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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에 관한 연구
1. 서론
구약성서의 신학적 주제를 연구할 때 이사야서를 제외시키기 어려운 것은 이사야서가 지닌 폭넓고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가 구약 신학의 축이자 중심이라고 평한 학자들의 통찰은 적절한 것이라 하겠다.
이사야는 사상과 교리에 있어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으뜸가는 구약의 예언자로 평가받는다. 월터 카이저(W. Kaiser)는 특히 이사야서 후반부를 가리켜 “구약의 로마서” 또는 “구약속의 신약”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사야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진정한 구약신학임”을 강조하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신학자 중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언약을 생각할 때 이사야는 고대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의 언약을 사용하여 그 언약에 새로운 공헌을 남기고 그 교리를 발전시키고 있는 점에서 탁월하였다.”고 언약의 계속성 또는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신학적인 공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폰라드(G. Von Rad)는 “이사야의 선포는 구약성서의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적 지표를 제시한다.”라는 말로 구약에 있어서 이사야서의 위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사야의 신학적 탁월성은 특히 그의 종말론적 기대를 선포한 첫 번째 설교자로 보며, 심지어 이사야를 구약 종말론의 창시자라고까지 단언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밖에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가 구약의 종말론적의 기초를 놓았다고 하는데 견해를 같이 한다. 이사야의 종말론 사상은 그의 예언서 전체에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그의 예언의 전반부(1-39)에서 종말론적 주제는 ⌜남은 자⌟ 사상과 임마누엘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으로 대표된다.
하젤(Gehard F. Hasel)은 일찍이 이사야의 신탁을 그의 예언사역의 초기, 시리아- 에브라임 전투(BC 734-733), 이사야의 예언 말기(BC 716/5-701) 등 세 시기로 분류하고, 각 시기에 나타난 ⌜남은 자⌟본문을 중심으로 ⌜남은 자⌟사상의 발전을 살펴본 바 있다. 하젤에 따르면 ‘이러한 ⌜남은 자⌟는 조상의 뿌리에 근거하며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극히 소수의 참 이스라엘만이 그 명맥을 유지할 것이고, 이 소수의 ⌜남은 자⌟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미래는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가운데 이러한 ⌜남은 자⌟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해서 ⌜남은 자⌟ 사상이 이사야서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고 있으며, 다른 주요사상과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책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자리를 하고 있는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이 연구를 통해서 ⌜남은 자⌟사상이 단순히 이사야에서 다루고 있는 다른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신학 전체를 엮어 주는 골격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논증해 나갈 것이다.
2. 본문 사역
<이사야 1:8-9>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초막같이, 에워 쌓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8) 만군 의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이라도 살아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라.(9)”
.hr;Wxn ry[iK] hv;q]mib] hn:Wlm]Ki !r,k;b] hK;suK] @/Yxi Atb' hr;t]/nw 8
에워 쌓인/ 성읍같이/ 원두막의/ 초막같이/ 포도원의/ 망대같이/ 시온은/ 딸/ 겨우 남았도다.
.WnymiD; hr;mo[}l' WnyyIh; !dos]Ki f[;m]Ki dyric; Wnl; ryti/h t/ab;x] hw:hy yleWl 9
같았으리라/ 고모라/ 우리가/ 소돔 같고/ 조금이라도/ 생존자를/ 우리를 위하여/ 살아남게/ 만군의/ 야훼께서
/하시지 않으셨다면
이사야서에 ⌜남은 자⌟ 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는 구절이 이사야 1:8-9이다. 이사야서의 서론(1-6장) 세 단락 가운데 첫 번째 단락(1:1-2:4)에 해당하는 이 본문은 이스라엘이 겪을 황폐함을 생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데가 없을 만큼(1:5-7) 매 맞고 상처 입은 상태를 보여주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비참한 상태가 된 원인은 그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도의 민족적 파국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소수의 ⌜남은 자⌟를 살려두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존속이 가능하도록 섭리하셨음을 노래한다. 남유다 왕국의 전 국토가 외적의 침공으로 인해 황폐된 상태에서도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막의 초막같이 겨우” 남았다(hr;t]/nw). 이사야서에서 딸 시온은 흔히 예루살렘의 거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사5:3; 8:14; 10:24, 32)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의 언약에 신실할 것을 촉구하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시온과 관련된 약속들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젤의 표현에 따르면 “시온과 관련된 약속들은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여호와께 돌아올 경우에만 희망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기에서 시온의 불가침성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선결요건이 반드시 충족될 때에만 참된 의미에서의 시온의 불가침성이 성립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1:8에서는 ⌜남은 자⌟의 성격은, 이사야가 “딸 시온만 겨우 남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정화된 ⌜남은 자⌟, 즉 “거룩한 씨”(6:13)나 “거룩한” 생존자(4:3)를 뜻하지 않는다. 본문은 이 “생존자”들이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는 심판을 거친 신앙공동체, 곧 종말론적 ⌜남은 자⌟들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사야1:9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킬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 “소수의 생존자(dyric: : a remnant)가 남은(ryti/h)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은총과 자비 때문이었다. 이러한 ⌜남은 자⌟의 의미는 이사야의 후기 사역에서도 나타나는 데, 사30:17이 그것이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30:17)
이 본문은 유다 왕 히스기야(BC 716-687)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의 세력에 대항하여 애굽의 그늘에 숨으려고 하는 것을 책망하는 문맥에서 보아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가만히 앉아서 지낼 것인데 자기 스스로 앗수르의 공격을 피해 보려고 달아나기 바쁘다. 그러나 그들이 탄 말보다 더 빠른 말을 타고 적군들이 ?아 올 것이다. 한사람이 꾸짖으면 천 사람이 도망하니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을 것이다, 이제껏 우거진 숲을 닮았던 이스라엘은 이제 산위에 꽂혀진 깃대같이 산꼭대기에서 외롭게 서 있는 나무같이 될 것이다. 이 깃대 같은 것이 바로 전쟁으로 처참하게 폐허화된 넓은 그 땅에 불행스럽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남은 자⌟들인 것이다.
