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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모건의 연구와 관련하여
1884년 초판 [서문] 15p~17p
이하의 장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유언의 집행이다. 그의 유물론적 역사 연구의 성과들과 결부하여 모건의 연구 결과들을 서술하고 그리하여 그 결과들이 갖고 있는 전체적인 의미를 밝히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맑스였다. 모건은 40년 전에 맑스가 발견한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새로이 발견하였고, 미개와 문명을 비교하는 주요 지점들에서 이 역사 파악으로부터 맑스와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독일의 쭌프트적인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한편으로 <자본>을 열심히 표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완강한 침묵으로 그것을 묵살했듯이, 영국의 ‘선사’학 대표자들도 모건의 <고대 사회, 또는 야만에서 미개를 거쳐 문명에 이르는 인류의 진보 경로에 대한 연구>(1877)를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취급하였다. 나의 저작은 고인이 된 나의 친구가 수확하지 못한 열매에 대한 미약한 대용물에 불과하다. 그는 모건의 글을 상세히 발췌하고 거기에 비판적 평주들을 달아 놓았는데, 그 자료들은 지금 내 수중에 있다. 나는 이 비판적 평주들을 별일이 없는 한 그대로 본 서에 옮겨 놓았다.
유물론적 파악에 따르면, 다음의 요인들이 역사를 종국적으로 규정한다 : 직접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 그런데 이것 자체는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생활 수단들의 생산, 즉 의식주의 대상들과 그것에 필요한 도구들의 생산과 인간 자체의 생산, 즉 종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와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회적 제도는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노동의 발전 단계와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노동의 발전이 미약할수록, 노동 생산물의 양이 제한적일수록, 따라서 사회의 부가 제한적일수록, 사회 질서는 더욱 혈연적 유대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듯 혈연적 유대에 근거한 사회 구조 하에서도 노동 생산성은 계속 발전해 가고 이와 함께 사적 소유와 교환, 빈부의 차이가 생겨나고,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할 가능성이 생기며, 이에 따라 계급 대립의 기초가 생긴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요소들은 몇 세대에 걸쳐 낡은 사회제도를 새로운 상태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 양자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완전한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혈연 단체에 근거한 낡은 사회는 새롭게 발전해 나온 사회 계급들과 충돌하여 산산이 부서지고 그 자리에 국가로 총괄되는 새로운 사회가 들어선다. 국가의 하부 단위는 이제 혈연 단체가 아니라 지연 단체이다.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유 질서가 가족 질서를 완전히 지배하며, 지금까지의 모든 쓰여진 역사의 내용을 구성하는 저 계급 대립과 계급 투쟁은 이 사회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전개된다.
쓰여진 역사의 선사적 기초를 주요한 지점들에서 발견, 복원하고, 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까마득한 옛날의 그리스, 로마, 독일의 역사를 해명할 열쇠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혈연 단체 속에서 발견한 것은 모건의 위대한 공적이다.
이하의 서술에서 무엇이 모건에 근거하는 것이고 무엇이 내가 덧붙인 것인지 독자들은 대체로 쉽게 알아볼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에 관한 역사를 다루는 장들에서 나는 모건의 전거에 그치지 않고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덧붙여 두었다. 켈트 족과 독일인에 관한 장들은 주로 나의 것이다. 모건은 이 부분에서 거의 2차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독일의 상태에 관해서는 타키투스를 제외하면 오로지 프리먼씨의 조악한 자유주의적 날조 자료에만 의존했다. 경제적 논술은 모건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겠지만 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에 전부 내가 새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건에게서 인용한 것이라고 명기하지 않은 모든 결론들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나에게 있음을 밝혀 둔다.
