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 19] 삼년산성 주변 지형도
보은은 교통의 요지이다. 사방으로 길이 통한다. 지금도 그렇다.
[도면 20] 삼년산성 평면 실측도
[도면 21] 삼년산성 내부시설 배치도
[사진 2] 삼년산성에서 바라본 보은읍 일대 모습
보은 일대는 지세가 높아 한강과 금강의 상류이지만 분지를 이루며 넓은 평야도 끼고 있다.
이 때문에 여러 종류의 풍부한 식량이 생산된다. 식량이 풍부한 만큼 넉넉한 인력도 주위에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삼년산성은 이들 주민들의 보전을 위하여도 필요한 거점이었다. 삼년산성은 해발 35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자리잡았다.
지금도 읍에서 바라다 보이는 낮은 산에 성이 위치하여 있다.
그러나 막상 성에 올라가 보면 한 눈에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이다.
그것은 성벽을 높이 쌓은 결과이기도 하다. 10~15m에 달하는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삼년산성 만이 가지는 위용이다.
다른 어떤 성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이인데, 이렇게 성벽이 높이 쌓여져서 오랜 동안을 견디어 온 기술은 대단한 것이다.
이는 견고한 성벽을 만들겠다는 집념과 노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현대전에서도 공격과 방어의 비율을 3 : 1 정도로 잡는다.
즉 1개 중대가 방어하면 1개 대대의 병력으로 공격하여야 된다는 전술이론이다. 지형의 유리함이 가지는 이점(利點)은 이보다도 크다.
견고한 성에 의지하면 방어는 그만큼 더 튼튼할 수 있었는데, 무기체계가 발달하지 못하였던
고대의 경우는 그 비율이 훨씬 높아서 더 많은 병력이 공격에 동원되어도 함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기록에는 삼년산성이 함락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삼년을 두고 장기간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쌓은 특출한 성이 쉽게 함락되었을 리 없다.
성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 문이다.
삼년산성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면 문을 방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고려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삼년산성에 가는 가장 쉬운 길은 서쪽 계곡으로 오르는 길이고 서문은 가장 큰 골짜기에 만들어진 문이다.
삼년산성에는 동.서.남?북쪽의 사방 계곡을 이룬 곳에 문을 내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사방에 높은 봉우리를 두고 가운데가 오목한 고로봉(??峯) 형식의 산성이다.
삼년성의 정문은 서쪽의 백제 쪽을 바라보는 서문이다.
서문은 매우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적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위치가 되므로
성문을 지키려는 예비조치가 강구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 바깥으로 열리던 성문
삼년산성의 정문(正門)은 현재 문터를 남기고 있는 서문(西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문의 기초를 이루는 초석을 일부 묻어 놓아 잘 볼 수 없으나, 가장 훌륭한 문틀이 남아 있다.
서문은 유구(遺構)에서 볼 수 있듯이 전후(前後) 2차에 걸친 구축(構築)이 있었다. 맨 처음 만든 상대(上代)에 그랬듯이,
수축하면서 다시 만든 하대(下代)에도 서문은 정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현재도 서문은 전체 성벽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를 횡단하여 성벽이 통과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외부로의 출입이 가장 편한 곳이다. 성문 밖에서 바라보면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려다 보이지 않는다.
계곡의 중앙에서 왼쪽(北側)으로 약간 비켜있기 때문이지만, 문터 바로 앞까지
[사진 3] 삼년산성 서문터 모습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능선이 급하게 내려와 있기 때문에 살짝 가려져 있고,
성문이 지세에 따라 약간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기 때문이다.
성에서 정문의 방향은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성의 서쪽이 가장 적합하다.
서쪽 보청천 유역에 보다 많은 사람이 살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삼년산성은 전략적으로 전투와 보급을 맡는 치중(輜重)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치르는 일이지만, 치중의 경우 다른 의미가 있다.
최전방에 있는 산성에 무기나 식량을 다량 보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년산성의 경우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많은 물자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고, 산성의 문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게 한 주된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맨 먼저 만들어진 서문은 상대(上代) 문터라 하며 문지방 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남아 있다.
그것도 수레바퀴의 양쪽 바퀴 사이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삼년산성에 치중의 임무가 없었다면 그렇게 큰 수레가 통행하였을 까닭이 없다.
산성에 이처럼 큰 수레까지 다니던 문을 만든 것은 이곳 삼년산성의 서문이 유일한 것이다.
이 서문으로 드나들던 수레 가운데는 왕(王)이 행차할 때 타던 수레가 넘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백제를 통합하는 전쟁을 진두지휘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왕들은 수레를 타고 주위에 무장한 군인을 비롯하여 많은 시종들이 호위하였다.
그러한 그림이 고구려의 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에 여럿 남아 있다.
고구려의 평양 장안성(長安城)의 터전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성문에서도
수레바퀴의 홈인 궤도(軌道)가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수레바퀴 사이의 너비가 1.5m였다.
신라의 수레가 보다 넓었던 모양이다.
신라가 수도인 금성(金城, 지금 경주)에서 수레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은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수레의 실물 미니어쳐가 남아 있어 알 수 있고,
대구의 시지 지구의 조사에서도 수레의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유구가 있었다.
신라의 호화로운 수레가 삼년산성 서문을 드나들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의 좌우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각각 곡성(曲城)이 있다. 문의 북쪽은 약 71m 남쪽은 약 100m정도 떨어져 있다.
두 개의 곡성은 문을 향하여 접근하는 적을 망보아 계곡으로 몰려든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알맞은 위치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성문의 적대(敵臺)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곡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높이는 성문보다 약 30m 정도 높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양쪽의 곡성은 서문을 수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남쪽 곡성과 북쪽 곡성을 연결한 선으로부터 성문까지의 거리는 약 50m가 된다.
