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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_9_174p History as Progress
Secondly, we need not and should not conceive progress as having a finite beginning or end. The belief, popular less than fifty years ago, that civilization was invented in the Nile Valley in the fourth millennium B.C. is no more credible today than the chronology which placed the creation of the world in 4004 B·C· Civilization, the birth of which we may perhaps take as a starting-point for our hypothesis of progress, was surely not an invention, but an infinitely slow process of development, in which spectacular leaps probably occurred from time to time. We need not trouble ourselves with the question when progress-or civilization-began. The hypothesis of a finite end of progress has led to more serious misapprehension. Hegel has been rightly condemned for seeing the end of progress in the Prussian monarchy-apparently the result of an overstrained interpretation of his view of the impossibility of prediction. 둘째로 우리는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간주하는 것. 진보를 유한한 시작이나 끝이 있는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50년 전에는 인기 있었던 믿음인 ‘문명은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나일 강 유역에서 BC 4000년에 발명되었다고. 그리나 이것은 오늘날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BC 4004년에 창세기의 시작이 되었다는 만큼이나 믿을 수 없다. 문명의 탄생은 우리는 아마 진보의 가정을 위해서 시작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문명의 탄생은 분명히 발명은 아니고 무한히 천천히 진행하는 발달의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 가끔씩 비약적인 도약이 일어났다.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보 또는 문명이 언제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진보의 유한한 끝을 가정하는 것은 더 심각한 오해를 가져왔다. 헤겔은 정당하게 비난받아 왔다. 진보의 끝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봄으로써, 이런 결론은 겉으로 부기에는 분명히 과도한 해석의 결과이다. 예언의 불가능에 대한 그의 견해의 과도한 해석의 결과로
But Hegel's aberration was capped by that eminent Victorian, Arnold of Rugby, who in his inaugural lecture as Regius Professor of Modern History in Oxford in 1841 thought that modern history would be the last stage in the history of mankind: 'It appears to bear marks of the fullness of time, as if there would be no future history beyond it.' Marx's prediction that the proletarian revolution would realize the ultimate aim of a classless society was logically and morally less vulnerable; but the presumption of an end of history has an eschatological ring more appropriate to the theologian than to the historian, and reverts to the fallacy of a goal outside history. 헤겔의 일탈은 최고조에 달했다. 유명한 빅토리안 아놀드 럭비에 의해. 그는 그의 흠정 교수 취임사에서, 1841년 옥스퍼드 대학교 근대사 흠정교수 취임사에서 근대사는 시간이 꽉 찬 듯 보인다.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는 보이지 않는 듯이. 마르크스의 예언인 프로렐타리아 혁명이 계급 없는 사회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예언이 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덜 취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을 가정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울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자들에게 더 적당하다. 역사가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역사 밖에 역사의 목표를 세운다는 면에서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Chapter 5_10_175p History as Progress
No doubt a finite end has attractions for the human mind; and Acton's vision of the march of history as an unending progress towards liberty seems chilly and vague. But if the historian is to save his hypothesis of progress, I think he must be prepared to treat it as a process into which the demands and conditions of successive periods will put their own specific content. And this is what is meant by Acton's thesis that history is not only a record of progress but a 'progressive science', or, if you like, that history in both senses of the word-as the course of events and as the record of those events-is progressive. 분명히 유한한 끝은 인간의 마음에 매력적이다. 그리고 액튼의 견해-‘역사의 진전은 끝없는 진보이다 자유를 향한 끝없는 진보이다’라는 견해는 차갑고 모호하다. 그러나 만약 역사가가 진보의 가정을 유지하고 싶다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는 준비해야 한다. 그것을 과정이라고. 그 과정속으로 연속되는 시대들의 요구들과 조건들을 각기 특유의 내용들로 채워 넣는 과정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액튼의 뜻이다. 역사는 진보의 기록일뿐만 아니라 진보하는 과학이라는. 또는 당신이 좋아한다면 역사는 두 가지 의미이다. 사건들의 전행일뿐만 아니라 그 사건들의 기록이 진보적이라는
Let us recall Acton's description of the advance of liberty in history: It is by the combined efforts of the weak, made under compulsion, to resist the reign of force and constant wrong, that, in the rapid change but slow progress of four hundred years, liberty has been preserved, and secured, and extended, and finally understood. History as the course of events was conceived by Acton as progress towards liberty, history as the record of those events as progress towards the understanding of liberty: the two processes advanced side by side." 다시 상기해 보자. 액튼의 기술을. 역사에서 자유의 진전이라는 기술에 대해. 그것은 약자들의 단결된 노력에 이해 쟁취된다. 물론 노력도 강요에 의해 행해진다. 끊임없는 악의 통치 지배에 대항하는. 그러나 이것은 변화는 빨랐지만 진보는 느렸던 4백년간의. 자유는 보존되어 왔고, 확보되어 왔고, 확장되어 왔고, 그리고 마침내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건들의 기록으로써 역사는 액튼에 의해 자유를 향한 진보로 생각되었다. 그 사건들의 기록으로써의 역사는 자유의 이해를 향한 진보로 해석되었다. 이 두 과정들은 나란히 진행되었다.
