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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69회 : 역사교사시리즈 제5편 최후의 만주수복전쟁, 공민왕의 북벌 (2002.10.5.)
방송일: 20021005 조회수 : 1991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프롤로그-
만주벌 말달리는15 몽골초원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대제국원을 건 설했던 몽골, 고려 또한 몽골의 말발굽에
짓밝 힌채 90여년을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정세가 급변, 원이 쇠퇴해지지 고려의 반격이 시작됐다.
-지도 만주로7
-압록강너머깃발 두만강깃발 요동깃발13 1356년 압록강 넘어 파사부를 치고 쌍 성총관부를 회복한다.
1370년 여름 올랄산성을 공파하고, 마침내 요성을 공략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한다
고구려의영광이 고려공민왕에 의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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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말달리는 서브 타이틀 '최후의 만주 수복 전쟁, 공민왕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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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기본 세트 고구려가 망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만주벌.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던 땅 고구려전사들이 넘나들던 드넓은 만주들판 바로 이땅을 고려말 공민왕이 북벌을 단행하여
수복했었다는 사실을 들어 보셨습니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공민왕은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스페셜 특집 '천명의 역사 교사가 뽑은 역사 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 오늘은 고려의 북방 개척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관심분야 원형 C.G에서 정치외교로 타이트됐다가 정치외교 사라지고그 자리에 고려의 북방 개척 글씨로
천명의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주제별로 가장 관심이 많은 분야가 역사속의 인물이었고, 그 다음이 정치 외교인데요,
정치외교 중에서 특히 고려의 북방개척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인공 위성 지도가 입체적으로 들어와 세트 바닥에 깔린다MC들어와 서고 화살표 압록강 너머 요양과 두만강쪽
으로 나간다 고려는 건국초부터 고구려의 옛땅, 만주를 찾으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고려말에야 비로소 공민왕이라는 위대한 왕에 의해 그 오랜 꿈이 이루어
졌습니다 고려말 공민왕때라면 고려가 90여년간 원의 지배하에 있었던 때입니다.
세계 제국 원에 시달려 고려의 국력이 극도로 쇄약해진 때로 알고 있던 그때
- 자 보십시오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장악하고 두만강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옛땅을 공민왕은 마침내 되찾았
습니다
-MC 지도의 요성쪽 걸어가 서면 고려사 기록 나와 펼쳐진다
여기가 바로 요동의 중심입니다 공민왕의 요동 공략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성을 진격해 함락시켰다' 고 나옵니다 요성은 어디일까요.
먼저 그곳으로 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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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공민왕의 북벌! 정벌지, 요동의 심장부 요동성을 찾다
-태자하보이고트레킹13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차로 5시간을 달리면 태자하가 나온다
-요동 시내트레킹7 태자하를 건너면 중국 요녕성 요양시가 나온다.바로 이요양시가 요동의 심장부였던,
요 성이다
-시내요탑보이는 트레킹11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 있다
-절PAN요탑. 요탑 T.U15 백탑은 요양을 차지하려는 각국의 쟁탈전속 속에서 한때 이곳을 장악한 금나라가
71미터, 탑을 세웠다
-부조 조각,요탑F.S10
요양이 금나라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봉교수 인터뷰 "모든쪽에서 요양을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교통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역대 왕조마다 중요한 전쟁이 여기서 많이 일어났다 요양의 전쟁 결과가 전체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사통팔달 요양C.G12
환인 길림 대련 조양 동서 남북 요지를 잇는 사통 팔달의 요충지에 요양이 있다
-요양 스케치18
수양제 100만대군을 격파했던 고구려의 요동성 이 바로 요양이다
-몽고 전쟁 이미지15
고려를 침입한 원은 평안도에 동녕부를 함경 남도 지역에는 쌍성총관부를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했다
-지도 동녕부 요동 표시C.G13 그후 고려의 강력한 요구로 원은 평안도 일대 에 설치되었던 동녕부를 지금의
요양으로 옮기면 서 수만명의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봉교수 인터뷰 "원나라는 지금의 요녕성에 요양 행성을 두고 동북지방 전체를 다스렸다
요양 행성의 수도는 지금의 요양시였다 현재의 요양시는 요나라때는 요양현이었고 원나라때는 요양 행성이었다"
-요동성찾으러마을트레킹9
사통 팔달의 요지인 이곳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공민왕은 이곳을 쳤다
-동네집 골목 PAN(마을 자막)7
그렇다면 요성 즉 요동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마을 아저씨EFF "집을 짓긴 했는데 성벽이 남아 있는 곳이 있어요 "
-마을 아저씨 안내가는15 1950년대 중국의 대약진 운동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요동성의 모습을 이마을
에서 어럽게 확인할수 있었다
-아저씨 흙담 얘기EFF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성벽의 중간 지점이다 옛성벽이죠 이게 성의 흙이다 다른 지역의 흙과는 다르다"
-흙담만지는피디4- 돌담과 흙무더기에서 우리는 옛성의 흔적 을 찾을 수 있었다
피디 서서 F.S4 .