성문의 위치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양쪽 곡성의 보호를 받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외부의 적이 침범하는데 일차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 이곳의 곡성이라 하겠다.
[사진 5] 삼년산성 서남곡성 기단부 모습
물론 이차적으로 성문 자체의 튼튼함이 있어야 하겠는데, 위치적인 측면에서 한 번 더 살펴보면, 바깥에서 설령 문을 통과하여도 서벽 안쪽이고 문의 바로 안쪽에 연못(아미지)이 있어서 성안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없다.
성문을 통과한 적병은 일단 연못과 부딪치게 된다. 성문을 부순 여세를 몰아 일거에 성내로 진입하려는 적병은
여기에서 일단 저지되며, 주위에 매복한 군사에 의하여 공격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평지에 쌓는 성에는 성벽 바깥에 도랑을 파 돌린 해자(垓子)가 있다.
해자는 성문 밖에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더욱이 산성의 경우는 해자를 마련하기 어렵다.
따라서 산성의 문 안쪽에 해자를 설치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며, 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제일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문은 삼중(三重)의 방비가 될 수 있으며, 출입이 편한 가장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멀리 밖에서는 문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게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안목과 지견을 갖춘 솜씨라 하겠다.
성벽의 두께가 매우 넓다. 실측에 따르면 약 12m 정도이다.
이렇게 넓은 성벽에 연접되는 문은 어떻게 구성해야 되었을 것인가.
성문이 오목하게 들어와 있고 양쪽에 곡성이 있는 모양 자체가 호구(虎口, 문의 문구부에 공간을 둔 것이며,
군사용어이다.
지금은 바둑에서 흔히 사용하지만 본디 성곽에서 나온 말이다)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1차적인 방어 계획이다.
상대 문의 초석과 문지방 돌의 구성으로 보면 문짝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있다.
세상에 성문이 밖으로 열리게 만든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성문은 보통 안쪽으로 열었다가 바깥을 향하여 닫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런데 삼년산성의 서문은 처음 문이 밖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문을 구성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구조상 합리적이 될 것인가.
문 초석의 존재로 육축(陸築, 성문으로 통행하는 부분 나머지를 축조한 벽)하고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를 여는 그런 성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목재를 위주로 하는 구조의 성문이었다.
이런 성문의 성벽이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아직도 의문이다.
앞으로 이 서문의 구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내어야 한다.
현재도 그렇지만 성문 바로 바깥은 낭떠러지이다. 옛날도 마찬가지였었다고 밝혀졌다.
성문 앞에도 여유 있는 광장이 없다.
발굴과 조사에 따르면 문의 밖으로 박석(薄石, 얇은 돌, 널 판 모양의 돌을 까는 것)을 깐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 성벽이 있는 외측 벽면에 이르면 이 통로도 낭떠러지가 된다.
길은 여기에서 꺾이어 성벽의 바깥 밑으로 해서 계곡을 건너 산기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길과는 반대 방향의 기슭으로 길이 있었다.
서문의 안쪽은 바로 연못이다. 이 연못은 연못으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해자의 구실도 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해자가 성문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까지 접근되어 있었다.
문지방 턱을 넘어서면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는 높아지고, 그 끝에 석축이 있어 연못 벽이 된다.
이런 구성 때문에 문짝이 안쪽으로 열릴 수 없었다. 밖으로 여는 쪽이 오히려 구조상 합리적이었다.
성문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는 또 다른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문보다 좌우의 성벽은 바깥쪽으로 내밀어 있으므로, 문은 골목 안에 위치하는 듯이 호구(虎口)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밖으로 열린 문짝은 이 벽체에 의지하게 되어서 문으로 수레들이 드나들어도 거추장스러울 까닭이 없다.
밖으로 열리는 성문은 성안의 군사들이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다.
안쪽으로 열릴 때는 문이 열리도록 물러섰다가 전진하는 만큼의 시간이 단축된다.
성문에 접근한 적을 기습한다면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수레에 뿔처럼 앞에 댄 것으로 성벽을 무너트리는 도구) 등이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밖으로 열리는 문짝은 상하와 좌우가 문틀에 지탱되어서 안쪽으로 여는 형태의 문짝이 빗장에만 의지하는 것 보다
월등히 견고할 수 있다
.
문짝이 밖으로 열린다는 것은 그러나 차츰 문제가 있게 되었다. 적군이 만약 문에 바싹 다가와
문짝을 지탱하는 문설주를 찍어 문을 부수기가 쉽다.
문을 닫고 가로지른 빗장 대목(帶木)도 안쪽에 시설되었을 것이므로 문짝 자체의 견고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문짝이 안으로 열도록 바꾼 것을 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문의 밖을 비워서 남겨두지 않고, 거기를 낭떠러지로 만든 것은 공성구(攻城具)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더구나 산기슭으로 나있던 도로가 성벽에 이어지면서 성벽 아래를 지나야만 문에 이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공격군이 이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방어군이 성벽 위에서 지키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혹 약간의 결함이나 약점이 있었다 해도 문의 방어에는 지장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원거리에서의 화공(火攻)도 큰 효과가 없다.
계곡 아래서는 성문이 올려다 보이지 않는다. 앞을 산세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성문을 공격할 수 있을 자리까지 접근하면 방어군의 사정(射程) 거리 안에 들어서게 되어서 매우 불리하다.
성문이 두꺼운 성벽 안쪽에 위치하게 하려는 배려는 공격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 성문초석의 구조로 보아 문의 양쪽으로는 커다란 네모기둥이 세워졌었다고 보여진다.
