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체크(rain check) / 최종호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교사 수준이 곧 교육의 질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엊그제 내부 전산망인 업무관리 시스템에 ‘다가감 벚꽃제 행사 추진 계획’이 올라왔다. 올해 6회째를 맞이한다. 4월 초가 되면 교정에 피는 벚꽃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참 예쁘다.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뜻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전 네 시간 동안 퀴즈 대회, 장기 자랑, 다행시 짓기(2학년은 2행시, 3학년은 3행시), 보물찾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기대와는 너무 달랐다. 교육과정과 관련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면서 공부도 되는 내용을 계획해야 하는데 아이들의 재미만 쫓아서다. 결재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학생들이 엊그제 체육관에서 다모임(전교학생회)을 열어 행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는 것을 보았다. 교사들도 업무 담당자를 중심으로 의논했을 것인데 계획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닌 것 같아서다.
어느 책에선가 ‘뒤통수 치는 관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전에 협의하고 의사를 전달해야지, 사후에 아랫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닦달하면 최악이라는 것이다. 일찍 담당자를 불러 내 의중을 전달하고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게도 일부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일단 결재했다.
학교를 옮겨 와서 처음 이 행사를 맞닥뜨렸을 때는 행사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의견을 묻고 조정했다. 사진 찍기와 시 쓰기 등 교육과정에 나오는 내용을 행사와 연계하고 좋은 작품은 학교 현관에 새롭게 마련된 ‘작은 갤러리’(사진이나 미술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고쳐 만든 장소 이름)을 활용하자고 했다. 담당자와 즐겁게 의견을 조율했다.
저학년은 담임과 함께 말린 꽃으로 압화를 만들어 보는 체험을 했다. 중학년은 광양에서 활동하는 동화 작가를 초청하여 시 쓰기를 배우고 시화를 꾸몄다. 고학년은 사진 기자로 활동하다 퇴직한 분(지금은 우리 지역에서 커피농장 운영)에게 사진 찍는 방법을 배웠다. 아이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 중에서 선별하여 전시하니 모두 좋아했다.
작품은 보통 한 달 반에서 두 달 동안 전시한다. 너무 길어지면 흥미와 관심을 끌지 못해서다. 날마다 현관을 드나들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원들도 만족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동서양의 명화(크기에 맞게 주문 제작한 작품)나 초대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아이들의 작품으로 채우니 색다른 맛이 났다. 이곳이 좋은지 하교 시간이 되면 현관에서 통학차 탈 시간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작년에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는 더 발전시킬 것으로 믿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음날 교감과 교무 부장을 불렀다. 실망감을 내비치자 자치활동의 의미를 살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전임 학교에서는 교사의 개입이 많아 의견을 잘 내지 않았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신선했습니다.”라는 얘기가 변명처럼 들렸다. “아이들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교육적인 의미와 효과를 살릴 수 있도록 교사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나요?”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듣고만 있던 교감이 교무 부장을 보며 다음에는 사전에 교장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단다. “그런 의도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행사를 계획하려면 교사들이 진지하게 협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라며 교육과정과 연계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계획을 다시 짤까요?"라고 물어서 그냥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다음부터는 더 세심하게 검토하겠단다.
며칠 뒤에 담당 교사가 교장실을 찾았다.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계획을 수정, 보충하겠단다. 자신은 저학년 담임이어서 다모임에 참석하지 못했고, 진행 담당자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왕에 전시 공간을 만들었으니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아이들의 작품 전시회가 한 학기에 한 번은 필요하지 않느냐? 이번 다가감 벚꽃제는 그 의미를 살리지는 못했더라도 개교기념일을 계기로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일단락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틀 뒤에 담당 교사가 다시 교장실을 찾았다. 선생님들과 의논해서 고학년은 시(다행시도 가능)를 쓰고, 저학년은 강사를 불러 꽃으로 장신구 만들기를 하겠단다. 시를 쓰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사전에 담임이 지도하고 당일에는 캘리 그라피 강사를 초청하여 예쁘게 글씨 쓰는 것도 배우겠다고 했다. 쓴 시에 그림도 그려 넣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계획이라며 전시도 하겠단다. 교장실을 나서기 전에 “행사를 계기로 서로 커가는 기회로 만들자.”라며 격려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이종선의 『따뜻한 카리스마』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때 레인 체크(rain check)를 활용하란다. 본래 뜻은 경기 중에 비가 와서 더 이상 진행이 어려우면 다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우대해 주는 것이다. 누가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을 하면 이번에는 어렵다면서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거절하는 것이 곧 생활 속의 레인 체크란다. 그래야 끌리는 매력을 잃지 않고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계획은 부족했더라도 다음에는 핵심을 놓치지 말자고 한 레인 체크가 효과를 발휘한 듯하다. 내용이 부실하다고 얼굴을 붉히고 바꾸라고 했더라면 자발적인 노력은 물론이요, 자기 성찰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는 크고 작은 행사가 많다. 감염병이 우려되어 생략하거나 축소했지만, 모두 없앨 수는 없다. 학생의 자치와 자율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교사는 늘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생의 의견을 존중하되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학생 중심 교육과정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행사를 추진하려면 교사가 어디까지 참여하고 어떻게 교육과정과 관련지을지 많이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