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고려 좀 배워라! 조선의 광해군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섬기려고 애쓰는 조정의 공론을 한심스러워하면서 고려의 외교 좀 배우라고 가슴을 쳤습니다. 고려는 거란(요)-금-몽골(원)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얼음판 외교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물론 세계제국 몽골(원)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능수능란한 곡예외교를 펼쳤습니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거란이 서희(942~998)의 세치 혀에 말려 280리나 되는 땅(강동 6주)을 떼 주었습니다. 서희는 거란(요)의 소손녕이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라고 주장하자 우리가 고구려를 계승했기에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이라고 응수하면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서 거란에 조공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라고 어르고 달래 거저 강동 6주를 차지했습니다.
또 세계제국 몽골(원나라)도 강화섬으로 천도한 고려의 애간장 녹이는 줄타기 외교를 견디다 못해 재침공의 계획까지 세웠지만 끝내 포기했습니다. 원나라는 “저들이 험준한 산과 강화섬에 기댄다면 100만 대군을 동원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고려 침공 불가론이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108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942년(태조 25년) 일어난 이른바 ‘만부교 사건’입니다.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절도에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묶어 굶겨 죽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사건은 고려 475년 역사 중 최대 미스터리로 꼽힙니다. <고려사>에서는 무도한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발해의 계승자를 자처한 고려가 고토 회복을 염두에 두고 강력한 북진정책을 천명한 의지의 발로라는 겁니다. 실제 고려를 건국한 태조(재위 918~943)는 만부교 사건 1년 뒤인 943년 ‘훈요 10조’를 남기면서 특히 거란을 겨냥한 조목을 2개나 포함시킵니다. 즉 “거란은 금수(禽獸)의 나라다.(4조). 강하고 악한 나라 이웃(거란)은 늘 경계하라(9조)”는 것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이후 700년 정도 뒤인 조선 후기 이익(1629~1690)은 <성호사설>에서 태조 왕건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즉 거란이 후백제 견훤(재위 892~935)을 꺾고 위명을 떨친 고려 태조를 두려워 한 나머지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낸 것이라면서 그러나 태조는 옛 고조선과 고구려 땅을 되찾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거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멸망한(926년) 발해의 유민 10만여 명이 고려 땅으로 밀려들어오던 시기였습니다. 이 중에는 발해 세자인 대광현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익은 태조가 고려로 밀려들어온 발해 세력을 의식해서 거란 사신단을 모질게 대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익은 만약 거란이라면 치를 떠는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거란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태조가 만부교 사건 1년 만에 서거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치통감>은 고려가 다른 나라 승려(호승)를 파견하여 후진의 고조(재위 936~942)에게 거란 협공을 제의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고려와 발해가 혼인한 사이인데 발해 임금이 거란에 붙잡혔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태조가 발해 멸망(926년) 후 16년이 지난 때(943년)에 발해 운운하면서 신흥강국인 거란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이 개운치 않습니다. 고려는 이후 3차례(993·1010·1018)에 걸쳐 거란의 침략을 받습니다. 물론 서희의 외교로 강동 6주를 획득하고(1차),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3차)으로 거란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고려말 대학자인 이제현(1287~1367)은 태조의 처사에 의문점을 제기했습니다. 이제현은 한마디로 중국측 기록인 <자치통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태조 왕건은 쓸데없는 외교 분쟁을 일으켰을까. 만부교 사건 후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1308~1313)이 이제현에게 물어봅니다.
“태조대왕께서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마리를 키우는 게 백성들에게 무슨 피해가 간다고 굶겨죽이셨을까. 그리고 싫으면 돌려보냈으면 될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제현의 대답은 알쏭달쏭합니다. “원래 나라를 건국한 창업주의 소견은 워낙 원대하고 깊어서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태조께서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한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제현은 태조대왕의 조치에는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면서 전하께서 묵묵히 생각하시고 힘써 행하셔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셔야 한다고 공을 임금에게 돌립니다. 안정복(1712~1279)은 <동사강목>에서 최부(1454~1504)의 언급을 인용했는데, 역시 태조 왕건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평했습니다. “강성해진 거란이 사신을 보내옴으로써 동맹을 맺는 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정책일 텐데 태조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때문에 3차례나 거란의 침공을 받아 현종(1009~1031) 때에 전라도 나주까지 피란길에 오르는 위태로움을 겪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재현의 궁색한 답변이 오히려 후대 임금을 다그치는데 아주 좋은 인용사례가 되었습니다. 이제현은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태조 왕건의 뜻이 ‘거란의 간계를 물리치려 한 것인지,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한 겁니다. 그러면서 태조대왕의 숨은 뜻을 알아내 정답을 찾는 것이 바로 후대 임금들의 몫이라고 슬쩍 공을 돌린 겁니다. 역사는 진실과 상관없이 배우는 자의 몫입니다. 단적인 예가 1486년(성종 17년) 조선조 성종(1469~1494) 때의 일입니다.
반려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던 성종 임금이 중국에서 낙타를 구입해오라며 흑마포 60필을 낙타 구입비용으로 책정합니다. 그러자 대사헌 이경동(1438~1494)이 바로 만부교 사건을 인용하며 극력 반대에 나섭니다. “고려 말 이제현은 태조가 거란의 간계를 꺾고, 후세의 사치하는 마음을 막으려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성종)께서는 낙타 한 마리 때문에 성스러운 인품에 오점을 남기시겠습니까.”
이경동은 흑마포는 중국 황제들까지 보물로 여겼던 귀한 것으로 60필은 콩으로 치면 6000두, 석으로 치면 400백석이라면서 쓸데없는 짐승을 사려고 그렇게 많은 비용을 쓴다는 게 말이 되냐며 조목조목 따집니다. 성종은 결국 꼬리를 내립니다. 이경동은 만부교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치 않았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가한 고려말 학자 이제현의 추정 중에 ‘사치’ 부분에 방점을 찍어 성종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인용한 겁니다.
사실 왕조시대에는 군주가 천하를 제멋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반려 동물 한 마리 키우는 것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 중 하나인 <서경>은 “군주라면 개와 말 같은 동물은 기르지 말아야 한다. 작은 행위를 조심하지 않으면 큰 덕에 누를 끼친다”고 했습니다. 군주가 애완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그때까지 이룬 업적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