3. '남은 자' 용어의 용례와 그 의미
구약성서에는 남겨 진(being left), 구원받은 (delivered), 또는 탈출한(having escaped) 등의 뜻을 가지는 ⌜남은 자⌟의 개념을 나타내는데 네 가지의 동사 - 사알(rav), 야탈(rty), 파라트(fluiuop), 사라드(drc) - 가 있다. 이 네 개의 낱말들이 분사 또는 본동사의 형태로 사용되거나 파생어의 형태나 명사로 각각 사용되고 있다. 이 네 가지 동사의 기본형을 중심으로 해서 ⌜남은 자⌟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알(rav)
사알(rav)은 그 파생어들과 함께 구약 성경에 명사형 스알(rav) 25회와 스에리이트( tyrav) 66회를 포함하여 총 220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선택과 정화의 과정에서 하나님께 충성된 백성으로 보호함을 받아 살아남은 무리들을 묘사하는데 이 단어가 특히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7:23; 45:7; 왕상19:18; 왕하17:18; 렘23:3; 사10:22; 미4:7) 손석태 교수는 “이 사알(rav) 단어는 주로 전쟁의 문맥에서 발견되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출14:28; 수8:17; 사4:16; 삼상11:11; 수10:28, 30, 33, 37, 39, 40; 11:14)고 뮬러(Werner E Muller)와 하젤(G. F Hasel)의 이론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선택과 정화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명사형 스알((rav) 25회와 스에리이트(tyrav)는 ‘남은 자, 잔류 자, 나머지’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이 용어의 여러 형태들은 ‘남아있는 부분’을 뜻하거나(창7:23) 또는 ‘작은 부분’ 이나 ‘절반’ 혹은 ‘큰 부분은 떼어낸 후의 나머지’(출10:5; 사4:3; 17:6) 등을 가리킨다.
어근 사알(rav)의 파생어들은 가끔 ‘무가치함’(신3:11), ‘작음’(신4:27; 렘8:3)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강한 미래지향적인 면을 나타내는 말로써 그 규모에 관계없이 ⌜남은 자⌟ 의 갱생에 대한 본래적인 가능성을 강조한다.”
(2) 야탈(rty)
야탈(rty)은 구약에서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248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적어도 110회 정도의 용법에서 ⌜남은 자⌟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이 낱말은 쓰고 남은 제물의 분량을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무엇을 나눈 분량의 한 몫과 관련되고 있다.
야탈(rty) 동사는 Hiphil형으로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풍성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Niphal형으로 ‘승리를 얻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여성분사형으로 ‘잔류 자, 남은 자’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러 가지 변화형들은 ‘작은 한 부분’(삿8:10; 삼하8:4), ‘절반’(출28:10; 사44:19) ‘보다 큰 부분’(대하31:10; 삿7:6; 삼상15:15)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세기49:4에서는 동사로서 야탈(rty)이, 창세기 49:3에서는 명사 예텔이(rty)이 ‘탁월함’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3) 파라트(fluiuop)
파라트(fluiuop)는 구약성경에서 총 80회 사용되고 있는데, 역시 같은 어족의 여러 가지 셈족 언어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특히 이 단어는 전쟁에서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되고 또 이 낱말은 단독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동의어 사알(rav), 야탈(rty)과 함께 사용되는 예가 많다.(왕하19:30,31; 대하30:6; 겔6:8)
실제의 사람을 가리킬 때 파라트(fluiuop)의 파생어들은 주로 ‘도피하여 살아남은 자’를 가리키는데 ‘나머지’또는 ‘찌꺼기’라는 의미와 함께 파라트(fluiuop)는 ‘탈출’ 또는 ‘구원’의 의미를 가진다. 때로 옆 사람 중 한 사람 정도의 구출, 또는 전체의 손실이라는 순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되기도 했다.(암9:1; 렘42:17) 그러나 대체로 이스라엘의 ‘도피하여 살아남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과 계속적인 생존에 대한 위협에서 구출 받는 경험을 했다.(사37:31-32; 왕하19:30-31; 겔6:8-10) 심지어 믿음 있는 이방인들도 이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사4:4; 욜2:32)
(4) 사라드(drc)
사라드(drc)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파생어를 포함하여 총 29회 사용되고 있는데, '도망하다(escape, flee)’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명사형 사리드(drc)는 ‘도피한 자’ ‘남은 자’라는 의미를 갖는데(수10:20; 신3:3), 여기에 나타난 내용은 전쟁과 관계되어 전쟁의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이 단어는 재앙으로부터 생존하지만 그 생존자들 이 결국 멸망하게 될 때 사용되거나(민21:35; 24:19; 신3:3; 수8:22; 10:28,30,7,39,40), 재산이나 소유물의 ‘남은 것’(욥20:21)이 결국 없어진 때와 관련해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에서 ⌜남은 자⌟용어들의 의미와 그 용례를 살펴 본 것과 같이⌜남은 자⌟의 개념으로 쓰인 네 개의 단어 용례가 비종교적인 것(역사적인 사건)과 신학적인 것(종말론적 사건)의 경계가 유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스9:8). 또한 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남은 자⌟사상이 이중적임을 알았다. 이미 있은 심판이나 체질(sifting:걸러냄)에 관한 언급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심판의 한계성을 의미한다. ⌜남은 자⌟는 그 심판으로부터 피하였다. 이렇게 ⌜남은 자⌟ 개념은 ‘심판과 구원 문맥’의 다양한 본문에서 양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은 자⌟사상을 드러내는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하는 것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즉 자신의 능력으로 우연히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이사야서에 나타난 '남은 자' 개념
1) 이사야 여러 본문들 속에 나타난 '남은 자'개념
(1) 사1:21-26
이 본문은 이사야의 초기 사역 중에서 ⌜남은 자⌟사상의 발전을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21)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22)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23)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24)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25)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26)“
이사야는 본문(1:24-26)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선언한 분은 바로 거룩하고 강력한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전능자”이다. 그는 그의 원수들에게 분노의 심판을 돌릴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이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원수들을 향하던 그의 형벌을 자신이 선택한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형벌은 순결케 하는 힘이 있어서 찌끼와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다(25-26). 사1:26에서의 ⌜남은 자⌟는 정련된 불로써 순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된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공동체는 “의”와 “믿음”을 위한 여지를 갖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2) 사4:2-4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2)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3)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4)“
이 본문은 이야 서론(1-6장) 세 단락 가운데 두 번째 단락에 해당된다. 중심내용은 ‘가혹한 심판과 정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 예루살렘에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2:6-4:1까지의 책망과 심판의 예고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포기하실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며, 앞의 2:6-4;1에 나타난 내용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2절은 “그 날에(aWhh' !/YB)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 용어는 ‘종말의 때’를 강조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용어는 특별히 이 단락과 앞 단락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가리킨다(사2:12,17; 3:7,18: 4:1). 그러나 그 관련은 매우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그 때에 유대인들의 거짓희망과 자기만족이 사라질 것임을 묘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파멸이 아니다. 그래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날이 백성들을 옹호하는 날이 아닐지라도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날도 아니다. 오히려 도래할 여호와의 날은 정화와 회복을 완성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오스왈트(John N. Oswalt)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앞의 예언과 형평을 이루고 결론을 내리는 역할을 한다.
