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를 좋아하는 아내의 요청으로 만두를 만들게 된다. 헉생때 화교의 만두가게에서 일을했던 경험으로 만두기술자가 되었다. 직장다니며 한창 청년부 활동을 열심히하던 시절에도 내가 청년들에게 자주 만두를 빚어줬다는 말을 30여년이 지난후 오랫만에 만난 친구를 통해 되새겼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도 만두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무척 좋아해서 젊을 때는 자주 직접 반죽을 해서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대접을 했었는데, 당뇨진단을 받은 후 부터는 가급적 밀가루 섭취를 줄이느라 자제를 하게 된다.
부부싸움의 승자는 누구인가를 묵상하게 된다.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다. 만일 부부중 한명이 자신을 승자라고 생각했다면 아직 거듭남을 경험치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중생을 경험했다면 부부싸움에는 절대로 승자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누가 승자일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2:2에서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본 절에 대한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내용은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나를 기쁘게 해줄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공동번역)의 뜻이다.) ” (고후 2:2, 만나주석)
부부싸움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바울의 근심에 대한 주석일 것이다. 선교를 위해 재정적인 궁핍을 겪는 바울에 대해 고린도교인들은 근심이 많았다고 하였다. 자신들이 마음껏 도와주지 못함에 대한 근심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바울은 자신의 문제로 당신들은 절대로 근심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 이유는 근심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심은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교인들이 제아무리 선한 목적에 대한 주제로 근심을 한다해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한다. 부부싸움은 절대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부부의 사이를 가라놓고 불화를 조장하기 원하는 마귀가 틈을 노리다가 절호의 챤스가 올때 치고 들어올 뿐이다. 평소에 영적인 대비가 충분한 신자는 영을 분별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에 영적인 능력이 미약한 자는 자신의 생각과 성령의 인도를 혼동하게 된다.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화는 절대로 성령의 인도가 아니다. 마귀가 심어주는 공격일 뿐이다. 영성이 강한자는 상대가 자신을 향한 공격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잘안다. 결코 맞서지 않는다. 그러나 영성이 미약한 자는 인간적인 판단을 기준으로 하다보니 불의하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하여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게되고 본의아니게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된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숨을 쉬듯 주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된다면 마귀는 결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