네모난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서있었다.
[사진 6] 삼년산성 서문터 상대 초석 모습
이들 네모기둥들은 성벽과 직접 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둥 사이를 무엇으로든지 막아야 한다.
역시 목재가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도면 22] 삼년산성 서문터 상대 초석 실측도
네모꼴 기둥 홈은 좌우측의 문 초석에 각각 네 개씩 있다. 네모기둥 4개가 열을 지어 서있는 구조이다.
문의 규모가 3칸을 이룬다. 그 네모기둥들이 문짝이 달리는 문틀의 좌우에서
앞쪽과 뒤쪽으로 열 지어 서 있는 구조로 되었다.
사주문(四柱門, 문의 옆 기둥이 한쪽에 4개가 있는 문)을 구성하면 문짝을 중간에 두는 방식이 통례일텐데
그 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네모기둥 위의 머리에는 건너지르는 나무가 있어 결구(結構)되어야 구성된다.
열을 이룬 4개의 기둥이 좌우에 있으므로 이 좌우 기둥머리를 가로지르는 재목이 있어야 하였을 것이므로, 자연스레 가로지른 천정목(天井木) 사이에도 딴 부재(部材)를 두어 천정목과 천정목 사이 틈을 막았어야 한다. 문을 덮는 천장이 형성된 셈이다.
목재로 만든 평평한 천정만으로 문틀이 완성되지는 못한다. 비를 막을 지붕이 설치되어야 한다.
평천정만으로는 지붕의 물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기둥 세우고 가구(架構)하여야 기와지붕을 이룩할 수 있다.
그러려니 자연히 성문의 외관은 다락집(樓閣)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같은 성문 유형을 방불케 하였을 것인데,
이런 누문(樓門)의 고형(古形)을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성곽도(城郭圖)에서 볼 수 있다.
삼칸(三間) 다락형(樓閣形)의 성문이 그것이다. 아래층 기둥은 상당히 높고,
위층 기둥은 짧아 급격히 체감한 듯한 형상의 것이다.
이 서문의 경우는 아래층 어간(御間)만이 목조의 문이 되고,
좌우의 쪽 칸은 성벽이 되는 방식에 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층(重層)은 삼간(三間)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성벽 위로 문의 좌우에서 거침없이 다닐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안쪽으로 문짝을 여는 성문
상대의 성문은 어떤 불행 때문이었는지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였다. 불에 탔었나 보다.
병란(兵亂)이 없었던 통일신라 시기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한동안 재건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문터는 매몰되고 성벽은 일부이지만 무너졌다.
급격히 문을 재건하여 산성을 다시 활용해야 될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전의 문 초석을 들어올리려면 연속된 다른 시설들도 뜯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을 그냥 매몰하여 두고, 새로 다듬은 석재를 써서 원위치보다 성의 안쪽으로 약 3m 정도 이동하여 문을 세웠다. 하대(下代)의 문 초석이 남아 있는 과정을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다.
[사진 7] 삼년산성 서문터 하대 초석 모습
문의 초석을 새로 만들 때에 큼직한 돌을 구하여 네모기둥을 세울 홈을 파고,
문설주를 세울 홈도 파고 확쇠를 박을 홈을 만들다가 실패하였다.
다듬기도 어려운 돌을 사용한 외에 돌에 결이 생겨서 무거운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문 초석을 만들다 그만둔 것이 서문 밖의 민가 자리에 남아 있는 이유가 그렇다.
문의 초석은 성밖의 어딘가에서 결이 없는 화강암을 구하여 만들고 운반한 것이다.
삼년성 안에서는 이런 화강암은 나오지 않는다.
상대 문 초석을 매몰하는 과정에서 기왕의 성토된 층에다 부족한 흙을 더 보태어 보완하고 단단히 다짐을 하였다.
많은 기와 조각들이 이때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초석을 만듦에 있어서는
앞선 시기의 문짝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와 달리 이제는 안쪽으로 열었다가 밖으로 닫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성문에서 문짝이 안으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어서 그것에 따르기로 하였던 모양이다.
상대 성문 자리보다 높게 신방석이 놓이게 되었으므로, 이제 연못 두둑의 높이와 대등하게 되어서
문짝을 안으로 열어도 크게 거추장스럽지 않게 되었다.
문은 성벽 밖에서 더 안쪽으로 들여서 만들었다. 호구가 그만큼 크게 만들었다.
적군이 호구 안에 많이 들어오면 문 위의 좌우에서 독 안에 든 쥐를 잡듯이 공격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역시 삼간(三間)을 구성하였다.
문의 초석은 거의 같은 크기와 모양을 하였으나, 이제 문 지도리 홈을 안쪽에 만들었다.
문이 다 되었을 때 성벽도 문이 이동한 만큼 옮겨져야 하나
그것을 뜯어 옮겨 다시 축조하기에는 많은 노동력이 소요될 것이므로,
당초의 문 터 좌우 성벽에서 안쪽으로 덧대어 성문이 안쪽으로 들어온 만큼을 보축(補築)하였다.
3m 두께의 보축이 체성 안쪽으로 덧대어 쌓여지게 된 것이다.
무너졌던 성벽이 이때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나 급하게 보수하였기 때문인지
처음의 그 치밀한 축조기법 보다는 엉성하게 되었다.
엉성한 것은 문도 마찬가지이었고 보축된 좌우 측벽 부분도 그렇다.