1891년 제4판 [서문] 18p~31p
나는 원문 전체를 신중히 재검토하고 일련의 보충 작업을 했다. 바라건대, 이것이 과학의 현 상태를 충분히 반영한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또 나는 이 서문에서 바호펜에서 모건에 이르는 가족사에 대한 견해의 발전을 간단히 개괄해 둔다. 그것은 주로, 국수주의적 색채를 띤 영국 선사학파가 모건의 발견으로 이루어진 원시 사관에서의 변혁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계속 묵살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건의 성과를 횡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영국의 이러한 수법을 너무나 열심히 모방하고 있다.(18p, 9~)
60년대 초까지는 가족사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역사학은 이 분야에서 아직도 완전히 모세 5경에서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 바, 사람들은 이 가부장제적 가족 형태를 주저 없이 가장 오래된 가족 형태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일부다처제라는 점을 제외하곤 그것을 오늘날이 부르주아적 가족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가족 일반이 아무런 역사적 발전도 거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셈이다. 기껏해야 원시 시대에는 성적 무규율의 시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인하는 정도였다. 물론 단혼 외에 동양의 일부다처제나 인도-티베트의 일처다부제 등도 알고 있지만 이 세가지 형태를 역사적 순서나 연관 없이 묘사했다. 고대사의 몇몇 민족들과 아직 현존하는 몇몇 야만인들은 아버지의 혈통이 아닌 어머니의 혈통을 따지며 유일하게 유효한 혈통으로 인정했으며, 오늘날의 민족들 중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큰 집단 내부에서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족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관습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등의 사실들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면서, 계속해서 이런 사례들을 모으고 있으면서도 이 사례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예컨데 E. B. 타일러가 쓴 <인류의 원시사 ~에 관한 연구>(1865)조차, 이러한 사례들이 불타는 나무에 철기를 대는 것을 금지하는 몇몇 야만인들의 관습이나 이와 유사한 종교적 우행들과 별 차이가 없는 괴상한 관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9p, 5~)
가족사의 연구는 바호펜의 <모권>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무제한적 성교 생활을 했다. 이러한 관계는 아버지를 확정할 온갖 가능성을 배제하며, 따라서 혈통은 여계, 즉 모권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 그리고 고대 민족들의 초기에는 모두 그러했다. 그 결과 여자는 젊은 세대의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어버이, 어머니로서 높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고, 나아가 완전한 여성 지배에 도달했다. 여자가 오로지 한 남자에게만 속하는 단혼으로의 이행은 태고의 한 종교적 계율(같은 여자에 대한 다른 남자들의 전통적 권리)의 침해였기에 여자는 일정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김으로 이를 속죄(보상)하였다고 바호펜은 이 책에서 주장한다.(20p, 1~)
바호펜은 이러한 명제들에 대한 논거를 고대 고전 문헌의 구절들에서 찾는데, “난교”에서 일부일처제로, 모권에서 부권으로의 발전은, 특히 그리스인의 경우에 종교적 표상의 계속적 발전의 결과이며, 새로운 견해를 대표하는 새로운 신들이 낡은 견해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신들을 밀어내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바호펜의 주장은 남녀 상호간 사회적 지위의 역사적 변천이 생활 조건들의 발전이 아니라 사람들 두뇌에서 이 생활 조건들의 종교적 반영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바호펜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몰락해 가는 모권과 영웅 시대에 발생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는 부권 간의 투쟁의 극적 묘사로 보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신의 정부 아이기스토스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은 죽인다. 그리고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이는데, 모권에 의하면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가장 엄중한 범죄이기에 모권을 수호하는 에리니에스는 그를 고소한다. 그러나 신탁으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이게 한 아폴론과 재판관으로 호출된 아테나(상대적으로 새로운 12신, 부권이라는 세 재도를 대표하는)는 오레스테스를 옹호한다. 