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번지
경주 용산회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와 마음이 급해졌다.
회를 포장해서 바로 서울에 가느냐... 경주를 좀 더 둘러보고 밤에 서울에 가느냐...
세워놓은 여행일정표를 보며... 갈등에 갈등을 더하며 결정장애를 겪고 있었다.
남산은 제대로 한 번 올라봐야 하는 거 아니야? 삼불사코스로 갈까? 아니면 삼릉코스로 갈까?
가족들 회 신선할 때 먹이고 싶은데... 그냥 서울로 올라갈까?
마지막으로 제일 가고 싶은 곳 한곳만 들르고 가야겠다.
그렇게 간 곳이 경주 원성왕릉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주여행을 왔을 때만 해도 경주 원성왕릉은 경주괘릉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니 꽤 오래전이다.
2011년 7월 28일 경주괘릉에서 경주 원성왕릉으로 명칭변경이 고시되었다.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일괄은 석사자상 4구, 석인상 4구, 팔각석주 2기 등 모두 10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5년 1월 22일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입구에 화표석을 두고 무인상과 무관상으로 추정되는 석인상과 석수상(石獸像) 등의 능묘 조각상이 배치된다.
우리나라 능묘조각은 백제 무녕왕릉 석수상(국보 제162호)에서 처음 등장하며
신라시대는 김유신묘의 호석에 새긴 십이지신상이 가장 이른 예이다.
이후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의 정형화된 능묘제도가 형성되었다.
경주 원성왕릉(괘릉) 석상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능묘조각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주 원성왕릉(괘릉)의 능묘조각은 봉분이 바라 보이는 능묘 입구에서부터 화표석인 팔각석주가 놓이고,
그 위로 문인상과 무인상이 각각 한 쌍씩 사자상이 2구씩 마주하는 구조이다.
관모를 쓴 문인상은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진다.
칼을 움켜 쥐고 주먹을 쥔 무인상은 큼직한 이목구비, 힘이 느껴지는 굵은 옷주름, 근육이나 장식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는데
곱슬머리와 부릅뜬 눈, 턱수염 등에서 신라인 보다는 이국인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를 두고 중앙아시아인이 아니라 불교의 금강역사상과 관련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각기 다른 모습의 사자상 네 구도
탄력적인 가슴과 곱슬곱슬한 머리 갈기, 날카로운 발톱 등 당당한 자세에 사실적인 세부 표현이 특징이다.
8세기에 제작된 경주 원성왕릉(괘릉) 석상 및 석주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세부 묘사가 특징인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조각들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인 혹은 불교의 금강역사상과 같은 풍모를 한 석인상은 통일신라 왕릉조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며,
당당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사자상도 동물조각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통일신라시대 조각사와 능묘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석인상과 석사자상이 일괄로 등장하는 통일신라시대 능묘조각에는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흥덕왕릉이 있다.
736년에 제작된 성덕대왕릉 석인상이 가장 이른시기의 작품이며, 835년 흥덕대왕릉은 9세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좌측의 토라져 외면하고 있는 듯한 사자상의 모습이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입구쪽을 경계하고 있는 듯 보인다.
김지정의 난을 진압한 후 신라 36대 헤공왕을 이어 반란진압의 주역인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선덕왕이다.
선덕왕이 5년의 재위 기간으로 자손이 없이 죽자, 반란 진압에 큰 역할을 한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38대 원성왕이다.
원성왕은 785년~798년까지 약 13년간 재위하였고 신라 하대의 시작을 알리는 왕이었다.
이후 신라는 내부권력의 다툼으로 인해 급격히 전제왕권이 쇠퇴하여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경주 원성왕릉이라고 하니 예전에 괘릉으로 불리던 때에 방문했을 때랑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경주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사람의 왕래가 뜸하고 한적하니 무심히 걷기 좋은 유적지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 사이로 12지신상이 새겨진 둘레돌(호석)이 보인다.
봉분을 돌며 12지신상 찾는 재미도 있을 듯...
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는 혼유석을 중심으로 오른쪽 한바퀴 돌았더니....
뱀으로 시작해서 말로 끝났다.
흥덕왕릉과 더불어 신라 하대 신라왕릉의 능원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입장료도 무료고 주차장도 무료로 운영된다.
도로가에 있어서 접근성도 용이하고... 볼 게 많은 데 무료라는데... 경주에 오면 꼭 한번은 와봐야 하는 곳이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에 하나는 비슷하게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 경주 흥덕왕릉이었다.
경주 원성왕릉에 비하면 매우 외진 곳이라 잘 알려지지 않았고 홍보도 잘 되어 있지 않다.
왕릉 둘레의 바닥에는 배수를 고려하여 부채꼴 모야의 판석을 바깥으로 경사지게 깔아놓았다.
왕릉 뒤쪽에는 물이 나오고 있어서 축대를 쌓고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 아쉬운 3박4일의 경주여행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야 할 때다.
새로운 경험도 많이 했고 변화된 경주의 모습에 많이 놀라기도 했다.
이름은 괘릉에서 원성왕릉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갈
이곳에서 경주여행의 마지막을 하게되서 느끼는 바가 많다.
경주 또 올 것이다. 바뀌어서가 아니라 잘 지켜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