이는 매우 서둘러 이들 시설을 완성하려 하였던 데서 야기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국시대의 신라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혹 문을 옮긴다 하더라도 이렇게 완전하지 못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와 조각들로 보아 매몰된 지반이 통일신라 시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 기와 조각 가운데는 고려시대의 것은 없다. 지표에 무수히 고려시대 기와편이 있으나,
이 지층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 초기의 사이에 해당하는 기간에 이 지반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후삼국시대가 그런 시기에 알맞다.
고려(高麗)가 먼저 점령한 것인지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먼저 점령하여
산성을 이용한 것인지를 밝힐 자료는 아직 없다.
그러나 유물로 보아 이 시기에 성문이 고쳐지고 성내의 여러 건물들이 중건되었다.
그들 건축물들이 고려의 어느 시기까지 존속되다가 폐지되고, 그 일부는 조선왕조 때까지 잔존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의 초기까지 군창(軍倉)만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대 문 초석에 이어 4개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든 네모진 주초(柱礎)가 있다.
기둥자리(柱座)가 조각되는 그런 주초가 아니라, 고려시대 특유의 네모진 판상할석(板狀割石) 모양 자연석 주초이다.
이 4개의 초석은 주간의 간격이 좁다.
주춧돌 크기에 비하면 기둥 간격이 너무 좁다.
그리고 앞선 시대의 문 초석들과 축선(軸線)이 맞지 않는다. 이것이 의문이다.
이럴 때 성문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의문인데 상상해 내기가 쉽지 않다.
(3) 문마다 다른 구조
삼년산성의 동문은 대야리로 가는 골짜기에 마련하였다. 동쪽 성벽에서 가장 낮은 부분에 문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 치우쳐 가파른 비탈에 대어서 만든 모양은 서문에서나 비슷하다. 그러나 동문은 문의 구조가 특이하다. 문 밖에서 문으로 들어오는 길이 한번 꺾여서 들어오도록 만들어 “ㄹ”자 모양으로 문 길을 만들었다. 이러한 모양이다 보니 문의 좌우 성벽 위에서 문을 지나는 사람을 식별하고 적군이면 곧바로 문에서 공격이 가능하다.
[사진 8] 삼년산성 동문터 모습
문 길을 이처럼 굽게 만든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 것인지, 후대에 고쳐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성벽의 폭이 넓다 보니 문 길을 굽어 통행하도록 만들어 특이한 호구(虎口)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동문의 북측 성벽은 가파른 경사면이다.
동문을 들어서면 솥 안 모양의 평탄지가 있다. 동문을 막 들어선 경우에도
북쪽의 높은 곳으로부터 공격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사진 9] 삼년산성 북문터 모습
북문은 또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북문도 북쪽 성벽의 가장 낮은 위치에 만들었다.
보은사(報恩寺) 북편으로 올라 잘록한 부분인데 바깥은 풍취리이다.
길다란 계곡을 올라온 곳으로 잘록한 곳을 그냥 통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 밖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아 이 벽을 돌아 올라서야 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적이 바깥 차단벽 앞에 다다르면 이 차단벽에서 공격할 수 있고,
이곳을 돌파하려고 돌아 오르는 위치는 성벽 위에서 공격이 가능하다.
북문의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도 잘록한 부분이 있다.
이곳에 작은 문을 만든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만약 작은 문이 있었다면
암문(暗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통행하는 문)이었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와 북문으로 접근한 적을 살며시 나아가 공격할 수 있도록 구상된 것일 것이다.
남문은 더욱 묘한 이치를 살려 만들었다.
남문은 서문에서 벽을 따라 남쪽으로 나가 끝에 있으며, 안에서 보면 잘록한 부분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서남 모서리에 곡성의 터가 그대로 남아 있고,
남쪽 성벽의 서쪽 끝에다가 문을 만들었다 역시 남쪽 성벽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만들었으나,
다른 문과 달리 현문(懸門)을 만들었다.
현문이란 사다리나 줄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가장 뛰어난 방어력을 가지는 성문이다.
바깥에서 보면 성벽을 한참 쌓아 올린 위에다 凹자 모양으로 문 길을 만들었다.
문으로 들어가려면 길다란 사다리를 걸쳐야 되는데, 산비탈에 있으므로 사다리는 매우 길어야 된다.
사다리가 길다보면 그 무게 때문에 들어서 성문에 걸쳐놓기도 어렵다.
또 긴 사다리는 가운데가 늘어져 부러지기 쉽고 흔들려 기어오르기도 어렵다.
삼년산성의 남문은 이러한 양식의 성문을 만들었으나,
그 후 어느 시기인지 모르게 이 성문을 메워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남문이 있었던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4) 자세히 본 돌 성벽
삼년산성에 대한 학술적 조사 결과 성벽은 내외겹축(內外夾築)의 석축 성벽으로서
외부에는 외측 벽면에 덧붙여 일단의 보축(補築)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서문의 북쪽에 남아 있는 성벽에 대한 조사에서 보축 하부(下部)에는 기초가 설치되었는데
지형에 따라 설치 방법이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의 두께(너비)는 약 10~11m이며 잔존 높이는 외부 1.2~2.2m, 내부는 4m 정도가 되었다.
[성벽 위쪽 부분 ― 상부(上部)]
성벽 안쪽 능선 부분에는 60~80cm 정도의 너비로 소로(小路)가 나 있으나,
내?외 경사면은 부식토(腐土) 위에 많은 풀과 관목류(灌木類)의 잡목이 우거져 있고,
곳곳에 직경 30cm 정도의 커다란 참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다.
