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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선현의 효행 사적(事蹟) 고찰
김영호
Ⅰ. 들어가는 말
오늘날 사회현상 가운데 가장 중요시해야 할 부모자식관계에 관한 강상(綱常)의 문제가 상도(常道)에 어긋나서 악의 축이 되는 사례가 발생하여 이를 눈여겨 본 인사들은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시대에는 어버이를 닮지 못하는 것을 불초(不肖)라 하여 부끄럽게 여겼고 부모 또한 자식에게 모델링의 일차적 대상이 되어 일상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모범을 보여 왔다.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못해도 자녀들은 보모를 극진히 섬기며 효도하였다.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기면서 효도를 다하는 행동양식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던 것이다. 자녀들은 가정이라는 교육의 장에서 태어나 확대가족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인간생활에 바탕이 되는 비형식적 교육을 받고 신체, 사회, 언어, 표현, 탐구생활의 기본을 형성해 왔으며, 올바른 몸가짐과 남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에 의해 배웠던 것이다. 조부, 조모, 부모, 형, 누나 등으로부터 대인관계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절을 보고 듣고, 배워왔으며 효도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생산이 가정과 분리되고, 교육의 기능이 가정과 분리하여 국가가 관리하고 운영하는 체제로 변하게 되었다. 생산과 교육의 장소였던 가정은 사회의 전문화와 분화로 인해 그 통합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과학기술의 가속적 발달은 대규모 생산방식, 대중교육제도 등 생산과 문화를 포함하는 생활양식에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날로 증가하는 산업시설로 인하여 취업기회가 많아져서 여성인력도 산업화에 참여하게 되었고, 직장을 따라 이사를 하다 보니 가정은 핵가족화가 되어 부모를 모시고 생활하지 않아서 가정의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 그로 인해 자녀들은 가정에서 자라며 배워야 생활예절에 대해 기본적인 학습기회의 부족으로 도덕적 판단능력과 예절행동에 대해 많은 문제를 일으켜서 이에 대한 교육이 더욱 시급히 요망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부모들은 노령에 자식들로부터 봉양을 받지 않고 대부분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외롭게 보내다가 종생을 맞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런 현상을 시대적인 변화라고 몰아간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대부분의 부모세대들은 경제적으로 유족하지 못하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청년기부터 노동에 시달리며 고달픈 삶을 살아온 세대들이지만 자식들만은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일생을 고통을 감내하며 자식 뒷바라지로 살아왔다. 부모의 구로지은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불효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개인적인 행복을 유보하며 자식을 위해 살아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서 효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고 있어서 이의 복원을 위해 경주 선현들의 효행사례를 고찰하여 효도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데 그 자극적 반성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효의 개념과 효행사적 및 경주선현의 효행사적을 고찰하고 효도교육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효의 개념
효(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일 또는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이다. 또 효는 맏자식을 칭하기도 하고, ‘거상(居喪)하다’. ‘제사지내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글자의 형태로 보면 효자(孝字)는 ‘노(老)’자(字)와 ‘자(子)’자(字)가 합해진 것이며 자식이 늙은 어버이를 업고 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효경』에는 ‘효가 덕의 본이라(夫孝者德之本也)’하였다. 덕은 ‘똑바른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걷다’의 뜻을 지닌 글자로서 도를 행하여 체득한 품성을 말한다.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똑바른 마음을 지니고 행하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근본의 되는 것이 효라는 것이며, 그것이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라고 뜻하고 있다. 그래서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百行之源)이라 칭해오고 있다. 효의 대상은 옛날부터 대체로 부모로 한정되어서 자기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었다. 그런데 『서전(書傳)』에는 ‘계선조지지 위효(繼先祖之志 爲孝)’라 하여 부모에 한정하지 않고 ‘조상의 뜻을 계승하는 것을 효라고 한다.’라 하였다. 『중용(中庸)』에는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그 사업을 잘 성취하는 것’이 효라 하였다. 자손들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업 즉, 기구지업(箕裘之業)을 이어 받아 그것을 꼭 이루는 것을 효라고 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어버이를 잘 섬긴다 함은 어버이 뜻을 거역하지 않고 받들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섬기면서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부모에 대한 봉양은 물론이요, 양지(養志)의 효를 더욱 중요시 하였다. 양지는 뜻을 기르는 것 혹은 자기가 마음 먹은 것을 이룩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뜻한 바를 이룩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효를 더욱 가치 있는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효경(孝經)』에는 몸을 이 세상에 세워 진리를 행함으로써 어버이 존재를 뚜렷하게 하는 것이 효의 완성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2차원적인 속성을 갖는 효가 3차원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 효행이 된다. 효행은 행실이다. 다시 말하면 부모를 잘 섬기고 조상의 뜻을 이어 받아 이룩하는 행실 즉, filial piety이다. 이것은 품격을 나타내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버이를 정성을 다해 섬기려는 마음이 내재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효로서 인간적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인간적 행동은 어떤 사회의 법률이나 도덕률에 의한, 즉 인간에 의해 조작된 규칙을 지키는 행동보다 순수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행동을 말하는데, 이것이 가장 인간미 있는 행동이다. 