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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3)
< 설 교 >
운명을 바꿔 주시는 하나님
김윤기 목사
사주팔자(四柱八字)는 생년 생월 생일 생시 8자를 말합니다. 세조는 사주를 쉽게 풀어 책으로 낼 뜻을 갖고 이를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에게 명했습니다. 서거정은 논리적으로 따지고 거두기를 상소했습니다. 사주팔자가 황당무계한 근거는 사람의 생년 생월 생일 생시 사주의 순열과 조합으로 달라지는 운명의 총수는 51만 8천4백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근세조선 인구 1500만에 사주가 같은 사람이 29명이 생기므로 운명이 같아진다는 사주의 원천적 모순을 지적 했습니다. (지금 세계인구 60억이 넘는데 사주가 같은 사람이 1157명이 생기고, 우리나라 인구 4천2백만 명이면 81명이 운명이 같아집니다.)
성종은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과부가 성안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녀에게 살아온 여정을 물어보니 성종이 세자 책봉 때 이 여인은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이 임금으로 등극 할 때 이 여인은 남편과 사별하여 과부가 되었습니다. 임금의 경사스런 일이 있던 해마다 이 여인에게는 불행이 겹쳐 밥을 빌어먹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은 세상에 못 믿을 건 사주라고 개탄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되었으니 보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해서 운명이 뻔하게 결정된 자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소경을 치유하신 역사를 통해 그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숙명(宿命-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적인 삶을 복된 삶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 숙명적인 삶이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배안에서부터 장애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얄궂은 운명을 저주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이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소경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부모나 자신에게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이 라고 느끼었던 모양입니다.
1)우선 이 소경의 고난의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개개의 병이나 고난들이 일일이 어떤 죄의 결과라는 인과적 관념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나면서 소경인 경우에는 그것이 자기의 죄의 결과이냐 부모의 죄의 결과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두 가지 추측에는 다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죄의 결과라는 설은 구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출20:5) 그러나 꼭 죄의 결과만이 질병으로 고난이 온다는 사상은 욥기서에서 부정되고 있습니다. 고난은 누구의 죄 값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죄는 각자에게만 보응 된다는 것입니다.(겔18:20)
출 20:5
겔18:20
둘째는 자기의 죄의 결과라는 추측도 영혼선재설과 복중의 아이도 범죄 할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창25:26, 눅1:41-44)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칼빈은 이말은 그당시 불교식의 윤회설이 일부 유대인들에 의하여 신봉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25:26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운명적인 존재로 단정하지 않으시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셨습니다. 미래에 되어질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불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창조의 가치를 부여 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불행을 숙명적으로 해석하는 불교나 유교와 미신의 영향을 받은 한국 사람은 소경으로 태어난다던지 불구자가 되면 평생 동안 거지나 인생의 낙오자로 생을 저주하며 살아가 죽어버리는 것이 당연 지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이 자기 앞에 휘몰아 칠 때 운명으로 맡기고 생을 저주하며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고난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고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성공적인 인생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어 불행한 자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맡겨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행한 운명을 바꾸어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했습니다.
2)주님의 치유 방법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 방법들은 ①말씀만으로도 ②손을 상처부위에 대심으로(마8:2-3,9:29) ③귀신을 쫓아내심으로 ④손을 만지심으로 ⑤기름을 사용하심으로 ⑥침을 사용하심으로(막7:33,8:23,9:)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소경의 치료를 그의 신앙정도에 따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 로마나 유대 사회에서는 특히 침이 눈병에 특효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아마 주님은 이 소경의 저급한 심리 상태를 이용하신 것으로 봅니다. 오늘도 주님은 각양의 방법으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역사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 때부터 내 운명은 이미 주어져 있다고 미리 판단하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나의 숙명적인 운명을 복된 삶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광명한 삶이 있습니다.