-아저씨 인터뷰 "여기를 경계로 위쪽은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높이는 3.6장(12미터)정도 였고 넓이도 3.6장
정도였다 우리가 서있는 이곳은 성벽의 중심이다"
-벽돌손으로 만지는9 위용을 자랑하던 요동성벽은 초라한 집담벽으로 남아 있었다
-앉아 벽돌에서EFF
"현재 남은 벽돌은 얼마 없다 이게 다 성의 벽돌이다. 두꺼운 편이죠"
-벽돌 스케치6
얼마 남지 않은 성벽을 통해 요동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골목에서 모여 서서5 우리는 주민의 증언속에서 요동성의 모습까지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성그리는 5
어릴적에 본 요동성의 형태를 집주인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성 문그리며EFF
"여기에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여기는 동문 자리였고 여기는 고려문이 있었다. "고려문은은 높을고 자에 문은
이렇게 씁니 다"
-주인혼자뭐라뭐라 ( 당시까지도 동문바로 옆에는 고려문이라는 고 고구려의 흔적이남아 있었다고 한다)
-태자하 그리는EFF13 -앉아 성내부 그리는EFF17
(보다가) 성내부의 구조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문은 물론 성안 도로까지도 하나하나 그려보였다
-아저씨 성그린8 (보다가) 주민들의 증언으로 요동성은 그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리PAN인공호수13 마을 주변을흐르는 하천은 요동성의 해자였다 성의 윤곽뿐만 아니라 방어체계까지도
남아 있 는셈이다
-도시에서 PAN 태자하15 그리고 요양시를 휘감아 흐르는 태자하는 요양을 지켜주는천연방어벽이다.
요동성은 이중의 해자가 있었다.
-도서관 외경, 자막 11
우리는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요동성의 모습 을 좀더 구체적으로복원하기 위해 요녕성문물 연소의 역사학자
들의 자문을 구했다
-전요지책 5권7 중국 사서를 통해 요동성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교수와 책보는F.S3 책지도펴고5
이책은 요동성을 확인할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다 원말 요동의 각종 지도들을 모두 모아두었다
-지도 PAN15 (보고)
산천과 도로, 거주지등이 아주 상세하다 당시의 요동지리를 한눈에 파악할수 있다
-지도 요동성 손으로가리키는7
요양 지역을 그려 놓은 지도에서 요동성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된다
-스틸 요동성 부분3 (보고)
-요동성 내부상세F.S4 요동성내부를 그려놓은 상세도도 있었다
-태자하 성문PAN15 긴 직사각형 성벽을 따라 태자하가 남북으로 흐르다 다시 동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성안의 각종 방어시설도 보인다
-내부 성7 잘구획된 도로 와 주택가 관공서들 이것이 바 로 고구려의 요동성 원나라의 요성이다
-성내부F.S3,아저씨 그린성F.S3 마을 주민의 증언과 일치한다
-태자하 트레킹C.G5 요동평야 한가운데, 태자하를 방어막으로 삼아 세워진 요동성은 . 이렇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요동성벽에서 정문까지C.G28 20-30미터 높이의 거대한 요동성.