“여호와의 싹(hw:hy jm'x,)”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탈굼 이래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여호와의 싹”에 관한 병행구는 “그 땅의 소산($r,a;h; yrip)이다. 델리취와 영(E J. Young)이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의 신적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면, ”그 땅의 소산”은 메시야의 인간적 성품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이는 문맥상 타당하다고 본다. 2절의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laer;c]yI tf'ylep)라는 표현은 3절의 ”시온에 남아 있는 자(@/YxiB] ra;v]NIh)”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l'i;Wrc]yiB rt/Nh)”라는 표현에 의해 보다 더 확장된다. 여기에서 “피난한 자”, “남은 자”, “생존 자”는 평행 어구들로 하나님의 도성, 곧 시온에 거할 백성들을 지시한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거룩하다고 지칭하는 근거가 4절에 제시된다. 즉 주께서 그 “심판하시는 영(fPvm]' jWr)”과 “소멸하는 영(r[eB; j'Wr)”으로 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jr) 그들의 피를 청결케 하실(jydy) 것이기 때문이다.
(3) 사6:11b-13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11b)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12)
이사야6:11b-13은 이사야서의 서론(1:1-6:13)은 징계와 책망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 곧 ⌜남은 자⌟의 메시지로 마지막 결론을 맺는다. 이사야6:11b-13은 이사야서 전체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 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사야 예언의 특징적인 요소인 심판과 회복의 내용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답은 계속된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완전히 멸망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hb;v;whY:rici[HB; d/[) 이것도 삼키 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tb,X,m')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vd,qo [r'z)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13)”
성읍의 거민이 “10분의 1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hb;v;whY:rici[HB; d/[)의 “10분의 1”(hY:rici[)의 개념은 부정적인 남은 무리이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남은 무리가 못된다. 이는 “10분의 1”에 해당하는 남은 소수의 무리도 구원의 대상이 아니며 멸망 받을 무리, 즉, “이것도 삼키 운 바 될 것”(r[eb;l] ht;y}h) 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무를 베면 그 “그루터기”(tb,X,m')가 남은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그의 새 백성들이 돋아날 그루터기를 남겨 두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그루터기는 현재의 살아남은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른 예로서 손석태는 이사야37:31-32를 들고 있다. 이러한 이엘의 상징인 상수리나무와 밤나무의 그루터기는 나중에 새싹이 돋아날 “거룩한 씨(vd,qo [r'z)요 밤나무 상수리나무의 뿌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연단을 받아 전혀 새로운 경험으로 새롭게 함을 입은 자들인 것이다. 여기서⌜남은 자⌟사상의 이중적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성읍의 거민 중 ⌜남은 자⌟십분의 일은 멸망의 대상이 되지만, 그루터기로 언급된 ⌜남은 자⌟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당하나 구원을 받아 마침내 새로운 민족을 일으킬 ”거룩한 씨“로 묘사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의 남은 자가 아니라 장차 새싹이 돋나날 ”거룩한 씨“요 심판 후에 있을 회복의 근거로서의 ”거룩한 뿌리“인 것이다.
(4) 사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bWvy: ra;v])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7:3)
이사야 7:3에는 이사야의 첫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bWvy: ra;v])인데 스알(ra;v])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남은 자⌟이고 야숩(bWvy:)은 ‘돌아오리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돌아올 것에 대한 징조와 예표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다.(사8:18)
그런데 스알야숩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이사야의 이름과 함께 열거 되고 있다. 스알야숩의 이름이 아하스에게 고지된 구원신탁의 첫머리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유다의 구원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클레멘츠(R. E. Clements)는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적군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 한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스알야숩은 적에 대한 심판과 유다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남은 자⌟사상은 아하스에게 보여준 ‘임마누엘 징조’(사7:10-17)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마누엘 징조’는 여호와께서 이적을 행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하스에게 믿음의 결단을 내리도록 격려한다는 의미에서 이사야7;4-9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증한다. 따라서 임마누엘은 위협과 약속의 이중적 의미를 포괄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위협이지만 믿음을 갖기로 결심한 자들에게는 약속인 것이다.
(5) 사10:20-2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20)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1)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22)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23)”
이사야 10:20-23은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10:5-34)의 문맥에서 읽어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스알야숩(bWvy: ra;v)은 이스라엘 민족 다수의 멸망과 소수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사실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번성하였으나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다수가 멸망하고 소수의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6) 사10:28-11:12
“앗수르 왕이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치중을 머무르고(10:28) 영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 사람은 도망하도다(29)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30) 맛메나 사람은 피난하며 게빔 거민은 도망하도다(31)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32)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33) 철로 그 빽빽한 삼림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작벌을 당하리라(34)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2)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3)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4)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5)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6)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7)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8)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0)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11)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12)”
이사야10:28-32는 마치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해 오는 것을 가상하여 묘사하고 있다. 베어진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나고 한 가지로 자라서 결실하고 다시 부흥할 것이다.(11:1) 이것은 선택된 ⌜남은 자⌟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회복은 미래의 메시야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를 것이고,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실 것이며(2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다.(3a) 그는 우수한 통치자이며 외모로 심판치 아니하며 정직과 공의로 빈핍한 자와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다. 그는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와 성실로 허리띠를 삼을 것이다. (3a-5) 이러한 공의의 열매는 이제 평화의 왕의 지배하에 있는 그 백성들을 통치하고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도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평화의 실현이다. 이사야 10장 끝부분과 11장 시작 부분은 한편은 당시 앗수르를 사용한 유대의 징계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오실 메시야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교차하고 있다.
