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옛 그림 읽기♣-그림, 스토리에 빠지다 ⑧
<자연으로 돌아가라> -노자-
“노자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노자가 함곡관을 지날 때였다. 푸른 소를 탄 사람이 노자란 것을 안 윤희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윤희는 함곡관을 지키는 관리였다. “그대가 나를 어찌 아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노자 선생님을 알거늘,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장차 은둔하려고 하시니, 저를 위해 억지로라도 가르침을 주십시오.” “도(道)는 말로 드러낼 수 없는 법! 길을 터 주게.” 노자는 윤희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윤희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가면 다시 못 볼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안 이상 순순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윤희는 스승이 마음을 열 때까지 거듭거듭 청을 드렸다. 윤희의 끈질긴 구도심에 결국 노자가 두 손을 들었다. 말로 드러낼 수 없는 도를 말 속에 담아 윤희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로 시작되는 『도덕경』상, 하편은 그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 뒤로 노자가 여생을 어떻게 되었는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른 소를 탄 노자 ♣ BC 6세기경에 활동한 노자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司馬遷:BC 145년경~BC 85년경)의 『사기』에 나온다. 『사기』에는 노자의 이름이 이이(李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諡號)는 담(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으로 주 왕실의 장서(藏書)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사기』에는 ‘200여년’,『열선전』에는 ‘80여년’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이 ‘200여년’이라 말한 근거는 노자가 도를 닦아 양생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오랫동안 주나라에서 살다가 주나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에서 윤희와 대화를 나눈 것이 바로 이 때였다. 노자가 함곡관을 나서며 윤희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전해주는 장면은 ‘노자출관(老子出關)’이란 주제로 많이 그려졌다. 노자가 도가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진만큼 도가의 경전을 전해주는 장면이 주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청우출관(靑牛出關)>도 그 중의 하나다. 오른쪽 언덕에서 뻗어 나온 늙은 소나무가 파라솔처럼 무대를 만들어 준 곳에 ‘청우’를 탄 노자와 가르침을 청하는 윤희가 서 있다. 두 사람 뒤쪽으로 이층 누각이 구름 속에 휩싸여 있어 이곳이 함곡관임을 암시해준다. 그래도 행여 사람들이 이 중요한 장소를 알지 못할까 봐 조바심이 난 걸까. 정선은 소나무 가지가 끝나는 곳에 ‘청우출관(靑牛出關)’이라 분명하게 적어 두었다. 그 지점에 화제(畵題)를 써 넣음으로써 마치 소나무가 손가락처럼 글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글자를 향해 대각선으로 피어 오르는 구름이 끝나는 곳도 역시 화제가 씌여진 곳이다. 그림 속에서 두 사람은 모두 학창의(鶴?衣)를 입고 붉은 띠를 둘렀다. 학창의는 옛날부터 신선이 입는 도복(道服)으로 알려져 있다. 도를 가르쳐주는 노자나 전수받는 윤희 모두 이미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꽤나 인기가 있었던 듯 비슷한 구도를 가진 그림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선,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18세기 초, 비단에 연한 색, 29.6×23.2cm, 한국 왜관수도원. 정선,<노자출관>,비단에 연한 색,23.2×28.5cm, 간송미술관
그런데 많은 작가들이 ‘노자출관도’라는 화제를 다투어 그리게 된 이유가 단지 그 때문일까?『도덕경』을 전해주는 순간의 역사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지만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걸까? 함곡관이 유난히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 AD67년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도교는 불교와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해야 했다. 걷잡을 수 없이 세력이 커지는 불교에 위기의식을 느낀 진나라(291-306년) 때의 도사 왕부(王浮)는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가짜 경전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이다. 왕부는 이 가짜 경전 속에 불교를 공략할 수 있는 그럴듯한 얘기를 꾸며 넣었다. 중국에서 득도(得道)한 노자가 함곡관을 통해 서역으로 가서 붓다가 된 후 호인(胡人)들을 교화하였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어찌 되었거나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관문인 함곡관이 매우 중요한 장소로 부각되어야만 했다. 불교를 의식한 요소는 ‘청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교에서 소나무의 푸른빛은 신선의 상징이다. 소나무가 천년을 묵어 그 정기가 변한 것이 청우라는 것이다. 