인간미 있는 행동이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본성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미 있는 행동은 같은 수준의 욕구일 때는 상대방의 욕구를 희생시킬 수도 있지만, 효행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갈등을 유발하는 대상이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의 효행은 부모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성취시키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희생하는 행동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차원이 부모의 욕구 차원 보다 도 높은 차원의 욕구일 때는 부모를 설득시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행동, 즉 효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자신의 욕구를 상황이 요구하는 욕구와 비교해 볼 때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의 판단은 어느 정도 도덕적 인간이 되어 있는 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김영호. 2010). 그래서 효는 도덕적 자아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맹자는 하늘이 만물을 낳고 그 피조물을 지배하는 영원불멸의 법칙을 정해 이것을 만물창조의 목적으로 삼았다. 하늘의 법칙성이라는 것은 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질서체계이며 이는 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에 본성은 착한 것인데, 그것이 삶의 과정 속에서 세속에 오염되어 나빠진다고 하였다. 오염된 본성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 불효라는 것이다. 맹자가 지적한 다섯 가지 불효는 오늘의 사회에서도 경시할 수 없는 행동지침이라 할 것이다. 그중에서 첫째의 불효는 게을러 일하지 않아 집이 가난해져서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인간의 과업가운데 첫 번째라 하였다. 게으름은 소득이 없는 절대소비이다. 한결같게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였던 것은 게으름을 경계한 말이다. 일자리를 찾지 않고 환경만 탓하면서 구직의 게으름으로 불효하는 자식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둘째의 불효는 놀음과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 했다. 놀음을 좋아 한다는 말에는 당면한 일들을 회피하고 비정상적인 정서치중 활동을 과도히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셋째의 불효는 부유하면서도 아내와 자식의 사랑에 빠져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 했다. 낳은 자식이 온당한 인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르고 교육을 하는 것은 부모 된 자의 당위적 임무이지만 그 임무수행에 있어서 과도한 애정으로 자식의 자존적 인간형성을 저해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익애형 부모들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소외영역이 효의 부문이다. 과도한 자식사랑에 빠져 부모봉양에 대한 생각이 실종되는 불효를 경계하여야 한다고 맹자는 가르치고 있다. 넷째의 불효는 여색과 풍류를 좋아하여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입신출세해서 부모까지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 하였듯이 부모를 욕되게 하는 모든 행동은 삼가 하기를 바라고 있다. 다섯째의 불효는 다른 사람과 싸우기를 좋아하여 성격이 거칠어 자신은 물론 부모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불효 짓을 하지 않고 예절바르게 생활하는 것은 인간이 일상 속에서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예절행동이다. 예절을 모르니 효는 또한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되고 사람 노릇을 해서 사람대접을 받으며 사람과 더불어 살려면 예절을 알아서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예절을 실천하지 않음은 바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지니라.” 는 것은 자기관리와 대인관계의 올바른 예절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맹자의 다섯 가지 불효는 불후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Ⅲ. 효행 사적
1. 중국의 효행 사적
중국의 효행사적은 조선 세종 때 간행한 『삼강행실도』에 수록되어 있는 고대 중국인의 효행사적을 발취한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세종 10년(1428)에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여 대신들이 강상의 죄목에 대해 논의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세종은 집현전에서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책을 편찬할 수 있도록 직제학 설순이 책임자가 되어 편찬할 수 있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세종 14년(1432) 6월에 초고가 완결되고 이듬해 각판을 완료하여 정초(鄭招)에게 발문(跋文)을 작성케 하여 11년(1434) 11월 25일에 인출함으로써 종친과 신료들, 그리고 각도에 반포하게 되었다. 이 한문본 『삼강행실도』에 권채가 쓴 서문에 따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가운데 참고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 속에서 효자, 충신, 열녀 등 각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새겨놓고, 그 행적을 뒤에 적이 찬시를 한 수씩 붙였다.”라고 한다. 이들 사적 중에서 효행에 관한 것으로, 반종구부(潘綜救父)와 숙겸방약(叔謙訪藥)의 효행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반종구부(潘綜救父)의 효행
반종구부의 효행은 반종이 아버지와 함께 적진에게 쫓기다가 목숨을 바쳐 그의 아버지를 구한 효행이다.
진나라 반종(潘綜)이 손은지(孫恩之)의 난(亂)에 아버지와 더불어 적군에게 쫓기다가, 아버지가 힘이 다하여 “ 내 늙어서 빨리 못 가겠으니 너나 살아라.”하고 땅에 앉으니, 반종이 적군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버지는 늙었으니 살려주소서.”하고 성의를 다해 간청하니 그의 아버지 또한 적군 앞에 나아가서, “내 아들이 나 때문에 여기 있으니, 나야 죽어도 좋지만 아들은 살려 주시오.” 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적군이 그 아버지를 베려 하자 반종이 아버지를 안고 엎드리니 적군이 머리를 네 번 쳐서 반종이 이미 죽었는데, 한 적군이 와서 이르되, “이 아들이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구하니 효자 죽임이 못 할 일이다.”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다 살아났다. 관청에서 나라에 여쭈어 그 마을 이름을 순효라 하고 세금을 삼대까지 면제하였다는 성의를 다한 구부(救父)의 효행은 면연(綿延)히 잊을 수 없는 효행사적(事蹟)이다.
“潘綜 吳興人 孫恩之亂 祅黨攻破村邑 綜與父驃共走避賊 驃年老行遲 賊轉逼驃 驃語綜曰 我不能去 汝走可脫 幸勿俱死 驃困乏坐地 綜迎賊叩頭曰 父年老 乞賜生命 賊至 驃亦請曰 兒年少能走 爲我不去 我不惜死 乞活此兒 賊因斫驃 綜抱父於服下 賊斫綜頭面 凡四創 綜已悶絶 有一賊來語衆曰 此兒以死救父 殺孝子不祥 賊乃止 父子並得免 元嘉四年 有司秦改其里爲純孝 蠲租布三世”
2) 숙겸방약(叔謙訪藥)의 효행
해 숙겸의 어머니가 풍습병으로 수년간 앓고 있었다.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고 고통이 매우 심하여서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해숙겸은 할 수 없이 매일 밤에 뜰 가운데에 나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늘에 빌었다. 그랬더니 허공에서 이르기를 “정공등(丁公藤)으로 술을 빚어 먹으면 나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의원에게 물으니 다 모른다고 하므로 숙겸은 정공등을 얻으려고 두루 다녔다. 어느 날 이 도(都)의 깊은 산중에 도달하여 백발이 만연한 노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 노인은 얼굴에 광채가 가득하였고 정신이 맑아 보였으며, 도끼로 나무를 베기에 “나무를 무엇에 쓸 것인가?”하고 물었더니, 대답하되, “정공등이다.” 하기에 절하고 울며 얻으러 다니는 뜻을 말하니, 어여삐 여겨 네 조각을 주면서 술 빚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문득 사라졌다.
숙겸은 가르쳐 준 방법대로 술을 빚어 어머니께 드려서 그 술을 마시고 어머니는 병이 즉시 나았다.”는 것이다.