그 소경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 졌습니다. 주님은 이 소경에게 창조의 삶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살았다고 하는 자각 말입니다. 비로소 이 소경은 밝은 빛 아래 사명을 받는 인간의 존엄성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경은 그동안 숙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니 글을 배우지도 못했고, 눈이 안보이니 전혀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평생 얻어먹는 비렁뱅이 신세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구약에는 소경이 고침을 받은 표적이 없고 소경의 말도 요9:32에서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함을 듣지 못하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어 본인도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고 살아야 되는 신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35:5, 마11:5에서 메시야가 오면 눈먼 자가 보게 되리라 하는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눈먼 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해줌으로 소경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제는 빌어먹지 않아도 내가 일해 벌어먹을 수 있는 근로자로 삶이 바꾸어 졌습니다.
사35:5
마11:5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영적인 눈이 뜬 사람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경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을 바꿔 놓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면 우리는 변화가 됩니다. ①마음- ②생각- ③말- ④행동- ⑤습관- ⑥성격(인격)이-운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①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면 ②생각도 창의적이고 소망적인 생각을 갖고③말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고 ④행동도 죄질 일을 하지 않고 성실해 지고 ⑤나쁜 습관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⑥그렇기 때문에 성격이 달라집니다. 죄와 불의 한 일을 버리고 복받는 사람의 성격 인격으로 변화되어 ⑦ 운명이 바꾸어져 사주팔자, 관상, 무당의 말이 무효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운명이 달라진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 : 관원, 일시소경 /광명, 신약13권 집필, 그리스도의 사도가되었습니다.
베드로 : 어부, 불학무식 / 예수의 수제자와 베드로전후서 집필 했습니다.
이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이지 않았던 눈이 보이는 광명한 삶과 소망의 삶 그리고 영적인 눈까지 뜨는 새로운 삶의 차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나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숙명적인 어둠의 삶에서 광명의 삶으로 바꿔져서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감격적인 삶이 있습니다.
경험에 기초한 신앙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론이나 신학이 아닙니다. 다만 체험일 뿐입니다. 나를 눈뜨게 한 사람이 누군지 그 날이 안식일인지 아닌지 이 소경으로서는 알바가 아닙니다. 다만 내 눈이 떠졌다고 하는 체험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내 눈을 뜨게 하셨다는 개인적인 체험 이 주관적인 경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에 하천풍언(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인물은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내천감삼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어도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고 본처의 소생들에게 구박,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저주스러운 삶을 살면서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는데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하천풍언은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기생의 아들도 사랑하시나요?” "아무렴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그리스도 인이 되어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감격이 하천풍언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감격에 사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독립적인 세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 소경은 눈을 뜨고 감격적인 상황을 봅니다. 예수가 인자 즉 하나님의 아들 됨을 믿는다는 응답입니다.(9:38) 새로운 운명의 사람으로 바꾸어진 삶으로 삽니다.
①스테반은 주님 만나 용서함 받은 감격과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②다윗은 그 감격에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③삭개오는 그 감격 때문에 세금을 늑징하는 도둑질을 벗어 버리고 자기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그 감격 때문에 주님의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⑤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도 주님께서 나를 구속 하였다는 감격 때문에 자기 집에다가 비석을 세워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일생을 마쳤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숙명적인 삶에서 광명의 삶과 감격적인 삶을 사르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사명자이십니까?