노자가 굳이 청우를 탄 것은 노자를 신선에 비유하려는 의도가 강하지만 이 또한 불교에서의 ‘심우도(尋牛圖)를 의식한 혐의가 짙다. 조보지,<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북송, 족자, 종이에 먹, 50.6×20.4cm, 대북 고궁박물원 왕기, <태상노군>『삼재도회』「인물」10권, 1609년 왕부가 꾸며낸 이야기는 밋밋한 노자의 생애를 그려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귀가 번쩍 트이는 화젯거리였을 것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노자출관도’를 화제로 그렸다. 제목은 ‘노자출관도’‘청우출관도’‘노자기우도(老子騎牛圖)’ 등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마찬가지다. 노자가 홀로 청우를 타거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탄 모습으로 약간씩 변화가 있지만 장소는 모두 함곡관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에서는 송대(宋代)의 조보지(晁補之)를 필두로 명대(明代)의 상희(商喜), 장로(張路), 구영(仇英) 등의 기라성같은 화가들이 이 화제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판화술이 발달된 명대에는 청우를 탄 노자의 아이콘이『역대고인상찬』『열선전』『신선전』『선불기종』『삼재도회』등의 삽화로 제작되어 노자열풍을 일으켰다. 조선에서는 정선을 비롯하여 김홍도, 유숙,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등이 노자출관도를 그렸다.
♣공자, 노자에게 길을 묻다♣ 노자의 생애를 얘기할 때 ‘노자출관’만큼 잘 알려진 에피소드가 공자와의 만남이다. 공자는나이 34세 때(BC 518년) 제자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에 있는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다. “예가 무엇입니까” 노자가 대답했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표정과 끝없는 야심을 버리시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소.” 노자는 젊은 공자에게 인신공격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공자는 노자의 폭언에도 불구하고 전혀 얼굴을 붉히지 않았고 언어 너머의 본질을 읽을 줄 알았다. 노나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노자를 설명할 때 ‘용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난 장면은 공자의 생애를 담은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 <문례노담(問禮老聃)>이라는 제목으로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노자의 호가 담(聃)이니까 <문례노담>은 ‘(공자가) 예에 대해 노자에게 묻다’ 라는 뜻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는 모순되는 점이 많아 지금까지 그 사실여부에 대해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는 마치 당연한 사실처럼 두 사람을 한 자리에 앉혀 놓았다. 18세기에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필사본 《공자성적도》에는 사각 병풍 앞에 앉은 노자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춘 공자와 제자들 모습을 그렸다. 왼쪽 난간 밖에는 공자를 태우고 온 수레가 놓여져 있어 공자가 먼 길을 찾아 왔음을 시사한다. 화면 위에는 이 그림의 제목과 상황설명이 적혀 있는데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 이유에 대해 주자의 의견을 넣었다. 노자가 ‘주나라에서 주하사(柱下史)의 벼슬을 지낸 적이 있어서 예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그에게 예를 물었다’라고 했다. 주하사는 역사를 기록하고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을 지칭한다. 자칫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의 만남은 공자와 노자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 전혀 감추어지지 않고 후세에 전해졌다. 한 사람은 독설가로, 또 한 사람은 교만하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전락할 뻔했던 만남이 어떻게 양측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었을까. 공자와 노자의 만남은 단순히 이름 없는 두 무명씨의 만남이 아니다. 중국의 주류 사상인 유가(儒家)와 비판 사상인 노장(老莊)의 만남이다(공자의 사상은 맹자로, 노자의 사상은 장자로 이어지지만 그 시작은 공자와 노자다).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닌 두 거장이 만났다는 것은 배척과 외면보다는 수용과 포용력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철학관을 반영한다. 또한 주류사상인 유가(儒家)쪽에서나 비주류인 도가(道家)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손해나는 일은 아니었다. 주류인 공자측에서는 아무리 상대가 쓴소리를 하더라도 ‘예’를 갖춰 20여살 많은 연장자의 뜻을 수용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고, 비주류인 노자측에서는 공자같은 주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이 노자라는 것을 홍보할 수 있으니 감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두 성인의 큰 뜻이 어디에 있었든 소인배의 측량은 항상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공자와 노자를 배우는 일은 평생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나같은 소인배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까지.
