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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11. 회복하리라 12.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13. 그제서야 깨달음
마 17: 11. 회복하리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엘리야가 먼저 왔다는 것은 사람의 환생(還生)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시대의 상황을 거슬러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다.
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예수님도 구약의 예언을 서기관들이 이해한 그대로 인정하셨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올 것이고 그에게 부여된 임무대로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윤회(輪廻)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어린 아기로 출생하거나 하늘로부터 강림할 수는 없다.
이 예언은 한 선지자가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타나 엘리야 당시와 같이 배교적인 그 시대 교회의 상황을 거슬려 외로이 그러나 능력 있고 충성되게 사역할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본다.
(1)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엘리야라는 이름 자체가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다. 고백은 중요하다. 고백은 나를 공개하는 것으로 열어 보이는 것이며 나를 밝히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때부터 나의 숨겨져 있던 마음을 공개하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 고백이 없으면 짝사랑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참 힘이 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맨정신으로 못하니까 술을 마시고 가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람도 있다.
고백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나의 진심을 상대방에게 전해주고 알려주는 가장 진솔한 전달 수단이다. 이 고백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도 이 세상 만천하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하고 자신 있게 공개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롬 10: 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2)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였다.
* 왕상 17: 1 -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는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 섬긴다고 고백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 멀어져가고 있을 때 유독 엘리야만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기리라고 외쳤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죽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엘리야에게 그 비범한 용기와 담대함을 베풀어주신 원천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엘리야는 마지막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하기 전에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에게 갑절의 능력을 주고 떠났다.
지금 제자들이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서기관들이 성경을 가르칠 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고 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묻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선지 엘리야'를 보낸다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그 말은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책망을 하며 회개를 외쳤던 그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자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오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세례 요한을 지칭한 말이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다. 마 11: 14에서 말씀하신 대로 '오리라 한 엘리야'는 곧 세례 요한이라 지칭하신 것이다.
마 17: 12.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그 선지자가 왔다. 그가 세례 요한이었다.
누가복음 1: 17에 증언한 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했던 천사는,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가 예언대로 왔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해 임의로 대우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대로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와 비슷하게, 메시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1]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1) 그 선지자가 왔다.
예언대로 오실 자가 왔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임의로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대우하였다.
대중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알아보는 분별력, 공경심, 순종심이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으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예수의 삶을 예표 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두 가지 면을 제시, 비교하셨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눅 1: 17)으로서 왔던 세례 요한을 영적으로 무지했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오직 소수만이 그의 선구자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를 메시아의 선구자로 인정치 않고 오히려 배척, 박해하고 끝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세례 요한이 맡은 소임(所任)을 성실히 완수하였기 때문이다.
(2)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본문에서 '임의로'(*, 호사 에델레산)란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whatever they wished)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등을 거스릴 때 사용되는 말로서, 결국 임의로 행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임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설명하기를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고 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한 주님의 선구자로써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던 광야의 선구자다.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촉구했는데 정의로운 삶과 인간관계를 주장했다. 남의 것을 늑탈한 것은 모두 갚으라는 등의 합당한 메시지로 힘있게 외쳤다.
눅 1: 17에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말씀하신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
그는 헤롯 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가로챈 일을 직언 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극찬했다. 눅 7: 28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또 그를 사 40: 3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 위치를 잘 알았던 사람이다.
마 3: 11에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또 요 1: 27에서는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얼마나 겸손한가? 또 세례 요한은 요 3: 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이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고 우리는 그 하나님 영광의 그늘에 숨겨져야 한다.
12절에 엘리야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고난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최후의 순교를 당함으로 요한의 생애 속에서 그들은 엘리야에 관한 예언 성취를 발견하지 못했다.
2]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이와 비슷하게, 앞선 자가 입증했던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는 대중의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이었다. 예수는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왔으나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척하며 끝내는 죽음에 내어줄 것이었다.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 요 1: 9-11 –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다시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셨다.
백성들을 세례 요한에게 행했듯이 예수님이 대망의 메시아인줄 몰라보고 박해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마 17: 13. 그제서야 깨달음 -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
늦게나마 제자들이 깨달았다. 그렇다. 늦게라도 깨닫는 것이 복이요, 은혜다.