수나라 백만 대군도 넘지 못한 고구려의 자랑 이었고 거란의 중심 무대였고 원의 동북아지배 중심지였다
- 바로 이곳을 공민왕이 장악했던 것이다
-고려사기사 고려사에는 고려의 요성 정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글내용 요동은 우리땅15 (보고)장교수 인터뷰 "공민왕에 의한 요동정벌의 기도는 고려초이래 지속적으로 추진
돼온 북진정책의 한발로였을뿐 아니라 고구려 멸망으로 인해 만주 지역이 상 실한 약6백여년 이후의 이를 회복
하려는 민족 사에 있어서 일대 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주벌 말달리는15 요동 정벌 - 그것은 원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하겠다는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의
완성이자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부하던 고려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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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2-요동성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MC 성위에 서면 멀리 평원과태자하가 펼쳐진다 성내도 사이에
들어온다
요동성은 산위가 아닌 너른 평지에 지어진 성입니다 성 아래 흐르는 강 태자하는 성을방어하는 해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성위에서 보니까 정말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군요
이 요동성은 수나라 백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때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고구려의 자랑스런 성이었습니다 요양
행성의 수도였던 요새중에 요새, 요동성. 수나라 백만대군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이 난공 불락의 성을 공민왕은
어떻게 함락했을까요
그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동의 심장부인 요동성을 공격하고 만주를 되찾기 위한
공민왕의 20여년에 걸친 치밀하고 끈질긴 준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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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공민왕의 요동 장악을 위한 전초 작전, 오녀산성과 팔참 공략
-압록강철교 배21(압록강) (보다가) 한반도와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 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동시는 예부터
압록강을 사이에 둔 양국의 관문이다
-단동 시내13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첫도시 단동,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딛고 가야할 도시다
본격적인 요동공격을 위해 공민왕은 이곳에 교 두보 확보작업을 한다
-고려사 책5 고려사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있다-고려사 기록 내용8 (보다가) '압록강을 건너 격파한
파사부' 파사부는 단동에 있었던 원의 중요한 역참이었다
-파사부(구련성) 가는 트레킹7 원은 요동의 주요도로에 역참을 설치했는데 이곳이 바로 파사부참이 있던
곳이다
-구련성 가는 피디 일행4 -압록강 보이는PAN벽탑15 역대로 이곳은 역사의 고비마다 격전이 벌어지던 곳이다
러일 전쟁때도 만주 진출을 놓 고 러시아와 일본이 이곳에서 충돌했다
-단동 교수 인터뷰 "파사부는 문헌기록에 보면 후산이나 구련성 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증에 따르면 구련성이
파사부다 구련성은 중국의 중요한 요지이자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즉 압록강을 건너기 위한 주요한 관문이다"
-요동지 팔참 지도C.G13 파사부는 고구려의 구련성이었다
요동으로 들어가는 첫 길목인 파사부를 공민왕은 교두보로 확보했다 -윤교수 인터뷰 "한반도에서 요동 핵심
지역으로 가는데는 몇 가지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지름길이 될 수 있고 가장 안전한 길이 바로 신의주를 통과
하는 길이다
압록강을 건너서 단동 지역에 도착한 다음에 봉성을 거치면 중간에 본개를 거치면 요양으로 갈수가 있다 이런
지리적 잇점 때문에 고대로부터 상당히 중요했고 고구려 시대에는 바로 이지역을 통과 해서 적들이 오고 가고
또 우리 고구려군이 요동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루트로 사용되었다"
-규장각 외경, 서가F.S6 (보고)
-서가 책PAN8 파사부의 확보후에 공민왕은 요동로 가기위한 또하나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용비어천가 책표지5 조선왕조건국의 정당성과 태조이성계와 그선조 들의 위업을 찬양하고 있는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책장 넘기는9 .
-나랏말씀 글T.D11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있다
-태조 올라산성 공격 부분13 올랄 산성 정벌 - 그것은 고려군이 본격적인 요동정벌을 앞두고 단행한 마지막
정비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올랄산성은 과연 어디인가
-김구진 교수 인터뷰 "올라 산성 우라 산성등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것은 만주어를 한자로 표기할 때 생기는
문제다 올라라든가 우라라든가 만주어 여진어로서 강을 의미,그러니까 강가의 성이란 뜻,
그러니까 올라 우라 산성 등은 옛날 고구려때성을 여진족이 그대로 쓰면서 이름만 바꾸어 불렀던 것인데 오늘날
오녀성 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환인 시내 트레킹14 인구 30만의 자그마한 도시인 환인은 압록강 중류에서 50여킬로 미터 북쪽에 있다.
-환인 극장 간판3 고구려 7백년의 역사가 이곳 환인에서 시작됐 다
-환인시내 산F.S3 고구려의 첫수도였던 환인시의 북쪽에는 특이 한 모습의 산성이 있다
-산자락 PAN오녀산성11 (보다가) 마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산성, 오녀산성이다
-꼭대기 직벽PAN15 산성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바위산처럼 보이는 오녀산성은 마치 바위병풍을 펼쳐 놓은 듯
산중턱부터는 사방이 직벽의 깎아 지른 절벽이다꼭대기 직벽3 (보고)
-오녀산성 고구려제일도보는13 산성입구에는 중국측이 세워둔 고구려 첫수도 라는 표지석이 있다 T.D되면
성벽쌓은7 오녀산의 험한 능선의 끄자락에는 전형적인 고 구려 산성이 나타난다
-넓게 쌓은 성PAN10 사람들이 오를 수 있는 구릉을 긴 성벽으로 둘러 막았다
-잘 쌓은 성벽22 이성벽이 고구려의 첫수도를 지키던 산성이다 성벽은 큰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구조다. 2천년 세월을 견디고 남은 성벽이 그것을 말해 준다
-안내인 인터뷰 "여기다 성을 쌓은 이유는 여기가 다른데와 비교해서 지세가 평탄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지세에
맞게 높이 3미터 넓이 2.5 미터의 성벽을 쌓은 것이죠"
-직벽 아래에서T.U5 성벽을 넘어서도 성안으로 진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직벽 스케치10 2,3백미터 직벽
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직벽T.D협곡 올라오는7 -안내인 EFF "적군이 공격해 올 때 여기서 지키고 있으면 쉽게 막아낼 수 있다.
