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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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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1코린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4,16-30)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17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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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4,16-30
오늘 복음은 그 자체가 한 편의 ‘거룩한 독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시고, 놀라운 한마디로 마무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성경은 ‘옛날 옛적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듣는 이에게’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는 말씀을 누구보다 깊이 읽은 이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성령 안에서 읽힐 때 ‘오늘의 말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에게’ 그 말씀을 건네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독서란 바로 이 ‘오늘’을 듣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 ‘오늘’을 놓칩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가 다 아는 사람’이라는 익숙함이 눈앞의 하느님을 못 알아보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영적 성찰’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다 안다’는 생각이 그분의 오늘을 가려 버립니다. 익숙함은 이렇게 가장 조용한 눈멂이 됩니다.
우리도 그러기 쉽습니다. ‘그 기도문, 그 미사, 그 이웃, 다 아는 것’이라 여기는 순간,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오늘의 하느님’을 놓칩니다. 영적 성찰은 ‘다 안다’는 익숙함을 내려놓고, ‘다시 처음처럼’ 듣고 보는 눈을 되찾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드신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것’이라 여기며 움켜쥔 이들이 아니라,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처럼 ‘열린 마음으로 받은 이들’에게 흘러갔습니다. ‘다 안다·다 가졌다’는 이들은 도리어 놓치고, ‘처음처럼 여는’ 이들이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이미 다 안다’는 생각으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나는 말씀을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듣는가? 나는 익숙한 기도·미사·이웃을 ‘다시 처음처럼’ 대하는가? 나는 은총 앞에 ‘움켜쥔 손’인가, ‘열린 손’인가?
주님, ‘이미 안다’는 익숙함을 내려놓게 하소서.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시고, ‘처음처럼’ 여는 마음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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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30. 15:43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의도하신 바가 무엇일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2026년 8월 30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참된 제자직이 결국 십자가로 인도된다고 성찰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상식과 직관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메시지가 극적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충격으로 세상에 전해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것을 부인하고, 피하고, 약화시키거나 단순한 교리적 이론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메시지는 결코 배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되며, 반드시 중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늘의 우주적 비전을 제시하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인류와 함께 씨름하시며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곧, "예수님다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상태를 드러내신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부활에 이르는 길, 곧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제자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걷는 삶의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혹은 십자고상을 신앙의 중심 상징으로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우리가 자주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읠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켄 윌버가 구분한 "올라감의 종교"와 "내려감의 종교"라는 개념은 여기서 도움이 됩니다. 그는, 그리고 저 역시, "내려가는 종교"를 훨씬 더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본 언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내려놓음, 봉헌과 봉사입니다. 이는 흔히 우리가 '구원'이라는 말 속에 숨겨두는 자기 개발의 언어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예수님의 '내려가는 종교'를 또다시 새로운 형태의 '올라감의 종교'로 바꾸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결코 배경으로 밀려나서는 안 되며,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내내 분명히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개인적 도덕적 완성이나 어떤 형태의 '구원'—곧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 다른 이들을 개종시키는 것, 혹은 이 세상에서 건강·부·성공을 얻는 것—으로 바꾸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한 추구 속에서 우리는 결국 예수님이나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기보다는 제국과 전쟁, 식민지화와 손을 잡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21세기에 이르러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참된 제자직은 개인적 완성이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1] 내려가는 영성은 우리의 종종 복잡하고 어지러운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도록 자유롭게 해 줍니다. 이는 인간 여정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그 안의 경이와 비극을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랑과 고통에는 사실 특별히 '초자연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죽음과 생명, 봉헌과 용서가 서로 깊이 얽혀 있는 근본적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결국 이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직의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성령의 은총 안에서 사랑과 고통을 함께 살아내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신념 체계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보여주는 길입니다. 곧,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어떻게 사랑을 내어주며, 결국 어떻게 죽음마저도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어줌"의 삶입니다. 그렇게 내어줌으로써 우리는 세상과,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하느님과 깊이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오늘 아침 향기도(Centering Prayer) 중에 뜻밖의 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자캐오가 올라갔던 그 나무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은 제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성찰로 이끌었습니다. 오랜 세월 성경과 함께 기도하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단순히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 있는 체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느낀 것은 마치 복음 자체가 저를 찾아온 듯한 체험이었습니다. 말씀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성령 안에 살아 움직이며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Ilka F.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21), 216–217. [2] Rohr, Universal Christ, 212–21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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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31 04:44
- 힘은 빼야 하지만 또 있어야 한다.