유영설 목사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무엇 때문에 소경되었는지 질문했습니다. 제자들은 두 가지로 추측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죄 때문에, 둘째는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인을 다 죄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소경된 자나,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생에 사명이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육체의 장애를 입은 자나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풀리지 않는 자를 바라 볼 때, 우리는 동정심을 갖기 쉽습니다. 물질적, 육체적 도움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실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모든 것이 건강하고, 완전한 것만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천한 것, 멸시 받는 것을 택하셔서 잘났다고 하는 것을 없애십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어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십니다.(고전 1:27-29) 하나님은 역설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 하십니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 불쌍한 것을 보고, 저주하고, 괴롭히고, 피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과 달리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불행한 자들은 포기하고, 낙심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형통한 자들이 불행한 자들을 차별하고, 저주하고, 괴롭히고,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하늘 백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생명을 허락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미숙한 것에 대해서는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한다.”(9:4) ‘낮’은 빛이 있는 동안이며, 활동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빛을 대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어떤 환경에서든지 일해야 합니다. 포기, 낙심, 절망, 버림 등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 이로라”(9:5) 나는 이 말씀을 읽는 중에 사명과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시면 “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세상에 비추시려는 빛이 있고, 하실 일이 있고, 보이실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빛 된 자인 것을 깨닫게 하셔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빛이셨기 때문에 나도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 제자 된 자,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신분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과 내가 있는 곳에는 새로워지고, 형통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로 가득차야 합니다. 나 때문에 흥하고 잘되어야 합니다. 내가 맡은 일 무엇이든지 흠 없이 잘해내야 합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9:6) 이는 어떤 피조물을 가지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맹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빛을 보지 못해 답답해하는 그에게 진흙을 바름으로 더 갑갑하게 만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고,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명자의 자세로 주님이 어떻게 하시든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정서적, 환경적으로 열등감과 절망이 있습니까? 주님은 절망과 약함과 실패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관심 갖지 않고,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던 것을 통해 성장하도록 비전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운명적인 인생을 살았던 자에게 빛을 보게 하셨고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소경 그 자신도 포기하고, 그를 본 사람들도 포기하고, 외면하고, 버렸는데, 주님은 그를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이웃사람들은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가 눈을 뜰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들추어내기를 좋아합니다. 밝은 눈으로 돌아온 이 사람의 현실을 쉽게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의 새로워진 현실을 수용하려면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공한 사람, 잘된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옛이야기를 하며, “많이 컷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밝은 눈을 회복한 자를 놓고 맹인이었던 사람이다, 아니다, 비슷한 사람이다 라며 궁금증을 더해 갔습니다. 밝혀서 어떻게 하려고 하려는지 몰라도 그의 변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명 자는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요. 과거 소경이었던 사람 맞소!”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굳이 내 인생의 과거를 말할 필요는 없으나 말해야 할 때는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은혜 받은 자, 사명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자는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내 과거 인생과 비교했을 때, 오늘의 내 삶이 과거를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헬라인, 야만인, 지혜 있는 자,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딤전 1:15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사명자는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사명자는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보며,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도움만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실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명자 되게 하신 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긍정해 주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마음을 열게 하십니다. 그리고 과거를 숨기는 비겁하고, 부족한 자로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를 통해 내 과거처럼 살아가는 자들을 돕게 하십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명자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명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무엇을 위한 상식인가?
이병일 목사
“올해 둘 다 여든이 된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혼 이후 오늘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2월 한 달 동안에는 꼭 10번만 새벽기도를 나갔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던 이유로 작년 2월에는 10번만 나갔을까요?” <이 노부부는 작년 2월 18일(29일까지 있었다면 19일)에 결혼했습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잠시 머뭇거린 것은 어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합의된 생각, 즉 상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젊었을 때 하는 것이다. 특히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 할머니가 결혼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상식이란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일반인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지식·이해력·판단력 및 사려분별이라고 합니다. 즉, 깊은 고찰을 하지 않고서도 극히 자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식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쓰임의 자리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쓰이기도 합니다.
우선, 말 그대로 일반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상식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평범을 가장한 강요, 보편을 가장한 억압, 숨겨진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우쭐해지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반대로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주눅이 들어서 스스로 위축되었습니다.