이사야 11:6-9는 메시야가 통치할 나라는 평화로울 것이며, 거기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다. 사11:10이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사람들과 그 과정에 대한 것인데 먼저 본문은 열방 곧 이방인의 구속을 말하고 있다. 그 깃발이 선 곳은 영광으로 빛나며 모든 민족들이 그 깃발을 쳐다보며 그에게로 찾아올 것이다. 그 열방과 함께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 가운데 ⌜남은 자⌟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12절). 이것은 바벨론 포로귀환이 아닌 더 뒤에 있을 온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으로 보아야 한다. 이상과 같이 사11장은 메시야의 도래에서 이루어질 이방인들의 구원과 ⌜남은 자⌟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 그리고 메시야의 궁극적인 통치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한데 뭉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7) 사49:5-6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5)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6)”
‘여호와의 종’이 상징하는 메시야는 언약백성의 대표자로서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인 종말론적 ⌜남은 자⌟를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한다. 또한 메시야는 이방의 빛으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를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땅 끝까지 구원을 베푼다. 그리고 메시야는 이스라엘과 이방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그들의 죄책을 친히 담당하는 최후의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은 자⌟의 구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야를 신뢰하는 자들로 이루어 질 것이며 이스라엘과 이방의 차별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자⌟와 멸망하는 자 사이를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2) '남은 자'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들
히튼(E. W. Heaton)에 따르면, 이러한 ⌜남은 자⌟(ra;v])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① 예언자 당시 실제로 존재한 공동체, ② 이스라엘(유다)의 인구가 감소하여 미래의 한 시점에는 마침내 소수의 ⌜남은 자⌟만 존재할 것임을 예고하는 위협을 묘사, ③ 임박한 모종의 파국에 의해 백성들이 완전히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가 존속할 것임을 천명하는 희망적인 위로의 표현이다. 이 가운데서 히튼(E. W. Heaton)의 입장은 세 번째에 가깝다. 그는 기본적으로 ⌜남은 자⌟사상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 생존하여⌜남은 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주장한다. 그는 ⌜남은 자⌟사상이 이사야와 무관하게 포로 이후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적 상황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면서도 그것이 이사야 자신의 예언적 신념으로부터 생겨났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젤(Gerard F. Hasel)에 따르면⌜남은 자⌟ 주제는 특히 이사야 종말론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린드블롬(J. Lindblom)역시 이사야가 ⌜남은 자⌟용어를 종말론적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예언자이다. 이사야는 ⌜남은 자⌟사상을 그의 사역의 초기부터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비종말론 적이면서도 또한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였다. 이사야서의 중심적인 내용에서 ⌜남은 자⌟주제는 특히 여호와의 거룩하심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거룩하심 개념은 링그렌(Hemmer Ringgren)에 따르면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이사야의 심판 선포와 관련된 접근 불가능성과 경외의 측면이고 둘째는 여호와의 선택, 곧 구원선포와 관련된 은총의 측면이다. 이는 이사야 자신이 여호와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된 심판과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젤은 ⌜남은 자⌟사상이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사야의 선포에서 처음부터 주도적인 요소로 작용해 왔음을 강조한다.
3) '남은 자' 개념과 책의 구조
시온의 변화에 대한 열쇠는 심판을 정화 하는 것이다. 1장 2-23절에서 나타난 시온에 대한 고발로부터 2장 1-4절에 나타난 묵시, 종말론적인 시온으로의 이동은 갑작스럽게 나타난다. 이 이동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한권의 책 전체의 이동을 예시한다. 이러한 이동은 1:24-25절의 심판을 정화 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결과는 정화된 산물로서 ⌜남은 자⌟들인데 종말론적 시온의 핵심이 된다. ⌜남은 자⌟라는 단어(tyracee/ racee)는 1장에서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 개념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25절에 나타난 심판 공의는 회개하는 사람과 반역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들 사이에(27-28절) 급격한 구분을 초래한다.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되며 그렇지 않는 자들은 파멸된다는 사실이 2:1-4절의 종말론적 시온 환상으로 연결된다. 2장5절의 짧고 간곡한 권고 후에 동일한 연속적인 결과 들이 2:6-4:6절 걸쳐 일어난다. 즉 시온에 대한 고발(2.6-11a) 그리고 심판의 발표(2:11b-4:1)에 이어 종말에 대한 두 번째 종말론적 시온 환상(4:2-6)이 이어진다. 여기서 ⌜남은 자⌟라는 용어의 용법이 첫 번째 부분에 소개되는데 이는 1장과 2장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시온에 남아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4.2-4)”
1-39장의 신학에 대해 ⌜남은 자⌟ 주제가 주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잘 인식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1-2:4절에 대한 의도의 중요성을 바르게 찾아 낼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 장이 주는 ⌜남은 자⌟라는 개념이 더욱 이성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남은 자⌟의 의미는 36-39장처럼 중요한 시점에서 반드시 표면화 된다(37:31-32). 이 점은 바벨론 유배 자들이 이스라엘 집안에 남아있는 모든 자들로 써 선포되는 46:3에서 다시 표면화 된다. 만약 용어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을 때 ⌜남은 자⌟라는 개념은 책의 끝에 가서 나타나는데, 새 예루살렘(66:13-14)에서 위로를 받는 야훼의 종들과 밖으로 드러난(66:24) 반역자들의 무리와의 사이에서 명확한 구별이 되어 진다.
어쨌든 분명하게 ⌜남은 자⌟라는 의미는 책 전체적으로 하나의 안정적인 개념으로 이용되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책의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하위 단락을 통해 진행해 나간다.
1-12장에서 ⌜남은 자⌟는 유다의 혹독한 파괴 뒤에 남은 소수의 생존자들(1:9), 회개한 그녀(시온) 안에 거하는 자(1:27), 의로운 자(3:10), 종말론적인 시온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생존자(4:23), 하나님의 심판에 무너진 유다의 줄기 속에 남아있는 거룩한 씨, 앗시리아의 약탈 후에 땅에 남은 모든 사람(7:22), 앗시리아를 떠나서 야훼에게 의지하는 연단 받은 생존자들(10:10-21), 마지막에 그들의 땅으로 다시 모으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생존하고 있는 이스라엘 족속들(10:11-12:16)을 표현한다. 본문은 ⌜남은 자⌟ 개념 중 궁극적인 형태와 중개자적인 형태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결국 12장에서 보는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는 찬양의 노래로 귀결된다. 궁극적인 ⌜남은 자⌟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심판을 넘어 그날(12:1)에 종말론적인 시온에서 나타나게 될 공동체이다.
