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티 시립공동묘지 입구에서 조화를 사 들고 오솔길을 걸어갔다 그 방향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묘지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어머니는 여기 가족 묘지에 묻혔어” 릴리는 무덤 주위에 들장미를 심었다 국경 너머에 들장미가 핀다면 그게 모두 릴리가 심은 들장미 같았다 풀을 헤치고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묘비에 새겨진 릴리의 외조부와 외조모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들에게는 육십 년 전 남한 출신의 망명자에게 시집간 딸을 흙에 묻힌 채 돌려받은 것이었다 릴리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것을 떠올리려는 듯 걸레에 물에 적셔 묵묵히 묘비를 닦았다 들장미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지만 딸이 흙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꽃을 피운 것 같았다 한 사람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가장자리에도 들장미가 심겨 있었다 나는 릴리에게 장미 한 송이 주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들어가 묻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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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박인환상 시 부문 수상자로 <릴리와 들장미>(도서출판b)의 정철훈 시인이 뽑혔다. 시 심사위원단(위원장 이은봉, 위원 고진하·고형렬·오성호)은 수상작을 두고 “심미적 연민과 함께하는 서정적 페이소스가 그의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을 차원 높은 예술로 만들고 있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