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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선열 여덟 분의 사적지를 돌아보다
-겨레시인 성재경의 시집 8권을 들고-
2016년 4월 안중근의사 아카데미 10기 교육을 함께 수료한 성재경 겨레시인이 애국선열 8분의 애국시집 8권을 발간하였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백야 김좌진 장군, 별이 된 윤동주 시인에 대한 애국시집이다.
나는 8권의 애국시집을 감명 깊게 읽고 여덟 분의 사적지를 시집을 들고 답사하였다.
2023년 12월 9일 재경 춘천 교동초등학교 동문들 8명이 만나 점심식사를 하면서 정담을 나눈 후, 용산구 효창동에 소재한 효창공원으로 가서 제일 먼저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사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하여 김구 선생이 마련한 가묘를 살펴보았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이듬해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다.
일본 관헌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소요가 두려워 안의사의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뤼순 감옥 뒷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나는 2016년 4월 20일 안중근 의사 아카데미 10기생 일행과 함께 안중근 의사께서 재판을 받으신 법정과 수감되셨던 감옥을 돌아본 다음, 안의사께서 묻히셨다는 뤼순 감옥 뒷산 공동묘지를 살펴보았으나 안의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답사 일행은 하루속히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당신께서 그렇게 염원하신 국권을 회복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실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다 함께 기도를 드렸다.
나는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 가묘 앞에서 겨레시인 성재경 시집 제1권 ‘독립 삼남매 안중근’시 82수중에서 ‘독립 삼남매-숨겨둔 총탄’을 낭송하였다.
그날 하얼빈 역 운명의 풀랫폼에서/ 조슈 하급 무사 출신 이토/ 한국 침략과 아시아 평화 파괴의 원흉/ 백발 노귀 오른쪽 팔꿈치 위쪽을 겨냥해/ 폐와 복부를 명중한 3발의 총탄과/ 러시아인들을 피해 일본인만 저격한/ 4발 심판의 불꽃 탄환 말고도/ 1900년 식 약실에/ 그는 또 한 발의 탄환을 숨겨 놓았다./두꺼운 콩깎지 속에서 그의 손을 떠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칠형제 검은 콩알들은/ 간웅을 내리고 영웅을 새롭게 올렸지만/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막둥이 콩알 하나/ 광복 전사들의 품속을 꿈꾸고 있었다./ 탄두에 십자가 새긴 채 쏘지 않은 총탄은/ 두 손 높이 외친 코레아 우라 함성을 타고/ 한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다가/ 독립을 위해 죽어간 별똥별 삼남매/ 관순 누이에겐 아우내장터 태극기 되고/봉길 아우에겐 홍커우공원 물통폭탄 되어/ 뜨거운 노랫말로 돌아올 것이다./단 한발로 적을 죽일 수 있는 그가/ 반자동 7연발 권총 약실 마지막 공간까지/ 8발의 실탄을 꼭꼭 채운 것은 /대한 조국의 폭발할 듯 타오르는 분노/ 그가 쏜 것은 총알이 아닌 검은 핏방울/ 그가 맞힌 것은 사람이 아닌 침략 귀신/ 유관순 태극기는 수천 개 영혼 탄환으로/ 윤봉길 물통폭탄은 수만 개 혼 불 파편으로/ 조국 독립군이 부르는 군가가 되고/ 광복이 되어도 남과 북 분단된 조국에/ 통일로 가는 행진곡으로 들려올 것이어서/ 숨겨둔 총탄은 그의 자살 탄이 아니라/ 언제든 준비된 조국의 수호 탄이 될 것이다.
효창공원 바로 옆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가 잠들어 계신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의사는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국애국단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윤봉길의사는 조국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나서는데, 어찌 살아 돌아오리오.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1932년 4월 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 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성공시켰다. 윤봉길 의사는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2년 12월 19일 카나자와 육군 구금소 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셨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는 8.15광복 후 귀국하여 무엇보다 먼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적국 일본 땅에서 독립된 조국의 품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나란히 안장하여 편히 쉬게 하였다.