13-27장에서 ⌜남은 자⌟ 사상이 처음에는 국가들에 대해 일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더 부정적인 모습을 취한다. ⌜남은 자⌟라는 단어는 야훼에게 멸망할 바벨론, 한차례 앗시리아의 공격에 생존한 팔레스타인, 완벽하게 충격을 입은 시온의 표현(14:22),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14:30), 사자에 의해 먹힐 운명인 모압의 생존자(15:9)또는 피난한 모압의 생존자(16:4) 이스라엘 북왕국의 비루한 ⌜남은 자⌟에 비교할 수 있는 시리아의 쇠약해진 생존자들(17:3), 게달의 자손 중 활 쏘는 사람과 용사중 소수의 생존자(21:7), ⌜남은 자⌟ 마지막으로써 최후 심판, 격동후의 나라들, 모든 것을 포용한 후의 마지막 흔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24:13). 24장의 분명한 우주적 심판은 12-24장에 나타난 특정한 심판들에 따른 경외의 절정이다. 따라서 24-27장은 종종 구별되는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책의 논리적 발전에 따르는 한 이장들은 13-23장에 정확하게 조화를 이룬다. 구성적으로 볼 때 13-27장은 전체적인 책의 구성 중 하나의 단위이다. 그러나 이 장들에서 선포된 심판과 특별히 24장의 우주적 심판 목적은, 24:23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듯이, 예루살렘/시온에 대한 야훼의 통치를 세워 가는데 있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무색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24:23)
이 장로들은 추측컨대 새로운 시온에 거주하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일 것이다. 이 주요 단락이 절정을 이끎으로써 궁극적 의미에서 ⌜남은 자⌟ 개념에 대한 강조점(포커스)은 국가로부터 시온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것은 또한 신학적 의미를 되돌리는 것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단원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시온에서 구원받은⌜남은 자⌟에 의해 불리어지는 종말론적 송가로 끝난다(26-27장; cf.12장).
28-35장에서는 주변에 있는 국가들에 대한 관심과 ⌜남은 자⌟에 대한 개념이 사용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유다에 대한 중재와 최후의 양상, 두 가지 개념이 사용된다. 30장 17절에서는 1:8-9절을 상기시키는 태도로 이 개념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야훼를 의지하는 대신 이집트를 의지한 결과로 무자비한 침공을 당한 후 유다에 애처롭게 남아있는 ⌜남은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30:1-3을 보라). 하지만 이 같은 측면에서, 이것은 단원의 시작 부분에 나오며 단원의 거의 끝부분에서 다시 나오는데 이것들이 최종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두 가지 개념이다.
28:5에서는 ‘그날에, 종말론적인 ⌜남은 자⌟가 즐거워 할 것이며, 완전할 것이며, 두 왕국의 폐허를 불러온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멸망시키고 대치하는 야훼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16절에서 지적한대로 야훼의 완벽한 궁극적인 통치는 시온에서 실현될 것이다. 35:10에서 주님의 ⌜남은 자⌟는 노래하며 시온에 돌아올 것이고 그곳에서 결코 끝이 없는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며 질병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시온에서 회복 되는 완성과 주님의 ⌜남은 자⌟들은 종말론적인 ⌜남은 자⌟이다. 35장 10절의 노래는 12장, 26-27장에 기록되어있는 종말론적인 노래의 반영이며 따라서 이 주된 단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일한 기록으로 끝을 맺는다.
36-39장에서 ⌜남은 자⌟사상은 단지 수단의 의미로서만 나타난다. 37:4에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유다에 남아있는 자(포위된 예루살렘에 현재 있는)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부탁한다. 37장 31-32절에서 이사야는 ⌜남은 자⌟들이 시온에서 올 것 이고 예루살렘에⌜남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을 보장한다. 30절에 새롭게 되는 농작물에 대한 상징은 31절의 새롭게 되는 공동체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임박한 앗시리아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제거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33-35절을 보라).
이 기술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의미는 이어지는 두 장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시온에 대한 묘사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전체로 보았을 때 이 단락은 왕궁의 보물이 남지 않으며 다윗가문(히스기야의 후손이 포함된)에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진술에 가까우며 시온으로부터 오는 자들이 아닌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39:5-8). 이 부분의 후반부는 다윗 가문에 대한 분명한 몰락과 예루살렘에 대한 실제적인 파괴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37:35절의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나의 목적을 위하여 이 도시를 방어해주고 구원해 줄 것 이라고 했던 야훼의 초기 약속과 긴장관계를 보인다. 이에 대한 해답이 요구되지만 이 점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은 체,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긴장관계 속에서 이 단락은 끝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장들은 과도기적인 특성에 따라서 남은 자들에 대한 궁극적인 개념, 종말론적인 절정을 말하지 않는다. 36-39장은 단순히 책 중에서 하나의 단락이며 절정을 향해 접근해 가는 한 부분일 뿐이다.
이미 알고 있듯이 40-55장은 39장 이후에 이어지는 책 중에서 주요한 한 부분이다. 40-55장에 대한 책의 형식과 논리적인 배열을 주목하는 것은 이 장들이 두개의 구성적 단락(40:1-51:11과 51:12-55:13)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지시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40:1-51:11에서⌜남은 자⌟ 사상은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유지된다. 하나는 바벨론 유배를 통한 즉 이동을 통한⌜남은 자⌟ 개념인데 46:3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46:3)
두 번째는 35:10에 쓰인 절정의 말씀들에 대한 51:11절에서의 반복이다.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51:11)
⌜남은 자⌟ 개념이 유배로 표현되는 이러한 변화는 기대와는 다른 결과다. 이러한 이동은 중심 축의로의 즉각적인 진행을 도모하는 것으로서(36-39장) 이미 35장에서부터 예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함축하고 있는 것은 지금 분명해졌는데 이러한 두개의 이동 모두는 1장25절에 기록된 추방에 대한 정련 은유를 재적용 하는 것이다. 바벨론 유배는 당장 고통의 용광로이며 이 속에서 이스라엘은 정련되고 정결케 된 ⌜남은 자⌟로써 거듭날 것이다(48:10). 이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은 자⌟ 사상의 중간 매개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들이 회복된다. 유배로부터의 귀환은 종말론적 용어로 이용되었으며 책의 초반부에(first half)에서와 마찬가지로 야훼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시온의 거주자들(51:11)과 함께 묘사된다.