[사진 10] 삼년산성 남쪽 성벽 모습
표토(表土) 위는 주변의 나무들에서 떨어진 낙엽들로 15~20cm의 층을 이루고 있고,
낙엽을 제거한 바로 아래는 붕괴된 성벽의 성돌들로 덮여 있는데, 2~3단 겹겹으로 쌓여있는 부분도 있고,
표토 속에 섞여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 성돌들은 절반 이상 파손되거나 부식된 상태이다.
표토의 아래쪽은 부식토로서 두께는 능선부에서 50cm 정도이며, 내?외 경사면에서는 20~30cm 정도이다.
[사진 11] 삼년산성 북쪽 성벽 모습
부식토의 하부는 황갈색 점토에 돌 부스러기가 섞인 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 돌 조각들은 근처의 성돌들과 재질이 같다.
이 토층에는 성돌들이 섞여 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단단하게 다져진 층이다.
이 돌과 흙을 섞어 다진 층의 두께는 능선 부분에서는 1m, 내외 경사면에서는 40~60cm 정도이다.
다짐 층은 후대에 들어 성벽을 수축하면서 성벽 윗면에서의 누수(漏水) 방지를 위해 설치된 것으로 판단되며,
그 후 성벽이 무너지면서 내외 경사면 위를 덮게 된 것으로 보인다.
능선의 표면부터 혼합토층 바닥까지의 두께는 위쪽에서 180cm, 아래쪽에서 120cm로서 지세가 낮아질수록
두께가 얇아지고 있다.
다짐 층을 제거하자 성돌이 드러났는데, 성돌과 성돌 사이의 틈새는 빈틈으로 남아있어,
당초 축성 때에 흙을 쓰지 않고 석재로만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성돌들은 성벽의 내외방향으로 길게 놓여져 있다.
능선부를 중심으로 수평을 이루어 품(品)자 모양으로 쌓은 방식인데,
내외에서 쌓아 올라와 능선부에서는 폭이 2m 정도로 윗면이 평탄한 형태로 남아있다.
상단(上端)의 성돌은 넓적한 판상할석(板狀割石)보다는 긴 부정형(不定形)의 석재가 더 많다.
석재의 크기는 길이 60~70cm, 폭 30cm 정도의 것들이 많다.
[사진 12] 삼년산성 성벽 단면 모습
〔성벽 외측 벽면〕
조사 결과 경사를 이룬 훨씬 하부에서 외측 벽면이 나타났다.
현재의 잔존 높이는 보축 상단에서 105~220cm로서 일정하지 않으며,
서북쪽의 곡성(曲城)의 남쪽에서는 외측 벽면이 완전히 붕괴된 곳도 2개소가 있다.
붕괴된 형태는 현재 성벽의 남쪽이나 북쪽 성벽이 무너진 형태처럼 수직에 가깝다.
현존 외측 성벽 벽면 상단에서 표토 제거 후에 드러난 성벽 최상단까지 높이는
낮은 곳은 4.7m, 높이 남은 지점에서는 7.8m인데,
이 수치를 근거로 확인되는 이 부분의 성벽 최고 높이는 8.7m가 된다.
외측 벽면을 입면(立面)상으로 살펴보면 벽면을 이룬 면석(面石)들은 모서리가 각이 지고
넓적넓적한 판상석(板狀石)으로 다듬은 석재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12~20cm, 마구리 면의 장변(長邊)은 40~50cm, 뒤쪽으로 들어간 길이는 60cm정도가 많으나
90cm 가량 되도록 길다랗게 만든 것들도 있다.
외측 성벽 벽면의 경사도는 현존 높이가 얼마 되지 않아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1:0.08 정도이다.
면석(面石, 벽면 밖으로 보이는 성돌)들은 서로가 밀착되어 있으며,
틈서리에는 조그만 돌 부스러기를 끼워 입면에서 빈틈이 없다.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무거운 하중(荷重)으로 인해 석재들이 금이 가거나 안정되어진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초의 축조 때에 대단히 정성을 기울여 쌓았던 것이 더 타당한 이유라고 보여진다.
석재의 크기는 아래쪽일수록 큰돌을 사용하고, 위로 오르면서 작은 돌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나,
삼년산성에서는 상?하 어떤 부분에서도 석재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며,
곳에 따라서는 오히려 하부에 작은 석재를 더 많이 사용한 곳도 있다.
특히 보축(補築)으로 감추어지는 부분의 외측 성벽 면석들은 대체로 얇은 석재가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하 부분을 비슷한 크기의 석재로 쌓아올린 것은
현재 남아있는 남쪽 성벽과 동쪽 성벽의 매우 높이 축조한 성벽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 14]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3]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5]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6]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7]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8]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19]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20]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21]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22]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사진 23] 삼년산성 외측 벽면 모습
[도면 24] 삼년산성 성벽 단면도
[도면 25] 삼년산성 성벽 단면도
[성벽 내측 벽면〕
성벽의 내부 쪽은 내측 벽면을 찾아내어 성벽 두께를 확인하고, 내측 성벽의 잔존 높이가 얼마인지
최하단(最下端)을 확인하여 현재 높이를 재어보니 최고 4m 였다.
이 부분에서 실측한 보축 부분의 위쪽 끝과 내측 성벽 최하단과의 높이 차이는 2.6m이다.
내측 벽면을 입면상으로 살펴보면, 외측 벽면보다 조잡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내측 벽면의 면석들이 외측 성벽 면석에 비해 두께가 약간 더 두껍고,
형태가 장방형으로 다듬어지지 못하여
모서리가 정연히 맞지 않는 부정형(不定形)의 자연석이 더 많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내측 벽면은 외측 벽면에 비해 조금 덜 정치(精緻)하다고 볼 수 있다.
