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한남동의 총소리
2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79년 12월 12일 밤은 대한민국 군부의 치부를 노출했다. 공식 지휘부는 우왕좌왕 무능했다. 시간대별로 정리해 보면 그 흐름이 드러난다.
전두환에게 맞선 장태완의 고군분투
그날 밤 두 주인공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 전두환 세력에 정면 반발한 군인은 사실상 장태완 혼자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그날 장태완의 행보는 전두환의 쿠데타에 맞서는 진압군의 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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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주역들이 1979년 12·12 쿠데타 직후 서울 보안사령부 앞마당에서 기념촬영했다.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노태우 9사단장,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연합뉴스
장태완은 정승화 참모총장 인맥의 대표다. 그래서 전두환은 12월 12일 저녁 그를 술자리에 묶어두려 했다. 김재규 인맥의 대표인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그러나 장태완은 정승화 연행 후 불과 10분 만에 술자리에서 튀어 나왔다.
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총장이 연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부인이 당번병을 시켜 윤성민 참모차장 등 육군본부 지휘부 관계자들에에 전화를 돌려 “괴한이 총장을 납치했다”고 신고했다. 이 소식은 즉시 김진기 육본 헌병감에서 보고됐다. 김진기는 장태완과 같은 술자리에 있었다.
장태완은 김진기의 보고를 듣자마자 ‘전두환의 쿠데타’를 직감했다. 이미 그런 움직임에 대한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촌 요정에서 필동(수경사령부 소재지. 현재의 남산 한옥마을)으로 달려가면서 부대에 비상을 걸었다.
수경사령관 직속 부대 지휘관 가운데 핵심은 3명의 단장(대령)이다. 청와대 주변을 경비하는 30경비단장 장세동(육사 16기), 외곽을 경비하는 33경비단장 김진영(육사 17기), 헌병단장 조홍(육사 13기)이다. 3명의 단장은 모두 비상소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두환의 부름에 따라 경복궁 30경비단에 가 있었다.
장태완은 전투가능한 실병력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육군 최고지휘부는 모두 정승화 쪽 사람들이었다. 참모총장이 없는 상황에서 최종명령권(군령권)을 대신할 수 있는 육군참모차장 윤성민, 수도권 부대를 모두 거느린 3군사령관 이건영, 그리고 공수부대를 관장하는 특전사령관 정병주에게 전화를 돌렸다.
장태완은 밤 8시40분쯤 윤성민과 통화하면서 쿠데타 지휘부가 30경비단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30단에 전화했다. 평소 선배라 부르며 가깝게 지냈던 유학성 군수차관보와 황영시 1군단장이 “이쪽으로 오라”며 포섭하려고 했다.
괄괄한 성격의 장태완은 “더러운 놈들, 전차로 대가리를 깔아 뭉개 버리겠다”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불러도 오지 않는 장태완의 진압군
1996년 문민정부 시절 12·12 및 5·18 관련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만난 당시 군 수뇌부. 왼쪽부터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노재현 국방장관, 이건영 3군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중앙포토
장태완은 밤 9시30분쯤 윤성민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쿠데타 진압을 위한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수경사가 비상 시 지원받을 수 있게 설계돼 있는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그리고 빠른 출동이 가능한 9공수여단(경기도 부천 소재)을 보내달라고 했다. 9공수여단장 윤흥기는 비육사(갑종) 출신이라 그와 가까웠다.
수도권 4개 공수여단 가운데 1공수여단장 박희도(육사 12기), 3공수여단장 최세창(육사 13기), 5공수여단장 장기오(육사 12기)는 모두 전두환의 측근들이었다. 이들 3명 역시 전두환의 부름에 따라 30경비단에 모여 있었다.
윤성민과 이건영은 장태완을 격려해 주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장태완에게 전화해 “9공수 보내겠다”고 확인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밤 9시30분쯤 전투병력 대신 육본 벙커에 있던 윤성민 참모차장 등 육군 지휘부 장성 10여 명이 수경사로 몰려왔다. ‘(전두환 쪽) 1공수가 육본을 접수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피난 온 것이었다. 지휘부만 있는 육본보다 자체 병력을 갖춘 수경사가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장태완은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연락해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지원을 독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두환 일당을 소탕해 달라”던 이건영의 말이 달라졌다. “장관(노재현 국방장관)의 허가를 받아 출동시키겠다”며 한발짝 물러섰다.
장태완은 가능한 모든 시도를 다하고자 했다.