51:12-55:13절의 기록에서는 ⌜남은 자⌟에 대한 뚜렷한 사용을 찾을 수는 없으나 이미 보았듯이 ‘이스라엘 가문의 ⌜남은 자⌟’로서 유배의 특징은 이미 46:3에서 나타난다. 이것과 동일한 특징이, 40:1을 강하게 상기시키는 수단으로써, 함축적으로 이 단락에도 나타난다.(40:1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를 상기시키는 절로서 51:12절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다’라는 절이 이용됨). 51:12절에 ‘풀 같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대조본문으로는 40:1절의 ‘풀 같은 모든 육체’를 들 수 있겠다.
51:16절의 ‘너는 나의 백성이다 시온에 말 할 것을 명 한다’라는 대조 본문은 40:1-2절의 ‘위로하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 예루살렘에 유하게 말하라’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손에서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라는 51:17절의 선언은 40장2절의 ‘예루살렘(her)의 죄로 인해 두 배나 여호와의 손으로부터 받은‘이라는 유사한 기록을 상기시킨다. 산들(mountains)에서 시온을 향하여 돌아오는 야훼 통치의 복된 물결이 계속적인 선포로 이어지는 52:7절은 40:9-10절과 아주 유사한 문장이다. 그리고 51:11절 절정에 바로 이어서 본문은 앞의 내용과는 구분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 새로운 단락은 결국 이 단원의 끝인 55장에서 ’노래하는 가운데 시온으로 돌아오는 구원받은 ⌜남은 자⌟들‘(55:12-13)이라는 절정에 도달한다. 이때에 모든 피조물들이 노래함으로써 귀환자의 기쁨에 응답한다. 51:11절의 ‘영원한 기쁨’은 55:13절의 변화된 환경에 대한 ‘영원한 징표’ 그리고 55:12절의 유배로 부터의 복귀에 따른 ’기쁨‘(평화)이라는 의미의 용어로 발전한다. 따라서 40:1-51:11 그리고 51:12-55:13절은 개념적으로 볼 때 매우 밀접하다. 그러나 역시 구성적으로 볼 때는 별개의 단락이다.
56-66장은 책의 마지막을 이끌고 있는 부분으로서 ⌜남은 자⌟ 개념에 대한 하나의 최종적인 진전을 나타낸다. 앞의 두 단락에서 유배는 공통적으로 새로운 종말에 대한 전조로서 ⌜남은 자⌟들과 또한 그들의 시온으로의 복귀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56장에 따르면 복귀와 종말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며, 복귀한 공동체 내부에 정의와 악함 사이에 구분이 시작된다. 이러한 진전은 56장의 매우 초반부부터 시작된다. 56:1절은 복수에 대한 명령형이기 때문에 공동체는 공평과 의를 지켜야하며 따라서 종말은 비록 가까운 미래이기는 하나 미래로 위임된다.
“곧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56:1후반부)
다음절 56:2절은 1절에 대한 개인적인 훈계이며 이는 또한 이 훈계들을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에 대한 구분을 의도한다.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도다.”(56:2)
이 구분은 약한 자(20-21절)에 의로운 자(1절)를 대조시키고 있는 57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동체 내부의 의로운 자들은 야훼를 의례하는 자(57:13후반부),위법으로부터 떠나는 야곱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야훼의 종이라 부르며(63:17) 야훼에 의해 그의 소유가 된다(65:8-9). 그리고 이어지는 65:13-16에 ‘나의 종들... 그러나 너는...’ 이라는 5개의 대조법이 나오는데 이것을 통해 야훼는 그의 종들에 대한 축복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저주를 선포한다.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이야기는 65:17-25절의 종말론적 절정을 의미 있게 이끈다. 또한 이 절들은 19절에 새 질서는 ‘나의 백성’ 으로서 야훼 자신에 의해 거주하는 새 시온을 중심으로 한 새 창조의 결실을 나타낸다. 따라서 책의 이 마지막 단원은 종말론적 ⌜남은 자⌟들을 만들어 내는 회복된 ⌜남은 자⌟들로의 마지막 변화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야훼의 종들로서는 각각으로, 그의 백성으로(단수개념으로)는 공동체적으로 65:17-25에 절정과 함께 묘사되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보완적인 과정을 56-66장에서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야훼의 통치를 인정하고 복종하려는 이방인들에 대한 공동체 개방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부적이고 세밀하지는 않으나 이 마지막 단락의 끝과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의 주의를 강하게 사로잡는다. 56장에서는 스스로 주님께 연합한 외국인들은 야훼의 종들 가운데 일부를 차지하며 야훼의 언약을 귀하게 잡는 고자들이 공동체에서 존귀함을 받으며(4-5절) 회복된 성전은 모든 이에게 기도하는 집이라 선언된다(7절). 60장에서 개종한 나라들이 시온을 순례하며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고(6절) 유대 형제들을 섬김으로 과거의 잘못을 보상한다(10절). 그들의 재물은 야훼의 단에서 기꺼이 받음이 된다(7절 후반). 이 과정의 절정은 66:18-23절에 나타난다. 여기서 야훼의 영광을 말하며(18절) 예물과 함께 흩어진 이스라엘 자손들을 마지막으로 시온으로 데리고 오며(20절) 야훼가 모든 육체로부터 시온에서 예배를 받는다(23절). 역시 65장 17-25절도 종말의 도착이 새로운 창조의 언어로 발표된다.
이 마지막 단락에서 ⌜남은 자⌟사상은 축소되고 또 확장된다. 이것은 형식상 65:17-25과 66:22-23절의 이중 절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에서 ⌜남은 자⌟는 국가적이고 윤리적인 용어에 한정되지 않고, 고백적이고 행동에 관한 용어로 쓰인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남은 자⌟들 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보증이 없었다. 또한 외국인은 ⌜남은 자⌟들에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배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구절은 결사적으로 남아있는 자로 위치해 있는데 ⌜남은 자⌟는 포괄적이지만 반면에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은 자⌟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자다. ⌜남은 자⌟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과 심판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실체이다.