[사진 24] 삼년산성 내측 벽면 모습
[사진 25] 삼년산성 내측 벽면
[사진 26] 삼년산성 내측 벽면 모습
〔보축 및 기초〕
보축(補築)은 외측 성벽의 아래쪽에서 돌출(突出)된 형태로 축조되어 있는데,
면석(面石)들은 높이 15~18cm정도로 체성의 성벽 면석에 비교해
대체로 큰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 부정형(不定形) 석재를 많이 사용하였다.
외면이 경사진 석재들로 쌓아서 면으로 된 부분의 단면이 수직이 아니고
∠ 모양으로 된 것이며 성벽에 비해 조잡하게 쌓여졌다.
보축의 높이는 120cm, 위쪽의 폭은 80~100cm정도이나
곡성(曲城)에 가까운 부분에서는 점차 위쪽 너비가 좁아져 30cm 밖에 되지 않는다.
보축의 경사는 1 : 0.55 정도로 완만한 편이다. 보축의 경사면은 거의 직선을 이루지만,
곡성에 가까운 부분에서는 배부른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보축은 삼년산성의 동쪽?남쪽?북쪽의 성벽에서도 볼 수 있는 데,
조사 결과 보축은 성벽과는 별개의 구조로서 성벽을 쌓고 난 후 보강을 위해 쌓은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기초는 부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이 확인되었다.
보축 하부가 바위로 된 부분의 보축은 자연의 암반을 기초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초가 호박돌 섞인 판축 다짐으로 되어있는 곳도 있다.
보축 하부의 기초가 특이한 구조로 된 곳도 있는데,
보축 아래로 다시 2단의 석축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보축 바로 아래의 석축은 높이 50cm이며
보축 하부 지면에서 60~70cm가량 내밀어져 있다. 입면은 거의 수직인데,
그 하부에는 비교적 큰돌을, 상부에는 조그마한 부정형(不定形)의 석재를 사용하여
외면을 맞추지 않고 쌓아 매우 조잡해 보인다.
이 석축 하부에는 다시 일단의 커다란 돌로 쌓은 석축이 있는데
높이 80cm, 내밀어 진 너비 110cm 정도이다. 이 석축은 2단으로 축조되었으나
상단(上端) 석재의 높이가 60~80cm로서 하단에 비해 매우 큰 석재를 사용하였다.
이 두 단의 석축은 전체가 각각 하나의 판축(版築)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 27] 삼년산성 보축 모습
큰돌로 쌓은 석축 아래는 두께 75cm의 호박돌이 섞인 판축 다짐으로 되어있고,
판축 다짐 아래에서 생토층이 나타난다. 생토는 붉은 빛이 도는 황갈색 사질 점토층이다.
삼년산성에서 성벽의 기초는 지형에 따라 각기 달리 그 지형에 적당한 형태로 축조되었다고 판단된다.
〔후대의 수축된 성벽〕
서쪽 성벽의 서문 북쪽 곡성 바로 위쪽에는 조금 남은 후대 수축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이 성벽은 하부에 높이 40~50cm, 폭 60~70cm 정도의 큰 석재를 지대석으로 설치하고, 그 위에 성벽 안쪽을 향하여 약간 들여서 면석을 쌓아 올라간 방식이다.
그리고 서문터에서 서북쪽의 곡성(曲城)에 이르는 능선의 외부 곳곳에 이와 같은 성격의 성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무너진 부분의 지대석 하부를 조사한 결과 초축(初築) 당시의 성벽이 붕괴된 위에,
작은 돌이나 납작한 돌을 사용하여 바닥을 고르고, 그 위에 지대석을 설치하였다.
남아있는 후대 수축의 성벽은 지대석 하부의 석재들이 이탈되어 지대석이 불안정한 상태이다.
면석(面石)들은 대체로 삼년산성의 동?북?남쪽에 남아 있는 성벽들의 면석(面石)들보다 크다.
면석 가운데는 뒤쪽 길이가 긴 깊이 박는 돌들이 별로 보이지 않으며,
면석 안쪽의 속 채움 돌들도 삼년산성의 다른 부분의 무너진 단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은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외측 벽면의 경사도 다른 부분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성벽의 물매보다 완만하다.
내측 성벽의 안쪽은 내탁(內托)으로 처리하였는데,
초축 성벽의 내측 벽면이 붕괴 매몰된 위에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위쪽은 돌 부스러기와 흙과 섞어 다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성벽이 언제 축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문헌기록이 없어 단정짓기는 어려우나
현존하는 유구의 형태로 보아 조선시대에 수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 가장 멋진 곡성
치성(雉城)이란 성벽의 기둥처럼 성벽을 튼튼히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전투 때에 성벽에 밀착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突出)시켜 내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치성 가운데 성문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치성을 두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적대(敵臺)라 하며,
체성(體城)에서 직각으로 나가는 네모꼴을 이루는 것이 많다.
삼년산성의 것처럼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은 특히 이를 곡성(曲城)이라 부른다.
삼년산성의 북서쪽 곡성은 서문을 중심으로 서남 곡성과 대응되는 위치에 구축되어 있는데,
이들 두 곡성은 주위 지형과 설치된 위치로 보아 성의 정문인 서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사진 28] 삼년산성 북쪽 곡성 모습
서북 곡성과 성벽이 접하는 부분의 폭은 10.2m이며 성벽과 접하는 양쪽 지점을 연결한 선에서
최대 7.6m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사진 29] 삼년산성 북쪽 곡성 모습
[사진 30] 삼년산성 북쪽 곡성 모습
서북곡성의 평면은 전체가 반원형(半圓形)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는 않고,
곡성과 성벽이 접하는 부분은 성벽 벽면에서 거의 수직으로 2m 가량 돌출 된 다음 굽어지기 시작하여
직경 10m정도의 반원형(半圓形)을 이룬다.
