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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여기 오신 것이 다행입니다
이 수 영
혈압계가 부르르 떠는 소리가 들리더니 계기판에는 아무 결과도 남기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한 번, 두 번…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듯 주치의를 쳐다봤다. 의사 앞에 있는 심장 초음파 검사기 모니터에는 아직은 내 심장이 살아서 펄떡 펄떡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고 거의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분 지금 즉시 중환자실로 옮기세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의 차가운 음성이 내 귀를 때렸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그는 그 낌새를 알았는지 몇 마디를 보탰다.
“심방세동(心房細動)입니다. 심장의 기능이 정상인의 20% 정도이고 많이 부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살아서 여기 오신 것이 다행입니다.”
날카롭게 몇 마디 던지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Y대학 병원 순환기 내과 전문의 이ㅇㅇ 교수의 말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입원하는 것이 처음인데 내 발로 걸어 들어와서 첫 진단이 중환자실이라니,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이가 없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지는 그런 아득함이라 할까? 순간 어지럼증과 함께 온몸에 식은땀이 베어나고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중환자실에는 십 여 명의 환자들이 처음 들어오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이리저리 쳐다보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왼쪽 팔에는 몇 개의 링거가 달리고 가슴에는 무슨 기기와 연결된 줄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리고 산소흡입용 줄을 코에 걸었다. 중환자실은 보호자가 24시간 함께 있어야 하고 대소변도 제자리에서 받아내야 한단다.
눈을 감았다. 순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의 유령 모습이 생각났다. 죽어서까지 살았을 때의 모든 것을 주렁주렁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악연의 사슬들이…….
이튿날부터 무슨 검사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피는 매일 몇 차례씩 뽑아갔다. 심전도 검사도 거의 매일이고 심장 내시경 검사, 폐 기능 검사, 방사선 PET-MR 검사, 심폐기능 건강 검사와 걷기 테스트 그리고 심장 시술 등, 계속되는 검사와 치료에 대한 정서적 불안과 운동 부족이 겹쳐졌다.
‘심방세동’, 낯선 병명인데 설명을 듣고 증세를 알고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조심하라는 신호가 많이 왔던 것 같다. 등산할 때마다 조금씩 늘어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세라든지 가끔은 심해지는 어지럼증 같은 것은 애써 무시했다. 험한 산을 오르면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의 증세라고만 생각했다. 그 무렵 나는 전국의 유명산들을 휘젓고 다녔다. 그것도 해발 몇 미터의 산 정상을 찍고, 몇 킬로미터의 산길을 몇 시간에 주파했다는 등 경쟁하듯이 걸었다. 그리고는 나이에 맞지 않게 하산주를 들이켜며 건강을 과시했다. 아마 병이라도 난다면 위장이나 간장 쪽일 거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참 무식해서 용감한 처사였다.
중환자실 생활 며칠이 지나자, 온갖 잡념과 운동부족으로 몸이 찌뿌둥하고 식욕이 떨어졌다. 집에서 보던 책 몇 권을 가져 오라고 했다. 그리고 새벽이든 낮이든 틈만 나면 침대 주변에서 제자리 걷기를 하거나 병실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만보는 몰라도 몇 천보씩은 작심을 하고 걸었다.
걱정과 잡념을 걷어내는 데는 독서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또는 혼자 생각하며 느낀 것을 몇 줄씩이라도 쓰기 시작했다. 비록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즐겁게 생각하자”, “읽고 쓰자”, “많이 움직이자”를 생활 목표로 삼고 그대로 실천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식욕이 돌아왔다. 옆 사람들이 얼굴도 밝아졌다고 했다. 입원한지 열흘째 되던 날 중환지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
일반 병실은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검사의 횟수도 줄어들고 만나는 사람들이 훨씬 건강한 사람들이었다. 대화도 긍정적이었고, 삶에 대한 의지도 넘쳐 났다. 처음에는 2인실에 있었으나 이틀 후 다시 8인실로 옮겨졌다. 나는 8인실이 좋았다. 환자들이 자주 드나들기는 했지만 그들과의 대화 속에 묻어나는 삶의 의지와 세상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아주 짧은 여행길이고 저기 저 나지막한 앞산 하나를 오르내리는 것’ 과 같다는 옆 노인의 독백이 평범하지만 진리임을 깨닫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그런 호기를 부리며 무리해서 산을 오르내리고 물마시듯 하산주를 들이켰는지…….