험준한 지역이어서 한명의 병사만으로도 많은 수의 적군을 물리 칠 수가 있다"
-PAN 협곡 험준17 (보고) 암벽틈새의 몇군데 통로만 장악하면 이곳은 철옹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오녀 산성
이다 (보고)
-정상 올라오는10 해발 820미터의 산꼭대기에 오르면 꽤넓은 평 지가 나타나다
-정상 평지9 성안의 남북 1킬로미터, 동서 3백미터의 넓은 평지는 방어군이 주둔하기에 충분하다
-왕궁유지 돌PAN15 (보다가) 2천여년전 고구려는 난공 불락의 요새에 첫 왕궁을 지었다
-석축 돌9 궁터 자리에는 아직도 주춧돌이 남아 있다
-식량 창고13 돌로 정교하게 쌓은 이 시설은 당시 군수 물자나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로 추정되고 있다
-정상에 피디PAN마을9 산정상에서 보면 환인 시내가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혼강자막PAN 고려사엔 오녀산성 정벌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가 요동을 장악하기위해서는
파사부와 함께 이곳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윤명철 교수 인터뷰 "오녀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압록강 중류에서 요동성을 공격할 때 바로 그 중간 지점에 있다
그리고 거기서 교두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고 또한가지는 그 지역을 놔두고 갈 경우엔 토착 세력이라든가 다른
적대 세력들이 배후를 공격할 염려가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요동 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환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다"
-지도C.G14 요동성으로 통하는 양대 길목 장악! 그것은 요동성 정벌의 성공을 이룬 공민왕의 승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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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오녀 산성 배타고 가는 실사 그림이 플레이되고 배위 MC 오녀 산성 정상 F.S에서 타이트 실사 저는
지금 배를 타고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을 따라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환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저산이 바로 오녀산성입니다 웅장한 모습이 고구려의 수도답습니다 직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말그대로 하늘을 찌를 기세입니다
-오녀 산성 정상 MC서서 아래 내려다 보고 여기가 해발 820미터, 오녀산성의 정상입니다 환인 시내와 혼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군요 사방을 휘두른 절벽이 마치 암벽 등산로처럼 가파릅니다 그냥 올라오기도 아슬
아슬한 절벽길인데요, 여기서 전투를 치뤘다는 것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보면 산성아래 움직
임이 한눈에 파악되어 공격을 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천연의 요새 오녀산성을 고려군은 어떻게
함락했을까요 이 불가사의한 승리의 비결이 대단히 궁금해지는데요 자 이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 보도록 하겠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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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이성계와 최강의 고려군
-용비어천가 책5 오녀 산성에서 고려군이 승리할수 있었던 비결은 용비어천가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책내용 편전(조명)9 이 전투의 지휘자는 당시 동북면병마사 이성계였다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투를 묘사
하고 있다
-책내용11 '이성계가 편전 70발을 쏘아 모두 얼굴에 맞췄다' 편전, 바로 이 편전에 승리의 비밀이 담겨있다
-활터 PAN, 활쏘는13 편전은 어떤 무기일까 우리민족의 무기중에서 가장 우수한 무기가 활이었다-일반화살과
편전 비교 편전놓인10 편전은 화살의 일종이다 일반 화살의 절반이 채 안되는 30센티미터 크기다
- 이 짧은 화살에 어떤비밀이 담겨있을까?
-정진명 인터뷰 "보통 우리가 활을 쏠때는 오뉘를 시위에 걸어서 쭉 당기게 된다 그러면 촉끝에까지 들어온다
보통 살은 그렇게 하면 되는데 편전은 짧기 때문에 안된다 보통 걸어서 당기듯이 당기면 이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덧살 놓인4 편전을 쏘려면 이런 덧살이 필요하다
-덧살PAN7 덧살은 작은 대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다 편전에 덧살을 씌워 시위를 당길수 있게 한다
-편전에 덧살 걸고11 (보다가) 편전을 쏘는데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덧살잡고 시위 쏘면 덧살남고
15 (보고)이렇게 덧살을 타고 날아가는 화살은 상대 방의 눈에 화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혀 피 할 수 가
없다
-활에서 덧살 편전 놓인PAN6 덧살은 편전이 안정적으로 날아가는 궤도를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편전은
멀리 강하게 날아 갈 수 있다
-편전 놓인5 그렇다면 편전의 위력은 어느정도일까
-일반활 쏘는11 일반활과 편전의 사정거리를 비교해 보기로 했다 먼저 일반 화살을 쏘았다-줄자재러5 (보고)
-줄자 거리(225미터)4 화살은 225미터 지점에 떨어졌다-편전 쏘는8 이번에는 편전이다
-거리재는6 (보고)
-거리(317)3 편전의 사정거리는 317미터.