보수 정비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평면상태는 지대가 낮은 쪽 즉, 서문 쪽으로 전체가 쏠린 형태였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침하(沈下) 현상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축조 당시에는 좌우 대칭(對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곡성의 외측 벽면의 잔존 높이는 반원형의 최대 돌출부에서 90cm, 북쪽의 치와 성벽이 접하는 부분이 2.2m였다.
외측 벽면의 면석은 판상석(板狀石)들로서, 재질은 체성(體城)의 면석들과 같다.
그러나 체성의 면석들은 두께가 8~20cm정도로 여러 가지가 섞여있으나,
곡성에서는 두께가 너무 얇은 돌은 별로 쓰지 않는 등,
대체로 두께가 비슷한 정도의 돌들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그 두께는 평균 18cm 정도이다.
반원을 형성하는 면석들은 사다리꼴(梯形) 형태의 석재들인데 마구리 면이 직선인 석재들을 맞추어
반원형으로 축조한 기술은 아주 뛰어나다. 성 돌들의 형태와 쌓은 수법은 성벽 부분과 거의 같다.
즉 品자 모양 쌓기로 되어 있다.
다만 곡성의 반원형을 구성하기 위해 곡성의 중앙부에서 방사형(放射形)을 이루도록
중앙의 원을 이룬 중심을 향하여 방향을 달리하면서 돌아가듯 길게 석재를 놓아가며 축조하였다.
곡성의 축조는 체성 성벽을 먼저 쌓고 덧붙여 축조하는 것이 통례이나,
삼년산성에서는 체성 조성과 동시에 축조한 경우이다.
이처럼 삼년산성에서는 외부지형이 경사면이므로 체성과 별도로 곡성을 축조하는 것보다는
곡성과 체성을 일체로 구성하는 편이 보다 견고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서북 곡성에서는 곡성과 체성이 서로 물린 일체의 구조이기는 하나,
곡성의 외측벽면 양쪽 끝이 체성과 접속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곡성의 남쪽 끝 부분은 성벽과 한 켜 한 켜가 서로 엇물려 들어가는 방식이지만,
북쪽 끝은 곡성과 외측 벽면이 계속하여 체성 속으로 연장된다.
이러한 방식은 구조적인 면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지대가 높은 쪽은 서로 분리시켜 높은 쪽으로부터의 측면 압력이 곡성에 작용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고,
낮은 쪽은 서로 물리게 하여 아래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초 지반의 부동침하(不同沈下, 동일한 비율로 꺼져 내리지 않음)에 있어서도
서로 분리된 구조일 경우 붕괴의 위험성이 더 적다.
그리고 흥미로운 비교 자료로서 북서쪽 곡성에 대응되는 위치에 있는 서남쪽 곡성을 살펴보면
서남쪽 곡성은 북쪽, 즉 서문 쪽 부분은 체성과 서로 한 층 한 층씩 물려있고,
반대편인 남쪽 끝 부분은 체성 속으로 연장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서남?서북 곡성 둘 다 지대가 낮은 서문 쪽은 체성과 곡성의 외벽이 서로 물리게 쌓았으며,
그 반대편 높은 쪽은 곡성의 외측 벽면이 그대로 체성 속으로 연장되어 들어가는 방식이다.
서북 곡성의 보축은 2단으로 구성되었다. 위쪽의 제1보축은 최대 높이 1.7m,
경사도는 1 : 0.38로서 성벽보다는 완만하나 체성의 보축보다는 급경사이다.
면석들은 곡성에 사용된 면석과 그 크기나 형태가 비슷하다.
상부 폭은 중앙부에서는 85cm이나 양쪽 끝 부분에서는 점차 줄어들어 30cm 정도이다.
그리고 상단 보축이 체성의 보축과 만나는 부분을 북쪽 끝에서 살펴보면,
체성의 보축을 먼저 쌓고 난 후, 곡성의 보축을 쌓았는데, 곡성의 보축이 체성의 보축보다 2단 가량 높게 되어,
체성의 보축을 덮고 있다.
평면 형태와 축성의 방식이 특이한데, 평면은 상단 보축이 곡성의 외벽에 대해 동심원 형태로 돌아갔으나,
하단 보축은 상단 보축의 양쪽 끝에서는 상단에 붙어서 시작되나 중앙부에서는 3.7m 정도나 내밀어져 있다.
최대 돌출부의 현재 높이는 80cm이며 경사도는 1:0.3이다.
하단 보축이 상단 보축과 접하는 부분은 상단 보축의 위쪽이나 중앙부 쪽으로 오면서 지형이 낮아지
는 것과 맞추어 하단 보축도 점차 낮아진다.
중앙부의 하단 보축 상부와 상단 보축 하부와의 높이 차이는 2m에 달하는데
상?하단 보축 사이의 경사면은 상단 보축의 아래 어느 정도의 부분까지는 돌로 덮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양쪽 끝 부분 주위에 이 경사면을 덮었던 석재들의 자취가 일부 남아있다.
하단 보축의 면석은 곡성과 상단 보축의 면석들에 비하여 비교적 넓적한 것들이다.
상?하단 보축 사이 경사면을 덮은 석재들은 외면이 경사진 석재들로서 체성의 보축 면석들과 형태가 비슷하다.
삼년산성에는 이러한 곡성이 성벽 중간에도 있지만 방향이 바뀌는 산꼭대기마다 있다.
