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공원
안희연
날지 않는 새 한 마리
초입에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날고 있다
애쓰는구나, 너도
청동인 척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죽은 척하는 것들이 많다
분수대를 따라 아기 천사들
화관 쓰고 트럼펫 분다
행복이라는 팻말에 갇힌 연인
서로를 끌어안고 미소 짓는다
벤치 옆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
밤낮없이 읽는 사람 있다
그 자세 마음에 들어요?
대답이 없다
살아 있다는 거 알아요 움직이는 거 들켰어요
대답이 없다
나는 지도를 펼친다
이곳에는 정말 조각이 많아서
다 둘러보려면 일주일도 모자랄 것 같다
그러니까 조각 공원이겠지
나는 조각을 조각으로 보는 연습을 한다
내 식대로 구부리지는 않을 거야
지나온 조각에는 붉은 동그라미를 치며
걷다 보니
공원의 끝,
새로운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지도는 나의 것과 다르다
나는 공원을 저울에 달아보는 상상을 한다
무게가 거의 나가지 않는다
나는 어딜 다녀온 것일까?
조각 공원은 분명히 있다
나의 출구가 당신의 입구가 되기도 한다
굉장한 삶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 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 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당신 지금 여기에 있어요
『온 세계가 마을로 온 날 - 가장 어두울 때의 사랑에 관하여』(갈라파고스, 2021)는 9·11 테러 이후 일주일간의 시간을 다룬 책이다. 2001년 9월 11일, 납치된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청사로 돌진한 이후 미국으로 가는 모든 하늘길은 막혀버렸다. 영공이 폐쇄되자 당시 비행 중이던 유럽발 항공기들은 임시로 착륙할 공항을 찾아야 했다. 캐나다 남동부에 위치한 ‘갠더국제공항’은 그 대안으로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이 책은 바로 그곳, ‘갠더’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갠더에 도착한 세계 각지의 피난민들에게 갠더 주민들이 보여준 환대와 사랑, 신뢰와 회복에 관한 이야기.
갠더 주민들은 거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담요를 들고 왔고 누군가는 물이나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 욕실과 거실 소파를 내어주기도 한다.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을 기부한 이도 있었는데, 총이나 칼처럼 전투를 떠올리게 하는 폭력적인 장난감은 제외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만큼 세심히 마음을 썼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장면이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이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임시 거처로 줄지어 이송될 때, 어느 자원봉사자 한 명이 커다란 세계지도를 벽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곤 빨간색 마커로 갠더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그린 뒤 ‘현 위치’라고 적어 넣었다고.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은 그 지도를 보며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방향 감각을 되찾고 불안한 마음을 다잡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책은 설명한다.
나는 그 자원봉사자에게서 시의 마음을 봤다. 시는 먹을 것을 제공해 즉각적으로 배고픔을 달래줄 수 없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데에도 쓸모없지만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당신 지금 아프군요. 당신은 상실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어요. 이곳은 모든 것을 얼리는 냉동 창고이니 이곳에서 잠들면 안 돼요. 당신 입술이 파래지고 있어요.
또는 이런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당신은 조각 공원으로 소풍을 떠났지요. 그런데 그곳, 정말 조각 공원인가요. 그 조각들, 그저 조각일 뿐인가요. 당신 지금 슬픔 속에 있어요. 거긴 당신의 슬픔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공원이에요. 도망칠 수는 없겠죠. 슬픔을 탕진할 때까지 머무세요. 저는 조각인 척 당신의 곁을 지킬게요. 제 이름은 조각의 외피를 두른 시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시는 당신을 찾아낸다. 당신을 알아본다. 당신의 현 위치는 여기입니다. 시가 빨간색 마커를 들고 화살표를 그려 넣는 장면을, 이 계절 나는 똑똑히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