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어떤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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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서부에 있는 상주시(尙州市)는 북쪽으로 문경시, 충북 괴산군, 동쪽으로 예천군·의성군·구미시, 서쪽으로 충북 보은군·옥천군, 남쪽으로 김천시, 충북 영동군과 접한다. 동서간 거리는 48.3km, 남북간 거리는 49km다.
서쪽 경계에는 속리산(1,058m)·팔음산(762m)·포성봉(933m), 남쪽에는 국수봉(793m), 북쪽에는 작약산(763m)·도장산(828m) 등 백두대간과 그 지맥의 높은 산들이 솟아있다. 상주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남류하는데, 백두대간 분수령에서 발원한 이안천·북천·남천이 동류하여 낙동강에 합류한다. 하천 유역에는 비옥한 함창·상주평야가 발달해 있다.
백두대간 동쪽 사면과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나타나는 남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한다.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기온 -3.4℃, 8월 평균기온 26.4℃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56mm다.
낙동강을 낀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삼한시대엔 사벌국(沙伐國)이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했다. 신라가 249년(첨해왕 1) 이곳을 합병하고 사벌주(沙伐州)라 불렀다. 525년(법흥왕 12)에는 2경(京) 5주(州)의 하나인 상주(上州)가 됐으며,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명칭인 상주(尙州)가 됐다.
고려시대에도 상주라고 불렸다. 983년(성종 2) 목사(牧使)를 두었고, 조선 세종 때 경주와 함께 이곳에 경상도 감영(監營)이 설치됐다. 1459년(세조 5) 진(鎭)이 설치되면서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지가 됐으나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감영이 대구로 옮겨감에 따라 상주는 목(牧)으로 낮아졌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상주목은 상주군으로, 함창현(咸昌縣)은 함창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 함창군이 상주군으로 통합됐다. 현재 함창읍 및 사벌·중동·낙동·청리·공성·외남·내서·모동·모서·화동·화서·화북·외서·은척·공검·이안·화남면과 남원·북문·계림·동문·동성·신흥동의 1읍 17면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주는 평야가 많아 경지면적(28,081ha)이 넓고, 작물 총생산량 가운데 미곡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예로부터 삼백(三白, 쌀·누에고치·곶감)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콩·참깨 등도 많이 생산한다. 곶감은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점유하는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석탄은 은척면에서, 석회석은 공검면과 화남면에서, 고령토는 청리면에서, 규석은 이안면에서 생산된다.
경북선(김천∼영주) 철도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상주시를 중심으로 국도·지방도, 그리고 시·군도가 사통오달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2004년에 완공됐고, 앞으로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더 편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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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 속리산 북쪽에 솟은 높이 1,029m의 봉우리다. 정상에 큰 암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한다. 정상 바위는 약 5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다. 장암리 화북분소에서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속리산 국립공원 화북분소 054-533-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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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대
사벌면 삼덕리 낙동강변에 있는 경천대는 임진왜란 당시의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이 무예를 닦으며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정기룡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먹이통이 남아 있다.
또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 따라가 함께 고생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후일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했다는 무우정이 있다.
입구엔 어린이 놀이시설, 야영장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주차료는 대형 4,000원 일반 승용차 2,000원. 입장은 무료. 전화 054-536-7040, 054-530-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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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
사벌면 금혼리에 있는 충의사는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장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왜대장이 되어 6만의 왜적을 대파하고, 상주·합천·의령 등의 여러 성을 탈환했고, 경주·울산을 수복하는 등 부족한 군사와 무기로 용맹을 떨친 그를 흔히 ‘육지의 이순신’이라고 불렸다.
옥대·신패·유서·교서·교지 등 장군이 남긴 유물은 보물(제669호)로 지정되어 충의사에 보관하고 있다. 이외에도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 ‘매헌실기’의 판목 58점과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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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검지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공검지(도기념물 제121호)는 삼한시대 저수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1195년(명종 25)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못을 축조할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기 때문에 공갈못이라고 부른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종 때 못의 일부를 논으로 만들면서 5,000여 평으로 축소됐고, 1959년 공검지 서남쪽에 오태저수지가 완공되자 1964년 2,000여 평만 남기고 모두 논으로 만들었다. 1993년 옛터 보존을 위해 14,716㎡의 크기로 개축했다. 관개면적 1.1㏊, 저수량 1,000t, 못 둑의 길이는 34m, 못 둑의 높이는 3.6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