(解叔謙 鴈門人 母有病 叔謙夜於庭中稽顙祈福 聞空中語云 此病得丁公藤爲酒 便差 卽訪醫及本草 皆無識者 乃求訪至宜都郡 遙見山中一老公伐木 問其所用 答曰 此丁公藤 療風尤驗 叔謙便拜伏流涕 具言來意 此公愴然 以四段與之 幷示以漬酒法 叔謙受之 顧視此人 已忽不見 依法爲酒 母病卽差”
2. 한국의 효행 사적
1) 지효감물(至孝感物)의 이야기
김극일(金克一)은 김해사람이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몸에 부스럼이 심하게 나서 매우 불편하였다. 요즈음 같으면 병원의 피부과 가서 치료를 받으면 쉽게 치유될 수 있지만 지난 시대에는 의료기관이 없어서 병원에 갈 수 없고, 동네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극일은 어머니의 부스럼을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병균으로 인해 피부 조직에 염증이 생겨서 고름이 나오는 더러운 질환인데 극일은 그것을 입으로 빨아서 고름을 말끔히 제거하여 어머니의 피부질환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병환에서도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다.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며 병세를 판단하여 효과적인 치료에 도움을 주었으며, 양친이 돌아가시자 6년간 시묘사리를 하였다. 부모님의 구로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비록 묘소 곁에 여막을 지어 정성을 다해 조석으로 배묘하며 묘소를 지키는데 범이 묘소 곁에 와서 새끼를 낳아 길렀다. 그래서 극일은 범의 새끼를 마치 가견(家犬)을 기르듯이 제사를 지내고 물린 음식을 주어 먹여서 범의 새끼가 잘 자라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가 사랑하였던 첩을 극진히 섬겼다. 아버지 생전에 섬겼던 그대로 효성을 다해 섬겼을 뿐만 아니라 부첩(父妾)이 죽었을 때도 예법에 따라 정해진 기간 동안 거상(居喪)하였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고 오직 아버지가 사랑했던 첩이므로 부모의 예로 복을 입고 치상을 하였던 것이다. 첩 때문에 불편하고 소란스러웠던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 사별과 더불어 인연을 끊고 싶었을 터인데 극일은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며 효성을 다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관아에서 확인하고 조정에 보고하니 천순(天順) 갑신년에 김극일에게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그리고 양욱(梁郁)은 산음사람이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육년간 시묘하였다. 직접 흙과 돌을 지어다 무덤을 만들었다. 비록 힘이 들더라도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공을 생각하며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기의 힘과 정성으로 성분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무덤 위에 우래 같은 소리가 있기에 기이하여 나가보니 큰 범이 땅을 벋디디고 큰 돌 셋을 무덤가에 굴려오니 사람들이 양욱의 효성에 범이 감동하여 도아 준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사실이 관아에서 알고 조정에 아뢰어 양욱에게 정려와 벼슬이 제수되었다는 것이다.
『속삼강행실도』에 나오는 효자이야기다. 『속삼강행실도』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의 동양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는 귀중한 옛 도서이다. 이 책자는 조선 중종이 1514년에 신용개 등에게 명하여 효자 36명, 열녀 28명, 충신 5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사적을 한문과 그림으로 설명하고 한문으로 기록된 사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의 간행 목적은 백성들의 윤리도덕을 순화하고 미풍양속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명에 의해 편찬된 책자이다. 시묘사리를 하는 데 종종 호랑이가 나타내서 효자의 시묘사리를 지켜 준 사례가 발견되어 왔다. 요즈음 산에는 수목이 울창하더라도 사람을 헤치는 동물들이 서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산돼지들이 더러는 설치고 있지만 늑대, 호랑이, 사자 같은 야수들은 종적을 감추고 보이지 않는다. 지난 시절에는 그런 짐승들이 많아서 산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효자가 시묘하는 모습을 지켜 본 범들이 그 효행에 감동하여 여타 짐승이 나타나서 효자를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묘소 근처에 와서 지켜준 사례는 지효감물(至孝感物)의 깊은 의미를 느끼게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난 시대의 효행사례를 들려주고 읽게 하는 것은 윤리도덕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해본다.
Ⅳ. 경주 선현의 효행 사적
1. 신라시대의 효행 사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발견된 효행설화는 경덕왕(景德王)의 효행과 향덕(向德)・성각(聖覺)・지은(知恩)・진정법사(眞定法師)・대성(大成)・손순(孫順)의 효행 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경덕왕・ 향덕・ 대성・ 손순의 효행에 관하여 다음과 간추려 본다.
가. 경덕왕의 효행
신라 경덕왕은 아버지인 성덕왕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대종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훙서(薨逝)하였다. 그 뒤를 이은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 7년 771년에 종을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 어버이의 뜻을 계승해서 성취한 효의 사례이다.
나. 향덕(向德)의 효행
향덕은 웅천주(州治는 지금의 公州)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부(父)의 이름은 선(善)이요 자는 반길(潘吉)인데, 천성이 온량(溫良)하여 향리에서 그의 행실을 떠받들었다. 모(母)는 그 이름을 모른다. 향덕도 역시 효순(孝順)으로서 세상에서 칭찬을 받았다. 천보(天寶, 唐玄宗 연호) 14년 을미(乙未)(신라, 경덕왕 십사년 서기 755)에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었는데 여역(癘疫)까지 겹쳤다. 부모가 주리고 병들고 더욱이 어머니는 종기가 나서 모두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이 밤낮으로 옷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였으나 봉양할 수 없었다. 이에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고 또 어머니의 종처를 빨아내어 모두 평안하게 되었다.
향사(鄕司, 지방관청)에서는 이 일을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하교(下敎)하여 벼 삼백곡(三百斛, 1곡은 10말), 집 한 채와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리고, 당해 관(官, 有司)에 명하여 석비(石碑)를 세우고 사실을 적어 표시(標示)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곳을 효가(孝家)라고 이름 한다.
다. 대성의 효행
모량리에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었다.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자인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니, 그 집에서 몇 이랑의 논을 주어 의식의 밑천을 삼게 되었다. 이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흥륭사에서 육윤회(六輪會)를 베풀고자 복안의 집에 이르러서 시주를 권하자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축복하기를,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될 것이며 안락하고 수명이 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성이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승려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니, 하나를 시주화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함이 없어 지금은 곤궁한데, 이제 또 시주를 하지 못하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입니다. 우리의 용전(傭田)을 법회에 시주하여 수세의 응보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어머니가 좋다고 하였다. 이에 전답을 점개에게 시주하였는데, 얼마 후 대성이 죽었다. 그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너의 집에 의탁하려고 한다.”라는 소리였다. 집안사람들이 깜작 놀라서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던 날과 같은 때였다. 그래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왼쪽 주먹을 펴지 않고 있다가 7일 만에 폈는데, 금간자(金簡子)에게 ‘대성(大成)’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집안에서 두루 봉양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유렵(遊獵)을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토함산으로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아랫마을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책망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라고 하였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 주기를 비니,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이불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이후부터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위하여 곰을 잡은 곳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이에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으며,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우고 신림(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부모의 상(像)을 설치하고 성대히 하여 길러준 노고에 보답함으로써 한 몸으로 2세의 부모에게 효도하였다.
