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6
내려가는 길
아들아, 너에겐 내일이 있다
승전보에 들떠 있는 사이 정종이 인덕궁에서 훙(薨)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으나 아우 이방원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이방과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보위에 있었던 2년이 생애 가장 길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판한성부사 맹사성, 전 판서 최이, 경창부윤 우홍강을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에 임명한 태종은 도총제
여칭과 관찰사 이백지를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에 명하여 유훈에 따라 개풍군 흥교리에 산릉을
마련하도록 했다.
정종은 한양을 떠나 어머니 신의왕후 능과 가까운 곳을 택한 것이다. 능의 이름은 후룽(厚陵)이다.
국장을 잘 치른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렀다.
“이번 강무는 해주(海州)에서 실시한다.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예년의 강무는 경기도 광주와 철원 등지에서 시행되었는데 해주라니 뜻밖이다.
강무는 군사훈련이다. 강무가 끝나면 사냥과 여흥이 있다.
명분은 군사훈련이었지만 태종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개성은 태종에게 꿈과 야망과 좌절의 쓴맛을 보여 주었던 고장이다.
청운의 꿈을 불태우며 스승 원천석에게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며 어여쁜 색시를 만나 장가를 들었던 고을이다.
태조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와신상담 세월을 낚았던 곳이다.
함흥에서 태어난 이방원에게는 제 2의 고향이었다.
세종을 대동한 태종이 도성을 벗어났다. 대소신료가 모화관까지 나와 배웅했다.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이 배행했다.
청평부원군 이백강, 도진무 연사종· 최윤덕· 이춘생, 병조판서 조말생, 병조참판 이명덕, 병조참의 윤회,
여량군 송거신, 내금위 절제사 이화영 등 12인과 사금 절제사 권희달 등 5인과 사옹제조 2인과 대언 6인이
호종했다.
임진강 나룻가에서 하룻밤을 묵은 태종은 사람을 보내어 송악산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 이르고 개성에
들어갔다. 감개가 무량했다.
송악산을 바라보며 성리학에 몰두했던 일.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했다는 급전을 받고 단기 필마로 급히
개성을 빠져 나가던 일. 형 방간과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전투를 벌였던 일 등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태종과 세종이 등산곶(登山串) 강무장 달달리에 막차를 정했다.
이 날 어가가 금강평(金剛平)에 머무를 때 태종이 매를 팔에 올려서 놓아 보내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사고가 있었다. 불길한 징조다.
이튿날 군사훈련은 간단하게 마무리했다.
강무를 끝낸 태종은 세종을 대동하고 홍가이산과 소이산에서 사냥을 즐기고 구월산과 홍해산을 구경하고
어인포(御仁浦)에 머물렀다.
시위한 재상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다시 발갑산(鉢甲山)에서 사냥을 구경하고 고읍상에 돌아와서 머물렀다.
신평산과 군장산 그리고 금굴산을 두루 유람한 태종은 이백강을 보내어 후릉(厚陵-정종의 릉,개성)에 제사
드리도록 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형님에 대한 예를 마친 태종은 제릉(齊陵-태조 정비 신의왕후 한씨 릉)을 참배했다.
태종이 초헌(初獻)을 하고 세종이 아헌(亞獻)을 했다. 어머니 신의왕후에 대한 아들의 도리다.
부왕과 함께 할머니께 인사드린 세종은 별도로 계명전(啓命殿)에 제사드렸다.
또한 태종은 여흥부원군 민제의 무덤에 환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개성을 주유하고 돌아온 태종은 풍양 신궁에 머물렀다. 공사가 마무리 된 신궁에 아예 주저앉을 태세다.
낙천정에 기거하던 대비가 풍양 이궁으로 이어(移御)했다.
태종이 풍양에 머물게 되자 변계량과 홍섭 그리고 봉녕부원군, 익평부원군, 길창부원군, 의산군, 판한성치사,
지병조사가 문안하였다. 이어 대소신료들의 발길이 줄줄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부원군 이하는 교지를 얻은 뒤에야 풍양궁에 와서 문안할 수 있다.”
태종이 선을 그었다. 정사에 바쁜 신료들은 시간을 뺏기지 말고 국사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풍양궁에 머물던 태종이 대비를 두고 낙천정으로 이어했다.
노왕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경거망동 하지 마라’
태종이 풍양에서 낙천정으로 떠났다는 전갈을 받은 세종이 부랴부랴 중량포에 나아가 영접했다.
태종이 목장 가운데에 이르러 말을 세웠다.
뒤따르던 병조판서 조말생과 지신사 원숙을 말 앞에 나오게 하고 꾸짖었다.
“사헌부에서 병조영사(兵曹令史)를 불러 나의 거동을 물었다 하니 이것이 무슨 예절이냐? 홍여방은 공신의
아들로 사헌부의 장이 되어 거만스럽게 나의 거동을 묻고 주상에게 고하여 금지시키라고 하였으니 어찌
애경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것이 나를 옛 임금으로 여긴다고 하겠는가?