입원 18일 째, 오늘은 퇴원하는 날이다. 퇴원 길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데 이상하다. 병원 현관 앞에서 햇빛을 보니 병원 건물이 한 바퀴 빙 도는 것 같다. 병 때문인가, 아니면 18일 동안 이처럼 약해졌다는 말인가. 집에 왔다. 여기가 진짜 나의 안식처다.
다음 날 그동안 더부룩하게 자란 머리를 깎았다. 한결 기분이 새롭다. 16시경 아내와 함께 텃밭을 찾았다. 맙소사! 18일간의 공백이 이럴 줄이야! 밭이 온통 잡초로 뒤덮였다. 그래도 무는 손질하면 가을 김장용으로 쓸만한데, 씨를 뿌려두고 입원한 배추 상추 등은 전부 새로 심어야 할 것 같다. 무를 속아내고 그동안 익은 고추를 따고 가지와 호박을 몇 개씩 땄다. 이제는 이 텃밭의 식물들처럼 주인이 없어도 아프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심장이 고동친다. 가슴이 벌떡인다.
2018. 5. 23
첫댓글 평소 무리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을 잘 돌봐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중환자실에서의 긍정적인 성찰은 새롭게 건강을 되찾으신 계기가 되어 오늘날 처럼 건강한 모습을 뵐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골골 백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 잔병치레를 자주하며 골골거리는 사람은 자주 병원을 찾기도 하고 조심도 하기 때문에 오래 산다는 말인가 봅니다. 반면 건강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과한 운동과 병원을 자주 찾지 않는 이유인지 한 번 아프면 크게 아프다는군요. 그 말이 맞나 봅니다. 정말 선생님 말씀처럼 살아서 여기 오신 것이 다행입니다,' 다시 찾으신 건강 잘 지키셔서 좋은 글 많이 쓰시길 기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산행을 함께하면서 선생님의 건강하신 모습이 부럽기 까지 했는데 그런 어려운 사연도 있었군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건강이란 생각이 듭니다.지금처럼 건강하신 모습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기야 한다고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어 나중에 아쉬움으로 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중환자실 경험은 오히려 선생님께서 삶의 애착심을 자각해 준 좋은 경험이라 여기시고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삶의 큰 고비를 담담하게 써놓으신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제 가슴이 벌벌 떨렸습니다 부모님 편찮으실 때 중환자 실에 자주 들락거렸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 누구나 그런 순간이 올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경험하셨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더 건강하실 것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건강때문에 한번의 고비가 찾아오나 봅니다. 평소 건강하신 선생님도 그런 경험을 하셨군요. 다시 몸을 추스려 더욱더 멋진 글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더욱 건강하시기 바랍니다.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드립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산행하며 가볍게 들은듯 합니다. 무리한 등산등 운동은 병으로 연결됩을 알았습니다. 이제 쉬엄쉬엄 산행하며 건강을 지켜야되겠습니다. 무시히 퇴원하시어 건강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대단합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시려는 노력이 교장선생님의 건강의 원천인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건강하신 줄 알았는데 그런 위험한 사태에 이른 경험을 지니고 계시군요. 건강을 자신하는 사람이 더 빨리 간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다행이군요 그것이 앞으로 삶에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중환자실의 경험 그리고 퇴원의 감사함. 읽는이들에게 하나의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신이 병을 키워서 가는 곳이 병원이라고 하던군요.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건강백세 하시리라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댓글을 틀림없이 썼다고 생각되는데 두개가 나와 지운게 다 지워졌나 봅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사라진줄 알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코에 입에 주렁주렁 다는 줄은 생명 연장용인 줄만 알았는데 선생님께선 그 줄을 달고도 이렇게 살아서 문우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평소에 몸에 배인 운동습성이 더 빨리 회복 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에 경종은 삶의 촉매제 이기도 합니다.앞으로 건강 챙겨셔서 백세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