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1742]-곽예(郭預)7절-상련(賞蓮)
賞蓮-연꽃을 감상하며
郭預[곽예]
賞蓮三度到三池
상연 삼도 도삼지
翠蓋紅粧似舊時
취개 홍장 사구시
唯有看花玉堂老
유유 간화 옥당노
風情不減鬢如絲
풍정 불감 빈여사
연꽃을 즐길려고 삼지연못에
세 번이나 왔네,
푸른 덮개, 연지 붉게 하는 화장은 예나 지금이나
오르지 연꽃을 바라보는 옥당의 노인만이
풍정은 변함이 없는데 귀밑
모발은 명주실 같구나
원문=東文選卷之二十 / 七言絶句
賞蓮(상련)
곽예(郭預)
賞蓮三度到三池。翠盖紅粧似舊時。
唯有看花玉堂老。風情不减鬢如絲
연꽃을 완상하러 세 번째 삼지로 가니 / 賞蓮三度到三池
푸른 일산(잎)과 붉은 단장(꽃)은 예와 다름 없구나 / 翠蓋紅粧似舊時
오직 꽃을 구경하는 옥당의 늙은이 있어 / 唯有看花玉堂老
풍정은 줄지 않았는데 머리털만 희었네 / 風情不減鬢如絲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곽예(郭預)
자가 선갑(先甲)이고 처음 이름은 곽왕부(郭王府)이며
청주(淸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사람이다.
고종 때 과거에 장원급제1)해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임명되었다.
원종 초에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 있으면서 홍저(洪泞)와 함께
화친(和親)의 문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 포로가 된 사람들의 귀환을 요구했다.
곽예는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밀어 주는 사람이 없어 불우한 처지로
세월을 보내다가 사관(史館)의 천거를 받아 예빈주부(禮賓注簿)로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직하게 되었다.
충렬왕이 평소 그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위하자 바로 발탁해 벼슬에 올렸다.
거듭 승진해 판도정랑(版圖正郞)·보문서대제(寶文署待制)·지제고(知制誥)가
되었으며 비칙치[必闍赤]로 국가 기밀에 참여하게 되자
사림(士林)에서 적임자를 발탁했다고 추겼다.
국자사업(國子司業)·전법총랑(典法摠郞)·위위윤(尉衛尹)·춘궁시강학사(春宮侍講學士)를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되자 마소의 도살을 금지하라는 건의를 올렸다.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임명되어서는, 전법판서(典法判書) 김서(金壻)의 지위가
자기보다 위라는 이유로 사양한 후 그를 임명해 달라고 건의하자 사람들은
그의 겸양을 칭찬하였다. 마침 김서가 부친상을 당해
다시 곽예가 과거를 주관2)하게 되었는데, 명망높은 선비를 다수 뽑았다.
이후 좌승지(左承旨)·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문한학사(文翰學士)로 승진하고,
12년(1286)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올랐으며,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가는 도중에 죽으니 나이 쉰다섯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담박하고 곧았으며 겸손하고 안락해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선비 때와 똑 같이 행동했다. 글을 잘 짓고 글씨는 가늘면서도 굳세어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 서체를 본받는 바람에
그것이 완연히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원(翰院) 재임시 비가 올 때마다
맨발로 우산을 들고 혼자 용화지(龍化池)로 가서 연꽃을 완상했는데,
뒷사람들이 그의 풍치(風致)를 고상하게 여겨 그 일을 시로 많이 읊었다.
아들은 곽운룡(郭雲龍)과 곽진(郭鎭)이다.
곽운룡은 벼슬이 도진장(都津長)에 이르렀다.
곽진은 과거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郞)이 되었다가
뒤에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었다.
이하 매일신문 입력 2016-07-08
[이종문의 한시 산책]
연꽃 핀 풍정은 이렇게 그대로인데…나만 백발일세
이종문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연꽃구경
곽예
연꽃 보러 세 번이나 연못을 찾아가니
푸른 잎, 붉은 꽃은 옛날과 같건마는
꽃을 보는 옥당의 늙어빠진 이 사람은
풍정은 그대로인데 머리털은 백발일세
賞蓮三度到三池(상연삼도도삼지)
翠蓋紅粧似舊時(취개홍장사구시)
唯有看花玉堂老(유유간화옥당노)
風情不減鬢如絲(풍정불감빈여사)
*원제: [賞蓮(상연)]
*三池: 개성 龍化院 崇敎寺 있던 연못 이름.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정호승 시인의 '연꽃구경'이란 시의 일부다.
그렇다. 달과 별과 새들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다 연꽃으로 피어난다.
하지만 배 속에 창자가 들어 있고,
창자 속에 비빔밥이 들어 있는 사람은 끝내 연꽃이 될 수가 없다.
하물며 그 향기로운 연꽃 앞에서 정말 놀랍게도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따위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연꽃이 될 수 있으랴.
하지만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서 가끔 연꽃이 된 사람이 있었다.
위의 시를 지은 곽예(郭預: 1232~1286)라는 시인도
원나라 지배하의 진흙탕 속에서 그윽하게 피어난 한 송이의 '사람 연꽃'이었다.
그는 성품이 평담하면서도 굳세고 곧았으며,
귀하고 현달한 뒤에도 벼슬하지 않을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민간에 스스로 잘난 체하는 사람을 '성자'(聖者)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장원급제한 사람들 가운데
성자 짓거리를 하지 않는 사람은 곽예 한 사람뿐"이라는 말이
세상에 떠돌 정도였으니, 그 사람 됨됨이를 알 만하다.
바로 그 곽예가 옥당(玉堂: 한림원의 별칭)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다.
그는 부슬부슬 비가 내릴 때마다 혼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용화지(龍化池'三池)까지 맨발로 걸어가 연꽃을 구경하고 왔다고 한다.
위의 시를 짓던 날에도 곽예는 연꽃을 보기 위해 무려 세 번이나
우산을 받쳐 들고 맨발로 용화지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날 새삼스레 살펴보았더니,
연못 속에 있는 푸른 연잎들과 붉은 연꽃들은
옛날과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푸른 피 펄펄 뛰던 젊은 시절의 그 도저한 풍정은 그대로인데,
그 검던 머리털이 온통 백발로 변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늙은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비 오는 날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서
하루에 무려 세 번씩이나 맨발로 연못으로 찾아가는 사람,
사물에 대한 이토록 절실한 설렘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사람은
몸이 비록 늙었을망정 '젊은이'라 부르는 게 옳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