-편전 뽑아서 317미터10 편전이 일반 화살보다 백여미터 더 멀리 나간다. 이것은 전시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속도기계준비하는7 소총탄을 만드는 방위산업체인 주식회사 풍산 의 도움을 받아 속도측정을 해보았다
-속도기 세우는8 두 개의 막을 통과할 때 걸리는 시간을 측정 하는 장치다. 주로 소총탄 실험에 사용된다
-편전과 일반활 놓인8 속도가 빠르면 곧 관통력이 크다는 것이다 일반활과 편전의 속도차는 어느 정도 일까
-실내 모니터,모니터 글씨9 일반활과 편전의 속도 실험 결과는 오차 없이 정확하게 컴퓨터를 통해 자동으로
계산된다
-일반활 쏘는5 일반 화살을 먼저 쏘았다-일반활 슬로우2 (보고)
-모니터 T.D5 일반 화살의 속도는 초당 59.8미터다 -편전쏘는11 이번에는 편전이다
-편전 슬로우2 (보고)-모니터T.D5 편전의 속도는 초당 71.8미터. 일반 화살보다 초당 12미터가 빠르다
-편전 쏘는11 이 편전이 바로 고려의 비밀 병기였다
-박교수 인터뷰 "고려말기에 군사 편제 방식은 고려 전기와 다르게 원의 영향을 받아서 천호 만호 단위 와 같이
개별 군사 집단이 하나의 전투력의 중심이 되는 편제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군사 단위에서는 지휘자가
어떠한 능력을 갖느냐하는 것이 전투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이성계와 같이 활을 잘 쏜다
든지 격구에 능하다던가 말타기를 잘한다던가 이러한 뛰어난 기동력과 전술을 가진 장수가 거느린 군사 집단은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있겠다"
-이성계 어전17 고려군에 대한 원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 려말의
뛰어난 명장들중에서도 단연 이성계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고려사 책6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의 뛰어난 전투력의 또다른 비결은 기마술에서 찾을수 있다-책 내용22
(고려는 단오때면 격구 시합을 즐겼다. 공민왕때 이성계도 격구 선수로 선발돼 시합에 나갔는데 말위에서
엇마기라는 어려운 기술을 보이자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고 놀라워 했다)
당시 이성계는 최고의 격구 선수였다 격구와 기마술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격구채9 이것은 격구채다 등나무를 가지고 만든 1미터 20센미터의 길인데, 끝부분은 공을 담을수 있게 되어
있다
-격구공4 나무로 만든 격구공인데 지름은 7센티미터다
-격구공 올리고 말달리는5 말을 달리며 격구채로 공을 치거나 던져 장문 즉 골대에 넣는 경기가 바로 격구다
-땅에 공 채서 치는5
-격구공 올리고 기술22초 격구는 배지, 수양수, 치니매기 등 다양한 기술을 말위에서 겨루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군인들의 기마 훈련의 한 과정이었다
-김영섭(충혼당 회장)인터뷰 "고려 시대 격구는 무관들의 제일 중요한 스포츠의 한 과목이고 훈련의 한 과정
이다 말을 그만큼 잘 다룰 줄 알아야 말을 타고 기사를 한다던지 창을 쓴다던지 평상시 유희적 놀이로 격구를
수련한 것 같다"
-격구 슬로우 기록 40 고려사에는 격구가 군인들의 훈련에 사용되었 다는 기록이 끊임없이 나온다 편전이라는
신무기와 뛰어난 기마술을 지닌 막강한 고려군이 있었기에 공민왕의 북벌은 가능 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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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4-뒷배경 격구하는 실사 장면이 흐르고 보고 있던 MC 격구채와 격구공을 들고 이것이 격구채구요,
격구공입니다 격구는 서양의 폴로나 하키처럼 채로 공을 쳐서만 하는 것이 아니군요 공을 낚아채기도 하고,
채에 공을 얹어 놓고 회전시키기도 하고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할 것 갔습니다
제가 한번 해 볼까요 (시연) 격구채로 공을 채어 올리기도 어려운데요 말을 달리며 격구채로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격구는 군사들의 기마훈련으로는 안성맞춤이었을 것 갔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의 북벌준비는 단지 군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고려사 기록 공민왕 즉위 원년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재추부터 이서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활 1, 화살 50, 칼 1, 창 1를 갖추게 하여 사열
하였다' 재추란 최고 높은 벼슬아치 즉 재상을 말하고 이서란 가장 하위직인 아전을 말하는데요,
공민왕은 이처럼 군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무장을 시키고 북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즉위초
부터 공민왕은 대대적인 만주 수복 전쟁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나라의 식민지배에
시달리던 고려, 쓰러져 가는 고려의 영광을 되살린 공민왕. 그는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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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공민왕의 자주 회복 정책(반원정책, 고토 회복, 쌍성 총관부 탈환)
-산 공민왕 쌍분Z.I17 개성 시내를 벗어난 아늑한 산자락, 봉명산 중턱에는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봉분이 있다
-쌍분 PAN5 고려 31대왕인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 공주의 능이다
-노국공주와 공민왕 초상15 공민왕은 원황실의 공주인 노국공주와 결혼했다 -중국 베이징시8 당시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 했다.