많이 안다는 것과 깨달음과는 다르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이해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알고, 느끼고, 결단하는 종합적인 지혜를 말한다.
지식을 과거 지향적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미래 지향적이다.
1]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깨달음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매를 맞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사람이 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건강의 귀중함을 깨닫기 참으로 어렵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깨달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를 바로 깨닫는 성도가 됩시다.
* 시 49: 20 -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성도 여러분, 깨달음이 복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마땅히 주어질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단잠을, 건강을, 식욕을 복인 줄 모르고 산다. 그것을 모르면 잃고 난 후에 알게 된다. 단잠을, 식욕을, 건강을 잠시 중단 당해 보아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복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본문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늦게라도 깨달았다면 이것도 은혜이다.
누가복음 1: 15-17에 증언대로, 그의 출생을 예언한 천사는 말하기를,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울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고 하였다.
예언대로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여 임의로 대우하였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바르게 알아보고 그를 존중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 필요했으나, 대중들의 마음에는 그런 분별력, 그런 공경심, 그런 순종이 없었다.
아니 많은 사람이 그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대중의 지도자들은 영적 소경들이었다.
열린 눈, 열린 귀가 없는 무지한 대중들은 그를 핍박하는 그 핍박에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 눈, 열린 귀를 가진 자들은,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를 공경하고 그를 따를 것이다. 동일한 주의 종에 대하여 그리고 동일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그 두 부류는 나누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쪽에 속해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자.
2] 진리의 보수
산상 변화가 있은 이튿날, 예수와 세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셨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 이에 대하여 제자들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절)라고 했다.
산상에서 본 것, 즉 예수의 변형과 엘리야의 등장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며, 왜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
(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① 진리는 아무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진리는 아무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비의(比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피차를 해치게 된다.
* 마 7: 6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인간이 하지만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는 결코 진리를 이해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 요 16: 13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들을 귀가 있는 자,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것은 진리가 그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②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자라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서 가운데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마 8: 1-4), 두 소경을 고치신 후에 (마 9: 27-31), 귀머거리를 고치신 후에(막 7: 36), 각색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에(막 1: 32-3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막 5: 35-43)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그것은 병 고침을 받는다는 데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 문둥이가 다 고침을 받았으되 예수께 나아와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 눅 17: 11-19 –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라'(마 16: 16)고 그의 신앙을 고백 했을 때에도, 아무에게도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주님을 말씀하셨고(마 16: 20), 본문에 나타나 있는 산상 변화 후에도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의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계시 되었다.
(2)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① 진리에 대하여 무지한 세상
산상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질문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절) 이 대화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제자들은 산상에서 본대로 예수께서 메시야라고 한다면 어째서 서기관들이 말하는 엘리야가 메시야에 앞서서 선지자로 나타나지 않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접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기다리고 있는 엘리야는 이미 세례 요한으로 와서 엘리야의 사역, 즉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였다.
세례 요한이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불의를 비난한 것은 엘리야가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린 백성들을 책망하고 아합 왕과 이세벨의 불의를 비난한 것과 같다.
* 왕상 18: 20-21 –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나 세상은 다시 온 엘리야(세례 요한)도, 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세례 요한과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12절)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진리를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다시 오실 재림 주를 맞이하려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 마 25: 1-13 –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② 진리는 지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영성(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랍비들로서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유다의 귀족적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엘리야와 메시야의 도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해박한 성경 지식이 그것을 아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진리를 아는 것은 지식으로가 아니라 영성에 의해서이며, 진리는 아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믿음에 있고 지식에 있지 아니하며, 구원 또한 믿음에 있고 아는 것에 있지 아니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즉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다.
* 요 1: 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둘째, 주의 증거를 믿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음성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증언하셨다.
그것은 주의 제자들을 위해 또한 후 시대에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증거였다.
우리는 이 증거들을 믿어야 한다.
셋째, 주의 고난을 본받자.
영광의 주께서는 연약하고 낮고 비천한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고난을 겪으셨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는 낮아지시고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주님을 믿고 또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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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설교 자료 감사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였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였다.
설교 감사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