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중근성에게 / 이미옥
여름은 지난한 기억의 부스러기를 안고서 떠나고 계절은 무던한 노인의 일상처럼 반복되네요. 나는 계절이 품은 오랜 시간을 떠올립니다.
잘 지내시나요?
8월의 그날처럼 화사한 햇살을 볼 때면 오빠의 안부가 묻고 싶어집니다. 그날은 오빠가 처음으로 집에서 독립하는 날이었죠. 이사하는 날은 비만 오지 않으면 길일이니 아침부터 쨍한 날씨가 반가웠어요. 말복이 지난 즈음이어서 더위도 주춤거릴 때였죠. 진주 사는 ㅈ 선배도 이사를 도우러 오기로 해 남편이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다들 속으로는 걱정이 많았지만 오빠의 기대를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어요. 오빠 인생의 첫 집. 분양 받고 건물이 올라가는 걸 즐겁게 기다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누군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우린 오빠의 부고를 들었어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아침이 또렷하네요. 전화를 받던 남편의 뒷모습,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여름 햇살, 일요일 이른 아침이라 자고 있던 아이들까지. 통화 내용을 전하는 남편에게 “아니…, 왜…?”라고 물었어요. 왜 갑작스레 떠났는지, 왜 오늘이어야 했는지. 슬프고 뭔지 모를 답답함에 우린 서로를 보며 그냥 울었어요.
내 기억 속에 오빤 늘 즐겁고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죠. 유월의 어느 오후, ‘청바지에 어여쁜 아가씨가 날 보고 윙크하네. 처음 보는 날 보고 윙크하네. 오호 이거 참 야단났네.’ 공학관 건물 얕은 담장에 걸터앉아서 선배들 서넛이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죠. 교문을 들어서는 여학생들이 킥킥거리며 그 앞을 지나갔어요. 객기가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때니까요. 거기에 오빠도 있었죠. 다리를 흔들며 노래 부르는 이들 속에 오빠의 낡은 목발은 흥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빠 표정은 유월의 바람처럼 춤추고 있었어요. 늘 그렇게 우리와 함께할 줄 알았는데.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에서 한 선배가 “음, 그러니까, 잘못된 선택을 한 거지?”라고 묻는데 다들 말이 없었어요. 우린 죽음의 원인이 심근경색이라고 전해 들었지만 쉽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 했어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어둑한 강의실 복도에서 마주친 오빠가 ‘오늘 재수 좋은 날이야. 기사 아저씨가 장애인의 날이라고 택시비 안 받더라.’라면서 웃었죠. 그 서늘한 웃음 뒤의 아픔이 오빠 인생이라 생각했을까요?
발인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의 말을 듣기 전까지 저도 그 선배 말이 틀렸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납골당에 가기 전, 입주할 새집에 유해를 안고 간 남편은 너무 속상했대요. 공간마다 오빠가 들인 정성이 보여서. 그래요. 우리가 알던 오빠는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이었어요. 그 얘길 들으니 더 슬프고 안타깝고 미안했어요.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 오빠의 장애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막상 죽음 앞에선 그렇지 않았나 봐요. 쉽게 오빠 삶을 판단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우리가 알던 오빠로 기억되게 해 줘서.
기억할게요. 유월의 바람에 춤추던 표정도, 서늘한 웃음도.
살아있는 이들과의 이별은 희미해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데 삶의 시공간을 벗어난 이별은 공기처럼 떠돌다 햇살에, 바람의 향기에, 맑은 술잔에 내려앉아 내 안에 스며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죠. 햇살이 쨍한 날 오빠가 온 것처럼. 이럴 땐 슬픔이 온통 날 채우기 전에 되뇌죠. ‘너무도 잘 지낼거야.’라고.
그렇죠? 잘 지내시죠? 유월의 바람처럼.
첫댓글 소설인가요? 다음 회차가 기대되는 연애소설 같아요. 슬프지만 울지 않을게요.
울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그렇죠? 잘 지내시죠? 유월의 바람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하네요. 글 고맙습니다.)
늘 힘나는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시 쓰시지요?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워요.
삶의 시공간을 벗어난 이별, 글에서 유월의 습기를 읽습니다.
시를 배우는 중입니다. 쓰는 건 잘 못하구요. 하하.
한 문장 한 단어, 고심해서 쓴 글 잘 읽었어요. 아마 선배도 그곳 어딘가에서 미옥님을 생각하겠지요...
그럴까요? 고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슬픔을 터트리지 않고 머금고 있네요.
고맙습니다. 교수님께 혼날까 조마조마합니다. 하하.
선생님 글 너무 잘 쓰십니다. 브런치 작가들 중에서도 으뜸이실 것 같습니다.
에구, 아닙니다. 꼴찌랍니다. 여기저기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많아 힘듭니다.
명상에 들게 하는 글이네요. 언제나처럼 맑고 깊습ㄴ니다.
고맙습니다.
글이 맑아요.
정제된 행간에 숨은 이야기가 읽혀서 읽고 나니 슬퍼졌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