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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14. 한 사람이 꿇어 엎드려 15. 불쌍히 여기소서 16.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
2.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 17: 14-21. 막 9: 14-29. 눅 9: 37-43 상 )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마 17: 14. 한 사람이 꿇어 엎드려 -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
주의 세 제자가 무리에게 다가왔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렸다.
그 사람은 예수의 신성과 신적 능력을 믿었고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고쳐줄 수 있다고 믿었다.
1]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이르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오셨다. 무리에게 이르셨을 때, 한 사람이 그에게 와서 꿇어 엎드리어 말하였다.
막 9: 14에 보면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우리는 여기서 산 아래 광경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9명의 제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한 사람'은 귀신들린 아들들을 둔 부모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보고 있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이르되' 이 사람의 신앙의 자세가 되어있다. 전능하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피조물의 기본신앙의 자세다.
여기서 '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존경의 의미가 있고, 항복의 의미가 있으며, 모든 것은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께 맡긴다는 의미가 있다.
또 꿇어 엎드린다는 자세는 늘 깨어 기도하는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능력자요, 힘이 있는 자다. 본문에 이 부모는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에게까지 왔으나 해결 받지 못했으므로 다시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
마 17: 15. 불쌍히 여기소서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그의 아들의 병은 간질병이었다. (Byz C D W ita b d ff2vg (syrp) cop(meg)arm Diatessaron Origen 등.)
그 아들은 그 병으로 심히 고생하고 있었고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다. 몸이 상했고 여러 번 죽을 위험도 겪었다.
1]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퀴리오스)는 헬라어로 본문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퀴리오스'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 용어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8: 2. 17: 4)
이런 관점에서 마가는 '디다스칼로스'(*, 선생님)로 기술하고 있다.
* 막 9: 17 -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막 9: 21과 눅 9: 38에 근거해 보면, 이 아들은 외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 막 9:21 -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 눅 9:38 -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이러한 아들의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 그 아비는 예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에 호소한다.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모든 병자, 모든 죄인의 회복과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
영어 성경에는 ‘미친’(lunatic)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원문의 단어는 우리 말 성경대로 ‘간질’이라는 의미가 있다.
2]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간질(*, 세레니아조마이)은 '달의 침범을 받다'(strucken by moon), '미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고대인들이 간질병을 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데서 기인된 듯 싶다.
간질병은 보통 5-10분 동안 발작하는 병이다. 이 병이 발작할 때에는 환자는 갑자기 나뒹굴며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때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자기 몸을 자해하기도 한다.
* 막 9: 20 -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심히 고생하여(*, 카코스 파스케이)는 '심하게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그 병의 증세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음 암시한다.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이는 간질병 환자의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한 돌발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위험성을 호소한 말이다.
* 막 9: 22 -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귀신에 의해서 이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자해(自害)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귀신과 악령들은 사람의 마음에 침투하여 평온하게 하지 못하고 그들의 악한 습성과 파괴적인 경향대로 그 인격을 두렵고 불안하게 하고 평형감각마저 앗아감으로써 자멸을 유도한다.
이 아이의 간질병은 보통 간질병이 아니라 귀신이 들려 간질병이 든 경우로써 막 9: 17에 보면 그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가 나타내는 증상이 간질과 똑같았다. 귀신이 역사하면 어린아이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거꾸러뜨린다. 저도 어렸을 때 동네 아주머니가 꼭 비가 와서 물이 고이면 그 물 속에서 간질 하는 여인을 보았다. 거품을 품고 이를 갈며 발작을 했다.
이런 자녀를 가져보지 않은 부모들은 이 귀신 들린 아이의 부모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분통하겠습니까? 그 아들이 외아들이었다. 부모의 신앙이 귀하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을 메시아로 불렀으며. 생명의 주인으로 불렀다. 신앙은 고백이 위대해야 한다. 신앙이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덧입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긍휼하심을 덧입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한 시라도 살 수가 없다.
이 사람은 모든 문제를 가감하지 않고 솔직히 주님께 고백했다. 이런 신앙이 귀한 신앙이다. 마 9: 21을 보면 예수님이 이 아이가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으실 때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라고 대답을 했다. 벌써 고질병이 되어버렸다. 귀신이 근방들린 사람은 빨리가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잘 나간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신에 잡혀있는 사람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귀신이 육체에 거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모는 아이를 고칠 수있는 방법이라면 돈이나 체면, 어떤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다. 막 5장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에 시달리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다. 막 5: 26에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이 불쌍한 여자가 예수님의 뒤에 가서 옷자락을 붙잡고 병이 나았다.
본문의 부모도 결국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 하룻밤 철야 기도를 하셨다. 이 부모는 할 수 없이 남은 제자들에게 찾아갔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았는데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귀신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동을 부렸다.
어린아이를 거품을 물고 이를 갈며 넘어지게 했다. 그곳에 누가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서기관들이 있었다. 서기관들은 그러지 않아도 저것들이 고쳐내나 어디 보자는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생각에는 그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푸사 깨끗하게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교만한 서기관들의 입을 딱 막았으면 얼마나 통쾌했을까? 서기관들은 아마도 '귀신을 쫓아낸다고 큰 소리 치더니 아이로 더 망가뜨렸구먼!'하고 빈정댔을 것입니다.