56장에 나타난 관점의 변화와 사건이 발생하는 곳에서 최종적으로 전개되는 ⌜남은 자⌟에 대한 개념의 진행으로부터 시작된다. 56-66장은 형식적으로 문장의 처음(56:7)과 끝(66:20)에서 비중 있게 표현된 ‘나의 거룩한 성산’이라는 표현이 포함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구분된다. 동시에 이 장들은 개념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밀접하게 통합되어있다. 이장들의 최종적인 절정은 새로운 시온에서의 완전한 예배를 말하고 있는 66:22-23절이며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던 절정에서와 같이 이 장들 역시 절정을 향하여 통합되어있다.
핵심적인 전환 단원(36-39장)을 제외하고 이 장들은 시온 안에서 또는 돌아오는 길에서 노래하는 종말론적인 절정을 가진다. 이 마지막 단락의 노래하는 모티브는 보다 포괄적인 예배에 대해 주어진 적절한 수단이나(66:23), 개념적으로 볼 때 이 절정은 진행되어온 모든 과정에 완전하게 일치된다. 더욱이 여기서 직면한 외국인까지 포용하여 ⌜남은 자⌟에 담는 포괄적인 모티브는 이미 이전 단락(44:5)에서 예상했던 결과이다. 더 나아가 본 단락에 쓰인 (⌜남은 자⌟ 개념의 최종적인 발전에서 중심이랄 수 있는) 각각이랄 수 있는 복수형 ’종들‘은 앞 단락 54:17절 전반부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단락은, 우리가 본 것처럼, 1:1-2:4절에 계획적으로 실린 이사야의 환상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것은 특히 야훼에 대한 반역(66:24; cf. 1:2, 5)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는 것, 시온에 대한 열방들의 순례(66:18-23; cf. 2:1-4)로부터 몇 개의 중요한 주제들을 골라내어 반복함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완전한 예배는 이 책의 시작에서 나타난 더렵혀진 예배에 대한 최종적 응답이다.
요약하면, 우리의 연구는 이사야서가 7개의 구조로 이루어졌음을 보이기 위해 실시하지 않았다. 책의 중심축이 되는 36-39장은 책의 전반부(앗시리아 위협이 주로 다루어지는)로부터 후반부(바벨론 위협이 주로 다루어지는)로 변화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중심기능을 하는 단원(36-36장)은, 각 단락의 끝부분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시온의 밖 또는 시온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른 야훼를 찬양하는 노래를 담고 있는, 전반부 단락들(1-12, 13-27, 28-35장)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중심단락 이후로 동일한 방법으로 끝나는 3단락(40:1-51:11; 51:12-55:13; 56-66장)이 이어진다. 나아가 ⌜남은 자⌟ 개념과 이 개념의 발전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책이 요약하고 있는 환상에 대한 개념의 핵심적인 중요성과 그 충만한 존재(실체)를 밝혀내었다. 시온의 출현과 시온이 보여주는 변화는 우주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열쇠이고, 신실한 남은 자들의 궁극적인 완성은 시온의 변화에 대한 열쇠이다.
이제 우리의 연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할 위치에 와있다. 우리는 ⌜남은 자⌟ 개념이 어떻게 해서 다른 신학적 주제들인 거룩한 씨앗, 임마누엘 아이, 주춧돌, 메시아의 형상과 종 등과 연관 되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5. '남은 자' 사상과 다른 신학사상과의 관계성
종말론적인⌜남은 자⌟에 의해 진행하는 과정을 통해 이사야서는 다양한 은유적 산물을 묘사했다. 그 중 하나가 앞에서 보았던 것으로 금속 정련이다.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시온에 대해 고통을 가한 것을 용광로의 강열한 열로 은유하였다. 과거 시온의 거주자는 풀들이고 새로운 시온에 거주하는 자들은 순수한, 제련된 ⌜남은 자⌟들로 은유하였다. 이 은유는 책의 전반부 앗시리아와 후반부 바벨론에 의한 시련에 사용되었다(1:24-26과 48:10).
출산이 이것과 동일한 방법의 또 다른 은유로 사용되었다. 엄마는 예루살렘/시온을 상징하는데, 야훼의 역사적 심판의 결과로써 그녀가 당하는 고통들은 그녀가 격어야 할 아픈 노동이지만 고통을 통해 그녀가 낳게 될 아이들 또는 아이는 신실한 ⌜남은 자⌟들을 상징한다. 가장 눈에 띄는 예가 책의 절정 근처인 66:7-9절에 나온다. 모든 은유의 성분들이 존재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형태를 띤다.
수수께끼(7절): “시온은 구로하기 전에 생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자를 낳았으니”
대답(8절 후반부):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을 순산하였도다”
회고적인 관점에서 노동에 의한 고통은 영광의 결과에 비교했을 때 하찮은 것이다. 14절에 나타나 있는 최종적인 남은자라는 의미에서의 종들은 돌아오게 되는 시온의 아들들이다. 이 과정 속에 나타난 회고적인 견해는 종말론적 성취이다.
이 과정의 초기단계에 대한 언급의 일환으로 책의 전반부, 7장과 8장에서 동일한 은유가 사용되었다. 당시의 상황(예루살렘이 적대자에게 둘러 쌓여있는; 7:1절)과 현실은 이사야로 하여금 그 아들 시알야숩을 데리고 ,믿음이 없이 흔들리는 아하스 왕의 앞에 나아가 확실히 말하게 하였는데(⌜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 이라는 의미) 이와 같은 사실에서 7:14절의 신실한 남은자의 출현을 말하는 은유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있다. 출산과 관련된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 그녀의 아들은 상징적으로 임마누엘이고 또한 예언자의 주변 인물들로써 믿음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제자들 또는 아이들을 가리킨다(8:16-18). 그들은 시알야숩의 이름에서 예상 할 수 있는(가까운 날 이라는 관점에서의) ⌜남은 자⌟들을 말하며 또한 이들은 주님께 회개하며 돌아온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노래하며, 그들은 시온 산에 거주하는 주인인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주는 전조(징조)이고(8:18) 따라서 그들은 종말론적 ⌜남은 자⌟들의 전조가 된다.
세 번째 은유는 종말론적인 나무로써 다시 성장하는 식물이다. 그 나무는 다윗왕조와 수도인 예루살렘/시온을 포함하는 유다를 말한다. 나무의 베어짐은 야훼에 의해 국가에 행해지는 역사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땅 가까이 남아있는 줄기는 직접적인 의미에서 ⌜남은 자⌟들이다. 줄기로부터 자라난 숲 또는 새로운 나무는 최종적인 의미의⌜남은 자⌟들이다.
