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음으로 기독교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자신의 회개와 인생 자서전인 『죄인들의 괴수에게 내리는 은총』에서 자신이 읽고서 큰 은혜를 받은 책으로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을 지목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하는 기독교 격언인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표현과 주장이 나온 책도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그 내용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과 신뢰를 가리킨다. 다른 더 좋은 표현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과 신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로 여겨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의 불완전한 믿음을 내가 믿기 시작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로 받아들이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나를 향하신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의심해도 개의치 않으신다. 나의 영이 낙심하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죄들을 보지 않으신다. 내가 육체를 갖고 살아 있는 동안 죄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러나 병아리가 어미 닭의 날개 아래 있는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날개 그늘 아래 있다. 나는 나를 덮고 있는 죄 사함의 넓은 깃발 아래 두려 음 없이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 안의 죄의 잔재를 덮고 용서하신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기 시작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불완전한 의를 완전한 의로 받아들이신다. 확실히 죄인데도 불구하고 나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여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육체의 덮개 아래 숨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지 못하도록 낮에는 우리의 구름기둥이 되고 밤에는 우리의 불기둥이 되신다(출 13:21). 우리의 죄를 보고 죄로 양심이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중보자이자 화해자인 그리스도에게 피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온전하게 된다. 따라서 늘 튼튼하고 안전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모든 것을 갖는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스도께서 공급해 주신다. 우리가 이것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아직 우리의 육체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잔재들을 눈감아 주신다. 그래서 마치 죄가 아닌 것처럼 그것들을 덮어 버리신다. 바울은 본질상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내 아들을 믿으므로 너희가 아무리 많은 죄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죽을 때 그 죄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용서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의에 관해 이렇게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지런히 바울의 글을 읽고 또 읽어 보라. 바울과 바울 자신을 철저히 그리고 충분히 비교해 보라. 그러면 진실로 그리스도인의 의는 두 가지 사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곧 그리스도인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과 하나님이 의를 우리에게 돌리시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돌리시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죄의 잔재를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으셔야 한다. 당연히 하나님은 죄의 잔재 때문에 우리를 처벌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죄를 덮어 주시며 마치 아무 일이 아닌 것처럼 값없이 용서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다. 곧 우리가 행한 것 때문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자 죄인이다. 거룩한 자이자 불경한 자이다. 하나님의 원수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다. 의를 얻는 참된 방법을 모르는 자는 이런 대립 관계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괴로움 속에 있는 죄인을 가르치고 위로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어야 한다. “형제님, 현세에서는 죄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형제님의 몸은 태양처럼 흠이나 점이 없이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에게 티나 주름이 있어도 형제님은 거룩합니다. 형제님은 '내 안에 죄가 있고 죄를 느끼는데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겠지요. 형제님이 자신의 죄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은 좋은 표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병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과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내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또 물으시겠지요. 그러므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죄인을 구원하는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달려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화를 낸다고 말하는 이성의 판단을 따르지 마십시오. 이성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므로 형제님은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님께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형제님 안에 남아 있는 죄는 형제님의 죄과가 되지 않습니다. 형제님이 믿는 분 곧 완전히 의로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게 될 테니까요 그리스도의 의는 형제님의 의이고, 형제님의 죄는 그리스도의 죄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대제사장임을 확인한다. 우리가 처음에는 우리 자신의 이성과 육신의 지혜를 죽여서 제물로 바치고,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고 오래 참고 인자하고 자비로우시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쳐져야 하는 새 언약의 제사다. 저녁 제사는 이성을 죽이는 것이고, 아침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 기독교 제사의 훌륭함과 존엄함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에 대한 희한하고 놀라운 정의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의로 돌려진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들으면 웃는다. 그리스도인의 의를 영혼 속에 부어져서 우리의 각 부분으로 퍼지는 일종의 특질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올바른 판단과 선한 뜻 곧 선한 의도가 참된 의라고 가르치는 이성의 잘못된 관념들을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태어나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자기 아들을 영접하기만 하면,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 여기시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이다. 이것은 모든 이성을 초월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그분을 붙잡는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주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갈 2:20, 3:13).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자기를 내놓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저주가 되셨기 때문에 내가 영원한 사망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허한 사변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붙잡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주신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을 완전한 의로 여기신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과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들어가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또는 우리가 은혜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인지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신학의 핵심 속에 들어가 있다. 이 신학을 통해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과 이것을 믿으면 우리가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그것도 큰 죄가 남아 있어도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믿음의 의를 이렇게 규정하신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왜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율법의 의에 흠이 없고, 할례를 받으며, 선을 행하고, 금식을 한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나오도록 불러내셨고, 그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믿은" 것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나"(곧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을 영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한다.