마 17: 16.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열두 제자들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받았지만(마 10: 1), 무슨 까닭인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였다.
같은 배경에 막 9: 18에 보면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환자의 아비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아들을 예수께 데려왔으나 예수의 변화 산 행(行)으로 인해 만나지 못했다. 대신 남은 아홉 제자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제자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기도 했었다.
* 마 10: 1 -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눅 10: 17 -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그 같은 권능은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었으며, 또 오직 온전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2]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의 실패는 13: 54 – 19: 2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주제이다.
* 마 14: 16-19, 26, 30, 33 –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마 16: 5, 22 –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마 17: 4, 10-11 –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이러한 실패는 제자들이 진보와 실패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 마 14: 26-27, 31 –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실로 이것은 천국의 이적을 행하는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며 마술과는 달리,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그 자신의 믿음의 여하를 따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도 여러분,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입니까? 주님께 다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마 10: 1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에게 권능을 주었다. 그리고 전도하러 내보내셨다.
마 10: 8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눅 10: 1 이하에도 똑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나가 전도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했다. 눅 10: 17 이하에서 이렇게 보고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귀신들도 나사렛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니까 산 아래 아홉 제자들은 이미 찬란한 영적 승리의 체험자들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무리들 앞에서 서기관들 앞에서 영 말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산밑에서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상실했고, 은혜를 다 까먹어버리고 나니까 이렇게 허수아비가 된 것이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산아래서 세상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신앙인이 세속에 빠지면 무기력해진다.
신앙의 능력은 주님 앞에 있을 때 일어난다.
* 빌 4: 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님을 떠난 심령은 살수가 없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석하지 않고 예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질병을 치료하는 교회
산상에서 기도하러 올라갔던 예수의 일행은 하룻밤을 산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산 아래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그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에게 나아와 간질에 걸린 자기의 외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눅 9: 38)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내 아들을 고치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1) 산 아래 세상의 실상
① 죄로부터 오는 질병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다. 의학이 발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근절되기는 커녕 불치의 질병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아직도 암이 정복되지 않고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에이즈라는 새로운 공포의 질병이 발생하였다.
'페스트'에 비유되는 이 질병은 현대인들의 성의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천형의 병으로 알져지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하여 온 지구촌이 페닉에 허덕이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은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씀으로서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죄는 심령의 평정을 잃게 하고, 심령이 평정을 잃으면 질병에 걸린다는 것은 현대의학의 증언이다. 그리고 무지와 조심성의 결여가 질병 파급에 기여하고 있다. 이것 역시 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육체의 건강은 건강한 심령에 의해서 얻어진다.
②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
현대인의 정신적 질환은 다음의 세 악령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그것은 물질 만능사상과 권력 지상주의, 그리고 육적 쾌락주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 칼 막스는 이 세상을 '물질'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았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며, 물질에 의하여 그 삶이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부터 물질 만능 사상은 현대인의 정신을 점령하고 말았다. 물질이 인간의 척도가 된 것이다. 물질적 소유의 정도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이 악령은 인간을 물질화시킴으로서 비인간화에 기여하고 있다.
ⓑ 니이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규정했다.
이 사상은 '힘'의 우상을 낳았다. 권력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다. 정치를 위해서는 모든 물리적인 힘이 거침없이 동원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면 해결 못할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 법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을 정치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있다.
이 권력의 우상은 독재와 전제 정치를 탄생시키고 인간을 정치적 도구로 만듦으로서 비인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생명활동은 성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상은 현대인을 성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펄벅은 오늘의 미국의 부부는 다만 '성의 동반자'로서의 의미밖에는 없다고 말한 일이 있다. '성의 자유', '성의 개방'사상은 간통과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미혼모, 기아(棄兒), 독신주의 등의 사회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물질(부), 힘(권력), 성(쾌락)은 현대의 3대 우상이며, 현대인은 이 세 우상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다 악령(귀신)에 사로잡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임을 말해주고 있다.
(2) 교회의 임무
① 간질병을 고치지 못하는 현대교회의 무능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절). 이 사람의 말은 바로 현대 교회의 무능을 찌른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 교회가 왜 간질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나? 그것은 교회 자체가 이 간질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돈의 힘이 교회를 지배하고, 봉사자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십자가의 고등 윤리 종교가 세속적 음란 문화에 휘말려 있다.
교회 자체가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간질병을 치료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이 무능은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이 가져온 불행한 결과이다.
② 산상의 신비적 체험이 교회의 임무를 회복하게 한다.
교회는 산 아래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산 아래 사람들은 모든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다.
교회가 이들과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이들을 치유해야 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할 수 있는 이 치유 능력은 세상에서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는다.
교회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하여 신적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그 자체의 건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가 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못할 것이 없느니라'(마 17: 20)고 하신 것은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오늘의 모든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보좌의 능력과 축복을 가진 자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설교 감사합니다.
제자들은 죽으나 사나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