현재 서북 모서리와 남서 모서리의 것은 잘 눈에 띄지 않으나,
남동쪽과 북동쪽 높은 위치의 곡성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꼭대기에 있는 곡성은 특히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막고 멀리까지 관측이 용이한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년산성의 위용을 대표하는 곡성이 바로 동북쪽 꼭대기의 곡성이다.
이 곡성은 북쪽 성벽에서 바라보면 특히 그 모습이 늠름하여 곧잘 사진의 배경이 되어주곤 한다.
(6) 장수 굴이라 불린 수구
삼년산성의 동문을 나가서 남쪽에 굴이 하나 뚫려 있다. 이 굴을 대야리 사람들은 장수 굴이라고 불렀다.
옛날에 이 굴속에서 장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장수굴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치성을 드리는 곳이었다.
대야리 마을에 살던 사람이 촛불을 켜 놓고 손을 비비며 무언가 소원을 빌던 그런 곳이었다.
삼년산성에서 나무를 해서 땔감으로 쓰던 시절에는 이 굴이 냉장고로 이용되었다.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 도시락을 가지고 이곳에 이르러 굴속에 넣어 놓고 일을 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다시 이곳에 와서 도시락을 꺼내어 점심을 먹었다.
속에서 찬바람이 나와서 자연적으로 냉장고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 장수 굴이라 불린 굴은 사실 장수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삼년산성의 동쪽 수구(水口)로 만들어진 것이다.
성안에 있는 물을 나가게 하는 시설을 이처럼 만든 것이다.
굴속을 들여다보면 모양이 재미있다. 5각형이랄까 집 모양이랄까 평평한 바닥은 층 층을 이루어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올라간다.
바닥의 너비가 43cm로 어린 아이들이 굴속으로 들어가 보려 들어갔다가
속에서 좁아져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니까
되돌아 나오려 해도 몸을 되돌릴 수가 없어서 뒷걸음으로 나와야 하였다.
옆의 벽은 납작납작 한 돌을 층 층으로 쌓아 속으로 들어가면서 바닥이 높아지는 만큼 높아져 있다.
위를 보면 맛배지붕 모양으로 삼각형을 이룬 천정을 이루었다. 벽의 높이는 바닥에서 천정까지 63cm이다.
맨 끝의 바닥은 혀바닥 모양으로 크고 넓은 돌을 밖으로 15cm 내밀게 깔아 놓았다. 물이 흐른 자국도 있다.
물이 이 돌 끝에서 떨어지면 바로 아래의 성벽에 물이 닿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이 턱을 이룬 돌에서 아래로 1m 아래는 성벽의 바깥 아래를 보축한 벽이다.
계곡에 해당되므로 보축은 다른 곳에 비하여 넓고 튼튼하게 쌓아서
물이 여기에 떨어져도 파여 나가지 않도록 고려되었다.
이러한 모양의 수구 양식은 신라 특유의 것이다.
성벽 안쪽에 있을 입수구는 지금 묻혀 있어서 볼 수가 없고 물길과 출수구만 볼 수 있다.
아마도 안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거기에 고인 물이 장마철에 넘치면 이 수구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을 것이다.
성벽 중간을 뚫어 놓은 듯한 수구를 만드는 방법은
현재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이곳 삼년산성의 수구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는 경주 명활성 북쪽 수구가 있으며,
충청북도에서는 이웃한 문의 양성산성?충주 남산성?단양 온달산성이 있다.
이 밖에도 경기도 여주 파사산성과 하남시의 이성산성에도 이와 비슷한 수구가 있다.
옥천 군서의 은행리에 있는 성티산성에서도 성벽 중간을 뚫어 네모지게 만든 수구가 있다.
이들 현재 남아 있는 수구들 가운데 삼년산성의 것이 가장 우수한 것이며 가장 아름답다.
다음의 것으로 충주 남산성과 온달산성의 것인데, 이 두 개는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다.
5세기 후반의 삼년산성식 수구는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사다리꼴의 모양으로 바뀌고
다시 네모꼴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에 남아 있는 우리 영향을 받은 성터에서도 성벽 중간으로 나가게 만든 수구가 있는데,
이러한 수구 양식의 본산지가 바로 삼년산성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 미인의 눈썹처럼 생긴 연못
삼년산성의 서문을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것이 아미지(蛾眉池)라 바위에 새긴 글씨이다.
이 글씨는 신라의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쓴 것이라 전해왔다.
이 바위에서 보다 높은 곳에 잘 보이지 않지만 유사암(有似巖)이라 새긴 것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옥필(玉筆)이라 쓴 것도 있으나,
글씨의 모양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아미지라 쓴 것이 제일 예뻐 보인다.
아미지라는것은 이 바위 앞에 있는 연못의 이름인 듯하다.
연못은 그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완전히 조사된 것이 아니지만
성안에 있는 연못으로서는 매우 큰 편에 속한다.
20여년 쯤 전에 이 연못을 시굴조사 할 때에는 연못이 메워지고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물이 빠지는 곳이 깊이 패여 있었을 뿐이었다.
조사에 의하여 연못은 약 50m의 지름을 가진 둥근 모양의 것이 차츰 메워져
나중에는 서쪽 성벽 가까이에 반달 모양으로 작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모습이 아마도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눈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처럼 매력적으로 보인 것이 아닐까.
아미(蛾眉)는 개미의 눈썹이란 뜻이지만 개미처럼 허리가 잘록한 여인의 눈썹을 말하기도 한다.
본디 있었을 연못이 절반쯤 메워지고 남은 반달 모양의 연못이 있었을 때
이곳에 찾아온 멋진 사람이 이 연못의 이름을 아름다운 여인의 윙크하는 눈맵시에 비유하여
돌에 새긴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