저의 오늘 강론의 주제는 “힘은 빼야 하지만 또 있어야 한다.”입니다. 사실 힘이 있어야 빼기도 하는 것이지 힘이 아예 없다면 뺄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데 왜 강론 주제를 이것으로 잡았냐 하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힘 얘기를 하기 때문이고, 저도 힘 얘기를 전보다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이 빠지기 때문이고, 그만큼 힘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주 김장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었는데 밭고랑을 내고 퇴비를 밭에 뿌리는 일을 하면서 불과 5년 전과 비교해도 그 일들이 힘에 부치는 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힘이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좋다는 생각도 하고 오늘 바오로 사도에게도 같은 가르침을 우리는 받습니다.
코린토에 처음 갔을 때의 그는 약했으며 두렵고 떨리기까지 했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 되게 하려 했다고 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매우 강했고 두려워 떨던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매우 지혜로웠고 설득력도 대단한 분이었지요.
그러나 그럴 때는 성령의 힘과 지혜를 지니지 못했고, 자기의 힘과 지혜를 믿고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데 그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를 당신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의 힘을 꺾는 일을 먼저 하셨고 약해지게 하셨지요.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약해졌을 때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힘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야코는 죽이고 성령을 체험케 하심으로 그리된 것입니다.
보통 인간적으로는 힘이 약해졌을 때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졌을 때, 다시 말해서 심약해졌을 때 갖가지 마음 병과 정신병이 들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힘이 약해졌을 때 그 힘이 약해진 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나이 먹어 약해진 것도 나이 먹어서 약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이와 함께 약해지게 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약해진 것을 보약을 많이 먹어서 회춘하려고 들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강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하고 그래서 내 힘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할 수 없게 되고, 마구잡이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면 내 힘을 빼고 성령의 힘은 채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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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31. 06:00 언제나 성령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과 장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그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그 무관심은 스며듭니다.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한 말은 지금 우리 정신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당시 인류가 알게 된 가장 강력한 발명품 중 하나였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그것을 발명했을 때, 그는 친구였던 그리스 학자에게 '폭발적인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가 무언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제시된 단어가 바로 dunamis(두나미스) — "폭발적인 힘"이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 자체는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점화 장치와 결합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성령의 "능력" 또한 같은 그리스어 dunamis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세례와 성사들을 통해 이미 이 dunamis — 성령의 능력 — 을 받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능력을 드러내는 "영적 다이너마이트"가 될 잠재력이 이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하나 올라옵니다… "나는 내 삶 안에서 성령의 이 놀라운 능력, 곧 dunamis를 증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점화 장치가 없는 다이너마이트처럼 무력하고 효과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는가?" 오늘 복음은 성령의 힘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예언자의 말씀을 읽으시며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메시아의 오심을 요란한 폭발이 아니라, 부드럽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곳, 나자렛에서 오셨습니다. 성대한 장관이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겸손한 시작은 하느님의 지혜 안에서 서서히 그 강력한 힘, 곧 dunamis를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이들에게 놀라움과 감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 그러나 성령의 힘이 계속 드러나자, 동시에 분열과 반대의 영도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요구되는 삶의 변화를 깨달은 군중은 분노와 격분으로 변했습니다. 결국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루카 4,28-29). 이것이 바로 성령의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놀라움과 감탄을 일으키는 힘, 그러나 동시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맞서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는 성령의 능력을 지닌 "영적 다이너마이트"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다이너마이트가 힘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성령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그 성령의 힘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곳,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의 의미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상징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지금 여기'를 강조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언제나 현재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현재가 모든 이에게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보지 못합니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직 미래이지만, 나무 위의 사람에게는 이미 현재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식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의식이 낮은 사람에게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아주 좁은 공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현재가 무한히 넓습니다. 그분의 청중에게 하느님의 나라란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루카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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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4366 2026.08.30 16:13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오늘 복음 묵상)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은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매우 준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앞에서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반석”이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반석이 순식간에 걸림돌이 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하느님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의 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켜드리려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지키려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이 드러납니다.
사람의 일은 반드시 악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매우 합리적이고 선하며 상식적으로 보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 손해 보지 않는 것, 고통을 피하는 것, 인정받는 것, 관계를 잃지 않는 것,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방식대로 보호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선한 의도조차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우리에게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갈라지는 현장은 거창한 곳보다 일상의 관계 안에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 다른 사람이 빛나는 것을 허용해야 할 때, 설명하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멈추어야 할 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사랑을 선택해야 할 때,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기다려 주어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고, 예수님의 뒤로 물러나 그분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은 단순히 ‘사라져라’라기보다 “내 뒤로 가라”는 제자도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강한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앞에서 길을 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에서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하느님을 떠났을 때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가 하느님보다 앞서갈 때인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칸적인 가난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가진 것을 버리는 것 이전에 내 생각이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소유를 내려놓는 것, 내가 정한 방식으로 일이 되어야 한다는 통제를 내려놓는 것, 하느님께서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음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대신 결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하신 꾸지람이 아니라 오늘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나는 반석인가, 걸림돌인가.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주님께 길을 가르쳐 드리고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듣고 있는가, 내 뜻에 하느님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가. 어쩌면 회개란 아주 단순한 방향 전환일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다시 주님 뒤로 가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앞서가지 않게 하소서. 저의 옳음보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제가 드러나는 것보다 형제가 살아나게 하시며, 제가 붙잡는 것보다 놓아드리게 하시고, 사람의 일에 매여 당신의 일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보다 한 걸음 뒤에서, 당신이 걸으시는 십자가와 사랑의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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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3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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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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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과 Mark Choi 님 : 분별력.