라. 손순의 효행
신라 손순은 흥덕왕 때 사람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한 아이가 항상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었다. 그것은 본 손순이 딱하게 여기서 그의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또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실 수가 없소. 라고 하며,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 모량 서쪽에 있음) 북교(北郊)로 가서 땅을 파고 아이를 묻으려 하였다. 그런데 땅 속에서 석종(石鐘)이 나왔다. 부부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는데, 아내가 말하기를 “이상한 물건을 얻음은 아마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어서는 아니 됩니다.”라고 하자. 남편 또한 그렇게 여겨서 아이를 종과 함께 업고 집으로 돌아와서 들보에 매달고 쳤다.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자. 그 사실을 모두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날에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려고 하자, 하늘이 금솥을 내려 주었다. 이제 손순이 아이를 땅에 묻자 석종이 나왔으니, 이는 전후 사실에 부합되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멥쌀 50석을 주어서 지극한 효를 기렸다.
(新羅 孫順興德王時人 養母至孝 有小兒 每奪母食 順 謂其妻 曰兒奪母食 兒 可得 母 難再求 負兒 歸醉山 堀地欲埋 忽得石鍾 甚奇 夫婦驚怪 妻 曰得物 殆兒之福也 不可埋也 順 亦以爲然 乃負兒與鍾 而還家 懸鍾於樑 撞之 聲聞王宮 王 使人審之 具奏 王 曰昔 郭巨瘞子 天賜金釜 今 孫順埋兒 地出石鐘 前後同符 乃賜屋一區 粳米五十石)
2. 고려시대의 효행 사적
가. 손시양의 효행
손시양(孫時揚)은 고려 명종(明宗, 1170-1197) 때 경주에 살았던 효자이다. 그는 연로한 부모를 시종하면서 어려운 살림사이를 하였으나 큰 근심 없이 생활하였다. 가을철이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아버지 윤백(允伯)이 괴질에 걸려서 효험있는 약 한 번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손시양은 경주 남쪽 냉천사 북쪽 산에 장사지고, 산소 옆에 여막을 지어서 삼년동안 시묘를 하였다. 때로는 밤에 산짐승들이 여막을 흔들면서 위협하였으나 손시양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바르게 앉아 굳굳하게 버티었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삼년간 시묘사리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동안 어머니께 하지 못했던 효도를 하면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는 것도 바쁘지만 시간이 나면 글도 읽으면서 단란하게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어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어느 이른 봄날에 노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손시양은 금산 중간 골에 유택을 마련하여 장사 지내고 이번에도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살아 계실 때처럼 문안을 드리면서 극진하게 시묘사리를 하였다. 산 중에서 보내는 생활이라 여러 가지 여건이 불편하였으나 손시양은 조금도 불평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참고 견디면서 생활을 하였다. 이복이 낡아 바지는 무릎이 나오고, 겨울철 먹을 물이 없을 때는 눈을 녹여서 먹기도 하였다. 고기를 먹지 않아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병이 들어도 오로지 어머니를 향한 효심만은 변하지 않았다.
삼년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와서도 부모님을 향한 효심은 변함이 없었다. 6년에 걸친 두 번의 시묘사리가 온 고을에 알려지자 당시 유수(留守)가 듣고 신하를 보내 그의 효행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왕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랬더니 왕은 그의 효행을 칭송하고 기쁘게 생각하였으며, 그에게 교지를 내렸고, 또한 마을에 정표(旌表)를 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본을 받도록 하였다. 고려 명종 12년(1182)에 정려비를 세웠으며, 이 비석은 금나라 연호인 대정(大定)으로 기록된 금석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보물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3. 조선시대의 효행 사적
조선시대에 효행으로 정려를 받은 경주효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삼강행실도』, 『동경잡기』, 『금오승람』, 『경주시사』, 『왕도경주』 등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효행사적을 형태별로 구분해 보면, 삼년시묘 효행, 단지의 효행, 고기봉양 효행, 살을 베어 치유한 효행, 종기를 빨아 치유한 효행, 호랑이와 관련된 효행, 불 속에 뛰어 들어 부모를 구출한 효행, 금식효행, 아버지의 눈을 뜨개 한 효행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족별 효행을 살펴보면, 전 가족 효행, 양세효자, 형제효자, 삼형제 효자, 사형제 효자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가. 3년간 시묘한 효행
삼년시묘는 부모 거상(居喪) 중에 3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매일 배묘하며 묘를 보살피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부모 생전에 다하지 못한 구로지은을 갚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스스로 통제하면서 황반초식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삼년이란 긴 기간 동안 가정사리를 돌보지 않고 사회생활 등을 포기하면서 불피풍우하고 생활여건이 좋지 않는 산간에서 시묘를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강의 심한 훼손을 감당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생활이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3년간 시묘생활을 한 경주의 효자는 김기손(金基巽, 정려), 김성화(金星化, 한성부좌윤에 증직), 김응벽(金應璧, 참봉, 정려), 김응규(金應奎, 좌통례, 정려), 김응정(金應井, 인의, 정려), 김일구(金鎰九, 정려), 김종일(金宗一), 김현술(金顯述, 영릉참봉), 남득온(南得溫, 정려), 박진수(朴震秀), 박춘우(朴春遇,부사), 박희남(朴希楠)・박희장(朴希樟)・박희정(朴希楨), 손성회(孫星晦, 호역감면), 오여번(吳汝蕃), 이군보(李君寶, 능서), 이변룡(李變龍, 습독), 이상헌(李尙獻), 이세번(李世蕃, 동몽교관), 이승증(李承曾, 정려), 이시강(李是橿), 이시인(李時仁), 이인희(李仁希), 이효증(李孝曾), 진위(陳韡), 최동량(崔東亮), 최영린(崔永嶙), 황윤장(黃潤璋, 포상), 황치근(黃致謹, 참의) 등이다.
삼효자 김응벽・김응규・김응정 삼형제의 효행 사적 |
김응벽 삼형제의 효행한 사적은 『朝鮮王朝實錄』, 『東京雜記』 『慶州市史』 등에 수록되어 있다.
삼효자의 휘는 응벽 응규 응정이다. 본관은 월성이고 경순왕의 제삼왕자 경주군 영분공 휘 명종의 26세손이다. 10대조는 병조판서 휘남보(南寶)이고, 조고는 조선 세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도사를 역임하였고 한상당군과 같이 북방을 지켰으며 이시애란에 창의 모병하여 평정에 입공하여 가선대부행밀양도호부사를 제수 받고 자헌대부병조판서의 증직과 요광원 사방 십리를 사패 받은 충암공 휘 귀일(貴一)이다. 아버지는 영암훈도 휘신종(信宗) 어머니는 정부인 언양김씨이며 이상의 따님이다. 1551년 신해 4월 16일에 친상을 당하여 일체 옛 제도를 따랐고 몸소 흙과 돌을 져다가 정사 지냈다. 응벽은 아우 응규 및 응정과 같이 아버지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 하였다. 비록 사나운 바람과 큰 비가 퍼부어도 산소에 절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항상 계단 위에 서서 곡하였는데 삼형제의 발이 닿았던 곳에는 움푹 패어 모두 깊이가 몇 마디쯤 되었다.