이 은유의 계획된 의미는 6:13절에 나오는데, 국가의 당면된 그리고 장기적인 예상을 검토하게 하는 이사야 소명의 마지막 설명 부분이 나오는 6:13절을 볼 때 중요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시급한 의미의 ⌜남은 자⌟로서의 견해가 37:31-32절에 책의 중심축으로 나타난다. 책의 결론 단원(56-66장)에서는 최종적인 의미에서 ⌜남은 자⌟로 인용된 것이 61:3절에 나온다. 이 문장은 분명히 종말론적인데, 새로운 시온에 거주하는 ⌜남은 자⌟들은 ‘주께서 심으신 정의의 상수리나무’로 불린다. 여기에서 베어진 상수리나무(6:13)로부터 최종적인 새로운 성장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28:16절에서 신뢰할 수 있는 기초로서 시온에 놓인 견고한 주춧돌은 모든 예언자와 연합한 믿음의 남은 자들에 대한 은유이긴 하지만 이 은유는 다른 은유들처럼 종말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7장에서 임마누엘 아이의 약속과 후에 그 약속으로 태어나는 아이는 8장에서 신실한 ⌜남은 자⌟라는 용어로 발전하며 9장에서는 6절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라는 말로 왕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아이는 분명히 이상적인 다윗의 형상이다. 관련된 문장으로 11:1-9절을 들 수 있는데 이 본문에서는 이러한 형상이 당하는 위기를 위해서 새롭게 자란다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 할 것이요”(11.1)
흥미롭게도 책의 끝부분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개인적 의미를 가지는 종말론적인 다윗의 통치자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왕족(국가) 공동체라는 점이다. 이 공동체는 55장3절을 고려했을 때 다윗에게 주어졌던 축복에 근거하며 이 공동체는 나라들을 다스리며 그들의 감사를 받는다(66:12-14). 전체적인 전개 측면을 고려한 책의 용어들을 볼 때 1-35장에 나타난 메시야적인 문장들의 왕의 형상 묘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닌 종말론적 ⌜남은 자⌟들에 대한 은유로서 공동체적인 용어로 보여 진다. 유사한 전개는 40-55장에 묘사된 고난받는 종의 형상에 대한 관심에서 분명하다. 여기서 말한 종은 참된 이스라엘이며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이다(49:1-3). 그는 또한 메마른 대지로부터 올라온 작고 어린 식물이다(53:2). 이 종은 최종적으로 영광스럽게 되며 정복자로서 오염으로부터 분리된다(53:12). 그러나 책의 끝부분에서 나타나는 것은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영광스럽게 된 종의 모습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된 공동체적 종의 모습이다(66:13-19). 다시 말해 책의 전체적인 전개로 볼 때의 용어라는 관점에서, 40-55장에 나타난 종의 형상은 선택된 ⌜남은 자⌟, 신실한 자, 고통당하고 영광스럽게 되는 자에 대한 또 다른 은유로써의 공동체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거룩한 씨, 임마누엘 아이, 주춧돌, 메시아적 형상과 고난 받는 종의 형상들은 모두 신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인 것이다. 또한 ⌜남은 자⌟ 출현은 시온의 변화와 우주의 변화에 관련된 열쇠인 것이다.
6. 결론
구약성서 가운데 ⌜남은 자⌟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해서 ⌜남은 자⌟ 사상이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고 있으며, 다른 주요사상과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최종형태인 한 책의 구조 안에서 ⌜남은 자⌟ 개념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구약성서에서 ⌜남은 자⌟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 네 가지의 동사들을 살펴보면서 이 네 개의 동사들과 파생어들은 한가지의 확정된 개념이 아니라, 폭넓게 상호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서로 혼용되는 것을 알았다. 또한 신학적 개념으로서의 ⌜남은 자⌟ 사상이 ‘심판과 구원의 문맥’에 속하여 그 개념이 양면적이었음을 보았다. ⌜남은 자⌟ 사상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한 것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었고, 자신의 능력으로나 우연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짐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파기와 불순종으로 인한 민족의 파국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소수의 ⌜남은 자⌟를 살려두심으로 이스라엘 존속이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특별한 전문 용어를 쓰지 않으면서도 ⌜남은 자⌟ 사상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보았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에는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며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파멸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며 오히려 도래할 종말은 정화와 회복을 완성하는 날이 될 것임도 알았다.
이사야 6장에서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이중성은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이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라는 뜻을 가진 스알야숩(bW:vy: ra;v 사7:3)에서도 적에 대한 심판과 유다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로 동시에 선포되고 있음을 알았다. ⌜남은 자⌟ 사상은 그 선택한 ⌜남은 자⌟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고 그 회복은 메시야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될 것임을 알았다.
1-12장에서 ⌜남은 자⌟는 유다의 혹독한 파괴 뒤에 남은 소수의 생존자들(1:9), 회개한 그녀(시온) 안에 거하는 자(1:27), 의로운 자(3:10), 종말론적인 시온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의 생존자(4:23), 하나님의 심판에 무너진 유다의 줄기 속에 남아있는 거룩한 씨, 앗시리아의 약탈 후에 땅에 남은 모든 사람(7:22), 앗시리아를 떠나서 야훼에게 의지하는 연단 받은 생존자들(10:10-21), 마지막에 그들의 땅으로 다시 모으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생존하고 있는 이스라엘 족속들(10:11-12:16)을 표현한다. 본문은 ⌜남은 자⌟ 개념 중 궁극적인 형태와 중개자적인 형태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궁극적인 ⌜남은 자⌟는 새로운 공동체로서 심판을 넘어 그날(12:1)에 종말론적인 시온에서 나타나게 될 공동체임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이사야의⌜남은 자⌟사상은 이사야에 나오는 다른 주요 신학사상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결코 분리 할 수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거룩한 씨, 임마누엘 아이, 주춧돌, 메시아적 형상과 고난 받는 종의 형상들은 모두 신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인 것이다. 또한 ⌜남은 자⌟ 출현은 시온의 변화와 우주의 변화에 관련된 열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남은 자⌟사상이 단순히 이사야에서 다루고 있는 다른 여러 주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 신학 전체를 엮어 주는 골격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바른신학 바른신앙 에서 가져 온 글 -
프로스원어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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