오레스테스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그녀의 남편과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두 가지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데 왜 에리니에스는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아닌 자신을 고소하냐는 말에 에리니에스는 “그 여자는 그가 죽인 남편과 혈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20p,15~)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살인일지라도 에리니에스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의 임무는 혈연 관계가 있는 자들 사이의 살해만을 고소하는 것이며,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가장 엄중한 범죄이다. 그러나 아폴론은 오레스테스를 옹호하고 아테나는 아테네의 배심원들의 표결에 부치는데 결과는 무죄와 유죄가 동수로 나온다. 여기서 아테나는 재판장으로서 오레스테스를 투표하고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에리니에스 자신들이 말하듯이 “젊은 세대의 신들”이 에리니에스를 이겼고 에리니에스도 새 질서에 복무할 직책을 지니는 데에 동의한다.(21p, 10~)
<오레스테이아>에 대한 새롭고도 아주 정당한 이 해석은 바호펜의 책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동시에 아이스킬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에리니에스와 아폴론, 아테나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이 신들이라는 것이 그리스의 영웅 시대에 모권을 전복하고 그 대신 부권을 세웠다는 기적을 믿고 있는 것이다. 종교를 세계사의 결정적인 지렛대로 보는 이러한 견해가 결국에는 순수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두터운 책자를 다 연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유익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 길을 개척한 그의 공적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처음으로 미지의 원시 상태에서는 무규율적인 성교가 진행되었다는 공문구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논증하였다. 그리스 인들과 아시아 인들 사이에서는 단혼이 있기 전에 한 남자와 여러 여자 사이 뿐만 아니라 한여자와 여러 남자 사이에도 관습에 조금도 저촉됨 없이 성교를 맺는 그러한 상태가 실지로 있었던 흔적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허다하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이 이미 소멸했지만 그 흔적은 여가 일정한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것을 대가로 하여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남아 있다는 것, 그렇기에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여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는 것, 부자 관계가 확실한 것으로 되었거나 어쨌든 그것이 인정되게 된 단혼의 시기에 들어와서도 오랫동안 여계만이 중요시 되었다는 것, 아이들의 유일하고 확실한 어버이로서 어머니의 이러한 시초의 지위는 어머니들에 대해, 동시에 여성 일반에 대해 그 후 그들이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했다는 것. 물론 바호펜은 그의 신비주의적 견해로 인해 이러한 명제들을 위와 같이 그렇게 명백하게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명제들을 논증했고, 이것이 1861년에는 그야말로 하나의 완전한 혁명을 의미했다. 바호펜의 두터운 책자는 독일어로, 즉 현대 가족의 선사에는 당시 가장 관심이 없었던 민족의 언어로 집필되었고, 그의 저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865년에 나타난 이 분야의 첫 후계자 역시 그러했다.(21p, 21~)
이 후계자는 J. F. 맥레넌이었다. 그는 그의 선행자와는 반대로 천재적 신비주의자가 아닌 무미건조한 법률가였다. 그는 거침없는 시인다운 공상이 아니라 변론에 나선 변호사처럼 그럴 듯한 논증을 내놓는 인물이었다. 맥레넌은 고대와 현대의 여러 미개 민족과 야만 민족들 사이에서, 아니 문명 민족들 사이에서까지 신랑 혼자 또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그 친척들에게서 외견상 폭력을 써서 약탈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결혼 형태를 발견하고 있다. 이 관습을 확실히 한 종족의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다른 종족에게서 실제로 폭력을 써서 약탈하던 옛 관습의 유물일 것이다. 그러면 이 ‘약탈혼’은 어떻게 발생했는가? 남자들이 자기 종족 내에서 충분히 아내를 발견할 수 있을 때는 그런 식의 결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흔히 보이는 발전하지 못한 민족들에게는 그 내부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일정한 집단이 있어서 남자는 아내를, 여자는 남편을 자기 집단 밖에서 구해야만 했다. 한편 또 다른 민족들은 일정한 집단의 남자가 자기 자신의 집단 내에서만 아내를 얻어야 하는 관습이 있다. 맥레넌은 전자를 족외혼 집단, 후자를 족내혼 집단이라고 부르고 그저 덮어놓고 족외혼과 족내혼의 두 ‘부족’사이의 엄격한 대립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런 대립이 많은 경우 그의 표상 가운데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족외혼 연구를 통해 모를 리 없음에도 그는 이 대립을 자신의 전체 이론의 기초로 삼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족외혼 부족은 다른 부족으로부터만 아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만의 시기에 상응하는 부족 사이의 부단한 전쟁 상태로 인해 그것이 약탈에 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2p, 25~)