Chapter 5_11_176p History as Progress
The philosopher Bradley, writing in an age when analogies from evolution were fashionable, remarked that 'for religious faith the end of evolution is presented as that which. . . is already evolved'. For the historian the end of progress is not already evolved. It is something still infinitely remote; and pointers towards it come in sight only as we advance. This does not diminish its importance. A compass is a valuable and indeed indispensable guide. But it is not a chart of the route. The content of history can be realized only as we experience it. 철학자 브래들리는 진화의 유추들이 가장 유행할 때 썼다. 그리고 말하기를 종교적 신앙에 대한 진보의 목적은 이미 진화된 것이다. 역사가에 있어서 진보의 목적은 이미 진화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아직 무한히 멀리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향하는 지표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만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나침반은 가치 있고 필수불가결한 가이드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구체적인 경로까지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내용은 실현될 수 있다. 오직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때만이.
My third point is that no sane person ever believed in a kind Of progress which advanced in an unbroken straight line without reverses and deviations and breaks in continuity, so that even the sharpest reverse is not necessarily fatal to the belief. Clearly there are periods of regression as well as periods of progress. Moreover, it would be rash to assume that, after a retreat, the advance will be resumed from the same point or along the same line. Hegel's or Marx's four or three civilizations, Toynbee's twenty-one civilizations, the theory of a life-cycle of civilizations passing through rise, decline, and fall-such schemes make no sense in themselves. 세 번째 포인트는 어떤 사람도 믿지 않는다. 어떠한 진보도 끊어지지 않는 일직선으로 나아간다든가, 역주행을 하지 않는다든가 그리고 이탈을 하지 않는 다든가 연속성에서 끊김이 있다든지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명백한 역주행도 그 믿음에 반드시 분명히 후퇴의 시기도 있다. 물론 당연히 진보의 시대로 있고. 더욱이 아래와 가정하면 성급하다. 후퇴 후에 그 진행이 같은 지점이나 같은 선을 따라 진행될 것이라고 가정하면 성급하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4개 또는 3개의 문명들, 토인비의 21개의 문명들, 토인비는 생명 주기의 이론으로 보았다. 문명들은 성장, 쇠퇴, 그리고 붕괴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이러한 도식들은 그들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Chapter 5_12_177p History as Progress
But they are symptomatic of the observed fact that the effort which is needed to drive civilization forward dies away in one place and is later resumed at another, so that whatever progress we can observe in history is certainly not continuous either in time or in place. Indeed, if I were addicted to formulating laws of history, one such law would be to the effect that the group-call it a class, a nation, a continent, a civilization, what you will-which plays the leading role in the advance of civilization in one period is unlikely to play a similar role in the next period, and this for the good reason that it will be too deeply imbued with the traditions, interests, and ideologies of the earlier period to be able to adapt itself to the demands and conditions of the next period. Thus it may very well happen that what seems for one group a period of decline may Seem to another the birth of a new advance. Progress does not and cannot mean equal and simultaneous progress for all.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관찰한 사실들에 대한 징조인 것이다. 문명을 추동하기 하는 데 필요한 노력은 한 장소에서 사멸되고 후에 다른 장소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가 관찰하는 어떠한 진보든지 분명히 시간적으로나 장소 측면에서 연속적이지 않다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가 역사 법칙을 만들려는 것에 열중한다면 그런 법칙은 아래와 같은 취지의 것이다. 계급이나 국가, 대륙, 문명 등에서 한 시대에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룹은 다름 시대에는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옛날 전통, 이익,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다. 전시대의 것에 젖어 있다보니 잘 적응을 하지 못한다. 다음 시대의 요구나 조건들에. 그러므로 당연하다. 한 그룹에게 쇠퇴의 시기같이 보이는 것이 다른 그룹에게는 새로운 진전의 시작으로 보이는 것이다. 진보는 의미하지도 않고 의미할 수도 없다. 동일한 그리고 동시적인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It is significant that almost all our latter-day prophets of decline, our sceptics who see no meaning in history and assume that progress is dead, belong to that sector of the world and to that class of society which have triumphantly played a leading and predominant part in the advance of civilization for several generations. It is no consolation to them to be told that the role which their group has played in the past will now pass to others. 