함승수 신부 님 [ 연중 제22주일 가해]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5&id=2136679&menu=4770 260830. 09:41
[연중 제22주일 가해] 마태 16,21-27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한 때는 예수님으로부터 교회를 지탱할 ‘반석’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가,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방해하는 ‘사탄’이라는 꾸지람을 듣습니다. 말 그대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추락’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살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지요. 인간이란 참으로 부족하고 약한 존재여서, 자주 생각이 바뀌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유부단한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작은 유혹 하나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볼 때 그렇습니다. 어제만 해도 뜨거운 신앙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았는데, 오늘은 하는 짓이 마귀나 다름 없이 비열하고 간사한 나를 발견하게 될 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온데간데 없고 내 생각 내 계획 내 욕심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느님과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한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삼시세끼 먹고 즐기는 일에만 신경쓰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사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그런 수많은 ‘베드로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 않고 하느님 곁에 항구하게 머무를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먼저 베드로의 말을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시자,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지요. 이는 스승님을 걱정하고 아끼는 제자의 마음에서 그러시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린 수준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붙들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예수님을 다른 이들로부터 따로 떼어놓기 위해 자기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을 쥐고 흔들려는 모습이지요. 또한 ‘반박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뜻은 ‘꾸짖다, 책망하다’입니다. 즉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께 충언을 한 게 아니라,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꾸짖듯이 예수님의 위에 서서 강한 어조로 훈계하고 통제하려 든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선을 넘었다고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베드로의 가장 큰 잘못은 그 다음 말에서 나오지요.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히브리어 관용구에서 온 것인데, 이는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개인적 바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감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바꾸려고 든 것입니다. 게다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한 부정표현 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이 반드시 막고야 말겠다는 베드로의 강한 의지와 고집이 담겨 있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가 윤리 도덕적으로 사악한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베드로가 보인 모습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사탄’은 하느님께 반대하고 그분의 길을 막아서는 ‘반대자’, ‘적대자’를 가리키지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이 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런 거라고 항변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반대한 베드로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요. 베드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음으로써 하느님께도 예수님께도 ‘사탄’이 되고 만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렇게 된 이유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요. 공부를 잘해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높은 자리에도 올라야 하고 그렇게 해서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게 행복이라 여기는데, 그 모든 걸 버리고 굳이 고통과 시련의 길을 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을 가시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초대하시는 그분의 손을 잡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아무리 많이 해봐야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면 그분께서 나의 삶을 참된 행복과 보람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당신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일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분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섭리의 길이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 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씀도 사실 같은 뜻이지요. 이를 그리스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내 뒤에 서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겸손하게 그분의 ‘뒤’에 서야 합니다. 내 고집, 주관, 편견, 욕심 등을 다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 그대로 순명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마저 기꺼이 끌어 안는 것이 순명입니다. 이같은 겸손과 순명의 마음으로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르다보면, 우리는 그 길의 끝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걷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이것이 좋다 혹은 저것이 좋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세의 풍조에 동화되지 말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별은 그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하지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두번째입니다. 그렇게 식별해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서운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그분의 권고가 그저 무리한 요구로만 들리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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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함승수 신부 님 [ 연중 제22주일 가해] ----- Mark Choi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6&id=2136682&menu=4770 260830. 12:34
Father, your reflection made me think deeply about discernment. We often see things through our own interests and emotions. Perhaps true discernment begins when we honestly ask ourselves, “Am I seeking God’s will, or my own?” Thank you for reminding us to humbly stand behind Jesus and follow His way.
신부님 글을 읽으며 마지막에 말씀하신 ‘분별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지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기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정직하게 돌아보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분별’은 생각보다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상황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판단이 달라집니다. 때로는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가 높다고 해서 더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옳다고 분별하고 싶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분별은 ‘내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가?’보다 먼저 ‘나는 지금 정말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사람은 자기 판단을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조차 다시 하느님 앞에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내 뒤에 서라”는 말씀처럼, 내가 앞서서 하느님의 길을 판단하려 하기보다 주님 뒤에 조용히 서서 따라가는 겸손이야말로 참된 분별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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