 얻은 것이 많다고 하였다.’
복덕의 실상을 우리가 깨놓고 이야기하면 복덕이라고 할 게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 금강경이 설해지던 시대에 제일 복덕이 많다고 하는 사람인들 지금 우리나라 중산층의 복덕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요즘 중산층은 다 자가용 있습니다. 그런대로 살만한 아파트에 살아요. 지하철도 좋고요 버스도 좋고 아스팔트는 좀 좋습니까. 어쩌다 비행기 타면 더 좋습니다.
특히 서울에는 여러 가지 생활환경을 얼마나 편리하게 잘해놨습니까.
과거 이천년 내지 이천 육백년 전에 복덕이 많다고 한들 그 복덕이 몇푼어치나 되겠습니까.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중산층이 진시황보다 훨씬 더 잘 삽니다. 지금 중산층이 진시황보다 잘 사는 백 가지 항목을 들라면 금방 우리가 적을 수도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가 잘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백년 후 천년 후 사람들이 이 땅에서 수용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주 형편없거나 심지어 거지나, 하층의 생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뭐가 복덕이란 말인가.’
우리가 말인즉슨 복덕, 복덕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복덕이라고 할 거리가 없는 거예요. 물론 그 시대에 맞게 우리가 복덕을 평가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복덕을 수용한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야’‘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나는 덕이 많은 사람이야’ 이런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부 자신이 느끼는 데 있습니다. 느끼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떤 대상이 복덕의 조건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아파트 평수가 어떻느니, 차 크기가 어떻느니 시골에 사느냐 도시에 사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 그 행복을 계산합니다만 전혀 안 맞는 계산입니다.
행복의 기준이 고정되어 있다면, 도시가 안 좋다고 시골로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골이 나쁘다고 도시로 가는 사람이 왜 나옵니까.
‘아무 것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금강경의 지론입니다.
복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인데 우리의 관념상 무엇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복덕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복덕이 복덕이 아니라 그 이름이 복덕이다’ 결국은 이런 말이 여기에 등장을 해야 옳습니다. 그런 말은 없지만 뜻은 이미 다 포함되어 있어요.
‘복덕이 없기 때문에 복덕은 복덕이 아니라 이름을 복덕이라 한다’
‘복덕이 없기 때문에 복덕이 많다고 말한다.’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데서 힌트를 얻어서 너무 집착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하나만 하더라도 우리가 복덕에 그렇게 매여있던 집착을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복덕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을 명심한다면 법계통화분을 공부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金剛般若波羅蜜經
제17강-(2) 이색이상분 제20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를 가이구족제상으로 견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불응이구족제상으로 견이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제상구족이 즉비구족일새 시명제상구족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불가이구족색신으로 견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불응이구족색신으로 견이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구족색신이 즉비구족색신일새 시명구족색신이니다.
제20, 사물도 떠나고 형상도 떠나다[離色離相分,이색이상분]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으로써 반드시 여래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은 곧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잘 갖춰진 육신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써 여래라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써 반드시 여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곧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여러 가지 상호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모습과 특성의 초월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이란 색도 떠나고 상도 떠났다 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과연 그 모습에 있는가’ 라고 묻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밖으로 드러난 나의 현상이 어떤지를 가지고 나를 평가하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佛可以具足色身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色身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具足色身이 卽非具足色身일새 是名具足色身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불가이구족색신으로 견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불응이구족색신으로 견이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구족색신이 즉비구족색신일새 시명구족색신이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히 구족색신으로 보느냐’ 물었습니다. 구족색신이란 구족한 몸, 구족한 육신이지요. 구족하다는 것은 제대로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제대로 갖춘 모습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32상과 80종호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여기는 80종호라고 해도 좋습니다. 세분화 된 것이니까요.
부처님은 여러 가지 관상학적으로 잘 생겼습니다. 부처님은 성인 중에 성인이시니까 그 영혼 그 정신세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육신도 아마 제일 잘 생겼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초기 경전의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부처님은 본래 왕족출신이고 귀한 집 출신이니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스스로, 당신의 입으로 ‘나는 관상학적으로 80종호같은 정말 흠집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걸 가지고 여래라고 보느냐’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감히 수보리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절대 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여래를 응당히 제대로 갖춘 육신으로써 보지 않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이것이 금강경이지요. 금강경은 모든 불자들이 교과서로 의지하고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생활의 지침서이자 수행의 지침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한국불교는 너무 상에 집착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바위를 가지고, 나는 뜯어봐야 그렇게 맞춰지지가 않는데, 무슨 관세음보살이 누워있느니, 서있느니, 앉아있느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우리 불자들도 미혹합니다. 금강경에 비춰볼 때 부끄러운 일이고 반성해야 할 점이지요.
보십시오. 살아있는 부처님을 앞에 두고 수보리와의 대화입니다.