아래와 같은 사실은 중요하다. 거의 모든 몰락의 예언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은 역사에서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정하는 사람들, 진보는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속한다. 어떤 세상의 일부분이나 어떤 계급에. 그들은 한 때 주도적인 뛰어난 부분들을 맡아온 사람들이다. 문명의 진보에서 여러 세대동안에 문명의 진보에서 앞선 그리고 눈에 뛰는 주도적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국가나 계급에 속해있던 사람들이 몰락의 예언자나 회의론자들이 되기 쉽다는 것은 의미있게 샆려볼 수 있는 일이다.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그들 집단이 과거에 맡았던 역할이 지금은 다른 집단에게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Chapter 5_13_178p History as Progress
Clearly a history which has played so scurvy a trick on them cannot be a meaningful or rational process. But, if we are to retain the hypothesis of progress, we must, I think, accept the condition of the broken line. Lastly, I come to the question what is the essential content of progress in terms of historical action. The people who struggle, say, to extend civil rights to all, or to reform penal practice, or to remove inequalities of race or wealth, are consciously seeking to do just those things: they are not consciously seeking to 'progress', to realize some historical 'law' or 'hypothesis' or progress. 분명히 그렇게 야비한 트릭을 사용해 온 역사는 그들에게 의미 있고 합리적인 과정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보의 가정을 유지하고 싶다면, 우리는 끊어진 선이라는 조건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진보의 진정한 내용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민들의 권리를 확장시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또는 형사 소송 절차를 개선하자는 사람들 또는 인종이나 부의 불평등을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단지 그 일 자체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그들은 의식적으로 진보는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역사적 법칙이나 가정 또는 진보를 실현하고자 함도 아니다.
It is the historian who applies to their actions his hypothesis of progress, and interprets their actions as progress. But this does not invalidate the concept of progress. I am glad on this point to find myself in agreement with Sir Isaiah Berlin that 'progress and reaction, however much the words may have been abused, are not empty concepts'.' It is a presupposition of history that man is capable of profiting (not that he necessarily profits) by the experience of his predecessors, and that progress in history, unlike evolution in nature, rests on the transmission of acquired assets. These assets include both material possessions and the capacity to master, transform, and utilize one's environment. 그들의 행동에 진보의 가정을 적용시키고 그들의 행동이 진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역사가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보의 개념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는 이샤야 벌린과 의견일치를 본 것에 대해 기쁘다. 진보와 반동을 아무리 남용되어도 개념들을 비게 하지 않는다. 아래와 같이 말하는 것은 역사의 전제다. 인간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물론 꼭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조상들의 경험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역사에서의 진보는 자연에서의 진화와 달리 획득된 자신의 전수를 기초로 한다는 사실들은 역사에서의 전제다. 이 자산들은 물질적인 자신들과 능력들을 포함한다. 그 능력은 그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변형하고 이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Chapter 5_14_179p History as Progress
Indeed, the two factors are closely inter-connected, and react on one another. Marx treats human labour as the foundation of the whole edifice; and this formula seems acceptable if a sufficiently broad sense is attached to 'labour'. But the mere accumulation of resources will not avail unless it brings with it not only increased technical and social knowledge and experience, but increased mastery of man's environment in the broader sense. At the present time, few people would, I think, question the fact of progress in the accumulation both of material resources and of scientific knowledge, of mastery over the environment in the technological sense. 사실 두 요인들은 긴밀히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 서로 영향을 준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력을 전체 구조의 기초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 공식은 받아들여 질만하다. 만약 우리가 노동력이란 것에 충분히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러나 단순한 자원들의 축적은 소용없을 것이다. 