마르틴 루터, 『갈라디아서』(복 있는 사람), pp.226~229.
첫댓글 <매튜 헨리 주석>
믿음에 의한 의인(義認)(2)(갈라디아서 3:6-18)
갈라디아인들에게 진리에 복종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또 이로써 그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을 깊이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애쓴 사도는 본문이지 그들이 거절하므로 그가 책망한 교훈을 광범위하게 증거한다. 그것은 주로 율법의 행위없이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인(義認)에 대한 교훈이었다. 이 사실을 그는 몇 가지 방법으로 증명한다.
Ⅰ. 아브라함의 의인(義認)을 예로 들어 믿음에 의한 의인을 증명한다. 사도는 이를 증거하는 데 로마서 4장의 것과 같은 논증법을 사용한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고 말한다(6절). 즉 다시 말해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그리고 그의 이 믿음에 의하여 그는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되었고 또 용납되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상징된 것이었다. 사도는 이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육체를 따라서가 아니요, 약속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 것"을 우리에게 말씀한다(7절). 따라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같은 방법에 의하여
그들도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들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창 12:3).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고 그 내용이 본문에도 성경 또한 하나님이 믿음의 수단을 통하여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안에서,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자만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처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가리켜 사도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 즉 참된 신자들은 그들이 어느 민족 출신인가를 불문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의하여 따라서 그가 가진 것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 믿음의 아버지인 그와 함께 축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얻는 것도 똑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Ⅱ. 그는 우리가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법정에 서서 그 재판을 받게 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추방당하고 정죄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죄함을 받지 않고 의롭게 되는 방책으로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이에 근거하여 자신의 의인(義認)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재판 법정은 틀림 없이 그들에게 불리한 선고를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신 27:26). 율법에 의하면 인간들은 누구나 생활이 완전해야 하며 인격적이어야 하고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율법의 용어는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든가 또는 12절의 경우처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에 살리라"는 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 율법은 저주를 선언한다.
우리의 복종이 율법책에 쓰여진 모든 것대로 보편적이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또한 영속적으로 되어지지 아니하는 한(만일 어느 때든 한가지 실수라도 범한다던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이 저주는 계시되고 경고된 것으로 진노와 파멸을 가져 온다. 저주는 모든 악에 대하여 각각 적용된다. 이 저주는 모든 죄인들, 곧 모든 인간들을 치는 강력한 힘과 권세와 효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 죄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면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인 것이다. 이 의인을 율법으로부터는 기대할 수 없지만 사도는 우리에게 이 저주를 피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준다. 그것은(그가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기이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므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감당하셨다. 그가 죄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선물이 되시었다. 즉 그는 모세의 율법이 특별한 낙인을 찍은 것이며 불쾌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죄를 없이하고자 선물로 자기를 드리신 것이었다(신 21:23). 예수께서 자기를 드리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유대인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가 되고 특히, 복음 시대를 위하여 예비해 준 성령의 놀라운 약속의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은 율법에 자신들을 드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죄인으로서 우리가 받았어야 할 비참한 경우를 기억하자. 율법 아래 있었다면 우리는 또한 율법의 저주와 정죄 아래 처해 있었을 것이다.
2. 우리를 향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자. 그는 우리 대신 저주를 담당하시려고 또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복종하셨다.
3. 그를 통하여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한 미래를 전망하도록 하자. 우리는 저주를 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축복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4.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Ⅲ.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절). 이러한 말씀이 언급된 것은 하박국 2장 4절로 거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이 다시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인용되고 있다. 하박국 2장 14절의 말씀의 의도는 참된 삶을 소유하며 죽음과 진노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의 가호를 입어 생명으로 복귀됨을 입을 수 있는 자들은 의로운 자이어야 하며 또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 용납되고 그를 위하여 살수 있을 때만이 이러한 생명과 행복을 얻게 되며, 이후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여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임을 또한 제시해 주고자 한다. 그 까닭에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혹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할 지 몰라도 적어도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없고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것이었다(레 18:15). 율법은 삶을 얻는 조건으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우리의 의인은 새로운 가르침 아니고 복음시대 이전에 벌써 하나님의 교회에서 세워지고 가르쳐진 것임을 밝히려 한다. 믿음이야 말로 진정 어느 죄인이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고 또는 의롭게 되는 오직 유일한 길인 것이다.