-원대 대도 성터로Z.I21 그뿐 아니라 고려의 왕자는 원에 잡혀와 볼모로 지내야 했다.
-자금성으로 Z.I 공민왕도 12살 때부터 십여년간을 원의 볼모로 있었다. 고려의 정치는 원이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형이었던 충혜왕은 정치를 잘못한 책임을 물어 원나라에 잡혀와 독살될정도였다
-장교수 인터뷰 "어린 조카인 충목왕 충정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국정이 더욱 혼미해지고 있을 때
자신은 원의 수도에 인질로 잡혀서 장시간 머물고 있으면서 원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자주 정책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더욱 공고히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개경성C.G18 1351년 스물두살 공민왕은 마침내 오랜 볼모생 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고려31대
왕위에 오른다.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 정책을 펴 나간다-변발 그림13 당시 고려에는 몽고풍이 만연했다 공민왕은
먼저 원의 복식과 변발을 금지하고 모든 관제를 고려의 관제로 되돌린다-책5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
공민왕의 개혁은 신속히 진행된다
-책내용9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책내용으로4 (보고)-책내용7 모든 법률과 제도를 고려초의 전통으로 되돌린 다
-내부 개혁 이미지15 공민왕은 당시 원의 권력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 권겸, 노책 등 부원 반역배를 숙청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완결 짓는다-박교수 인터뷰 "당시 원의 권력에 아부해서 살아 갔던 부원배 세력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고려가 본격적인 반원 개혁의 출발이자 상징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상황 공민왕
반원 개혁 정책의 상징이라고 얘기해도 좋다"
-원 명 전쟁지도C.G7 공민왕 즉위 당시는 중국대륙은 격동기였다 전국각지에서 원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주원장은 명을 건국하고 원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만주에서 원세력 물러가는C.G9 -공민왕 영정 중국대륙의 변화를 면밀히 분석해오던 공민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한 반원 자주화 정책을 단행했다-박교수 인터뷰 "원간섭기 이후에 누적된 사회 경제적인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민왕이라는 군주는 고려 역대34명의 국왕
가운데 태조 왕건과 비견되는 대단히 뛰어난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이미지 자막11 내부정비가 끝나자마자 원에게 빼앗긴 쌍성 즉 함흥이북의 영토회복에 나선다
-장교수 인터뷰 "쌍성 총관부는 고려의 영역내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주둔해 있던 몽고군은 고려정부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의 하나였다 또 이지역의 지배층은 부원 반역배들로 구성돼 잇었기 때문에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고려의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었다 반원 정책을 추진한 공민왕으로서는 영역의 회복이야말로
자주성의 첫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격 이미지21 원의 식민지고려, 원의 군대가 100년 가까이 고 려땅에 주둔해야만 했던 치욕을 씻고 건국이래
꿈 꾸었던 북벌을 완성한 공민왕- 그는 고려의 자주성을 되살린 위대한 고려의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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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벽에 지도 요동 정벌 영역 표시되고 쌍성 총관부 탈환지 지도 표시 공민왕은 고려 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만주 수복 전쟁을 벌인 왕이었습니다 당시 원은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직접
통치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끊임없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민왕은 이 동녕부와 쌍성 총관부를 치고 만주를 수복했습니다
-쌍성 총관부 탈환지 지도에서 함흥 이북으로 화살표 그런데 쌍성 총관부를 점령하고 공민왕이 수복한 땅이
어디까지인지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대략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주장한 함경도 일대