나는 2003년 3월 12일 친구 K와 함께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상하이 홍커우 공원을 둘러보고 의거현장에서 머리 숙여 윤봉길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효창공원 윤봉길 의사 묘 앞에서 겨레시인 성재경의 애국시집 제2권 ‘매헌 윤봉길’에 실린 102시중에서 ‘시계를 바꾸다’를 낭송하였다.
선생님이 어제 오늘 하제/ 그런 시간들을 묶어 놓고 싶어서/ 6원 주고 새 회중시계 샀습니다만/ 이 시계는 몇 시간 뒤에는 쓸모없으니/ 2원 짜리 낡은 시계와 바꾸어 주십시오./ 홍커우 공원 누대에 올라 축배를 들던 / 침략의 선봉들이 폭탄에 쓰러지면/ 선생님의 낡은 시계는 멈추고/ 저의 새 시계는 상해 임시 정부 품에서/ 살아있는 맥박처럼 힘 있게 뛸 것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은 나를 죽일 테지만/ 비로소 뜨거운 독립항쟁이 시작되어/ 피 흘리는 전선 위대한 의거마다/ 저의 붉은 영혼 함께 싸우게 하십시오/ 오천년의 시간 중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 너무 길어져 포기하지 않도록/ 대한나라 사람들 깃발아래 뭉치고/ 강한 이웃 나라들을 끝없이 일깨워/ 머지않아 기다리던 광복이 오는 날/ 어디선가 저의 굳어버린 시체를 찾거들랑/ 차가운 손목에 그 시계 조여 채워서/ 따사로운 햇살의 온몸에 퍼지게 하십시오./ 제 영혼의 시계도 멈추지 않고/ 천만년 조국의 시간과 함께 가오리다.
효창공원 백범 기념관 옆 언덕에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잠들어 계신다.
김구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시어 청년기인 18세 때 동학에 입문해 농민전쟁에 나섰다. 1896년 3월 김구는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에게 원수를 갚기 위하여 쓰시다 조스케 일본 군인 장교를 살해하였다. 인천 감리소에 투옥되어 2년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을 감행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다. 1910년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1915년 가석방된다. 1918년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였다가 이듬해 기미독립선언 직 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한다. 1923년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가 1926년에는 의정원장 이동녕의 추천으로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 임시정부 주석인 이동녕이 서거함에 따라 주석에 선출되어 1945년 8.15광복 때까지 대한정부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8.15 해방 후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여 서대문 경교장에 머물면서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 독립을 추구하다가 1949년 6월 26일 포병장교 안두희 총탄에 향년 72세로 서거하셨다.
나는 2003년 3월 10일 친구와 함께 상하이를 여행하면서 김구 주석께서 집무하시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여 주석께서 업무를 보시던 방을 관람하고 약간의 성금을 기탁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에 큰손자와 함께 서대문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 선생께서 집무하시던 방을 둘러보고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실 때 입고 계셨던 피 묻은 옷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겨레시인 성재경의 다섯 번째 애국 시집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백범 김구’시 101수중에서 ‘그 공원의 별빛-김구가 윤봉길에게’를 백범 김구 묘소 앞에서 낭송하였다.
덕산에 부모처자가 남기고 달려온 젊은이여/ 한인 애국단 뜨거운 선서는 순국의 다짐/ 나의시계를 바꿔 차고 공원으로 떠날 때/ 나는 차마 그 길을 따라나서지 못했다오. / 안공근 선생의 기념촬영 후레쉬 섬광은/ 우리의 마지막 살아있는 모습을 거둬가고/ 홍커우공원 누대로 쏟아지던 별빛 폭탄은 천장 절 침략의 잔치를 송두리째 분질렀다오./ 짐짝처럼 우편선에 실려 현해탄을 건너고/ 노다산 공병작업장 미간을 파고든 총알과/ 쓰레기통 통로에 버려진 쓸쓸한 주검은/ 장부출가생불환 시구절의 마침표였다오./ 한사람 홀로 전투는 백만대군을 앞질렀고/ 고독한 일인 혁명은 조국광복을 앞당겨/ 그대가 그렇게 열망하던 광복이 왔건만/ 그대는 떠나고 나만 눈물 속에 남았다오./ 내 가슴엔 어머니 아내 아들보다도/ 공원으로 떠나보낸 그대가 깊이 자리하여/ 조국에 돌아와 먼저 일본에서 모셔왔고/ 효창공원 그대 곁에 나도 묻힐 거라오/ 우리는 쉽게 만나 너무 쉽게 헤어져/ 이제 영원히 하늘에서 만날 날 있지만/ 그대의 소원 독립이 아직 절반이 남고/ 나의 또 다른 소원 통일도 남아 있다오.