Ⅳ.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사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계약의 불변성을 주장한다. 이 계약은 모세의 율법의 주어짐에 의하여 취소되거나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15절 이하). 아브라함이 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율법보다 앞선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약속에 근거하여 세운 것이었고,
또 약속은 믿음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8절). 그리고 이 계약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계약이 폐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계약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는가 또는 합의 조항이 인준되면 양편이 다 묶이게 되면 이미 다른 길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뒤에 있어진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이 무효화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diaqh,kh-즉 계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계약이라기 보다 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유언이 효력이 있기 위하여서는 유언자가 죽어야 하며 그가 죽은 후에 유언은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유언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은 확고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난 만일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상속 인물이 없기 때문에 유언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16절) 거기에 대하여서는 그런 염려를 안해도 된다고 사도는 말한다. 아브라함이 죽었고 선지자들도 죽었다. 그러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체결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매우 놀랍게 해석한다. 우리는 그 계약이 오직 유대 백성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아니라고 한다. 즉 "자손을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단수로 표시한 것을 보아 그 말씀은 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 같고 그 자손이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아직도 효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영원히 거시하시며, 또한 믿음으로 그의 것이 된 영적 자손들 속에서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율법이 행위를 너무 강조하기 때문에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그 율법이 계약을 폐할 수 없다면 또한 율법 속에 믿음이나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볍한다(18절). 그러므로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일 후에 있어진 한 행위가 약속을 폐기한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롭게 되는 길을 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지혜와 신실하심에 불일치 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에 유업이 주어졌고 이로 인하여 그의 영적 자손에게 물려진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약속을 거두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처럼 후회할 일을 행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코뱅 스펄전이 보았다는 주석답게 내용이 진짜로 풍성하네요.
<박윤선 주석>
갈 3:6, 7
이 귀절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은혜로 되는 구원 교리를 논증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 이것은 창15:16을 인용한 것이다. 이 문구의 히브리 원어를 직역(直譯)하면,"아브람함이 하나님 안에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안에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이다.
"하나님 안에 믿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네 자손"(기독 신자들)의 수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하신(창15:5)하나님의 약속(메시아 약속)을 믿고, 하나님 자신 안에 자기를 맡기고 안식한 것을 말한다. 이런 신앙의 대상과 내용은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의 대상 곧, 그리스도(그의 義)를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나타나신 것이 아니고, 그 한 건(件)을 조종(祖宗)으로 하고 후에 그 같은 칭의 건들이 수다할 것을 가리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은 제도로 칭의될 자들의 수가 하늘의 별의 수처럼 많을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한국 목사님이 쓴 거라서 그런지 내용이 더 쉽게 와 닿습니다 👍
@노베 공감합니다. 잘 쓰셨네요.
<호크마 주석>
갈3:6
본절은 바울이 4:7까지 믿음과 율법을 번갈아가며 전개하고 있는 순차적(順次的)인 논증의 첫번째 항목이다(Boice).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의로 정하셨다 -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로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롬 4:10).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 , 디카이오쉬네)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1)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Boice).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역시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다. (2)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E.D. Burton, Cole). 창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되었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의' 역시 신약 백성이 우리의 의와 같이 대속하신 구세주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先就)된 '의'일 뿐이다(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 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인정되었으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할례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장코뱅 이렇게 양질의 주석 설명을 들으니 학습 효과가 배가되는 것 같습니다 😂 😄
@장코뱅 호크마 주석도 좋네요.
이신칭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전신자 제사장 등... 핵심적 진리를 루터의 말로 직접 들으니 매우 감동적입니다.
공감합니다.
읽어보니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은혜이고 감동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은혜롭고 내용이 아주 훌륭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두 가지 의를 설명하였네요. 제사장이 저녁에 드리는 제사와 아침에 드리는 제사를 설명하면서, 저녁에 드리는 제사는 예수님이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처럼 회개를 요하는 것이 있고( 우리의 이성을 죽이는 것), 아침에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감사하는 제사(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가 있다는 것이네요. 아침에 드리는 제사는 용서 받은 죄인들이 칭의를 입은 것에 대한 감사겠죠. 결론적으로 희생제와 감사제의 의미를 살려서 우리 각자가 제사장으로서 행해야 할 것도 알려주네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율법으로 의로움을 지켜내려고 율법에 다시 종노릇하는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바울이 가르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을 해설한 내용에 감탄합니다.
공감합니다. 핵심을 잘 짚으셨습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