라고만 알려져왔는 데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연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몰아내고 어디까지 북진을 했을까요 쌍성 총관부를 치고 확보한 땅이 어디까지
였는지 공민왕에게 직접 물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전 공민왕 실루엣 보이고 MC 질문 전하, 전하께서 원나라의 쌍성 총관부를 치고 수복한 땅을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왕께서 수복하신 두만강변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어전 공민왕 실루엣 목소리 "자 이것을 읽어 보오 이것은 조선왕조 태종실록인데 여기에는 내가 수복한 땅이
공험진 이남이라고 기록해 놓았소 그렇다면 공험진의 위치를 확인해 보면 내가 회복한 땅의 경계를 알수 있을
것이오"
-태종 실록 기록 뜨면 보고 이것은 태종실록인데 어디보자 '지정 16년에 이르러 공민왕이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다' 여기서 지정은 원나라 순제의 연호니까 지정 16년은 서기 1356
년, 바로 공민왕이 쌍성 총관부를 쳤던 바로 그해의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쌍성 총관부를 치고 수복한 땅은 공험진 이남이라는 얘긴데요 공험진이 바로 북쪽 경계가
되는군요 그러면 공험진이 어디인가만 밝히면 문제는 풀리게 됩니다. 자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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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공민왕이 확보한 북방 한계선은 두만강 이북 연길이다-고대 박물관PAN9 (보고)
-북관 유적도 꺼내 오는5 고려대 박물관에는 17세기조선시대때 그려진 귀중한 화첩이 있다
-북관유적도 표지3 -책넘기는3 (보고) 북관 유적도는 함경도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전투모습이 생생하고 박진감 넘친다
-척경 부분 책 펼쳐진3 그림에는 해설이 실려 있다-비석 세우는(고려지경)Z.I13 그런데 이 북관유적도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한 점 있다 척경 입비도라는 제목이 달린 그림인데
-윤관 앉아있는 그림4 바로 여기에 공험진의 단서가 있다
-책 글씨 스케치 13 해설에는 고려 예종때 여진을 쳐서 3성을 뺏고 새롭게 육성을 쌓은 윤관 장군의 전공이
소개돼 있다
-책글씨 축육성 조명10 새로 쌓은 육성중 최북방 경계인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우는 장면이라는 설명이다
-비석 세우는 윤관으로PAN12 그렇다면 이장면은 바로 윤관장군의 북방개척 을 이야기하고 있다
-윤관4 -고려사책 표지 내용 11 고려사에서는 이역사적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 명하고 있다 -책내용10 고려사는
새로 축성한 육성중 공험진에 고려의 최북방 경계비를 세웠다는 사실도 확인 시켜준다
-세종대왕기념관 외경7 고려국경의 최북단에 있었다는공험진은 어딜 까?-동국지도 전시3 세종때 실측한 자료
를 토대로 만들어진 지도다
-지도아래에서T.U5 (보고)공민왕이 공험진을 회복한 때로부터 100 년 정도 지난 시기니까 상당히 정확한 지도
인셈이다
-두만강 백두산 표시11 특히 두만강 유역 북방 지역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백두산과 두만강이다
-두만강 이북지도9 여기에 공험진과 선춘현이 표시돼 있다
-위 지도 선춘령 공험진표시5 놀랍게도 공험진과 선춘현은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김구진 교수 인터뷰 "이지도의 가치는 동북지역 함경도 지역에 두만강 북쪽에 회령 종성 ..경성 경원 등 오진
즉 육진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공험진이 남쪽 함흥 평야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지만 이 지도에서는 분명히
공험진은 함흥 평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9성 가운데 제일 우쪽 공험진이라던가 선춘령 비가 두만강 북쪽에
있었다는 것이 이 지도로 증명된다"
-조선왕조 실록책10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이라는 근거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책 내용10 경원도호부가 있던 경원은 지금의 함경북도 샛 별군이다 경원도호부 북쪽 7백리에 공험진과
선춘현이 있다는 것이다
-교수와 책보는, 책11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공험진과 선춘령 가는길 을 아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책 내용22 (성우읽고) 이기록만 따르더라도 최소한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 320리 지점이다.
