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혼 낙동강(제1부)
이권섭
낙동강굽이 처 흐르는 태백산줄기 그 줄기 따라 맺혀 우뚝 솟은 산들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유독 서럽게 성진이가 사랑하는 산이 있으니 그 이름. 덕대산과 종남산이다. 산 높이는 덕대산이 666미터 종남산이666.5미터이다. 덕대산 정기 받아 태어난 수많은 고향사람들이 많이 산재해있지만 미천하고 어리석어 모두 다 전할 수는 없고 일부만 남긴다.
특히 하남읍 남전리에 가면 효자마을이 있다. 그곳에 가면 고려말기에 충신이며 대 선비인 載寧李氏門中出身(재령이씨문중출신) 李申公(이신공)의 효자문비각이 있는데 경상남도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어있다. 그가. 고려말기에 충신으로 봉직하다가 이성개의반란으로 하영남 조음리로 낙향해서 후학양성과 지극정성으로 부모봉양 잘하여 사후에 조정에서 효자문 비각을 세워주고 시호를 내려 후세에 귀감이 되게 배려했다한다.
그리고 고려의충신이 이조 초기에 벼슬을 하였다하여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는 변개량. 대구말이란 조그마한 마을 어귀에, 조선조 초기 대제학과 예조판서를 지낸 春亭(춘정) 卞季良(변개량)의 공적비이 있다. 그 분의 고향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은 명 문장가로 남긴 시조 또한 널리 회자하고 있다.
“까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마라 걷히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당대에 와서는 공정식 초동초등학교출신 삼성장군으로 해병대사령관을 지냈고, 박희동 육군중장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육사동기로 알고 있으며 기타 여러 선후배 제 현들이 전국각지에서 그 명성을 날릴 정도로 출세한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초동면 신호리에 있는 초동초등학교 이곳에서 6년 동안 유년시절에 꿈 많은 학창시절을 보냈다. 넓은 운동장에서 새끼줄로 묶은 둥근 공을 차기도하고 아이들과 뜀박질도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어느 만화가 선생님의 고인돌이란 만화 그림을 보고 만화가의 꿈도, 웅변 잘하는 선생님이 닮고 싶어 산꼭대기위에 올라가 목 틔우는 연습도 했고, 시인이라고 하는 선생님 졸졸 따라다니며 그의 시 낭송하는 모습을 보며 철없는 시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수 많은 욕심을 키우면서 낙동강정기를 받고 자랐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흰 쌀밥이라고는 구경조차 못하고 양철 도시락에 싸 주는 꽁보리밥에 된장 덩어리 한 점, 그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영양실조가 들어 저승과 천당을 몇 번이고 오고간 것이 아직도 아련한 추억일러라.
성진이가 살던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객금 부락이다. 지금이야 어느 시골을 가더라도 시골길이 잘 포장되어서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흙먼지 덮어쓰고 다니는가하면 비가 오는 날이면 어느 듯 바지가랑이는 진흙투성이로 변했다.
동네의 수호신처럼 마을 어귀에 버티고 서 있는 고목 포구나무 밑에서 비를 피해 집까지 걸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매 맞는 일 꾸중 듣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래도 무엇이 좋다고 실컷 두들겨 맞고도 그렇게 돌아다니고 싶어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쓴 웃음이 나온다.
낙동강하면 태백산맥 기슭 원류에서부터 하류김해평야 부산 을숙도까지 주변 어느 곳에 살던 낙동강 물에 혜택을 아니 입은 자가 어느 하늘 아래에 있단 말인가. 유년시절 곡강 마을에 만 가면 벼랑 끝에 나아가 낙동강 물에 풍덩 뛰어든 개구쟁이 수영선수였던 내가 아니던가.
작은 마을 객기미에서 고개하나 넘으면 자뚜, 자뚜에서 2키로 쯤 달려가면 낙동강 물이 넘실댄다. 양쪽에 있는 모래밭 그곳에는 일년에 두어 번 농사를 짓는데 한철은 보리농사요 한철은 채소농사다. 홍수가 심하면 보리농사 채소농사 모두 다 망친다. 둥둥 떠내려가는 보리 단을 보고도 그냥 두어야 하고, 물에 힙 쓸려 썩어 가는 배추 무를 보고도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하는 안타까운 농부들에 심정 그 뉘라서 알아줄까?
그래도 허허 웃으며 내년을 기약하던 우리네 어른들, 그 모습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궁능수 그 옛날 나라님이 배를 타고 연꽃이 만발한 늪지에 행차하여 쉬었다하여 御亭(어정)이 있는 곳 수산, 삼한시대에 수산제가 있었다는 곳 지금은 지역사학자가 발굴해 문화제로 지정되어 당시의 자료를 보관하는 박물관이 현장에 있다.
강을 오고 가면서 길손들을 실어 나르던 수산 나루터 홍수가 들면 창녕 이북지방은 물론 이방 적교 남지 길곡 부곡 등지에서 떠내려 오는 짐승들, 그리고 가재도구들이 수두룩하던 포구 이제는 지역마다 다리가 반듯하게 놓여져 그 위로 씽씽 달리는 자동차행렬들 세월이 참 많이 빠르고 문명에 혜택이 이렇게 골 고루 퍼질 줄이야 수백 년 전 우리네 조상들이 어찌 알기나 했을까!
영남의 혼 낙동강! 어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지금도 성진 이는 굽이굽이 흘러내려오는 낙동강 물을 정수시킨 물을 수돗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 멱 감고 뛰놀며 성진이 부모에 애환을 앗아간 낙동강,
수많은 희로애락 속에서 살다간 우리의 조상님들의 얽이 담기어 후세에 전해지는 역사를 낙동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낙동강하면 자연의 순리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믿지만 개발이란 미명하에서 훼손 되어 가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먼 앞날에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개인의 이익 앞에서는 물 불 아니 가리는 세태가 얄밉다. 낙동강 그 강물이 아니고서는 우리네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강이 아닌가, 나는 지금도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달려가서 은빛 물 반짝이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바라보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낙동강을 지척에 두고, 이 생명 다할 때까지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고파...
첫댓글 나의 고향은 부곡면 구산리 남씨 집성촌인데 저도 지난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아주 소중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