10여 일간 장맛비가 계속되는 하루 저녁에 홀연 소리가 들리기에 삼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들어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놀라서 여막을 나와 보니 보이는 바가 없었다. 잠시 후에 또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신주를 모시고 함께 나와 살피자 얼마 후 여막의 북쪽 산의 좌우가 무너져 여막을 덮쳐 버렸다. 또 한 마리의 개를 길렀는데 이름이 신춘(神春)이었다. 집안의 소식을 알고자 하면 삼형제공이 반드시 개 이름을 불러 개의 목에 편지를 메달아 각각 집으로 보냈다. 그러면 개가 그 뜻을 이해하고 세 집으로 오고 갔는데, 삼형제 집에서 역시 개의 목에 편지를 매달아 통지하였다.
3년 상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황반초식하며 재계하고 삼가 가묘에 참배하였다. 이러한 일을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다.
(『東京雜記』卷之三. “金應璧與弟應奎應井 俱有孝誠 及遭親喪 三人 廬于墓側 雖疾風大雨 不廢拜墓 常立階上而哭 三人當足處 皆穿深數寸許 一夕 風雨大作 忽有聲 三人 聚首而聽 乃亡父聲也 驚出廬外 則無所見 俄而又有其聲 心怪之 抱神主 同出候之 少頃 廬北之山 左右崩頹 壓於廬墓 又畜一犬 名之曰神春 欲知家信 則三人 必呼犬名 繫書于頸 各送其家 犬 能解其意 往復于三家 家亦繫書以通 服闋 歸家 晨昏 必齋服 祗謁家廟 終身不廢 事聞旌閭 閭在府南十里金光堤上”)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조선 명종 16년(1561년, 辛酉) 윤 5월 21일에 삼형제에게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최초의 정려비는 경주 남쪽 금광제 위에 세웠다. 이 비는 몇 차례 이건(移建)되어 현재는 경주시 탑동 숭덕전 동문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순조4년 1804년에 재차 중건한 삼효각의 비문(碑銘)은 통정대부 경주부윤 진병마절도사인 박종경(朴宗京)이 찬하였고, 축문은 병조좌랑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가 찬하였다. 삼효각(三孝閣)이란 현판은 칠원현감 최심건(崔心健)이 썼다.
김응벽은 참봉, 산사 등 각종 직책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족숙 월암 김호(金虎), 매제(妹弟) 이삼한(李三韓)과 더불어 아우 응규 응정, 조카 경두(景斗), 형두(亨斗), 건두(建斗), 광두(光斗)를 거느리고 창의하여 노곡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탁월한 전과를 올려 그 공적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 훈공을 받았으며, 녹권에 등재 되었고, 계속 승차하여 벼슬이 가선대부 금군별장에 올랐다.
김응규는 선무랑, 경력(經歷), 통례원 좌통례(左通禮)에 오랐고, 김응정은 음사로 사옹원 주부, 통례원 인의에 오랐다. 특히 김응규의 장자 경두(景斗)는 조산대부 봉화현감, 차자 형두(亨斗)는 훈련원 봉사에 올랐으며 계자 건두(建斗)는 선무원종공산 3등에 녹훈되었다.
김응정은 음사로 사옹원 주부를 거쳐 통례원 인의를 역임하였으며, 아들 광두(光斗)는 아버지의 효행으로 사옹원주부의 벼슬이 사사(賜仕)되었고 선조 때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김응벽 김응규 김응규 삼형제는 부모를 잘 섬겨 세칭 ‘동도삼효자’의 칭송을 받았으며, 나라가 위란(危亂)할 때는 거연(遽然)히 창의하여 위민보국으로 충효양전(忠孝兩全)의 모범이 되었다.
삼효자공의 효의(孝義)와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2015년 12월 17일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 비는 경주시 탑동 소재 삼효각(三孝閣) 남쪽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국가정보원 제1차장을 역임하고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인 행정학박사 염돈재(廉燉載)가 찬(撰)하였다. 비의 전면 비명(碑銘)은 12대손 교육학박사 김영호(金泳豪)가 썼다.
나. 단지(斷指)의 효행
단지는 부모나 남편이 사경에 이르렀을 때 피를 먹임으로 회생을 바라는 극단의 조치로 손가락을 자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단지는 어떠한 굳은 명세의 표시를 하거나 혈서로 맹약할 때 행해져 왔다. 특히 부모나 남편이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곁에서 임종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불효나 불경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공감해 보려는 도덕적 행위가 아닐까 여겨진다.
경주인으로서 부모의 병환을 치유하기 위해 단지를 해온 효행이 『경주시사』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된다.
권치웅(權致雄, 공조참의에 증직), 김기손(金基巽, 정려), 김사준(金士俊, 면신역), 김쉬하(金淬河, 통정대부 부호군 증직), 김용검(金用劒, 이조참판에 증직). 김은필(金殷弼), 김정기(金禎琪, 통정대부에 증직), 김지련(金志鍊, 사복시정 증직), 김치홍(金致洪, 포상), 박언목(朴彦穆, 포상), 박춘화(면호역), 손만걸(孫萬杰), 윤주백(尹周伯, 사간원 정언에 증직), 이도겸(李道謙, 조종대부 동몽교관에 증직), 이여주(李汝舟), 이영(李瑩), 이용우(李容佑), 이창영(李昌馨), 정명서(鄭明緖), 정선용(鄭善鎔, 포상), 정치익(鄭致翼, 동몽교관에 증직, 정려), 정환익(鄭煥翼, 교관 추증, 정려), 조봉정(曺鳳貞), 주병수(朱柄守), 한경동(韓暻東), 허조원(許調元, 정려) 등이다.
허조원(許調元)의 효행 사적 |
허조원이 나이 13세 때 아버지 허정문이 광질(狂疾)에 걸렸다. 허조원이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약과 섞어 드리자 병이 곧 나았다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마을에 정문(旌門)이 내렸다.
(『東京雜記』卷之三.“許調元 年十三歲 父程文 得狂疾 自斫手指 和藥以進 疾乃愈 事聞旌閭.”)