그것이 가져오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기술적인, 그릭 사회적인 지식과 경험의 증대와 인간의 환경에 대한 지배의 증대. 넓은 의미의 증대를 가져오지 않는 한 단수한 자원들의 축적은 소용없을 것이다. 현 시대에는 거의 어떤 사람들도 내가 생각하기에 의심하지 않는다. 진보라는 사실에는 물질적 자원의 축적뿐만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축적도 있는 것이라고, 기술적인 의미에서 환경에 대한 지배를 위한 물질적 자원의 축적뿐만 아니라 지식의 축적들을 포함한다는 것이 진보라는 사실이라는 데 요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What is questioned is whether there has been in the twentieth century any progress in our ordering of society, in our mastery of the social environment, national or international, whether indeed there has not been a marked regression. Has not the evolution of man as a social being lagged fatally behind the progress of technology! The symptoms which inspire this question are obvious. But I suspect none the less that it is wrongly put. History has known many turning-points, where the leadership and initiative has passed from one group, from one sector of the world, to another: the period of the rise of the modern state and the shift in the centre of power from the Mediterranean to western Europe, and the period of the French revolution, have been conspicuous modern examples. 의문스러운 것은 20세기에 어떤 진보가 있어왔는가 이다.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 환경,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 대한 우리의 지배력에서 어떤 진보가 있어 왔는가. 오히려 눈에 띄는 퇴보가 있어 온 게 아닌가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진화 과정이 기술 진보에 현저히 뒤쳐져 있는 건 아닐까? 이와 같은 질문을 불러오는 징후들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잘못된 전제하고 생각한다. 역사는 많은 전환점들을 알아 왔다. 그 전환점 시기에는 리더십과 주도성이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세상의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근대 국가의 성장과 지중해서 서유럽으로 힘의 중심의 전환 그리고 프랑스 혁명 시기들은 가장 눈에 띄는 근대의 예들이다.
[역사란 무엇인가_시즌2] 180~185(90+5*19)p_1월 19일(수)
Chapter 5_15_180p
Such periods are always times of violent upheavals and struggles for power. The old authorities weaken, the old landmarks disappear; out of a bitter clash of ambitions and resentments the new order emerges. What I would suggest is that we are now passing through such a period. It appears to me simply untrue to say that our understanding of the problems of social organization or our good will to organize society in the light of that understanding have regressed: indeed, I should venture to say that they have greatly increased. It is not that our capacities have diminished, or our moral qualities declined. 그런 시기들은 언제나 격렬한 전복들이 있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투쟁의 시기이다. 구 권력들은 약해지고, 새로운 방향지표들은 사라진다. 야망들과 분노들의 격렬한 충돌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나타난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그런 시기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이해도, 사회 조직 또한 우리의 선한 의지의 문제들의 이해도가 퇴보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난 과감히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크게 증가되어 왔다고 우리의 잠재적인 능력들이 감소되어 온 것은 어니다. 또한 우리의 도덕적 자실들이 쇠퇴해온 것은 아니다.
But the period of conflict and upheaval, due to the shifting balance of power between continents, nations, and classes, through which we are living has enormously increased the strain on these capacities and qualities, and limited and frustrated their effectiveness for positive achievement. While I do not wish to underestimate the force of the challenge of the past fifty years to the belief in progress in the western world, I am still not convinced that progress in history has come to an end. But, if you press me further on the content of progress, I think I can only reply something like this. The notion of a finite and clearly definable goal of progress in history, so often postulated by nineteenth-century thinkers, has proved inapplicable and barren. 갈등과 전복의 시기들, 권력의 균형이 이동하면서, 대륙간, 국가간, 계급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다. 이런 권력의 균형 이동 시기는 크게 증가시킨다. 우리의 능력들이나 자질들에 크게 부하를 가져온다. 그리고 제한하고 좌절시킨다. 긍정적인 성취를 향한 우리의 효과성을 좌절시킨다. 나는 과소평가하길 원하지 않는다. 지난 50년간의 도전의 힘에 대해서. 서방에서 진보의 믿음에 대한 도전의 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진 않지만 아는 확신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우리의 진보가 끝나가고 있다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진보의 내용에 대해 더 나한테 압력을 가한다면 가는 오직 이렇게 답변할 수 있다. 유한하고 분명하게 정의된 진보의 목표라는 개념, 이것은 19세기 사상가들에 의해 많이 정립되었었다. 진보의 목표라는 개념은 실현가능하지 않고 또는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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