2023년 12월 9일 오후 늦게 효창공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잠들어 계신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으로 전철을 타고 갔다.
독립운동가인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선생은 평안북도 강서군 출신으로 1913년 흥사단을 설립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청장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였으나, 동우회 사건으로 재 투옥되고 1938년 3월 10일 병으로 보석되어 고문 후유증으로 6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나는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묘소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겨레시인 성재경의 여섯 번째 애국시집 ‘도산 안창호’시 101시 중에서 ‘안창호가 윤봉길에게’시를 낭송하였다.
영웅이여 동지여 제자여/ 조국을 위해 불꽃이 되었는가./ 그대는 또한 내 영혼의 아들/ 그 푸른 주검을 가슴에 묻는다./ 홍구 공원 새롭게 만든 누대에 일왕 생일 천장 절 겸 전승기념일/ 한껏 뽐내며 환호하는 대장들에게/ 삼엄한 경호를 뚫고 날아든 물통폭탄/ 죽은 사람 불구된 사람 공포의 시간에/ 가슴 속 태극기 꺼내어 흔들던 청년/ 광복을 앞당긴 대한의 투사여/ 백만 중국군도 엄두 못 낸 1인 전쟁/ 일본으로 끌려가 오사카 감옥을 거쳐/ 가나자와 공터 총살형으로 떠날 적에/ 빼앗긴 나라가 가슴 뚫고 들어왔는데/ 나는 그 일에 연루되어 잡혀가서/ 죽을 병 얻어 광복 못보고 떠나는 길/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그대 통쾌한 거사가 내 길을 밝히고/ 하늘 만남이 가슴을 뛰게 하는 길/동지여 제자여 독립의 아들아.
2023년 12월 12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한 후 전철을 타고 온양온천역으로 가서 대전에 살고 있는 죽마고우 김승철을 만났다. 지난주에 약속한 대로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 보령의 김좌진 장군 묘와 병천의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오늘 날씨는 잔뜩 흐렸지만 기온이 겨울답지 않게 높아 눈이 내리지 않고 비가 좀 올 것 같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한식당에서 정담을 나누면서 식사를 한 다음 이충무공의 현충사로 갔다.
나는 1971년 4월에 결혼을 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신혼여행을 해외로 갈 수 없었고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현충사에 들려 이충무공의 사적지를 돌아보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는데 집에 있는 앨범에 추억이 담겨있는 흑백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의 사당이면서 영정을 모신 현충사를 거쳐서 이충무공의 묘소가 있는 아산시 응봉면 삼거리로 갔다. 노송이 우거진 이충무공의 묘소에 올라가 임진왜란 때 남해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께 친구와 함께 깊이 머리 숙여 참배하였다.
나는 2022년 11월 2일 남해안 길을 걸으면서 이순신 장군께서 순국하신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에 들려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1598년(선조31)11월 19일에 이충무공께서 왜장 소서행장의 왜선 200척을 침몰시키다가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셨다. 장군께서는 숨을 거두시면서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나라를 구하시는데 멸사봉공의 정신을 발휘하셨다.
나는 이충무공의 묘소 앞에서 겨레시인 성재경의 애국시집 천하제일 ‘충무공 이순신’시집에 실린 시 102수중에서 ‘난중일기를 읽다.’를 낭송하였다.