♣자연으로 돌아가라♣ 비록 소인배의 추측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답할 수도 있지만 필자가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노자의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대척점에 서 있을 만큼 그 지향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공맹(孔孟)’으로 대표되는 유가(儒家) 사상이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의예지(仁義禮智)’같은 개념을 강조했다면 노자는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하고 ‘자연(自然)’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서의 자연은 산과 바다 같은 산천이 아니고 문명에 대한 반대개념도 아니다.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인 질서로써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노자는『도덕경』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했다. 사람이 자연을 본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무위자연'(無僞自然)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부자연스러운 행동(作爲的)을 하지 않고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지 무작정 넋 놓고 게으름 피우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연을 따라 살면,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自然)처럼 될 것이다. 이것이 무위자연이며 도(道)이며 진리(眞理)다. 자연속의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기 때문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자연을 따라 살면 유가에서 말하는 예악(禮樂)이니 명분(名分)같은 인위적인 규제가 필요없게 된다. 왜냐하면 ‘도(자연)는 아무것도 행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아니함이 없기’(道常無爲 而無不爲) 때문이다. 무위자연이야말로 가장 높고 가장 선하며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스승이다. 요코야마 다이칸, <노자>, 1921년, 비단에 색, 184.7×88.4cm, 일본 웅본현립미술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이 그린 <노자>는 ‘가장 높고 가장 선하며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스승을 향한 헌사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노란 옷을 입은 노자가 경전을 펼치고 있다. 작가가 노자의 옷을 노란옷으로 칠한 것은 오방색중에서 노란색이 중앙색이기 때문이다. 노란색이 오방색의 중앙색인 것처럼 노자의 사상도 제자백가중의 중앙에 해당된다는 의미다.최고의 선은 편안하다. 노자 곁에 복숭아색 옷을 입은 동자가 팔로 턱을 괴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그려 넣은 것도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태평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도교의 신이 된 노자♣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해왔다. 노자의 대표작으로 알려진『도덕경』도 노자의 단독저작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집단창작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에 대한 자료의 부족과 흔적 없이 사라진 삶의 발자취 때문에 그를 신비스럽고 종교적인 인물로 상상하게 만들었으리라. 사마천이 노자의 수명을 200여년이라 말한 것처럼 후한(後漢:25~220)시대부터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로 탈바꿈했다. 단순히 삶의 지혜를 가르쳐 준 철학자나 스승의 수준을 넘어 도교(道敎)의 교주로 추앙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인류의 구세주인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격화시켰고 도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으로 변모시켰다. 김홍도가 도교의 여러 신들을 그린 <군선도>에서 도교의 신으로 변한 노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청우를 타고 손에는『도덕경』을 들고 있지만 이제 노자는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도교의 신이자 신선(神仙)의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인위적인 속박도 거부하는 자연인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었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의도와 달리 어떻게 변모되고 변질되는 지 노자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곳에 있더라도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우리에게 얘기할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조정육) 김홍도, <군선도8곡병>(부분), 1776년, 종이에 연한 색, 132.8×575.8cm, 한국 리움미술관
-이 글은 『Art Price』 3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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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원문보기 글쓴이: 조정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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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 부처님 발길따라 인도여행은 잘다녀오셨나요 ㅎㅎ
노자에 관한 글과 그림을 감상하며, 의상조사의 <법성게>중에서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이 귀절이 떠오릅니다. 노자, 공자, 여러 성현들과 우리들 역시 자신의 그릇대로 허공에 가득한
보배로운 진리를 담고... 생긴 모습 그대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자를 소재로한
그림중에서는 요코야마 다이칸의 <노자>가 제일 감동적입니다. ***
도덕경의 '上善若水' ~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제 일기장에 써놓고 자주 읽어봅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