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행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효행은 최포가 진사에 입격했다는 아들이 답하는 반가운 말을 듣고 붙은 눈이 열렸다는 것으로 『동경지(東京誌)』3권(卷之三)에 사적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최포(崔包)의 효행 사적 |
최포는 경주 남쪽 천면 부리에 살았다. 어려서 문명이 있었고, 효성이 돈독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눈이 멀게 되자 최포는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식사 때마다 직접 음식을 받들었다. 그는 서울에서 진사시험을 치른 후 방이 붙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도중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을 도중에 들었다.
집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뵈니, 아버지가 “너는 과거시험에 합격했느냐?”고 묻는 아버지의 물음에 최포가 “합격했습니다.” 라고 답을 하자 . 이에 아버지는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놀라 일어나니, 두 눈이 갑자기 열렸다. 이 사실을 마을에서 듣고 효성의 감화라고 말하였다.
(『東京雜記』卷之三.崔包 居府南川面鳧里 少有文名 誠孝篤 至父病盲 包須臾不離 側朝夕之食 必自手進 及擧進士 過試後 不待榜 下鄕中 路聞榜 歸謁于父 父 曰汝 得叅榜否 包曰 得叅榜否包曰 參榜矣 父大聲驚起 兩眼忽開 人謂孝感所致)
이상과 같은 『동경잡기』의 기록을 볼 때 최포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총명하다는 이름이 있었고, 부모님을 극진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특히 아버지의 안환으로 눈을 뜨지 못하게 되자 잠시라도 곁은 떠나지 않고(包須臾不離)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눈과 손이 되어 조석식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側朝夕之食 必自手進). 또한 과거 시험을 치루고 합격을 알리는 방을 기다리지 않고 아버지의 식사가 걱정되어 내려왔다는 것은 과거의 입격 여부보다는 아버지를 시봉하는 것이 먼저라 생각하고 효행을 행한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가 내려지게 된 것이다.
후손들이 공의 출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비각을 세웠으나 세월에 오래되어 퇴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1988년에 후손들이 영사정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는 저당산 동쪽 산록에 비각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문은 이채원(李綵源)이 지었고, 글씨는 정병찬이 썻으며, 정효각의 편액 글씨는 계전 최현주가 썼다.
최포는 자가 대보(大甫) 호는 우천(愚川)이며 본관이 경주이고 1516년에 출생하여 1566년에 졸하였다. 시조 최치원의 15세손이며, 고려 공민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관가정 최청(崔淸)의 5세손이다. 공의 선조는 경기도 본래 양주(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1리)에 살았는데, 아버지 최광윤(崔光潤)이 열여섯 살 때 현재의 내남면 부지1리(川面마을)에 내려와 복거(卜居)하였다. 공은 이곳 천면마을에서 태어났다.
영사정(永思亭)은 후손들이 효자 최포(崔包)의 의덕(懿德)과 효성(孝誠)을 기리기 위하여 1924년에 건립한 정자로서 현재 경주시 내남면 부지1리 67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영사(永思)라는 것은 영언효사(永言孝思)의 뜻이며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히 추모한다는 말이다.
이 정자의 북쪽은 기린산(麒麟山)이 아름답게 둘러싸고 남쪽 축대 아래 청석(靑石)이 반석으로 깔린 여천(麗川)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양 옆에는 아름드리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여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정문인 애일문(愛日門)을 만난다. ‘애일(愛日)’이란 날을 아끼며 부모님께 정성껏 효양(孝養)한다는 말이다. 문을 들어서면 영사정(永思亭)의 편액이 가운데 보인다. 영사정은 정면 6칸이며, 중앙의 넓은 강당은 대청마루이고, 동·서의 양쪽은 온돌방과 난간을 두른 누(樓)가 있어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목조건축의 독특한 양식이다. 동재(東齋)는 열화료(悅話寮), 서재(西齋)는 침천헌(枕泉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기문(記文)은 최현필(崔賢弼)이 지었으며, 1993년에 중수(重修)하였다. 후손들은 경주시 내남면 부지1리에 집성촌을 이룩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오늘날도 부모를 잘 섬기며 조상을 정성을 다해 숭모하는 대표적인 문벌로 알려져 오고 있다.
최포(崔包)공이 매일 이 보호수 아래에서 아버지의 안환(眼患)을 낫게 해 달라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고 하며 또한 과거에 꼭 합격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다짐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수령(樹齡)이 수 백 년 정도가 되는 우람한 이 보호수는 영사정 입구에 있다.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마을의 쉼터가 되고 있다.
라. 고기봉양효행
고기 봉양 효행은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의 기력회복을 위하여 고기를 마련하여 영양보충으로 건강을 회복한 효행이다. 경주의 효자 가운데 겨울철에 두꺼운 얼음을 깨어서 잉어를 낚고, 꿩과 노루, 토끼, 멧돼지를 잡거나 영지, 산삼 등을 구하여 부모의 쇄약해진 건강을 회복한 효행이 발견된다. 당시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해 볼 때 추운 날씨에 먼 바닷가로 나가 고기를 잡아 온다는 것과 귀한 산삼을 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강에 나가 잉어를 낚아서 부모의 반찬을 마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고는 할 수 있으나 그것도 효심이 없다면 자발적으로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병석에 계시는 부모님이 원하시거나 원기회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는 만사를 제치고 힘을 다해 구했던 것 같다. 꿩과 노루, 잉어 등이 효행사례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런 종류의 고기가 맛이 좋고 특히 환자에게 좋은 보양식으로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이 분야에 효행을 다한 경주효자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곽이륜(郭爾崙, 곰 기름, 형조좌랑 추증), 권의국(權宜國, 잉어, 영릉참봉 제수, 통정대부), 김규선(金奎善, 영지, 포장), 김두하(金斗夏, 잉어, 감호역), 김성하(金聲夏, 잉어, 감찰 증직, 정려), 김성화(金星化, 노루, 한성부 좌윤 증직), 김수만(金壽萬, 포도, 정려), 김일구(金鎰九, 잉어, 산삼, 사직서령, 이조판서 증직, 정려), 김정기(金禎琪, 영지, 통정대부 증직), 김치도(金致道, 토끼, 동몽교관 증직), 박정찬(朴貞燦, 산토끼, 꿩), 이광익(李光翼, 인삼), 이상백(李尙白, 水鷄, 감호역), 이월서(李樾瑞, 꿩 노루, 동몽교관), 이정배(李廷培, 노루), 이하곤(李河坤, 잉어), 최기형(崔基衡, 물고기), 황계동(黃계동, 멧돼지, 감호역), 황우로(黃祐老, 호경골, 감연호잡역) 등이다.