첫째, 정승화 참모총장이 잡혀 있는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을 습격해 총장을 구출하는 방안. 참모총장 수석부관이 총장 구출을 위한 탱크부대 지원을 요청했다. 동원 가능한 탱크가 1대밖에 없었다. 그나마 앞세우고 출동하려 준비하던 중 노재현 국방장관이 미8군 벙커에서 전화를 걸어 왔다. “절대로 병력 동원 말라. 전두환과 원만하게 타협될 거 같다”는 명령이었다. 출동을 포기했다.
둘째, 총리공관에서 최규하 대통령을 데려오는 방안이다. 대통령은 군통수권자다.
김진기 헌병감이 “헌병 1개 소대를 주면 대통령을 모셔오겠다”고 했다. 헌병을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준비 도중 김진기가 포기했다. 총리공관 상황을 파악해 보니, 청와대 경호실 병력이 그동안 공관을 경비하던 헌병대를 밀어내고 공관을 장악하면서 경계를 강화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셋째, 수경사 무력을 총동원해 보안사령부를 공격하는 최후 방안.
장태완은 밤 12시쯤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최후 방안을 보고했다. 더 이상 오지 않는 지원군을 기다릴 수 없으니 수경사에 남아 있는 병력으로 보안사를 공격하겠다는 의지였다. 윤성민이 ‘기다려 달라’며 이건영 3군 사령관에게 지원부대를 문의했다. 이건영은 “남침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출동 불가”라며 분명하게 거절했다. 윤성민도 장태완을 말렸다.
장태완은 혼자 가기로 했다. 새벽 1시30분 출동을 위해 퇴계로 쪽으로 배치된 병력에 대한 마지막 전투점검에 나섰다. 비전투 병력까지 모두 모았지만 60명에 불과했다. 포 사격으로 공격을 시작해야 하는데, 야포단장은 ‘민간인 피해’를 이유로 ‘사격 불가’를 통보해 왔다. 이미 1공수가 용산에 도착했다는 보고까지 들어왔다. 비서실장 등 측근 참모들까지 ‘속수무책’이라며 말렸다.
새벽 3시 노재현 국방장관이 장태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밤새 행적이 묘연했던 노재현은 목소리를 높여 장태완을 꾸짖었다.
말로 해, 말로. 당장 병력 철수.
새벽 3시30분 장태완의 직속부하인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헌병을 이끌고 사령관 집무실로 뛰어들어 장태완과 윤성민 등 육본 수뇌부 장군 10여 명을 모두 체포했다. 장태완은 8시간 동안 ‘진압’을 외쳤지만 실제 ‘공격’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전두환의 병력은 실제로 움직였다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보고를 받고 있다. 왼쪽 뒤가 최규하 국무총리. 최규하는 정통 외무관료 출신으로 과도기 대통령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중앙포토.
12일 초저녁까지만 해도 장태완의 진압이 성공할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휘부의 의지가 흐려지고 병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자정을 지나면서 육군 지휘부가 모두 장태완을 말리는 모양새가 됐다.
반면에 전두환 쪽은 처음엔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 11시쯤 무력을 동원하는 반격에 나섰다. 전두환 쪽 움직임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장태완 쪽과 명확히 대비된다.
전두환은 오후 6시30분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얻기 위해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다. 전두환의 보고를 들은 최규하는 “장관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전두환이 “모른다”고 하자 “장관을 찾아오라”며 서명하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이미 잠적해 연락두절된 상황이었다.
‘장관 부재 상황’이라고 설명해도 최규하는 버텼다. 최규하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며, 그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서명)해야 한다’는 헌법상 원칙을 고수했다.
전두환 입장에선 예상 밖이었다. 은밀히 처리해야 할 군부 내 사건의 경우, 보안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해 처리해 온 것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관행이었다. 전두환은 뭔가 차질을 직감하고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 총리공관 장악. 그때까지 총리공관 경비는 정승화 측근인 육본 김진기 헌병감이 지휘하는 헌병부대가 맡고 있었다. 오후 8시20분쯤 청와대 작전과장 고명승(육사 15기) 대령이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공관을 장악했다.
둘째, 30경비단에 대기 중이던 장군들과 단체로 총리공관을 찾아 대통령의 재가를 촉구하는 위력 시위. 전두환은 유학성 등 5명의 장군과 함께 밤 9시30분쯤 총리공관으로 올라갔다. 물론 이들은 비무장이었다.
하지만 단체로 몰려와 재가를 요청하는 모습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최규하는 다음 날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의 통화에서 “어젯밤 죽을 뻔했시유”라고 말했다(김종필 회고록). 최규하는 “장관 찾아오라”며 끝까지 버텼다.
