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선교부의 궁멀로 이전과 전천후 복음전도
전킨 선교사는 쪽 복음서를 돌리며 전도를 하였고 드루 선교사는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들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군산 앞 바다의 섬들과 금강 상류 변에 있는 충청도에 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러나 일본이 고종에게 요구한 군산항의 개항으로 수덕산(월명공원) 일대를 비롯하여 현재의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의 땅 약 17만 3천 평이 일본의 조계지가12)되어 그 중 10만 2천 평이 일본인들의 주거 용지가 되는 바람에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군산선교부를 수덕산(월명공원 일대)에서 군산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문제 직면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898년 제 7회 연례모임에서 군산선교부를 궁멀(구암동)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땅을 매입하였다. 그곳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주일학교를 시작한 궁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드루 선교사의 선교선을 띄우기 좋은 선창이 있었다.
전킨은 1899년 4월부터 선교부와 사택을 겸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궁멀선교부의 일자별 공사 상황을 이남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13)
4월 3일 일꾼들을 시켜 부지 정리 작업을 시작.
4월 20일 일꾼들이 일을 하자 말고 가버림- 일종의 태업
4월 22일 일꾼들의 부주의로 기와를 운반하던 중 모두 박살남
5월 1일 일꾼 중의 리더가 작업을 거부하고 일을 중단시킴.
5월 3일 담장에 쓸 재료를 모두 잃어버림
5월 5일 목수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며 역시 작업을 거부
5월 22일 목수가 열흘 동안 쉰다며 집으로 가버림
6월 20일 창문을 도둑맞음
전킨 선교사는 일꾼들의 횡포와 외국인에 대한 괄시와 텃세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피 군수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장마철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자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선교부는 그에게 여름휴가를 일본으로 가도록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되고 12월 21일 군산선교부가 수락산에서 궁멀로 이사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킨은 구암동(궁멀)에서 다시 정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산교회는 곧 난관에 봉착을 하였다. 일본의 조차에 의해 항구 일대가 다 일본인들에게 장악되자 항구주변에 살던 신도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전도 활동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으나 뜨거운 반응이 도시 변두리와 시골에서 왔다. 시골에 사는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자 토요일 밤에 교회로 왔다. 그리하여 전킨 선교사는 그들을 따라서 신도들이 사는 마을로 순회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군산 선교부의 정규적인 예배 장소가 네 곳으로 늘어났다. 군산교회(현 개복교회), 궁멀교회(현 구암교회), 대야 만자산교회(현 지경교회), 김제 송지동교회(김제시 공덕면)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계속해서 전킨은 조사들과 함께 통사동교회(개정 통사리교회), 남차문교회(익산 남전리), 제석교회(웅포), 월성리교회(김제 봉남면), 대창교회(김제 죽산면), 입석리교회(월천면)를 개척하였다.
1899년경 군산, 전주, 목포 등 세 곳의 선교센터에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세워졌고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공간이 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시골로 전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3주나 4주 동안 집을 떠나서 규모가 작은 성도들의 모임을 방문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미전도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순회 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텐트, 침낭, 담요, 통조림, 빵, 커피, 또는 코코아, 음식을 담은 상자,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용기, 옷, 책, 소책자, 벌레약을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전킨 선교사는 순회전도, 거리 전도에 열심 하였지만 의료, 교육을 통한 선교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전킨 부부는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1902년에 세워진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아내인 메리 레이번이 시작한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가 되었다. 그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구암병원 (군산 예수병원)을 세우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순회하지 않고 선교센터 안에 있을 때는 드루 박사의 선교병원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고 이내 그들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궁멀(구암)을 중심으로 하여 대야, 익산, 전주, 장항, 서천, 논산, 부여, 김제 등을 순회하였으며 금강, 만경강, 동진강 뱃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안타깝게도 1901년 서울 서대문밖에서부터 막역한 동지로 함께 헌신했던 드루 선교사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7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드루는 군산 예수병원 설립자였다. 외과의사로서 탁월했던 그는 ‘하루 종일 햇살이 한 줄도 비치지 않는 음침한 작은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일하였으며 아플 때도 있고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첫 두 해 동안 4천명의 환자를 돌볼 정도로 희생적이었다.14) 그는 병원에서 진료 뿐 만 아니라 자기가 치료한 환자들이 돌아가서 세운 교회를 돌보았으며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킨과 함께 금강을 오르내리며 섬과 내륙의 오지를 돌며 순회 진료를 하였으며 전도용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는 수년 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혹독한 사역으로 쇠약해진 결과로 선교부의 소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드루가 떠난 이후로 전킨은 심신이 아팠다. 그러나 불 선교사의 도움을 힘입어 순회선교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자신의 소진을 느꼈다.
군산 선교부를 연지 8년이 되었을 때 그의 몸은 열악한 환경과 과로로 허약해졌고 아내의 병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는 순회 중에 말이 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하였고 무리한 일정으로 편도선염이 악화되어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1899년 아들 시드니를 1903년에 프란시스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한 그 자신도 오랫동안 이질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될 대로 되었다. 아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다.
5부로 계속됨
2021.10.9
초라하니 올림
미주
12) 전병호 저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139쪽
13) 같은 책 150쪽
14)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74쪽
전주선교부로 발령과 복음에의 열정
1904년 남장로회 선교부는 연례회의에서 군산선교부의 전킨을 전주로 발령을 냈다. 이는 전킨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그가 안정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