감히 수보리가 부처님의 그 늠름하게 잘생긴 모습을 두고,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멋진 모습, 관상학적으로 빈틈없이 잘 생긴 그 모습 가지고 여래라고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여래가 말하는 구족색신은 곧 구족색신이 아니고 이 이름이 구족색신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스무 번이상 반복되는 즉비의 논리지요.
‘즉비(卽非), 곧 아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잘생긴 모습이 잘 생긴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그 이유는 아주 여러 가지로 있어요.
본래 없었던 것이고, 시간이 얼마가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입니다. 이 몸은 지금도 지수화풍으로 얼기설기 이루어진 가유(假有)입니다.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 맥박이 뛰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말을 하고 울고 웃고 하는 상황에서도, 불교적인 안목을 가지고 한 차원만 달리 본다면 그런 형상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월이 가서 죽어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아무리 잘 생긴 모습을 구족했다 해도 그것은 구족색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름이 구족색신인 것이지요.
우리가 편의상 여래는 32상 80종호를 갖췄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화엄경에서도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여래는 80가지 대인상을 갖췄느니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그래봤자 그것은 상(相)이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말 위대한 지혜와 자비와 영혼과 그 높은 깨달음을 두고 형상 가지고 부처님 부처님 한다면 부처님이 섭섭할 일입니다. 내가 부처라고 해도 당연히 섭섭한 일입니다. 그게 아니잖습니까. 눈에 비친 상은 정말 껍데기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이해한다면, 정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당히 철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외모나 어떤 외적인 모습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비록 셋방살이를 하든, 남들 자가용타고 다닐 때 나는 버스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든 아무 상관없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초연하게 인생을 성숙한 삶으로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볼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이 이색이상분이 아닐까 합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를 可以具足諸相으로 見不아
不也니다 世尊이시여 如來를 不應以具足諸相으로 見이니 何以故오 如來가 說諸相具足이 卽非具足일새 是名諸相具足이니다
수보리야 어의운하오 여래를 가이구족제상으로 견부아
불야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불응이구족제상으로 견이니 하이고오 여래가 설제상구족이 즉비구족일새 시명제상구족이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앞서 구족색신이라 하여 여래의 모습을 세분화해서 80종호로 봤다면, 여기서는 구족제상이라고 하여 32상으로 보자는 뜻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으로 보는가.’
32상으로 크게 나누어서 보든 80종호로 세분화해서 보든지간에 그러한 외적인 모습으로써 여래를 보는가 물은 것입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응당히 여러 가지 모습을 제대로 갖춘 모습으로 보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답했습니다.
32상이라고 하든, 80종호라고 하든 그것은 외적조건입니다. 그 어떤 조건이든지 외적 조건을 가지고서 부처님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따로 무슨 정신세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 드러난 상이라고 하는 것을 조금 다른 차원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까닭이 뭔가, 여래가 설한 모든 상을 갖췄다고 하는 것은 곧 구족한 것이 아닐새 이 이름이 모든 상을 갖춘 것입니다.’
역시 즉비의 논리입니다.
왜 상이 상이 아닌가,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본래 없었던 상이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현재도 보면 사대(四大)로써 얼기설기 얽혀서 이러한 상을 연출해 냈을 뿐이지요. 이것은 말하자면은 환영입니다.
그대로 두고 바로 공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상을 무상으로 본다든지 공한 줄로 보는 안목을 세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 분석공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사실은 없습니다.부처님 얼굴이 됐든 우리의 얼굴이 됐든 어떤 기계가 됐든 카메라가 됐든 자동차가 됐든 분석해 보면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는 이만여 가지의 부속으로 하나의 자동차가 되었는데, 그것을 하나하나 분해해 놓으면 이미 자동차가 아니예요.
그런 입장에서 보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분석공은 성문이 이해하는 차원입니다. 다음으로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합니다. 인연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공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연기(緣起)와 무아(無我) 공(空),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많이 들어온 이야기이지요. 인연으로 됐다고 해서 공으로 보는 이것은 연각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공입니다. 그 다음, 보살 정도 되면 즉공(卽空)으로 봅니다. 그대로 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 할 때의 ‘사물이 그대로 공(空)이다. 공 그대로 사물이다.’하는 것입니다. 분석하지도 않고, 또 인연으로 결합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도 않아요. 그냥 그대로 곧바로 사물 그대로 공하다, 라고 보는 것이 보살이 공을 보는 차원이예요. 공을 이해하는데도 그렇게 성문과 연각과 보살,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안목이 다른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봅니까. ‘세월이 지나놓고 보니까 참 무상하더라’ 이건 분석공도 아니고 연기공도 아니고 즉공도 아니고 그냥 세월공이라고나 할까요. 세월이 지나니까 공한 줄을 알겠다는 이해는 불교와 관계없이 인생을 살아보면 다 느낄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색이상분은 ‘모든 상을 부처님이 갖추고 있지만 사실 그 부처님의 훌륭한 상도 상도 아니니 집착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우리일소냐.’ 이러한 교훈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17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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