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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번역가는 매인 사람이다. 얽매여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사람이다. 시에 매이고, 가능성에 매인다. 그래서 더 어렵다. 열려 있는 가능성의 창이 많아서, 창은 많은데 번역가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에, 그걸 고심한다.
_20쪽
엄청난 오역을 했다. 책이 나오고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런데 그 오역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번역에서 이런 오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문학번역을 하는 수업에서 실례를 들어 보여줄 수 있기에 그야말로 산 공부가 아닌가.
_43쪽
번역은 환대다. 환대는 어려움에서 어려움으로 가는 일,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가는 일이다. 시를 두고 새로움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때, 그 새로움은 어려움에서 어려움을 만드는 환대의 과정과 흡사하다.
_49쪽
시원하게 떨구지 못하는 몸에 밴 습성들, 돌봄 노동, 아마 이 대목에서 모든 여성 독자는, 어머니들은 아내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 맞아. 어딜 가서도 돌봄에 익숙한 것이 여성의 DNA에 새겨진 운명인가 하고 말이다.
_75쪽
“Those f lowers, squatting down with a perineum,”. 첫 줄을 읽으며 미국인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참 이상하지. 그러나 그 이상한 조우가 이 시를 시로 만드는 첫 질문이다. 가장 강력하고 불친절한 환대의 방식.
_112쪽
번역은 여러 가지 가능한 변수 중에서 가장 좋은 해석으로 가는 길을 찾는 과정이다. 어떤 번역도 가능하기에, 이 시에 다다르는 많은 길 중 하나를 고른다.
_140쪽
출판사 서평
많은 이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말로 매끈한 번역, 이음새가 느껴지지 않는 번역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번역을 지우고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통해 시의 시다움을 느끼게 하기를 늘 꿈꾼다.
_「책머리에」에서
“번역은 어떤 작품이든 한 번 더 생을 살게 한다”
작품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언어를 수호하는 번역
『번역가의 단어』의 단어 목록은 시를 옮기며 유난히 오래 고민했던 구체적인 사례부터 번역을 둘러싼 이론적 개념, 번역출판의 수많은 변수와 AI의 발달로 변화하는 번역가의 위상 등 외부적 상황을 아우른다. “시를 사랑하는 ‘찐 독자’이면서 번역가이고, 연구자이자 또 교육자”인 정은귀는 책에서 겹겹의 정체성을 껴안고 번역을 새로이 마주한다.
시를 번역할 때 특히 더 고민스러운 행과 연의 배열, 형식의 문제들부터 문화번역 등 새롭게 등장하는 이론적 고민을 겹쳐 글을 쓰면서 나는 시와 나, 독자들 사이를 끝없이 들고 난다.
_본문에서
번역은 대등한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이 아니다. 저자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어야만 세계문학의 장에 들어설 수 있는 현실을 꼬집으며 언어 권력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 때문에 번역은 작품이 숨 쉬는 영토를 넓히는 일임과 동시에 소수 언어를 수호하는 행위다. 다른 문화권의 독자에게 가독성 있게 다가가면서도 하나의 고유한 문화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지 않으려는 팽팽한 긴장이 번역에 깃들어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영역본 We Do Not Part를 읽다가 ‘죽’이 ‘porridge’가 아니고 ‘juk’으로 번역된 것을 보고 기뻤다. 번역 불가능성을 끌고 오는 번역을 택하여 번역 전쟁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낸 사례이기 때문이다.
_본문에서
“느리지만 재빠르고 예리하게”
AI 시대, 번역가의 과제
챗GPT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아진 번역 프로그램을 목격하며 저자는 지금 번역가가 서 있는 자리를 고민한다. 문학번역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번역 수업에서 학생들과 실험에 돌입한다. 학생들에게 챗GPT와 자신의 번역을 비교해보고 그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써보게 하는 것. 인공지능이 번역가를 대신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 앞에 곤궁해지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도달한 결론은 시 번역에 요구되는 번역가의 “창조적 개입”에 있었다.
챗GPT는 느린 참을성과 예리한 결단이 없다. 하나의 시어가 품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 번역가의 창조적 개입이야말로 시 번역을 단순한 복제나 재현만 하는 실용적인 번역과 구분해준다.