그러던 중 저녁 10시쯤 노재현 장관과 전화 연결이 됐다. 노재현은 용산에 있는 미군 벙커에 숨어 있었다. 노재현은 “빨리 오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알았다”고 했다. 전두환과 장군들이 물러났다. 그러나 노재현은 오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의 재가는 얻지 못했다. 그 사이 장태완 장군이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보안사령부에 포착됐다. 밤 11시 전두환은 반격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자신들의 행위를 ‘10·26 진상 규명을 위한 정상 업무수행’이라 주장했다. 오히려 장태완의 병력동원을 ‘반란’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보안사령관 입장에서 ‘진압’한 것 역시 ‘정상 업무수행’이란 논리다.
전두환의 반격에 따라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핵심들이 일제히 병력을 동원했다. 공수부대가 먼저 움직였다.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가 13일 새벽 0시5분 김포공항 인근 부대를 떠나 0시40분 행주대교를 건넜다. 1시30분쯤 용산에 도착해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접수했다.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는 13일 새벽 2시 남한산성을 출발해 3시쯤 중앙청을 장악했다.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도 13일 새벽 2시 인천을 출발해 육본에 도착, 이미 1공수가 장악했음을 확인하고 인근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했다.
공수부대가 1진이라면 2진은 서울 서부지역 담당인 1군단(군단장 황영시) 예하 전투부대였다. 9사단과 30사단, 그리고 2기갑 소속 병력이 새벽 3시를 전후해 서울시내로 진입했다.
전두환의 승리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장태완은 혼자였다. 육본 지휘부는 실제 상황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하나회’라는조직을 움직였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군부의 실상이다.
🔎 등장인물
◆고명승=1935년 전북 부안 출신. 육사 15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경호실 작전담당관으로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이 거주하던 총리 공관 장악. 3군사령관 대장 전역.
◆김진기=1932년 평북 후창(무창) 출신. 육사 9기. 육군본부 헌병감(준장). 정승화 참모총장 시절 헌병감으로 김재규 체포에 공헌. 12·12 당시엔 신군부에 끝까지 반대해 1980년 예편. 김영삼 정부에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역임. 2006년 사망.
◆김진영=1938년 경남 통영 출신. 육사 17기 대표화랑으로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청와대 외곽 경비 담당인 33경비단 단장. 노태우 대통령 시절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로 강제 퇴임.
◆박희도==1934년 경남 창녕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제1공수여단장으로 병력 출동해 국방부와 육본 점령. 육군 참모총장. 보수우익 활동가.
◆신윤희=1941년 서울 출신. 육사 21기. 12·12 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으로 장태완 수경사령관 체포. 육본 헌병감. 소장 예편.
◆윤성민=1926년 전남 무안 출신. 육사 9기. 12·12 당시 육군참모차장으로 정승화 총장을 대신해 군령권 행사. 사건 직후 대장 진급. 5공 최장수 국방장관 역임. 2017년 사망.
◆윤흥기=1933년 평북 초산 출신. 비육사(갑종). 12·12 당시 9공수여단장으로 쿠데타 세력에 맞서 출동했다가 육군 수뇌부의 만류로 회군. 소장 예편. 1993년 전두환 등을 군사반란으로 고소. 2013년 사망.
◆이건영=1926년 강원도 영월 출신. 육사 7기. 12·12 당시 3군 사령관으로 쿠데타 세력에 반대했다가 중장으로 강제 예편. 5공에서 한국마사회장 취임해 9년간 재임. 1992년 통일국민당 전국구(비례) 국회의원. 2023년 사망.
◆장기오=1932년 서울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5공수여단장으로 병력 동원. 중장 전역. 총무처 장관. 김영삼 정권에서 군사반란 재판이 시작되자 미국행.
◆장세동=1936년 전남 고흥 출신. 육사 16기 하나회. 전두환의 최측근. 12·12 당시 30경비단장으로 쿠데타 세력 지휘부에 장소 제공.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 역임.
◆장태완=1931년 경북 칠곡 출신. 1950년 갑종 소위로 임관. 10·26 직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발탁. 12·12 당시 쿠데타 세력과 대립.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2010년 사망.
◆조홍=1933년 경남 함안 출신. 육사 13기. 12·12 당시 수경사 헌병단장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 육본 헌병감 준장 예편. 손해보험협회 회장. 12 12 재판이 시작되자 미국행. 2018년 캐나다에서 사망.
◆최세창=1934년 대구 출신. 육사 13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3공수여단장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 직속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중앙청으로 병력 출동. 합참의장 대장 예편. 국방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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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하루 전 “다 모여라” 전두환 가족 만찬서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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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총소리에 뒷담 넘었다…쿠데타에 3번 숨은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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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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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