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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전도서 1:1-11】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차지 아니하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말씀 선포: 들어가는 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의 수령이 5,000년이 넘는다고 합니다.
비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칠레해안 산지에 있는 침엽수로 5,484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브리슬콘 소나무로 4,853년의 수령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나무는 거의 청동기 시절부터 그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무들의 수령과 인간의 수명을 비교하면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때로는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압도당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제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휴스톤 서울교회 연수도 가보고 싶지만 나아아가라 폭포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 웅장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찬양이 절로 나온다고 합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폭포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수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지만 그 많은 물이 지금껏 한 번도 멈추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수많은 물이 흘러내리지만 강물의 수원지가 마르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양의 강물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그 많은 물을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시간 이어져 오는 자연의 장구한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세월은 무상(無常)하기만 합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하나님의 피조물을 능가할 만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자신의 무지함과 무능함과 비천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욥기 40-41장). 오늘 우리가 살펴볼 전도서 본문은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다시 살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시 결단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전도서 본문은 ‘헛되다’는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외치며 유한한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은 이제 인생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솔로몬 왕이 허무주의(虛無主義)적인 논지를 펼치는 것은 아닙니다.
언듯 보기에 인생무상이라며 인간사의 허무함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헛됨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외침 중에 헛됨에 해당되는 단어(헤벨)의 용례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숨, 입김,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교의 대상에 '잠깐' 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이고 매우 주관적입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구조 헬기의 시야를 가리는 아침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과 비교한다면 아침 안개가 존재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짧을 것입니다.
특히 창세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비하면 아침 안개가 존재하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것입니다.
마찬가지 자연이 유지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영원한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는 인생은 헛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음’이 주관적이다 보니 정작 본인은 ‘헛됨’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도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나놓고 보니 지난 시간이 아침 안개와 같이 헛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탑 사건을 기억하지죠?
바벨탑을 건축할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시날 평지에서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만들고 역청을 이용하여 탑을 쌓았습니다.
분명 이 탑은 종교적인 기능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즉, 종교적인 명분과 사회적인 필요를 가지고 신전 탑을 세웠습니다.
많은 인력과 재물을 동원하여 염원을 가지고 탑을 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탑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셨습니다. 심혈을 기울인 공든 탑이 무너진 것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견고하게 지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중압감이 느껴지도록 높이 쌓았지만 결국은 폐허로 변하였고, 이제는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직도 건재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허망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헛됨의 두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유익으로 번역된 단어(이트론)는 남다, 남겨지다, 보람이라는 의미로 활용되는 말입니다. 즉, 이 땅에 사람들이 남겨 놓은 것들이 하나님의 피조물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에 비하면 인간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앞에 인간의 역사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창세부터 변함없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반복되고, 수천 년 동안 자연의 현상은 반복되고 있지만 모든 만물의 운행이 피곤하여 지쳤다고 어느 누구도 단정할 수 없을 만큼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이렇게 아무런 정비도 받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아무 이상 없이 작동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면 인간 존재의 미약함, 볼 품 없는 인간의 능력, 무엇하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계를 직시하게 되고, 창세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 앞에 더욱 초라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9절에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라는 고백은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만 보면 인간의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수천 년이 흘러도 기억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기억이 되는 부끄러운 이름으로 기억이 되든지 후대까지 그 이름이 기억된다는 것은 큰 일입니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제국이 일어나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제국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제국의 존재도 다 기억을 못하는데 하물며 한 사람이 기억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다니엘서 12:2-3에 보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쪽은 영생을 받아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사람과, 다른 한 쪽은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날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25:31-34, 41 말씀을 보겠습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다니엘서의 말씀보다 더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41에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은
요한 계시록 20:14-15을 연상하게 합니다.
잠시 살펴보면,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라고 말씀하시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이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서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 지혜 있는 자가 책에 기록되고 구원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단 12:1),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책에 기록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21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지 못합니다.
불순종한 이들은 하나님이 기억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11절에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기억됨이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은 그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6에 보면,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볼 때 볼품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복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사람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의 이 땅에서의 삶은 각각 어떻게 평가 받을 까요?
아무리 큰 업적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진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가치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내 놓을 만한 업적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사람들이 살아간 삶을 헛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여러분 찬송가 120장 오베들레헴 작은 골을 작사한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 1835-1893) 목사님을 아십니까?
이 목사님은 헬렌켈러에게 신앙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준 인물이며, 스펄전, 무디 목사님과 더불어 동시대에 설교 황금기를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처음부터 명 설교자로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브룩스 목사님은 하버드를 졸업하여 라틴어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 직업에 흥미를 잃었고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교사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후 성공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보스톤 삼위일체 교회에서 22년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브룩스는 국가와 사회문제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브룩스는 링컨을 지지했으며 흑인이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받고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게티스버그 전장에 나가 흑인 병사들을 위해 감명 깊은 설교를 했고, 이후로 청중의 삶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가 그들의 인격의 변화를 도모시키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렇게 브룩스 목사는 설교에 있어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브룩스 목사에게 실패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어떻게 성도들에게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설득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몸부림 쳤던 목회자입니다.
많은 실패를 했지만 후대는 그를 성공한 설교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가며 건설업이 위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공한 사업가 였다고 해도 마지막에 부도가 났다면 사업에 실패한 것입니다.
IMF 당시 우리나라 30대 대기업 중 17개가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탱크주의, 세계경영으로 승승장구했던 대우그룹의 퇴출은 큰 충격으로 기억됩니다. 대기업은 영원하다는 인식을 완전히 깨뜨린 사건이었습니다.
반면에 7번 실패 하고 8번 만에 성공하였어도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이 성공한 삶인지 실패한 삶인지는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어떻게 판정 받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전도서 기자의 외침처럼 헛된 삶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치 있는 삶, 성공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빛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사람의 일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의 삶은 결코 헛되다 말할 수 없으며,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흔적이 되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갈 때 세상은 여러분의 삶의 가치를 몰라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인정해 주십니다(시1:6).
여러분!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허무하고 헛된 삶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간 인생은 헛되고 무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은 아무리 화려 해도 바벨탑과 같이 무너져 버리는 허망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춥고 배고프고 헐벗은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사람의 삶은 결코 헛된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인생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그 길이 승리의 길이며 영광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삶, 주님과 함께 걸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는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하나님께 영원히 기억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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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걷는 이 길은,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늘 위에 주님 밖에, 해 같이 빛나리, 그 사랑 얼마나,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언제나 내 모습, 그 길 따라.
찬송가: 484장 내 맘에 주여 소망 되소서, 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288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