님께서 난중일기를 쓰시던 자리에서/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멈춤 없는 붓끝의 춤을 읽고 있는데/어이 내 가슴으로 눈물이 맺혀오는가/ 3년 8개월을 한산섬에 머무르며/ 칠 할의 일기를 남긴 기록을 더듬어/ 오직 나라와 백성만 생각하던 어버이/ 임금 위에 임금 장수 위에 장수/ 그 한려수도 물길 같은 가슴을 읽었다./옥포에서 만난 오랜 조국 침략의 원수/ 사천에서 처음 거북선을 앞장 세웠고/ 거제대교 아래 견내량에서 시작되어/ 세계해전 전법의 전설 학익진을 펼치며/ 통영 앞바다로 몰아넣고 승리한 한산대첩/ 이시라의 간첩계와 원균의 장계로/ 죄수 되어 서울로 압송 하옥 되었을 때/ 목에 칼을 차서 일기를 못 쓰셨을까/ 간신들이 지필묵 빼앗아서 적지 못했을까/ 칠천량 그 청천벼락 같은 유일한 패배로/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갈 절대위기에서/ 배설 장군이 가져 온 열두 척의 군선/하늘의 도움으로 승리한 명량의 기록/ 한명의 적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다시 칼을 뽑아 호령하던 남해 노량리/ 관음포로 몰아넣고 부수고 또 부수고/흉탄으로 흐르는 피를 손바닥에 가두며/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음성으로 쓴 일기/ 님의 마지막 일기를 가슴귀로 읽으며/ 한없이 바닷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를 돌아 본 다음,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소가 있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로 갔다. 장군의 묘소에 도착하니 묘소 주변을 보수작업중이어서 추운 날씨에 수고하고 계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언덕으로 올라가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1889-1930)장군과 부인 오숙근 여사의 유해를 합장한 묘소 앞에서 깊이 머리 숙여 참배하였다.
장군께서는 1889년 11월 24일 충남 홍성의 명문대가에서 출생하셨다. 15세 때 가노를 해방시킬 정도로 진취적 개방 사상을 가지신 분이었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으로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20년 10월 20일-23일 청산리(靑山里)80리 계곡에서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하여 승리를 거두는 청산리 대첩을 이룩하였다. 1925년에는 신민부를 창설하여 총사령관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 계몽사업을 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 부근에서 고려공산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슬하에는 아들 전 국회의원 김두한(1918-1972)과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 사업회 이사장인 손녀 김을동(1945-)을 두셨다.
나는 2015년 8월 둘째 손자와 함께 백두산 두만강을 여행하는 가운데 중국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연변 자치구의 성도 연길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김좌진 장군께서 청상산리 대첩을 이루었던 유적지를 바라보면서 장군의 명복을 빌었다.
장군의 묘소 앞에서 겨레시인 성재경의 일곱 번째 애국시집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시 101수중에서 ‘이순신이 김좌진에게’를 낭송하였다.
그대도 들었는가, 칼의 울음소리를/ 나의 후인 백야 김좌진 장군이여/ 외로워도 외로워해선 안 되는 우리에게/ 명량과 청산리는 외줄에 걸린 운명/ 나는 바다에 그대는 청산에 누었나니/ 바다도 내 나라 청산도 내 나라/ 가야하네, 가야만 한다네./ 바다든 청산이든 한 몸 한 정신/ 우리가 서 있으면 겨레도 멈춰서고/ 우리가 망설이면 민족이 뒤뚱거려/ 젊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도해 오르내리던 나의 투혼/ 청산리 골짜기 누비던 그대 투혼/ 목숨으로 나라를 지킬 때까지/ 죽어서라도 가야한다네./ 태워야 한다네, 숯덩이로 타올라/ 마지막 재 한 줌 남지 않아도/ 서럽지도 분하지도 않게 후회 없이/ 나와 그대가 태어난 나라/ 우리 아들딸들이 살아갈 나라/ 육신을 넘어 영혼까지 태워야하네.
