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롬!! (2023년9월20일 수요일) 신우회 예배
계속해서 전래동화와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벙어리 귀신을 떠나가게 하시여 말문을 터주시듯 우리도 말문이 열리어 사람과 나에게 유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래동화 : 호랑이가 담배 피던 아주 옛 시절, 동해 바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무려 700년을 넘게 산 늙은 멸치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자신이 구름을 타고 승천한 뒤 날씨가 더웠다가, 추웠다가 변덕을 부리더니 갑자기 눈이 내리면서 다시 땅으로 내려오는 꿈을 꿨다.
꿈이 참으로 생생하여 멸치는 하인 가자미에게 해몽가 망둑어 노인을 모셔 오라고 말했다. 가자미는 그 말대로 서해로 달려가 망둑어를 모시고 왔다. 멸치는 망둑어를 보고 버선발로 달려가 웃으면서 반겼지만, 정작 수고한 가자미에게는 빨리 주안상을 가져오라고 면박을 주었다.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서 망둑어를 모셔왔던 가자미는 주인에게 수고했단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오히려 면박만 듣고 화가 났지만 함부로 대들지 못하고 꾹 참았다.
주안상을 올린 뒤 마을 물고기들이 구경하러 몰려왔을 때 멸치가 망둑어에게 자신이 꾼 꿈을 털어놓자, 망둑어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해몽을 해 보니 아주 좋은 꿈입니다. 그 꿈은 필시 당신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꿈이오. 구름은 용들을 모시고 가는 것이고 더웠다 추웠다, 눈이 내린다 하는 것은 용들이 다루는 기후의 능력. 필시 당신이 용이 되어 이 바다를 지배할 꿈입니다.
그 말을 들은 멸치가 기뻐하자,
아까 대놓고 면박을 받아 화가 나 있던 가자미가 반박하고 나섰다.
에이, 그건 아니에요. 유감스럽지만 그 꿈은 나리께서 죽는 꿈입니다요. 잘 들어봐요. 승천하는 것은 어부가 나리를 낚아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고, 더웠다 추웠다 하는 것은 나리가 석쇠에 구워지면서 부채질도 하는 것, 눈이 내리는 것은 소금이 뿌려지는 것이니, 이는 필시 나리가 인간들 식사거리가 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러자 순간 화가 치민 멸치가 가자미의 뺨을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가자미의 두 눈이 그만 한 쪽으로 몰려버렸다. 망둑어는 경악해서 눈이 튀어나왔고, 구경꾼 물고기 중 꼴뚜기는 자신의 눈이 몰린 것처럼 느껴져 서둘러 눈을 숨겼다.
메기와 병어, 새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기는 그 광경이 어찌나 웃겼던지 호탕하게 껄껄 웃다 그만 입이 찢어졌고, 새우도 허리를 굽히며 자지러지게 웃다 허리가 구부러졌다. 병어도 처음엔 메기처럼 크게 웃었지만 멸치가 눈을 부라리자 재빨리 웃음을 참고 입을 한껏 오므리다 입이 툭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본문 말씀 : 누가복음11:14-23 새번역
예수님께서 귀신을 하나 내쫓으셨는데 그것은 벙어리 귀신이었습니다. 그 귀신이 나가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리가 놀랐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그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또 가정도 서로 싸우면 무너진다. 그러니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는데,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좇는다면 너희의 추종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능력을 힘입어 귀신들을 내쫓으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이미 온 것이다.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체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준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
말씀 선포 : 멸치의 꿈, 수군거림 그리고 하나님 나라
(The Dream of Anchovy, Muttering and the Kingdom)
수군대다, 또는 수군거림은 주로 사람들 사이에 대화 주제인 대상에게 들리지 않는 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들리지 않게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이유는 그 대상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관심이 가지 않는 이에 대해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수군거리든, 대상에 대한 호감으로 속삭이든 수군거림에는 항상 대상에 대한 관심이 밑바탕을 이룹니다. 이로 인해 연예인이나 유명한 사람은 자신이 대중에 알려졌기에 수군거림은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어디든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는 인간관계란 존재하지 않기에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엔 언제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주님의 백성인 성도의 수군거림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항상 ‘예’ 또는 ‘아니요’ 라고 말하고 그 이상의 말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성도의 수군거림은 하나님과 대상의 관계에 있어 필요 이상의 말이 덧붙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간주해 볼 때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수군거리는 대상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품고 속삭일지라도 그 웅성거림이 하나님과 누군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리는 말이 될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엔 합당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여 태어난 아이가 주님이 마음에 작정하신 징계의 뜻을 따라 아플 때, 다윗이 식음을 전폐하고 전력으로 그분께 매달려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다윗은 일주일을 금식하며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 아기는 주님의 품에 안겼고, 신하들은 다윗이 끝내 자녀가 숨을 거뒀다는 비보에 절망할까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 대해 수군거린 것은 그에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웅성거림은 주님과 다윗의 관계에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기를 데려가시는 더 좋은 일을 선택하셨기에 그는 주님의 뜻에 동의하며 이제 다시 왕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 식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가 정말 좋은 마음으로 다른 성도와 하나님 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간다면 그 관계를 위해 기도하거나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성도의 수군거림이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요한복음서 6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를 살피십시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서 고대 유대인이 그토록 바라던 야웨 하나님과의 한 가족이 됨을 선언하시며 자신을 빗대어 여러 번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안다는 지식으로 그가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느냐 수군거리며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의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제한적인 선지식을 가지고 수군거리며 자신을 멀리하는 그들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인격적 언약 관계에서 듣고 배운 이는 모두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주님과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적이 없는, 즉 인격적 언약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수군거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선지식으로 필요치 않은 말을 이어나갈 수 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치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후 1세기 고대 유대인이 수군거림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인격적 교제를 꿈꾼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시편 41편저자가 노래했듯이 가장 가까운 이들이 예수님께 발길질 하고자 뒤꿈치를 들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도가 자신도 모르게 수군거리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게 행동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후 1세기 고대 유대인은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권능에 질투함으로 또한 자신들의 제한된 선지식으로 그분의 일을 악마가 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진짜 표징을 보여달라는 생떼를 썼습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이 개시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1세기 성도도 주후 1세기 유대인처럼 충분히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아들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 세워가고 계신 하나님 나라를 주님처럼 소망해야 합니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이 완성해 가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같이 동일하게 소망해야만 주님이 21세기에 하시는 일에 수군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주님과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써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