_본문에서
번역가는 가벼운 읽기부터 심도 있는 비평을 포괄하는 작업이다. 비평가가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원문의 상실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번역의 창조성도 달라진다. 『번역가의 단어』는 정은귀가 충실하고도 창의적인 번역을 향해온 여정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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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평면적 번역…인간만큼 다양한 해석 못해"
최현재 기자(aporia12@mk.co.kr)2025. 10. 12. 15:51
20년 영미시 번역 정은귀 교수
산문집 '번역가의 단어' 펴내
AI가 문학 이해 장벽 낮춰도
고민하는 번역가 역할 중요
'번역 후기'는 인간의 전유물
"괴롭긴해도 신비로운 작업"
지난 1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교수회관 연구실에서 정은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가 자신의 세 번째 산문집 '번역가의 단어'를 소개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문학 번역은 계속 좁아져가는 세계다. 원어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부유하다, 물줄기를 틀어 하나의 다른 언어로 잡아채는 일. 적절한 말이 없다면 원어를 옮기지 않은 채 증발시키고 마는 일. 업의 본질도 그렇지만, 업의 영역 또한 서서히 좁아지고 있다. 인공지능(AI)의 출현으로 업계가 위태롭다는 진단은 이제 낯설지 않다.
생성형 AI가 만조(滿潮)처럼 번역계를 집어삼킬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 때. 최근 매일경제와 만난 영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는 AI의 위협에도 번역의 미래를 긍정했다. "AI의 도움으로 외국 문학과 문화를 이해하는 벽은 더 낮아졌죠. 하지만 해석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번역가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어요."
지난 20년간 영미 시와 한국 시를 양방향으로 옮기며 영미 시 번역의 대가로 알려진 정 교수는 최근 세 번째 산문집 '번역가의 단어'를 펴냈다. 이번 산문집은 시의 행과 연에 숨은 의미와 시어를 해석해 옮기는 일의 희노애락을 탐구했다. 특히 책에는 AI를 경계하면서도 "AI는 느린 참을성과 예리한 결단이 없다"는 결론이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의 매력은 딱 한 편으로도 그 나라 역사와 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을 확 보여주는 데 있죠. 애증 같이 복잡한 감정을 담아내기도 하고. 이걸 해석해 번역하려면 복잡하고 오랜 고민을 거쳐 결정해야 해요. 그런데 AI는 너무 빠르게 평면적인 결론을 내죠."
'AI와 번역'이 요즘의 최대 화두라고 언급한 정 교수는 챗GPT 등 생성형 AI에 자주 시 번역을 맡겨본다. 그가 소개한 AI 오역 사례는 숱하게 많았다. 미국 원주민 시인인 셔먼 알렉시가 인디언 절멸의 역사를 녹여 써낸 시 '전당포(Pawn Shop)'의 한 구절을 오역한 결과물을 언급할 땐 실소를 짓기도 했다. "'그 많은 인디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Where the skins disappeared to)'란 구절이 나와요. 레드 스킨(Red skin)이 인디언을 지칭하는 속어라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하는데. AI는 그냥 '피부'로 번역하더라고요. 바보 같이(웃음)."
무엇이 AI와 차이를 만드는 걸까. 정 교수는 시 번역을 "신비롭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열혈 독자의 마음이 비평가의 탐구심으로 변모한 다음, 단 하나의 결론을 내야 하는 번역가의 냉정함에 이르는 일. 원고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더 나은 가능성을 찾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남는 일. 오역도 피할 수 없는 일. 정 교수는 이 모든 과정을 '번역 후기'에 담는다. 속도가 생명인 AI가 수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저서에 "후기야말로 AI는 당도하지 못하는 지점"이라고 적은 이유다.
"너무 괴로워서 번역을 마쳤는데 후기를 쓰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 그냥 기다려요. 번역 후기가 제대로 써져야 이제 (작업이) 끝나는 거예요".
괴롭고 후회가 남는 작업. 그럼에도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루이즈 글릭의 전집과 앤 섹스턴,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등 20여 권의 영미 시집을 국내에 꾸준히 전해온 그에게 번역을 이어온 원동력을 물었다. "시를 너무 사랑해서"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 역시 AI엔 없는 감정이다. "하루 종일 시를 생각해요. 좋은 시를 읽으면 번역에 적절한 말이 저절로 떠올라요. 설렜다가 곤혹스러웠다가, 어쩔 줄 모르다가, 체념도 하게 되죠. 후기를 쓰며 (원고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시를 (독자들에게) 나눠 드리고 싶은 마음도 커요. 결국 사랑 아닐까요(웃음)."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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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산문집 ‘번역가의 단어’ 출간…언어 사이에서 찾은 번역의 철학
노벨문학상 시인 글릭부터 한국 시까지 옮겨온 경험, A~Z 단어로 기록
“AI는 빠르지만 느릴 줄 모른다…번역은 느린 떨림 속 창조적 개입”
“시인이 만든 시의 법에 다른 언어의 옷을 입고도 온전히 포박되기를. 그게 나의 바람이다.”
출처 : 경북일보(https://www.kyongbuk.co.kr)
정은귀 산문집 ‘번역가의 단어’ 출간…언어 사이에서 찾은 번역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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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번역가의 단어 | 정은귀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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