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小確幸) 소고
철학이 무엇이냐고 한 기자가 알베르 까뮈에게 묻는다. 인간은 사멸한다는 것, 대체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 이 두 주제를 교직해 놓은 것이라 그는 답한다. 이렇듯 행복의 순간들은 짧고, 견뎌나가야 하는 시간으로 이뤄진 게 인생이지만, 많은 인사들이 행복론을 폈다. 그 이론은 특성상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객의 이름을 붙인 행복론으로 일컬어진다. 즉, 아리스토 텔레스의, 세네카의, 에피쿠로스의, 칸트의, 니체의, 쇼펜하우어의, 러셀의, 아인슈타인의, 달라이라마의 행복론 등으로…….
이 중 일찍이 에피쿠로스학파가 간파한 쾌락주의의 역설(Paradox of hedonism)이 유명하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이며, 쾌락을 추구할수록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역설을 인정하고, 쾌락주의를 표방하면서 욕망을 절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정신적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행복에 대한 견해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욕망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택할 수 없다면 고통 자체를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No pain, No gain이다.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실망하지 않았으리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상처 받지 않았으리라. 그럼 평생 기대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겠는가? 여기서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이론이 갈린다. 아프고 슬플지언정 기대하고 사랑하겠다는 것이 니체의 입장이다.
아인슈타인의 행복론 메시지도 유명하다. 그는 돈을 잘 안 갖고 다녀, 호텔 보이에게 팁을 주려 했지만 돈이 없어 행복론 메모지를 건네면서 언젠가 돈이 될 거라고 말했다 한다.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 묵을 때 메모지에 긁적거린 단문으로, ‘고요하고 겸손한 삶이 쉼 없이 성공을 추구하는 삶보다 더 행복하다.’ 지난 30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옥션에서 이 메모지가 약 17억 원에 경매 되었다 한다.
그와 같은 행복담론은 지양한 채, 이 글에서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0년대 발간된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소개한 신조어다.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소확행에 대해 말했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속옷이 쌓여 있는 것.
-정결한 면 냄새가 풍풍 풍기는 새로 산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라곰(Lagom, ‘적당한’의 뜻, 스웨덴), 휘게(Hygge, '편안함‘의 뜻, 덴마크), 오캄(Au Calme, '한적한’의 뜻, 프랑스) 등이 있다. 와비사비(wabisabi)도 즐거움을 선사하는 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와비(わび)(侘)'는 단순한 것, 덜 완벽한 것, 본질적인 것을 의미하고, ‘사비(さび)(寂)’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 오래된 것, 한적한 것을 뜻한다.
20세기 최고의 뮤지칼 영화인 <사운드 오브 뮤직> 삽입곡, <내가 좋아하는 것들(My favorite things)>에도 소확행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장미 꽃잎의 빗방울과 고양이들의 작은 수염.
(Raindrops on roses and whiskers on kittens.)
-밝게 빛나는 구릿빛 솥과 따뜻한 털 벙어리장갑.
(Bright copper kettles and warm woolen mittens.)
-노끈으로 묶인 갈색 종이 다발.
(Brown paper packages tied up with string.)
-크림 색깔의 조랑말과 바삭한 사과과자.
(Cream colored ponies and crisp apple strudels.)
-초인종과 썰매 방울들과 국수를 곁들인 송아지 커틀렛.
(Doorbells and sleigh bells and schnitzel with noodles.)
-날개 위에 달을 지고 나는 야생의 기러기들.
(Wild geese that fly with the moon on their wings.)
-하얀 드레스와 파란 새틴 장식 머리띠를 한 소녀들.
(Girls in white dresses with blue satin sashes.)
-내 코와 눈썹에 머무르는 눈송이들.
(Snowflakes that stay on my nose and eyelashes.)
-봄으로 녹아드는 하얀 은빛의 겨울들…….
(Silver white winters that melt into springs…….)
그러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일도 결코 녹록치 않다.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일탈의 여지를 가지려면 정신적 근력을 요하는데, 이는 교양과 감동에 의하여 획득 될 수 있다. 아무리 운명과 드잡이하느라 힘겹다 해도, 로마 제국의 노예도, 이집트의 노역자도, 억압 받는 북한의 인민도 아니라는 자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다. 자연과 생에 대한 경외감, 예술적 감동도 중요한 힘의 원천이 된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다.’ 임제 선사의 직관에 찬 잠언이나, 향년 백수(白壽, 99세의 별칭, 百-一 = 白)에 이른 연세대 김형석 석좌교수의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지성적인 행복론, 혜안의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자신이 원해서 하는 고생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란 언사 등을 통해 우리는 건전한 정신적 근육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외경심에 대한 필자의 졸시 한 편 <사하라 기행>을 소개합니다.
사하라 기행
정명기
와디*에서 맞은 사막의 밤
또 다른 자연,
바람마저 멎으니
0˚C에 음音·미味·향香도 -0-
시각視覺으로만 있는 시간
별빛 소나기 맞는 시간
온전히 우주로의 시간
야청빛 사하라의 밤에
평원 위 직립은 나 하나 뿐
불모의 땅에선 나그네는
'사람으로 생명 받다'가
사무치게 놀랍다
되겠다
이 놀라움이면 되겠다
놀라서 충분하다
*와디/
사막에서 비가 올 때만
물길이었다가 이내 고갈되는 강
첫댓글 2. 19 월례회 때 10분 가량 자유로운 주제로 스피치 요청이 박진우 회장으로부터 있었으나,
글감이 칼럼 형식에 적합하므로 스피치 대신 19 사이트에 게재합니다.
시인이라 시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산문도 명품이다.
마지막 시도 멋지다.
앞으로도 좋은 시와 산문 기대합니다 .
무심거사님의 찬사라서 더욱 기쁘네요!
짧지만 간결한 문장, 가슴에 와 닿습니다.
또 한분의 철학박사님의
글이 너무 가슴에 와
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