맥레넌는 족외혼의 관습이 혈연 관계나 근친 상간의 관념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이 둘은 훨씬 후대에 와서 발전한 것이라 한다. 그는 족외혼 관습이 여자애를 낳으면 곧 죽이는 야만인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관습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 관습으로 모든 개개의 부족에서 남자가 남아돌고 그로 인해 남자 여럿이 아내 하나를 공유하는 일처다부제가 나타나며, 아버지를 알 수 없기에 여계만을 따지게 되었고, 다른 부족 여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폭력적인 납치가 나타났다고 본다.(23p, 21~)
맥레넌의 공적은 그가 족외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도처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또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데 있다. 그가 결코 족외혼 집단의 존재 사실을 발견한 것도 아니며, 또 그 사실을 처음으로 옳게 이해한 것도 아니다. 래덤은 인도와 마가르 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이 제도를 상세하고 상세하게 서술하였으며 그것이 널리 보급되어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건도 이미 1847년에 이로쿼이 인에 관한 자신의 서한<아메리카 평론>에서, 그리고 1851년에 <이로쿼이 족 연맹>에서 같은 제도가 이 부족에게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또 정확히 서술하였다. 그런데 맥레넌의 변호사적 두뇌는 모권 문제에서의 바호펜의 신비주의적 공상보다 더 큰 혼란을 일으켰다. 맥레넌의 다음 공적은 모권적 혈통 제도를 본원적 혈통 제도로 인정한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그의 견해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여계만에 의한 친족 관계”라는 말은 되뇌면서 초기 단계에서 타당한 이 말을 후기의 발전 단계, 즉 혈통과 상속권은 물론이고 아직도 여계에 따라서만 따지지만 친족 관계는 남자 편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표현하는 그러한 단계에 대해서도 계속 적용하는 법률가의 편협함을 보여주고 있다.(24p, 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영국에서 대단한 찬동과 공명을 받아 그를 가족사학의 창시자로, 이 분야의 1권위자로 인정했다. 그에 의한 족외혼과 족내혼의 두 “부족”의 대립은 그 개별적인 예외도 있고 변종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적인 견해의 기초로 공인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 연구 분야에 대한 일체의 자유로운 고찰, 따라 일체의 결정적인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25p, 15~)
얼마 안 있어 그의 말쑥한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들이 속속 출현하였다. 맥레넌은 다음 세 가지 결혼 형태밖에 알 수 없었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단혼. 그러나 발달하지 못한 민족들 사이에서 일련의 남자들이 일련의 여자들을 공유하는 결혼 형태가 있었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리고 러복이 <문명의 기원>에서 군혼(communal marriage)을 역사적 사실로서 승인했다.(25p, 25~)
그 직후인 1871년에 모건이 여러 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새로운 자료를 갖고 등장했다. 그는 이로쿼이 족에게서 통용되는 특유한 친족 체계는 비록 그곳에서 통용되는 결혼 제도로부터 실제로 도출되는 촌수와 직접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합중국의 모든 원주민들에게 공통된 것이고, 따라 그것이 대륙 전체에 퍼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아메리카 연방 정부를 움직여 자신이 직접 만든 질문 용지와 표를 기초로 하여 기타 민족들의 친족체계에 관한 정보를 모으게 했다. 거기서 나온 답변들로부터 그는 다음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26p, 5~)
1. 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 체계는 아시아에서도 통용되고 있으며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많은 부족들에게서도 다소 변용된 형태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
2. 이 친족 체계는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섬들에서 지금 사멸해 가고 있는 군혼의 한 형태를 통해서 완벽하게 설명된다는 것,
