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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연합예배 말씀
240414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김성현감독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 종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종을 도와주시고, 입술에 기름 부어 주시사 말씀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이 있게 하여 주시되, 사람의 말을 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의와 철학을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 하나님의 것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되,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도록 하나님이 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누구나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분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의 성격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원치 않는 사람은 공감대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굳이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 마음 속에 그리는 하나님이, 혹은 자기가 배워서 이해하고 있는 바, 자기에게 소개된 하나님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이 이해 때문에 신앙을 대하는, 삶을 대하는 성격이 천차만별 다르게 되는 것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떠세요?
혹시 이렇진 않습니까? 굉장히 엄한 분이셔서 ‘너희들, 이런 것 없으면 안되는데? 수준이 안되는데? 뭔가 부족한데?!’ 하고 능력 없는 자를 야단 치시는 하나님, ‘아, 왜 이렇게 모르느냐.’ 지식이 없다고 야단치시는 하나님이진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인데, 당신, 하나님을 알아요?” 누가 그렇게 물어보면 저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 잘 몰라요.’ 하나님은 내 부족한 것을, 내 잘못을 찾아서 벌을 주시는 분이라 생각되십니까? 내 부족한 부분을 굉장히 사나운 눈으로 보고 계시는 분, 나를 감시하는 분 같습니까? 물론 누구든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내 부족함을 감시하고 계시고, 어떤 정해진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버리고 포기하는 그런 분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만일 당신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오늘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잘못 본 것입니다. 인간들이 잘못 소개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그리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입니다. 그는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는 사람이 은근히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 죄인입니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 없다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법적 지위로는, 우리의 일부분으로는 형벌의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죄가 없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가 많으시고 선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그려야 합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저도 소망이 없습니다. 아마 야단 맞으면서, 평생 공포감에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기를 못 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전, 어느 교회의 성도분이 간증하는 것을 조금 보게 되었는데, 굉장히 수준 높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 믿을 때 대충 믿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되겠어요? 아주 그냥 꼬꾸라지게 이렇게 해야 돼! 그 정도로 해서 되겠어요!? 하나님, 어떻게 믿느냐? 따라하세요! 죽도록 믿어라!” 이렇게 하는데, 저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수준이 안됩니다. ‘나는 다른 교회 목사입니다. 근데 그 수준은 안 돼요.’ 그 간증 속에 나오는 하나님은 제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기댈 수 있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죄인 찾으십니까? 저입니다. 훌륭한 사람, 잘 참아내는 사람 찾으세요? 능력 있는 사람, 찾으세요? 그런데 하나님, 제게 특별한 점이라면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법대로 하시는 분이십니까? 법대로 하면 저는 죽습니다. 뭘 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합니까? 열심히요? 하나님, 제 인생도 너무 힘듭니다. 저 이 인생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손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그저 따뜻하게 나를 용납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제가 찾는 하나님은 이렇게 부족해도 용납해 주시는,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제 죄를 그냥 못 본 척해주세요. 하나님, 자 따라해 보세요. ‘너는 죄 없다.’ 그냥 죄 없다고 쳐주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몰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없애기 위해 당신이 그 짐을 지셔야 합니다. 결코 죄를 넘지 않으시고, 행한 그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지금 논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그 부분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데 있습니다. 엄청나게 능력있고 수준 있는 자를 보시고 ‘와, 거기 능력이 있냐? 으하하하! 내 마음 기쁘구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셨습니까? 사실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하는 데에는 구약까지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안 읽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요 조금만 봐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견디지 못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짓눌리고, 힘이 없고, 빼앗기고, 억울한 자들을 도우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냥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구한 소망이 되시려, 영구한 성취가 되시려 오셨습니다. 다시 그 괴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영원히 그 괴로움에서 보호하시려는 분입니다.
과거 어느 때에는 무언가 세게 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사정없이 열심히 해야, 마치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 안 하신 분은 여기에 주일날 오실 때에 바닥에 무릎 꿇고 손들고 계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나 다름 없이, 마치 하나님께서 그런 높은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했는데, 그러면 저는 못 따라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을, 하나님의 자비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성경에 말하고 있거니와 가난한 자, 없는 자, 병든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제 딸을 좀 구해주십시오.” 하는 자의 말을 들으시고 그 딸을 낫게 했을 때 ‘와! 하나님 능력이 있으시다. 봐라! 하나님, 얼마나 능력이 있으시냐?’ 하는 것이 포인트가 아닙니다. 포인트는 뭡니까?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받아주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이 죄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사회에서는 용납해 주지 않는 자들, 낮은 자들, 무시하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자들이었죠.
이런 제 하나님을 잘못 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못 소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하나님은 자비가 충만하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런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4~7
글은 사무적으로 썼지만, 풍성한 은혜로 오신 분, 자비하신 분임을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무자비한 하나님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무자비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희망을 둘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성장할 때에 보아오던 그런 굉장히 엄한 그런 하나님.
또한 교회를 파괴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교회를 공격하고 하는 데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아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 교회를 분란 시키고, 이간시키고, 거짓으로 교회를 선동해도 괜찮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가르쳐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 주시지만, 그는 의가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에 심판의 하나님으로서 그 위치를 지키셔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과 같지 않다고 했는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이 어땠습니까? 그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를 가르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두 시간 거리가 아니라 며칠 길을 달려온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철수했습니다. 굳이 고생스럽게 힘들여 쫓아온 이유가 파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신사적이라 그랬습니다.[1]
‘신사적’이란 영어로 ‘Noble’이라고 하는데, ‘고귀한’, ‘품격이 있는’이란 의미입니다. 베뢰아 사람들 가운데 귀부인들도 많았는데,[2] 당시 서민들의 눈에 자비하고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부족하지 않으니 너그럽고, 진지하고, 친절하고, 쩨쩨하지 않고. 보는 것만 해도 즐겁고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이야, 귀부인이라도 저렇게 하는구나. 귀족이라도 저렇게 하는구나.’
