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에 섬진강이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건 나의 욕심이다.
자연은 그저 자기대로 동으로 서로 흐르고 산굽이를 돌고 나무사이로 숨는다.
왕지환의 등관작루의 뒷 두 구절을 써 달라고 영대에게 부탁했다.
천리의 안목을 얻으면 나는 더 행복해질 것인가?
한층을 더 오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더 멀리 보려고 하는 건 놀보심뽀다.
여기 구례에서 동으로 흐르는 섬진강 끝으로 사라져 가는 해를 보기는 쉽지 않지만,
어디 산봉우리에서라도 산 위로 지는 해라도 보는 것이 좋겠다.
사성암이 있는 오산을 생각하다가
며칠 전 한재에서 따리봉을 오르다가 봐 둔 백운산 정상에 가기로 한다.
옷을 부지런히 갈아입고 나와도 5시 10분이 지난다.
벗나무가 푸른 터널을 이룬 섬진강길을 달리다가 남도대교 지나 중대계곡으로 오른다.
한재에 차를 세우니 5시 35분이다.
해지는 시각이 7시 반이 넘으니 두 시간 반 가량은 산에 있어도 되겠다.
2.6km 백운정상 이정표를 보고 푸르른 숲길로 들어선다.
떡갈나무 이파리 사이에 잣나무와 소나무 몇 그루가 키가 크다.
등로를 가마니로 깔아둔 오르막을 지나 따리봉보다 더 완만한 길을 10여분 오르자
완만한 능선이다. 나무 사이로 지리의 파란 산록이 가끔 보이지만 다가서 멈출만한 곳은 없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다 뒤돌아보니 건너편에 따리봉 덩치가 부드럽고 그 뒤로 도솔봉이 오똑하다.
출발한지 40분이 다 되어서야 신선대 앞에 닿는다.
바람이 세차다. 신선대와 상봉을 앞에 놓고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신선대 계단을 오른다.
1985년이던가 가야산에서 일박하고 산에 오른 다음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병암 마을 뒤 논에서 텐트를 쳤다. 다음날 무거운 배낭을 매고 창욱이와 함께 올랐을 때
창욱이는 앞쪽 바위를 잡고 신선대를 오르더니 나와 구호한테는 뒤로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바위를 잡고 오르려다 포기하고 뒤로 돌아 날선 바위를 건너 무릎을 대며 올랐던 기억이 난다.
바람이 세차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 빛이 산록에 비치니 또 보기 좋다.
지리 주능선을 모두 담으며 몇 번 사진을 찍다가 반대쪽으로 내려간다.
정상까지 부지런히 걸으니 주변엔 계단과 테크가 더 많아졌고, 또 저쪽엔 뭐 세우려는지
자재를 많이 가져다 두었다.
정상석을 찍어보고 나도 거기에 집어넣어 셀카도 찍는다.
억불봉으로 가는 푸른 산줄기가 그늘을 안고 구부러져 있다.
저 너머 경상도 쪽의 산줄기들은 잘 모르겠다.
순천시는 제비추리봉 뒤로 가려진 듯하고 광양읍도 가야산 아래 아파트만 보인다.
도솔봉 옆의 형제봉은 꼭대기만 살짝 보이고 그 뒤로 호남정맥의 줄기는 또렷하지 않다.
흐린 백아산 뒤로 무등산이 둥근데 카메라엔 잘 보이지 않는다.
모후산 조계산이 흐린 남으로 서 있고 따리봉과 하천산 덩치 사이로 구례읍 벌판이 작다.
성삼재 뒤로 차일봉 종석대 노고단 뒤로 반야봉의 덩치는 크고 그 오른쪽으로
토끼봉은 길고 명선봉은 둥글다. 멋모르고 오후에 화엄사에서 혼자 올라 연하천까지 캄캄할 때 도착하던 그 때
명선봉의 덩치는 왜 그리 컸었던지.
형제봉 벽소령 넘어 덕평봉 칠선봉에서 영신봉을 다시 잠자리 짊어지고 오를 수 있을까?
이제 잠자리는 안가져가도 되겠지. 술도 못 마시게 하니 배낭 무게는 더 줄어들까?
세찬 바람이 몸을 춥게 한다. 겉옷을 입고 모자를 뒤로 쓴다.
하천산의 푸른 줄기를 두고 바위머리를 앞세워 지리 능선을 본다.
지리능선을 바라보기만 하고 걷지는 않는다. 나도 이제 눈으로 글이나 옛사진을 보면서 말로나 씨부리는
와유를 해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저녁해가 더 산 가까이 가면 하늘빛이 지리를 더 곱게 비출텐데, 난 하산길이 걱정되어 돌아온다.
다시 신선대로 돌아와 바위를 올라간다.
바람을 피해 한쪽에서 물을 마시고 작은 배낭에 든 과자를 먹는다.
술 생각이 나지만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거나 몇 줄의 감상을 적는 일도 않는다. 바보다.
배고픔을 달래고 신선대를 두고 나와 종씨라며 셀카를 찍는다.
부지런히 돌아오다 바위에 오르니 건너편 따리봉 위로 막 해가 지고 있다.
해를 보고 지리연봉을 만난다. 다행이다.
붉어지는 하늘에 지리연봉이 빨갛게 떠 보이기도 하지만 난 개의치 않고 즐긴다.
돌아오니 8시가 다 되어간다.
지난 번 따리봉에서 내려오다 멈춘 그 자리에서 토끼봉에서 천왕봉까지의 능선을 한번 더 보고
배가 고파 속도를 높이는데 앞이 보이지 않은 구비가 많아 얼른 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