김좌진 장군 묘소 참배를 끝내고 친구와 함께 서둘러서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로 가서 날이 어두워 질 무렵 유관순 열사 초혼묘에 도착하였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천안에서 태어나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하였다. 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 때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그 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0년 9월 28일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곳이 군용기지로 쓰임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중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 1989년 10월 12일 유관순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에 초혼묘를 조성하였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문화탐방을 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둘러보던 중 여성들이 수감되었던 여옥사에서 유관순 열사가 복역하였던 감방을 자세히 살펴보고 열사의 영혼을 위하여 화살기도를 드렸다.
유관순 열사의 초호묘를 바라보면서 겨레시인 성재경의 애국시집 독립 삼남매 ‘유관순’시집 83수중에서 ‘아우내 눈물 섬’을 낭송하였다.
수신 쪽에서 보면 초입이고/ 진천 쪽에선 끝나는 곳에/ 동그랗고 작은 섬 하나/ 건물에 둘러싸인 수줍은 모습으로/ 비바람 쓸쓸히 떠있습니다/ 언뜻 보면 무슨 섬이냐/ 유관순공원 아니냐 하시겠지만/ 가운데 쯤 들어와 눈감고 보면/ 어여쁜 섬 하나 허공에 떠서/ 어영차 파도 소리 들려옵니다./ 그래도 고함소리 들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엉켜있는 조각상에 다가가서/ 해당화 같은 소녀를 바라보노라면/ 붉게 무리 지었던 피 동백꽃 뭉텅이로/ 꽃 무덤에 수북이 떨어집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옹기종기 모여드는 섬사람들이/ 낮달을 잡을 듯이 자리를 펴고/ 맨 그물 하늘에 촘촘히 뿌려대며/ 숨 가쁜 뱃노래 들려옵니다.
2023년 11월 22일 겨레시인 성재경의 여덟 번째 애국시집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출판기념회가 종로구 혜화동 흥사단 강당에서 개최되어 참석하였다. 그리고 2023년 12월 19일에는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고개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으로 가서 윤동주(尹東株 1917-1945)시인의 삶을 살펴보았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출생하여 1925년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38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송몽규와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1941년 졸업 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시집을 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1942년 부친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43년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2월 16일 옥사하여 유해를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안장하였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1집을 출간하였다.
나는 2015년 8월 백두산, 두만강 여행을 하던 중 연길 시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독립투사를 길러내기 위하여 세운 대성중학교에 들려 윤동주 시비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윤동주의 일생을 더듬어보면서 겨레시인 성재경의 여덟 번째 애국시집 ‘별이 된 시인 윤동주’시 104수중에서 ‘윤동주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음속으로 낭송하였다.
별나라에서 별물을 퍼 올리실 시인이여/ 너무 궁금한 걸 편지로 여쭙니다./어떤 사람이 돈을 달라 해서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다 주었습니다./그 사람이 몸을 달라 해서/ 뼈까지 몽땅 꺼내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면 저는 산 사람 아닌 산송장/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는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이 편지를 윤동주 시인님께 보내는 것은 / 저와 공통된 답을 갖고 계신 까닭이고/ 누구도 답을 못할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처음엔 어떤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는데/ 어느 날 시가 아닐까 생각했고/ 끝내 아픈 내 나라임을 알았습니다./ 시인님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내주는 게 맞겠지요?/ 시인님 따라 하면 그 나라에 가서/ 별물을 퍼 올려 무궁화 꽃밭 가꾸는/ 자격증 하나 받을 수 있는가요?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하여 국민 모두가 고초를 당하고 있을 때 몸과 마음을 바쳐 국란을 극복하는데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신 여덟 분의 애국선열의 사적지를 겨레시인 성재경의 애국시집 8권을 들고 돌아보면서 후손인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된 것은 그분들께서 희생하신 덕분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겼다.
우리는 애국선열들의 유지를 받들어 이웃나라 일본이 지난날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지는 말고 국력을 더욱 튼튼하게 다져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여야겠다.
*후기: 계간지 ‘관세사’ 신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