3. 그런데 이 섬들에는 이 결혼형태와 나란히, 지금은 사멸한 한층 원시적인 군혼 형태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는 자신이 수집한 보고들을, 그것들에서 도출한 그의 결론들과 함께, 1871년에 <혈족 및 친족 체계들>이라는 책을 통해 발표하였고, 이로써 논의를 엄청나게 광대한 분야로 몰고 갔다. 그는 친족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조응하는 가족 형태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의 길을 열었으며 훨씬 더 과거까지 인류의 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 방법은 유효함을 인정받았으며, 맥레넌의 말쑥한 구성은 안개처럼 사라졌다.(27p, 19~)
1871년의 <혈족 및 친족 친계들>에서 희미하게 감지했던 것들이 본 서가 기초로 삼는 1877년 모건의 저작 <고대 사회>에서는 완전히 의식적으로 전개된다. 족외혼과 족내혼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족외혼 “부족”이란 것은 지금까지 어디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혼(모든 개연성으로 보아 한때 모든 곳에서 지배적이었던)이 지배하던 때에는, 부족은 어머니 편의 혈족에 따른 몇 개의 집단들, 즉 씨족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씨족 내부에서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한 씨족의 남자들은 아내를 부족 내부에서 구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이 통례였지만 반드시 자신의 씨족 외부에서 구해야 했다. 그러므로 씨족은 엄격히 족외혼을 하였지만 이 씨족 전체를 포괄하는 부족은 족내혼을 하였다. 이로써 맥레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가설은 그 최후의 잔재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27p, 28~)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 씨족은 모건에게 자신의 연구 영역에서 두 번째 결정적인 진보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모권에 따라 조직된 이 씨족 내에서 모건은, 우리가 고대 문화 민족들에게서 보는 바와 같은 부권에 따라 조직되는 이후의 씨족이 발전해 나오는 원형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 서술가들에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씨족들은, 이제 인디언 씨족들을 통해 설명되었으며 이로써 원시사 전체를 위한 새로운 기초가 발견되었다.(28p, 11~)
문화 민족의 부권 씨족의 전 단계로서 본원적 모권 씨족의 이러한 재발견은, 다윈의 발전 이론이 생물학에서 그리고 맑스의 잉여 가치 이론이 정치 경제학에서 가지는 의의와 동일한 의의를 원시사에서 가진다. 이 재발견 덕분에 모건은 처음으로 가족사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었으며, 오늘날 알려진 자료가 허용하는 한 이 가족사 안에서 적어도 전형적 발전 단계만큼은 일단 대체적으로 확립되었다. 이로써 원시사 연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사실이다. 모권 씨족은 이 학문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의 발견 이래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연구해야 하고, 연구한 것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영역에서는 모건의 책이 나오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28p, 18~)
하지만 이 관점상의 혁명이 모건 덕분이란 것을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메리카에는 이런 종류의 서적에 대한 이윤이 남을 만한 시장이 없고 영국에서 이 책은 조직적으로 억압되어 현재 서점에서 유통되고 있는 이 획기적인 저작의 유일한 판은 독일어 판이다. 이러한 냉담함은 아마 모건이 미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자료를 모으는 데에서 영국 선사학자들이 가장 인정받을 만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이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하는 데에서는 바호펜과 모건이라는 두 천재적인 외국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맥레넌의 족외혼 “부족”과 족내혼 “부족”의 존재에 대해 약간의 의혹만 보여도 극악한 이단으로 간주했던 것이 아닌가.(29p, 1~)
모건 덕분에 원시사에서 이루어진 그 밖의 진보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룰 필요는 없고 본 서의 중간중간에 필요할 때마다 언급할 것이다. 그의 주저가 출판되고 14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원시 사회의 역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풍부해졌다. 새로운 소재, 새로운 관점들로 모건의 개별적 가설들 중에서 동요하게 된 것들도 적지 않으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된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새로이 수집된 자료들은 역사에 대한 그의 기본 관점을 다른 관점으로 대체하지는 못했다. 그가 원시사에 부여한 질서는 기본 줄기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이 위대한 진보를 일으킨 장본인이 모건이라는 것이 은폐되면 될수록 그가 원시사에 부여한 질서는 더욱더 일반적 인정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30p,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