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쯤 구하여 1년 전에는 대강 정리하였는데, 아직도 미심하여 남겨놓은 것들이 있다.
유성원, 유응부의 간찰도 그에 포함된다. 미심하지만 일단 정리해둔다.
먼저 유성원의 간찰. 柳誠源(? ~ 1456)은 지평, 춘추관 기주관, 직집현전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琅玕). 유유(柳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허(柳滸)이다. 아버지는 사인 유사근(柳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단종을 위해 순절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간찰 우상단에 '柳司藝'라고 메모가 되어 있다.
近間消息 一絶阻閡 恒用泄/鬱 非意獲/書 찰審/調况向減 慰則慰矣 而最/緊之症 姑未夬減 則憂慮/旋切 而窃想旣已執症之後/ 則雖無顯效 自爾漸入佳境/ 一依李老所命 信服不撤/如何 此間所苦近候 霖雨所/困 長事憒憒 苦惱不須/可論 而雨下支離之故 雖奉/天之地 擧皆移秧 此實大/幸 而兩麥之不實 無異於/古辛亥 全無收穫處 太/半有之 前頭生涯之無策// 處處皆然 極可愁痛 所懷非書可/旣 只此不宣 惟冀/對時益護
戊陽月十六日 誠源 奉白
근간 소식이 일체 막혀서 항상 울적했는데, 뜻하지 않게 편지를 받고 조리하는 사정이 좋아졌다니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세는 아직도 줄어들지 않으니 우려가 더 합니다. 생각건대 이미 증세를 잡은 후에는 비록 현저한 효과는 없어도 저절로 점차 좋아질 것이니 한결같이 이 노인의 명에 따라서 믿고 끊임없이 복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쪽이 아픈 근황은 장맛비에 곤고로워서 오래 비실비실합니다. 고뇌를 꼭 말할 것은 없습니다. 비가 지리하게 내리는 까닭에 비록 봉천답일지라도 모두 이앙을 하였으니 이는 실로 큰 행운입니다. 양맥이 부실한 것은 옛날 신해년과 다르지 않으니 전혀 수확할 곳이 없어서 태반이 있어도 앞으로 생활에 대책이 없습니다. 곳곳마다 모두 그러니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소회를 편지로 다 말할 수가 없으니 이것으로 줄입니다. 오직 때에 따라 더욱 가호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년 양월(10월) 16일 성원 봉백
다음은 유응부의 간찰. 兪應孚(?~1456)의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 · 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이면에 '兪副摠'이라고 메모되어 있다.
承書存情可/謝 況審炎夏/ 侍事佳安者/乎 此中姑依/昔狀 無它可/言者 惠扇/封各樣 拜受/多謝 非但爲/物而已 餘竢/皁盖入洛奉/展 不備 伏惟//照在 謹謝狀
庚五月十日 應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