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탄생을 갈망하며 / 최종호
지난해 섣달그믐, 세모를 맞이하는 느낌이 여느 해와 달랐다. 11월은 날짜가 겅중겅중 지나가는가 싶더니 12월에는 연말로 그냥 껑충 뛴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 가는 해가 아쉬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여러 일이 영향을 준 듯싶다. 11월에는 주말 주택에서 김장했는데 그날, 대나무를 베다 입술을 다쳐 고생했다. 12월 하순에는 코로나가 다시 감염되어 힘들었다. 근육과 관절에 통증이 있는 데다 머리까지 아팠다. 지인들과의 약속도 취소하고 꼭 참석해야 할 곳도 나가지 못해 좀 우울했다.
격리가 끝나자마자 안과에도 갔다. 눈이 충혈되더니 별 차도가 없어서 문제를 직감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도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며 병원 진료를 권한 터였다. 의사는 눈을 살펴보더니 각막염이라며 감기 걸린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둘째 날과 셋째 날은 머리도 아팠지만, 눈에도 열이 느껴져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후유증이 나타났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으니 수건은 따로 쓰라는 주의 사항을 들었다. 약국에서 눈에 넣는 약을 두 가지 주었다. 하루에 네 번, 순서는 관계없고 무려 5분 간격으로 넣으라고 했다.
연말인 데다 사정이 이러하니 허전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누구를 만나고, 그렇다고 집에서 맥주 한 잔도 못 할 처지라 기분이 나지 않았다. 쌓아두면 숙제의 무게가 커질 것 같아 지인에게 전해 받은 ‘까치 문학’ 동인지를 들었다. 한참 읽다가 텔레비전을 켰더니 테니스를 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나달이다. 상대는 처음 보는 테니스 선수. ‘아내가 경기를 보다가 끄고 낮잠을 자러 갔나?’ 그다지 관심이 적어 다른 채널로 돌렸다. 내가 잠깐 과일을 가지러 간 사이에 나오더니 다시 돌려놓았다. 워낙 테니스를 즐겨보기에 군말 없이 함께 봤다.
안방에서 내내 보고 나왔는지 너무 잘한다며 “그날이 온 것 같다.”라고 한다. 점수를 보니 1세트는 노리가, 2세트는 나달이 이기고 3세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화면에는 ‘2023. 유나이티드컵 테니스 대회’라고 쓰여 있었다. 옆에 있는 아내가 월드컵 축구처럼 국가 간의 대항전이라고 설명해 준다. 경기 장소는 시드니. 관중의 대부분은 나달을 응원하고 있었다. 상대편 선수가 득점하면 그쪽 팀원들만이 환호성을 지르고 팔을 번쩍 드는 장면을 보여 준다. 중간 중간에 호주의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여자 경기도 잠깐씩 알려 주었다.
스페인의 나파엘 나달(Rafael Nadal)의 상대 선수는 영국의 캐머론 노리(Cameron Norrie). 세계 랭킹 14위다. 그는 지금까지 나달을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세트도 가져오지 못했단다. 그래서 이번에도 모두가 나달이 쉽게 이길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시합이 막상막하로 이어져 흥미진진했다. 서브 에이스도 뒤지지 않았으며 포핸드나 백핸드 스트로크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수비 또한 일품이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긴장감이 계속 이어졌다. 세 번째 게임에서 균형이 깨졌다.
테니스에서는 자신의 서브 게임은 지키고 상대의 차례일 때 득점을 많이 해야 이길 수 있다. 노리 선수가 나달의 서브 게임을 막아내자 환호성을 질렀다. 아내는 1세트와 게임 양상이 비슷하게 흘러간단다. 나는 노리를 응원했다. 세계 테니스계의 세대교체를 원해서다. 나달은 나이가 적지 않는데도 4대 메이저 대회(호주, 프랑스, US오픈,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 ‘2022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또 우승을 차지했다. 준결승에서 그와 팽팽하게 경기를 이어가던 신예 즈베레프가 발목이 꺾이는 부상을 당하는 경기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는 여세를 몰아 결국 스물두 번째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나달이 자신의 유리한 서브 게임을 뺏기자 이를 만회하려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노리가 점수를 얻으면 환호를, 반대이면 안타까워 탄성을 질렀다. 전체적인 승부의 갈림길에 있었다. 결국 브레이크 포인트(한 포인트로 상대 선수의 서브를 깨뜨리는 상황이 됐을 때의 점수)까지 가는 혈전을 벌였으나 자신의 게임을 지켜냈다. 노리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팀원들이 즐거워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노리는 결국 3세트를 6대 4로 이겼다.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영국의 유명한 앤디 메레이(Andy Murray)의 뒤를 잇지 않을까 싶다. 승리를 간절히 원해서 그런지 훤칠한 키에, 외모도 준수하여 매력적으로 보였다.
경기 규칙도 모르던 내가 가끔 테니스를 즐겨보는 것은 아내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집 근처에 있는 테니스장을 이용해서인지 경기 규칙과 용어를 잘 알고 있었으며 관심이 많아 중계방송을 즐겨 보았다. 큰 경기가 있을 적에는 혼자 보면 재미가 덜했던지 나를 불러 대회와 선수, 규칙을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도 큰 경기를 즐겨보는 수준에 이르렀다.
얼마 전에 테니스황제 페더러가 은퇴했지만, 조코비치와 나달은 지금까지 건재하다.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그리스의 치치파스, 미국의 프리츠 같은 선수가 호시탐탐 정상을 노리고 있으나 아직 이들을 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머지않아 신세대 선수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노련함보다는 패기와 역동적인 플레이가 좋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두 명의 선수가 너무 오래 정상을 차지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후배들의 앞길을 막아선 것 같은 느낌에서다. 영원한 권좌는 없다. 오랜만에 그 서광을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노리 선수 파이팅!
첫댓글 흥미진진한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테니스 잘 모르지만 남편이 틀어 놓으면 가끔 봅니다.
뿜어져 나오는 그 힘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 같아요.
교장 선생님이 테니스까지 섭렵한 것은 몰랐어요.
영원한 승자는 없는 것이 스포츠 세계의 냉정함이겠지요.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