마. 종기를 빨아 고친 효행
종기를 빨아 고친 효행은 부모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고름을 제거하여 고친 것이다. 종기의 고름 속에는 인체에 해로운 바이러스가 많아서 감염될 우려가 많지만 부모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기꺼이 입으로 빨아서 치유해야겠다는 것은 쉽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의 경우는 옮겨온 병균에 의해 목숨을 희생시켜야 하는 위험이 없지 않은데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부모의 통성을 듣고 있는 자식이 부모의 은공을 안다면 가세가 극빈하여 약을 구할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빨아내어서라도 고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어 고친 것은 진정한 효심이 아닐 수 없다.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한 경주효자는 다음과 같다.
김규선(金奎善, 포장), 김두하(金斗夏, 호역감면), 김사범(金思範), 오성건(吳成建, 포상), 이동춘(李東春), 이호영(李昊榮, 동몽교관 제수, 정려) 등이다.
바. 허벅지 살을 베어 치유한 효행
이 효행은 가정의 경제 형편이 몹시 곤궁하여 저잣거리에 나가 고기를 사 올 수 없어서 병환으로 기력이 쇠진(衰盡)한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허벅지 살을 베어 약고기로 드려서 부모의 병을 낫게 한 효행이다. 이 분야의 경주효행 인물은 다음과 같다.
김상동(金尙東, 면호역), 이운발(李運發, 동몽교관 증직), 이하곤(李河坤), 윤씨(尹氏, 통정대부 최민호의 처) 등이다.
사. 불 속에 뛰어들어 부모를 구출한 효행
불이 났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속에 뛰어 사경에 이른 부모를 구출한 경주효자는 우정택, 최계생 등이다.
우정택(禹鼎宅)의 효행 사적 |
우정택(禹鼎宅)은 아버지가 선산에 난 불을 끄기 위해 화염을 무릅쓰고 달려가니 바람이 사나워 불길이 그를 사방으로 에워 싸 사경에 이르렀다. 정택은 그 소문을 듣고 급히 달려와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드니 모두 말렸다.
“아버지가 선조를 위해 죽으면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죽는 것이 사람의 도리로써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고 불 속으로 들어가 옷을 벗어 아버지를 감싸 업고 나와 아버지는 생명을 보전했으나 그는 3일 후에 화상으로 죽었다. 제사를 받았다.
아. 호랑이와 관련된 효행
호랑이와 관련된 경주효자로는 김윤손, 박영곤, 손만걸 등이 발견되면 그 효행
사적은 다음과 같다.
김윤손・박영곤・손만걸의 효행 사적 |
김윤손(金允孫, 정려)은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보고 몸을 던져 쫓아가서 왼손으로 호랑이의 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격살하여 아버지를 구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가 세워졌다.
(『東京雜記』 卷之三. 金允孫 父 爲虎所攫 允孫 挺身逐虎 左手 扼其胡 右手 塞其口 因擊殺之 父 得生 事聞旌閭)
박영곤(朴永坤)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호랑이가 나타나 어머니에게 덤벼들자 도끼로 호랑이를 쳐서 죽이고 어머니를 구출하였다. 관부에 알려지니 호역을 면하게 되었다.
손만걸(孫萬杰)은 아버지가 병을 앓고 있을 때 10리 밖에 나가서 약재를 구하여 늦게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길을 막았다. 아버지 병환이 위급하다고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 호랑이를 깨우쳐 이르니 호랑이가 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효행으로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았다.
자. 금식효행
금식효행은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죽이나 나물밥을 먹거나 술과 고기를 금식하며 근신한 효행이다. 이런 효행을 한 경주효자는 다음과 같다.
이광익(李光翼, 3년간 죽 먹기), 이양호(3년간 죽 먹기), 장수의(張守義, 3년간 술과 고기 금식), 정시구(鄭時玖, 3년간 죽 먹기), 주담수(朱聃壽, 3년간 죽먹기), 최세보(崔世輔, 3년간 나물밥 먹기) 등이다.
차. 운구 및 설원(雪冤)의 효행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시봉을 다하고 사후에 장거리 운구(運柩)와 관직을 복작시키는 설원의 효행을 한 경주효자 이전인의 효행사적이 『東京誌』 제3권에 다음과 같이 발견된다.
이전인(李全仁)의 효행 사적 |
이전인은 회재(晦齋) 선생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약관 때 이미 서천잠(誓天箴)을 짓고, ‘차라리 성인을 배워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나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다. 중종 34년(1539) 회재가 전주부윤으로 재임할 때 나라의 재이(災異)가 있었다.
나라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널리 구하자 회재가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지어서 공으로 하여금 서울로 가서 상소하게 하자 중종이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여 세 본을 베껴 동궁과 외조(外朝)가 두루 읽어보게 하고, 특별히 품계를 높여 주었다.
인종 원년(1545)에 회재가 강계에 귀양 갔을 때 공은 그곳으로 가서 정성을 다해 봉승(奉承)하였다. 공은 날마다 부친 곁에서 동정(動靜)과 어묵(語黙)에 대해 관감(觀感)하고 글을 배우며 질의한 것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니, 곧 『관서문답』이다. 그 해 겨울에 회재가 안치 중에 돌아가니 어느 곳에도 의지할 없었다. 잠계는 황망 중에도 혼자서 치상하고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아버지 회재선생의 시신을 싣고 운구할 때 빙설이 온 산을 덮어 관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어떤 나무꾼이 흙을 매고 길을 닦아서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하였으나 공은 그대로 영구 앞에 엎드려 있으니, 보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상을 마치고 나라에 글을 올려 선생이 지은 『진수팔규』를 바치니, 명종이 경상도 감사에게 글을 내려 말하기를, “지금 이전인이 올린 글을 보았다. 몸은 초야에 묻혀 있으나 그 아버지가 지은 진수의 정성을 잊지 않으니, 진실로 가상한 일이다.”라고 하며 선생의 관직을 다시 주라고 명하였다. 또 선생의 문집을 가지고 퇴계 선생의 문하에 왕복하여 발휘한 바가 있었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그를 칭찬하며 “이전인은 시와 서를 익히고 올바른 방도를 안다.”라고 말했다.