-최교수 인터뷰 "다른 기록들에도 백두산에서 동북쪽으로 있다던지 천령에서 17백리 바깥에 있대던지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본다면 적어도 3,4백리 두만강으로부터 북상한 지역에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공험진
이나 선춘령은 지금 연길 지방 옛날 간도 지방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서울대 고문헌 자료실 서가8 그렇다면 고려의 최북방 경계, 공험진은 과연 연길지역일까
-통감부 책 펴는11 1900년초 일본이 작성한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기요'극비보고서 이책에는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책 내용(8장 고적 조사 부분)8 당시 일본은 간도 즉 연길의 유적을 조사 했는데 놀라운 발견이 이보고서에
있다
-책내용(국자가...)27 '중국 연길국자가 서쪽 1리반 지점에 있는 포이하통하 강물에서 커다란 석비를 발견
하였는데 비문의 대부분은 알아 볼 수 없고 남은 20여자의 글자 중 다행히 무자년이라는 기록을 알 수 있다'
-책내용(이해는 윤관 비를...)15 '무자년이해는 고려 예종 삼년으로 윤관이 비를 세운 해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선춘령비가 실제로 중국 연길지역에 존재했다는 것이 아닌가
-최교수 인터뷰 "공교롭게도 윤관의 공험진 비를 설치한 해가 무자년이다 무자년이 같기 때문에 공험진비로
추정하는 한 단서로 잡았고 세종 실록 지리 지에 공험진비의 내용을 호인들이 전부 깎아서 버렸다고 했는데
역시 새롭게 건져 올린 비도 거의 깍여 없어져 버리고 20자 밖에 읽을 수 없다
이런걸로 봤을 때 공험진비라 단정된다"
-연길 고속도로 팻말5 (보고)-연길 시내 트레킹9 중국 연길 두만강을 건너면 자동차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다-트레킹 사람들 풍경11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지역의 중심지인셈이 다
-시내 PAN7 연길의 중심가 국자가. 이곳에는 해방전까지만 해도 일제가 발견한 비 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노인과 건물쪽으로14 해방후 중국당국에 의해 이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 비를 보았다는 증언자들도 많다-할아버지 인터뷰(테9/5820) "내가 그때 5학년이니까 39년도 가량
될겁니다 ..그때 이게 있었어요 여기 모두...공지다 뭐 지금은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때 저기 비석이 한 십여개가
있었어요"
-건물 앞에서서 일행4 (보고)당시발견된 여러개의 비중 하나인 윤관의 공험진비
-강으로 가는 트레킹10 국자가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 이곳에서 비는 발견되었다-강물로 Z.I10 왜 윤관이
비를 세운 것은 고개인데 물속에서 발견되었을까 할아바지 인터뷰 "이곳인데 딱 어느 곳에서 나왔다고 지금
주장하기는 바쁩니다. 대충 이 부근이겠다
그리고 이 비석이 그때 강바닥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그리 이 강바닥에서 나온 것을 보게 되면은 원래 제자리에
있고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이다"
-강에서 PAN주변8 비석의 크기는 무려 3미터. 무게는 수천킬로그램이었다고 한다. 멀리서 가져오지는 못했을
것이다고개길 트레킹15 공험진의 선춘령은 연길주변의 산일가능성이 커진다 고려의 최북방 경계비인 공험진
비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고개PAN올라가는8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연길뒷산이다.
이산은 연길의 북쪽을 둘려막고 있고 이름도 북대고성 이다 -흙 고개길11 산정산에는 토성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중국사학계에서는 이 곳을 고구려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후대에도 당연히 주요한 군사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고개위 피디와 할배15 이곳에서 보면 연길시가 한눈에들어온다 고려 군이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이곳은 아주
중요한 군사시설이 되었을 것이다
-높은 고개 올라간3 공험진의 선춘령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임 에는 틀림없다-바닥에 돌 흔적11
-할아버지 인터뷰 "윤관비가 강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원래 강바닥에다 비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고 이 부근
어디에서 옮겨온 것이겠는데 이런 높은 이런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넓은 벌 PAN19 고려의 최북방 경계인 공험진- 정확한 위치는 좀더 깊은 연구가 과제로 남는 다.
그렇지만 최소한 두만강 건너 연길 북방에 공험진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해진다
-지도C.G쌍성 총관부 없애고9 (보고) 동으로는 두만강너머 간도지역 까지 서쪽으로는 요동의 심장부인 요성
까지
-지도C.G동녕부 없애고 전체 6 이렇게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를 내쫒고 옛땅 을 되찾는 북벌을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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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6-한반도와 만주의 입체적인 지도가 바닥에 깔려있고 MC 공민왕이 확보한 만주 연길에서 요동까지
걸으며 연길에서 요양까지 이 넓은 만주가 공민왕이 수복한 땅입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원명 교체의 혼란기였습니다 공민왕은 즉위초부터 원의 세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 만주를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즉위 한지 5년만에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두만강을 건너 동만주를 확보하고 을 끊임
없는 준비끝에 마침내 고구려의 영광이 깄든 땅 요동을 되찾았습니다
원의 족속국임을 단호히 거부하며 고려재건에 나썼던 개혁군주 공민왕 공민왕의 만주 수복 전쟁은 이렇게
완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민왕은 수복한 만주땅을 오래 지킬수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남쪽을 침입해 오는 왜구와 날로 강성해지는 명나라의 압력속에 만주를 끝까지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공민왕은 만주가 우리땅임을 선포하고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만주 수복의 결과는 이후 조선이 두만강 유역을 확보하게 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가 우리의 역사라는 점을 새삼 확인 할수 있었던 겄도 공민왕의 북벌이 가져온 성과였습니다
역사스페셜 '천명의 역사 교사가 뽑은 역사 이야기' 오늘 우리는 마지막 시간으로 고려의 북방 개척에 대해
알아 보았는데요 공민왕은 우리 역사에서 잃어버렸던 만주땅을 되살아나게 했습니다
고려 공민왕의 만주 수복 전쟁.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상 마지막 만주 공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