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인을 대표하는 3대 그림이라고 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년),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년 경),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를 꼽는다. 우연찮게도 그림 속 세 여인 모두 실존인물이고, 특히 베아트리체 첸치는 ‘스탕달 신드롬’을 거론할 때 언급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오노레 드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스탕달Stendhal(본명 마리 앙리 베일 Marie Henri Beyle·1783~1842)은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대성당에서 한 그림을 보고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경험을 한다.
"피렌체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황홀했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무덤가에 있지 않았던가! 숭고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 아름다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예술품과 열정적 감정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초자연적 느낌들이 충돌하는 감동의 물결이 나를 휘감았다. 산타크로체를 나올 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온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발을 내딛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스탕달이 쓴 이 글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명한 미술품을 감상한 사람들 중 갑자기 가슴이 뛰거나 흥분을 못 참고 날뛰거나 심지어 현기증과 전신마비 때로는 정신분열까지 나타나는 이런 현상에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은 우피치 미술관을 찾은 관광객과 다비드 석상을 본 관광객들 중 스탕달 신드롬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실제로 있다고 발표했다. 19세기부터 이런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관광객 환자들이 100명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거나 피렌체의 미술작품 홍보용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스탕달 신드롬은 1979년에 와서야 이름이 붙었는데, 이렇게 명명한 주인공 역시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그라지엘라 마레기니였다. 이탈리아 관광청의 홍보 아니냐는 오해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발작과 정신분열까지는 아니더라도 멋진 작품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때가 있긴 있을 것이다.
스탕달이 방문한 산타크로체 대성당에는 미켈란젤로와 마키아벨리, 갈릴레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스탕달은 무엇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후세 사람들은 귀도 레니가 그린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 작품은 귀도 레니가 1599년 그렸다는 설도 있고 엘리자베타 시라니가 1662년 그렸다는 설도 있다. 지금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로마고예술국립박물관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은 '1599년'과 '귀도 레니'로 표기하고 있다. 누가 그렸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뒤로 너무나 예쁜 베아트리체 첸치의 모습에 홀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지 짝퉁, 위작, 모작 할 것 없이 비슷한 그림들이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다. 세월이 한참 흘러 1818년에야 지금의 바르베리니 콜렉션에 진품이 소장됐고 이후로 계속 로마에 있게 된다. 만약 스탕달이 피렌체에서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을 보고 정신적 황홀경을 느껴 기록을 남긴 거라면 결국 짝퉁이 스탕달 신드롬을 만들어냈다는 뜻이 아닌가? 일부에서는 스탕달이 르네상스 때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가 성당 내부에 그린 프레스코화 '성 프렌체스코의 생애'나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의 생애'를 보고 그랬으리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하지만 스탕달이 방문했을 시기에 그 벽화는 회칠로 덮여 있었다.
어쨌든 당사자인 스탕달은 그 충격으로 한 달이나 치료를 받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고, 후세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 작품이 귀도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레니가 후대의 미술가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는 로마를 자신의 조각품과 건축물로 가득 채운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루브르 궁을 설계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파리에 갔을 때 자존심 센 프랑스인의 심기를 이렇게 건드렸다고 한다. “파리에 있는 모든 그림을 다 합쳐도 귀도 레니의 그림 한 점만 못하다.” 이 말 때문인지 몰라도 베르니니가 제출한 루브르 궁 설계도는 퇴짜를 맞았다.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는 원래 로마에 있었지만 스탕달이 방문했을 때 산타크로체 성당에 대여 전시 중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스탕달이 피렌체를 여행하고 돌아와 착수한 작품이 <첸치 일가>였다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탕달 신드롬이 '베아트리체 첸치'에서 연유했다 믿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베아트리체 첸치가 16세기 중엽 피렌체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했던 절세의 미녀였으며 지독히도 비극적인 일생을 살다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야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킬 만하지 않느냐는 해석이다.
베아트리체 죽음의 전후로 두 점의 명작이 탄생한다. 하나는 베아트리체 첸치가 처형을 당하기 직전 귀도 레니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 다른 하나는 카라바조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다. 이 그림은 참수 장면을 가장 참혹하고 무엇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귀도 레니 뿐 아니라 카라바조도 베아트리체의 참수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귀도 레니는 베아트리체 첸치가 처형당한 지 3년 후인 1632년에 '베아트리체 첸치'를 완성했다. 그런데 이로부터 30여 년 후인 1662년, 또 하나의 '베아트리체 첸치'가 세상에 나온다. 전작이 가엾은 소녀라면 후작은 처연한 숙녀다. 그리고 더 아름답다. 머리에 흰 터번을 두르고 비스듬히 앉아 얼굴을 뒤로 돌린 자세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분위기가 흡사한데, 페르메이르가 이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662년 작 '베아트리체 첸치'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이 그림이 완성된 때가 귀도 레니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20년이 지난 뒤라서다. 그래서 레니의 여제자인 엘리자베타 시라니가 스승의 완성작을 보고 모작했으리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다가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레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것을 시라니가 마저 완성했다고 한다. 17세기 이탈리아에 여성 화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몹시 흥미롭다.
엘리자베타 시라니는 베아트리체 첸치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일생을 살았다. 당시 드물게도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은 여성 화가였지만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고 데리고 살며 그림을 팔아 돈을 벌어오도록 강요했고, 그 돈으로 술을 퍼마셨다. 가혹한 아버지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그리면서 엘리자베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베아트리체보다 그나마 자신의 처지가 낫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여자로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슴 아팠을까. 엘리자베타는 그림을 완성하고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그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1577~1599)
‘천사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의 산탄젤로Sant’Angelo 성은 로마제국의 전성기 시절에 지어진 성이다. 중세에는 교황이 이 안에 바티칸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만들어 유사시에 대피할 수 있는 요새로 개조했다고 한다. 그 앞에 놓인 산탄젤로 다리는 베르니니의 조각품으로 장식돼 오랜 역사와 함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아직 베르니니가 조각한 천사상이 세워지기 전인 1599년 9월 11일, 산탄젤로 다리 앞 광장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 중에는 화가 귀도 레니와 카라바조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은 절세 미녀로 소문 난 베아트리체 첸치의 공개 처형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베아트리체뿐 아니라 그녀의 오빠와 새 어머니도 함께 형장에 끌려나왔다. 죄목은 존속살해. 그러나 이들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자가 너무나 폭력적이고 부도덕했기에 많은 로마시민이 첸치 일가를 동정했고 교황에게 감형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여론을 무시했다. 교황이 죽은 프란체스코 첸치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베아트리체는 스물두 살의 앳된 나이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아버지 프란체스코 첸치는 소문난 파락호였다. 그런데 귀족이었다. 죄를 짓고도 제대로 벌을 받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수군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녀들에게 손찌검하고 딸 베아트리체를 성폭행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사악한 백작이 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려진 것만큼 악랄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딸을 강간했다는 소문도 증거가 부족했다. 그렇다 해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588년 결국 자기 가족의 손에 맞아 죽은 걸 보면 가족의 미움을 받았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이듬해 초 교황청은 첸치 가족을 체포했다. 당시 로마 지역은 교황이 직접 다스렸다. 베아트리체와 가족들은 살인죄를 자백했다. 로마 민심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라 여겼는지 이들을 오히려 동정했다. 어쨌든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억울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았다. 화가는 초상화를 그리고 시인과 소설가도 그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겼다. 죽어서 전설이 된 것이다. 해마다 9월 11일 전날 밤이면 베아트리체 첸치의 유령이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로마에 나타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