(『東京雜記』 卷之三, 李全仁晦齋先生之庶子 從先生關西謫所 晝夜侍側 言動必記 作關西問答錄 先生 易簀 輿櫬而返 氷雪盈山 輀不得進 時 有樵夫 負土鋪路 使之安行 全仁 露伏柩前 觀者灑泣 喪畢 陳疏 獻先生所撰 進修八規 明廟 不諭監司 曰今 觀全仁疏辭 身在草野 不忘其父進修之誠 良用嘉焉 命復先生官職 又以先生文集 往復於退溪先生門下 有所發揮焉 退溪先生 嘗稱之 曰習詩書知義方)
퇴계는 공의 호가 없음을 알고 ‘잠계(潛溪)’라 지어주었으며 선고의 행장을 청하여 받았다. 공은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장산서원(章山
書院)에서 봉향(奉享)해 오고 있다. 본래 장산서원은 정조 4년(1780)에 영천군 임고면 장산리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5년(1868)에 금령으로 훼철되었고, 2007년 4월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92〜1번지로 이건 복향 되었다.
묘우(廟宇)는 선계묘(善繼廟), 강당은 지습당(智習堂), 동 서재는 심고재(尋古齋)와 지사재(志思齋), 삼문은 초요문(超邀門), 그리고 경각과 관리실이 있다.
장산서원 편액 글씨는 박광보, 선계묘 지습당 초요문은 박양보가 썼다. 심고재와 지사재는 박문환, 경각은 최채량이 썼다. 복향 상량문은 권헌조, 복향기문은 이영원, 봉안문은 이진기가 지었다. 향사는 매년 3월 초경일(初庚日)에 봉행한다.
증통훈대부예빈사정잠계이공사적비(贈訓通大夫禮賓寺正潛溪李公事蹟碑)는 서기 1979년 을미(乙未) 12월 상한(上澣)에 잠계선생기적비건립위원회(潛溪先生紀蹟碑建立委員會)에서 세웠고, 비문(碑文)은 성균관장 밀성(密城) 박성수(朴性洙)가 찬(撰)하였으며 글씨는 족후손(族後孫) 석근(錫瑾)이 썼다.
Ⅴ. 맺는 말 및 제언
효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근본이 되는 덕목이다. 그래서 효는 자기 관리와 사회인으로서의 대인관계를 원만히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되고 사람 노릇을 해서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남과 더불어 살려면 무엇보다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은 사람끼리 약속해 놓은 생활방식인 예절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효는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 발하는 성향을 갖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힘에 의해 나타나는 효는 진정한 의미의 효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효의 가치를 모르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다운 사람과 존경받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관리와 대인관계의 올바른 예절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예절행동 중에서도 효행이 백행의 근원이라 하였다(孝百行之源). 사람다워지려는 자기관리는 수기(修己)라 하고, 남과 어울려 함께 사는 대인관계를 치인(治人)이라 한다. 수기하는 예절은 자기의 안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에게 작용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그때의 본질은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공경의 바탕은 효가 근본이고 사랑의 근본은 인류애이다. 선현들은 신독(愼獨)과 안인(安人)을 함양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독은 홀로 있을 때 자기를 관리하는 요령이고 안인은 남을 편안하게 하려는 대인관계 요령이다. 효는 자기를 스스로 속임이 없는 무자기(毋自欺)의 양심(良心)으로 정성을 다해 신독과 안인을 실천하는 보본의 참마음행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마땅히 힘을 다하여 극진하게 부모를 모시고 부모의 분신으로서 부모의 고통을 대신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산간초려에서 시묘를 했던 것이며, 부모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불가의 답이 아니라 구하여 바쳤으며, 육신의 고통도 기꺼이 참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난 시대의 경주의 효자가 보여준 효행은 다양한 상황에서 무자기의 양심으로 신독 안인의 덕행을 실현한 것으로 보아진다. 부모 생전에는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고, 병환에는 백방으로 구약처방 하였으며, 환부를 빨아 피부질환을 낫게 하였다. 생활이 곤궁하여 고기를 구할 수 없을 때는 허벅지 살을 베에 영양실조사를 극복하였는가 하면, 불 속에 휩싸여 사경에 이른 부모를 목숨 바쳐 구출하였고, 호랑이가 부모를 물고 가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를 격살하여 부모님을 구출하였던 것이다. 특히 부모가 바라던 과거에 입격하여 아버지의 맹목을 눈뜨게 한 효행, 부모의 설원(雪冤)을 풀어주는 효행 등은 모두가 보본의 마음에서 나타난 자기관리였으며, 이는 또한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무엇을 우선으로 하여야 하는 가를 무언으로 가르친 교훈적 의미를 갖는다. 모두가 보여준 그 근본은 사람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인류애의 표현행동이다.
오늘날의 세태는 공경과 사랑이 잘못되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사살하고 아내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청부살인 하는가하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등 가공할 반인륜적 폐륜 현상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타산지석으로 방관할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의 가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벗어나려는 감정과 기분을 다스리며 자기 마음과 대화하는 행동이 요청되고 있다. 안에 있는 효의 마음과 밖으로 나타나는 효행이 일치할 때 인생의 참가치가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효는 자기의 마음에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마음을 부모에게 헌신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맹자(孟子)는 老吾老(노오노)하여 以及人之老(이급인지노)하며 幼吾幼(유오유)하여 以及人之幼(이급인지유)하면 天下可運於掌(천하가운어장)이니라.”하였다. 즉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어른도 공경하며,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의 자식도 사랑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일을 쉽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이 말은 남의 부모와 자식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원만한 인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효는 실천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알도록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은 바르게 실천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여름철 메뚜기는 파란 옷을 입고, 가을철 메뚜기는 노란 옷을 입는 것처럼 환경에 적응하여 자기를 보호하는 효행의 자기관리 능력을 가꾸어야 한다.
이와 같은 효행이 바르게 행동화되기 위해서는 경주 효자들의 효행사례에 주목하여 부자자효(父慈子孝)라는 말과 같이 자라는 세대들에게 부모를 잘 섬기는 효행을 자연스럽게 모델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인간존엄성에 관한 교육, 착한 마음의 교육, 옳은 말의 교육, 보본행동의 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원초적 인간화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효자들의 효행사례를 들려주고, 효자각(孝子閣)을 견학하도록 하여 부모를 섬겼던 사적(事蹟)들을 듣고 보도록 하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은 부모자식간의 천륜의식을 복원하여 보본의 마음가짐으로 효도를 생활할 수 있는 인간형성의 방안이 될 것이다.
경주 효자들의 효행 사적을 한 곳에 모아서 가칭 ‘경주효자관(慶州孝子館)’을 건립하여 자라는 세대들이 볼 수 있게 한다면 사회의 반인륜적 폐륜화(廢倫化)를 극복하여 경주시가 효의 원적지(原籍地)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되어 이를 제안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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