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30년대 산장의 '디테일'을 201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장터목 산장에서 발견합니다.
2) 그리고 한때나마 '등산을 통해 심신연성(練成)을 추구'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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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메박사가 돌아가자 (주) 금강산 전기철도는 박사를 기려 동상을 세울까 하다가
이왕이면 그 돈으로 비로봉에 산장을 세워 금강산을 드높이고 안전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1932년에 구메산장으로 선을 보입니다.
구메산장의 운영은 당시 경성에서 제일 서비스가 좋다고 소문난 여관에서 맡았습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그들의 '안목'에 탄복을 했습니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나오고 있네요. 숙면을 취하고, 오늘 하루도 기대에 찬 얼굴입니다.
그들의 발 밑을 유심히 보시면....
왕골같은 걸로 짠 두툼한 멍석이 깔려 있습니다....
등산화에 묻은 흙을 털어 쾌적한 산장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겠죠.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악산이고 지리산이고 우리네 산장은 말그대로도떼기 시장보다 더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저런 걸 본 기억이 없습니다.
장터목 산장을 '신라Hotel'에서 운영했더라면 ?
금강산 구메산장 사진에서 저런 디테일이 눈에 띤 계기가 있습니다.
성남시 야산의 산책로에서 이렇게 왕골로 짠 멍석같은 게 깔려 있는 걸 두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네 산장이 생각났습니다.
산장 앞에 이런 걸 깔아 등산객을 배려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말이죠.
좋은 대접을 받으면 사람도 더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되는 법이죠.
이런 아쉬움을 품고 있다보니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거고요...
월간 산 6월호 에서 발견한 지리산 장터목 산장입니다...^^ 어랏.
이게 산길 훼손을 막으려는 건지, 산장 이용객의 쾌적함을 도모하려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모튼 이제부터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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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등산을 통해 심신의 건강을 추구'한다는 말은 익숙합니다.
정말 한때, '등산을 통해 심신연성(練成)을 추구'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때 일제가 총력전을 펼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연성練成'이 무슨뜻인지 갸웃거리실 분들 많을텐데요. 우리가 써서는 안될 일본식 한자입니다.
'연성'을 검색하다 '총력전하의 인재양성과 일본어교육'의 일부를 구글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연성이라는 건 '전시하 황국신민으로의 연마육성(練馬育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패전 이후 '연성'이라는 글자 자체가 사라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라는 말을 뒤늦게라도 혐오시 하는 우리는 당연히 쓰면 안됩니다.
그런데....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에서 연성소로 검색하면 일제동안 단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와 연성소가 세워지는 때가 겹치기 때문이죠.^^
70년대 전후와 8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독립군을 양성하던 '연성소' 기사들이고요.
생뚱맞게 두개가 '은행'업계 이야기입니다.
1983년과 1985년 똑같은 포맷으로 은행들이 여름에 '연성소'를 마련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짐작컨대, 보수적인(?) 은행업계에 연성소라는 단어는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해왔던 것 같습니다.
1944년과 1945년에, 예컨대, 이화여대와 성균관대는 당시 폐교되고 연성소로 재편됩니다.
전국 각지에 '연성소'의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1983년이면 5개 은행 중역이 될 나이입니다.
그들은 해수욕장에서 그냥 퍼지고 놀지말고 단순히 단련(鍊)하라는 의미로 연성소라 썼을 겁니다.
다른 뜻- 황국 신민에의 추억-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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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자 일본인 중심의 경성제대 산악회는 사라지고
학생들은 새롭게 산악회를 만들고 지리산 등을 오릅니다.
그들은 산악회를 결성할때 그 취지 중에는 '심신 연성'등을 내세웁니다.
이때 그들 역시 '과거로의 회귀'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경성제대 44년도나 45년도 입학생들은 '연성'이라는 말을 당연시했을 거니까요...
그러나 이들은 손경석 선생님의 '한국등산사'에 단 한줄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땅에서도 시르죽이 '연성'은 사라졌습니다.
국어순화운동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연성소에서 땀뻘뻘 흘리던 고통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잊고 싶은 결과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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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일보에서 연성을 독려하기 위해 잡지도 만들었었군요.
1942년 이후 그러니까 조선땅에도 '연성'이 가득 드리워졌습니다.
전국에 연성소練成所가 생겨났습니다.
연성소는 우리로 치면 '군대 훈련소'입니다. 정훈교육과 신체훈련을 함께하는.
초등학교가 초급 연성소로 문패를 갈아 달고, 심지어 성균관대와 이화여대도 연성소로 바뀝니다.
당시 성균관대가 '반일정서'가 강해서 폐교시켰다고 성대출신으로부터 들은 적이있는데, 글쎄요.^^
아모튼, 1944,45년 이화여대와 성균관대 입학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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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전에 왜 우리는 6시 기상을 엄수할까라는 글을 썼는데요.
그 출발을 일제로 보는데....
남쪽을 개척하기 위한 인물을 기르는 '척남숙(拓南塾)'이 있었는데요.
그 일과표는 이렇습니다.
역시 6시 기상이군요.
이게 본격적인 연성소로 바뀐 다음에는,,,
30분 당겨져 5시 30분 기상입니다.
내용도 숨쉴틈도 없이 빡세게 뺑뺑이 돌렸군요.....
덧붙여) 산악계의 한 단체는 살아 생전에 벌써 원로 산악인의 동상을 설악산 입구에 세웁니다.
이 점, 구메박사의 경우와 대비해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구메산장이 민족의 영산인 금강산을 속화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산악계 한 원로가 '설악은 이ㅁㅁ 박사가 다 망쳤어'라는 말을 면전에서 한 걸 기억합니다.
세상 일이라는 게 명암이 있는 건데, 저는 구메산장도 찬성, 이기섭 박사의 업적도 경의를 표합니다.
구메산장을 세우기로 한 건, 이기섭 박사는 산과 시민의 등산을 위한 탁월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도대체 '산을 망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첫댓글 구메 박사 동상은 본거같은데...
연성과 같은 의미로 등산에서는 등행...건보...등이 쓰였던듯..
네.....구메산장과는 다른 의미로 당연히^^ 세웠으리라 짐작되네요...
그러고보니 등행이라는 말도 사라졌네요.
산행이라는 말은 있고. 산등이라는 말도 있을 법한데....~~
@모자이크-등산박물관 신금강과 내금강을 이어 비로봉을 쉽게 오을 수 등산로가 개통되고 등산객을 수용할 산장으로 지은게 구메산장... 이를 추진했던 분이 금강산전기철도 사장 구메. 산장지을 돈도 쾌척?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산장 이름도 구메산장. 산장 입구에 그의 얼굴을 찍어 놨다는데 아직 찾지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