‘신사적’의 반대는 뭘까요? Ignoble입니다. 제가 어디서 강의를 하느라 며칠 전에 일부러 찾아봤는데, ‘신사적’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이 ‘비열한’, ‘야비한’이라고 나왔습니다. 단어만 들어도 그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그 제자와 같은 스타일은 아닌 것이죠. 예수께서는 그에게 ‘간사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베뢰아사람 귀족적인 품위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보고 ‘이 사람이 뭐냐? 나사렛 이 사람이, 지 부모가 여기 있는데...’ 이렇게 말하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몸도 아프지만 마음이 아픈 자들, 누가 만지지도 않는 병자들, 문둥병자를 손으로 만지고, 그 눈을 만지고 혀를 만지시는 긍휼하신 분입니다. 왜 잘못 보십니까? 우리에게 그 하나님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 하나님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 없어도 능히 살 수 있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만나지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위해 오시지 않고,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아프고, 외롭고, 버려진 자를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미래가 불안한 자, 미래가 무서운 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미래가 무섭지 않은 자들은 교회를 부수고, 교회를 고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능히 삽니다.
우리는 ‘베뢰아 사람은…’ 하고 사도행전 17장 11절을 합독할 때 엄청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 중에 그 구절을 택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능력이 충만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그러한가 하면서 자기를 낮췄던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실 때 어떤 면을 보셨을까요? 성경에 사울 왕은 ‘잘 생겼다.’ 했습니다. ‘키가 크고 잘 생겼다.’ ‘잘 생겼다’는 데에는 여러 가지의 능력을 포함합니다. 똑똑하고, 스펙도 좋고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해서는 뭐라 하셨느냐면,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똑똑한 것 필요 없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 이 자의 마음을 원한다.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3]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다.’ 긍휼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긍휼한 하나님의 그 긍휼을, 자비를 받아야만 하는, 그런 버려진 자들을 위해 오신 그 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자였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를 파괴하고 분열하는 데에는 아무렇지 않은 그런 자가 아니라, 분열할 겨를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 그런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는 자, 하나님과 마음이 맞는 자입니다사도행전에도 말씀하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4]
다윗 왕이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아주 중요한 조언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내가 알려 줄게. 하나님은 마음에 하나님이다. 네 마음을 감시하신다. 네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어야 한다. 네 마음이 긍휼한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가 되어야 한다.’[5]
의로운 체하면서 교회를 어렵게 하고 그런 것 말고요. 겉으로는 엄청 훌륭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그런 것 말고요. 능력이 부족하면 차라리 ‘하나님,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나 너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죠, 하나님? 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날 용서해 주실 것입니까?’ 차라리 그렇게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자가 하나님과 맞는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알려준 하나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네 마음을 판단하신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라. 잘못하면 잘못했다 해라. 그리고 이길 수 없으면 이길 수 없다고 해라. 능력이 없으면 능력이 없다고 해라. 그는 너를 긍휼히 보시는 분이지, 너를 벌하시려는 분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을 바로 발견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성경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법과는 다른, 온 세상의 문화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걷고 있습니다. 다른 세상을 제시해 주시고, 세상과는 다른 이념과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알려 주고 계시는 하나님을 성경이 그리고 있습니다. 엉뚱한 데 쳐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이 영혼을 위해 오셔서 그가 승리하시고 하늘에 오르셨던 것처럼, 오늘도 성령으로 나를 그만한 기세와 그만한 능력과 그만한 권위로 올려 주려 하십니다. 오늘도 가득가득 소원이 있는 그 하나님으로 여러분 마음 속에 모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고요. 우리는 하루 백 번이라도 회개기도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이래도 날 버리시지 않겠죠?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백 번씩 해야 하합니다. 으스대고 ‘나 그리 죄가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떠나 있습니다. 긍휼이신 하나님,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신 우리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 우리를 위해 오신 그 하나님,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우리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 긍휼이 충만한 하나님, 나를 용납해 주실 것을 내가 기대할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구주 주님을 오늘도 영접하며 내 주님의 힘으로 삽니다. 당신의 힘이 내 것이죠. 당신의 권세가 내 것이죠. 당신의 비전이 내 것이죠. 당신의 영원한 생명력이 내 생명력이죠. 내 삶에 오시고, 내 가정에 오시고, 내 인생에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불행을 거둬 가시고, 당신의 행복과 당신의 성공으로 대신 내 앞에 놓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우리 하나님 정말 영원히 우리 사람들에 의해서도, 신자들에 의해서도 거짓되게 그려지지 않는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 좁은 길이지만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고 달려갈 때에 모두가 구원 받고 모두가 하나님의 행복 속에 영원히 이끌림 받을 수 있는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늘 달려갑니다. 우리 하나님이 필요한 자들에게 다 희망이 되어 주시고, 참 능력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되어 주시고, 놀라운, 따뜻한 음성으로 맞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그리지 아니하고, 긍휼하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을 잘 나타내고 선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2)
[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4]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 13:22)
[5]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쁨 뜻으로 섬길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