또한 ‘갑사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거둥에 따라 가는 것이 제 집에서 먹고 있는 것만 같을 수 있느냐.’
하였다 하니 예전에는 한 정승의 행차에도 군사가 반드시 호종하였었다.
이제 갑사들이 양식을 싸 가지고 가는 것으로 말이 된다면 군사는 설치하여 무엇에 쓰려는가?”
원숙은 황공하여 부복하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태종이 낙천정에 이르니 박은과 이원이 문안하고 아뢰었다.
“헌부가 매우 무례하였사오니 의금부에 하옥하고 국문하는 것이 의당하오이다.”
“집의(執義) 박서생과 장령 정연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노왕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얼어붙은 조정은 육조 당상관 각 한 사람씩 낙천정에 나아가 매일 문안했다.
낙천정에 머무르면서도 군사의 끈은 놓지 않았다.
군기감(軍器監) 제조 윤자당과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령하여 새로 건조한 전함(戰艦)을 양화진에서 시험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라 명했다.
낙천정에 머물던 태종이 세종을 대동하고 대모산(大母山)을 찾았다.
하륜이 잡아 준 수릉(壽陵)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자신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름에 잠기던 태종이 세종에게 말했다.
“하(河) 정승 륜(崙)은 사람됨이 남의 잘하는 것은 되도록 돕고 남의 잘못하는 것은 되지 아니하도록 말리어
충직하기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전번에 내가 양녕에게 선위(禪位)하려고 할 때 하륜이 나에게 고하기를 ‘만일 선위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마땅히 진양으로 물러가서 쉬겠나이다’ 하면서 말렸는데,
여러 민가(閔哥)들이 그런 것을 모르고 이간을 붙이려고 모략하였지만 나와 하륜이 서로 알아주는 사이를 누가
이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조준을 아끼는 것이 륜을 아끼는 것만 못하니라.”
수릉을 살펴본 태종은 경안역(慶安驛) 아래 들에 머무르며 이천 현감을 불렀다.
“농기구를 마련하여 양녕의 집에 넣어주고 농사에 종사할 일꾼은 그의 소원대로 주어 노비로 쓰게 하라.”
광주에 있던 양녕이 새로 집을 지어 이천에 옮겨와 있었다.
낙천정으로 돌아온 태종을 위환 잔치가 베풀어졌다. 탄신 축하연이다.
부름을 받고 이천에서 달려온 양녕대군과 효령대군·경녕군과 여러 종친이 참석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과 이백강·조대림·권규·윤계동·유관·조연·박자청·정역·이화영·변계량·
최윤덕·권영균·허지·허조·조말생·신상·이명덕·안순·한확·홍부·이교·원숙 등이 입시했다.
권희달·이춘생·유은지·황상·허해·윤회·김익정·유영·조서로·권도 등은 낙천정이 비좁아 바깥 대청에서 사찬했다.
세종이 내전에서 하례하는 예식을 행하고 안팎 의복과 안장 갖춘 말을 헌상했다.
공비와 명빈과 의화 궁주는 각각 체수박(遞手帕)을 헌상하고 각도 관찰사는 각기 그 지방 산물과 말 한 필씩을
헌상하였다.
연회에 입시하였던 여러 신하들이 각기 차례로 헌수하고 춤추니 세종도 일어나 춤추어서 헌수하고 태종도
춤을 추었다. 흥에 겨운 태종이 변계량에게 말했다.
“자식이 왕이 되어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니 기쁘도다. 그 아비가 되어 이처럼 누리게 되니 이와 같은 일은
고금에 드물 것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손수 술을 내리고 정승들에게도 술을 주었다. 지신사 원숙에게 술을 내리며 말했다.
“주상을 잘 보필하도록 하라.”
“전하께서 정사를 보시는데 그 처결하는 것이 각기 사리에 합당하였습니다.”
“내가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주상의 노성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하였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태종이 좌정한 대소신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 같은 임금이다. 만일 부인의 말을 들었던들 큰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 간에 한가로이 노닐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천하에
오직 나 한사람뿐이려니,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나의 오늘과 같지는 못하였다.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니 내 어찌 이 천하에서 뿐이랴. 고금에도 역시 나
한 사람뿐일 것이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허나, 아버지의 희색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슬픔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양녕은 잠시 혼란이 왔다.
흥겨운 잔치는 밤이 깊어서야 파했다.
효령대군을 시켜 대소신료들을 밖에서 전송하게 한 태종은 임금의 어깨에 의지하여 내전으로 들어가며
지신사 원숙에게 말했다.
“주상이 효양하는 가운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니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구하겠느냐.”
아우 세종의 어깨에 의지하여 내전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녕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부왕에게 큰 기쁨을 드린 지극한 효심의 눈물일까?
강안(江岸)에 부딪치는 물결소리가 유난히 철썩거렸다.
불효 막급한 참회의 눈물일까? 양녕의 속내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207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