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병에 걸리는 것은 부모나(출 20:5; 34:7; 민 14:18; 시 79:8; 사 65:6,7) 자신(레 16:15; 신 28:61; 대하 21:15; 시 107:17,18; 전 5:17; 미 6:13; 고전 11:30)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물음은 그 사회의 상식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인권이나 심지어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호적에 관한 것, 여성이나 성역할에 관한 것은 아직도 예전의 상식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이주민 혹은 새터민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혹은 선뜻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시대적 변화에 따른 상식의 변화로 선입견과 편견을 버릴 것을 요구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상식을 자기 논리나 주장 혹은 정략의 근거로 삼아서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상식’ 참으로 위험한 단어입니다. 나찌의 선전상 괴벨스는 ‘상식’이라는 단어를 누구보다 애용했던 사람입니다. “이건 상식이다” 한 마디면, 모든 반론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고, 침묵에 빠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상식’은 ‘파시즘’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이런 위험천만한 ‘상식’이라는 단어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쓴다면, 토를 달기 참 괴로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난히 “이건 상식 아닙니까?”하는 식으로 상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의 정책이 얼마나 상식에 적합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줄기차게 내세웠던 명분의 바탕이 됐던 상식이 틀렸다면? 그의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라, 혼자만의 ‘독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식을 파괴하는 행위를 몰상식이라고 합니다. 상식이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에 대해서 상식적인지 몰상식적인지 판단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몰상식 혹은 상식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개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라면 개인이 조금 불편하면 됩니다. 그러나 상식과 몰상식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대립되어 있을 때에 그 상황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상식의 개념이나 범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몰상식의 편에 있는 사람은 억지를 부리거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전통이나 관습처럼 삶의 자리나 입장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오랜 기간 동안 공동체 구성원들의 독창적인 사색과 고찰 결과 얻어진 것이 많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적인 공동체에서 자유와 진리는 누구나 다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처음부터 다시 고찰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얻어진 결과가 다시 상식이 됩니다. 따라서 과거의 어떤 기인(奇人)의 비상식적인 말이 오늘의 상식이 될 수 있고 과거의 상식이 오늘날에 와서는 진부하고 괴이한 비상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어떤 행위나 말(의견, 생각)이 상식이냐 몰상식이냐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상식이냐?’ 하는 상식의 지향입니다. 타인이나 내가 상식이라는 말로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할 때에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이건 상식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당위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나 말은 닫힌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를 향한 더 이상의 사고를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묻는 것을 근거해서 몇 년 전에는 “가계저주론” 혹은 “가계치유론” 논쟁이 있었습니다. ꡔ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ꡕ라는 책으로 시작된 이 논쟁에서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① 인간의 복이 조상으로부터 자손들에게 유전되고(아브라함의 복이 자손 대대에 이른다). ② 인간의 저주도 가계를 통해 대물림되는데(불순종의 저주가 자손 삼사 대에 이른다), ③ 저주의 통로(유전인자, 악한 영, 부모모방, 혼의 묶임, 죄의 결과)를 보면 저주를 단절하고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무어라 대답했습니까?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큰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있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무엇입니까? 그 동안 받았던 멸시와 차별, 그에 따른 고통은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새겨봅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치유활동으로 회복된 사람들 중에는 문둥병자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두 가지는 하느님의 저주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고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율법적으로 사회에서 격리되고 온갖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고 지금은 절망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앞에서,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것은 안이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회복시킨 것은 삶의 질곡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킨 것이고, 결코 하느님의 저주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죄나 부모의 죄의 결과라는 상식을 깨뜨리고, 그를 보게하는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일”드러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일은 ‘무엇을 위한 상식이냐?’ 하는 상식의 지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근거에 대하여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것이 당시 율법의 상식이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로 그 상식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식을 깨뜨림으로써 또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에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단지 시력을 회복시키는 일만이 아니라 차별과 멸시의 근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이제 앞을 보게 된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말은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보는 것은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도 본다는 말은 이해하고 인식하는 일의 바탕이 됩니다. 먹어 보고, 들어보고, 만져 보고, 느껴 보고, 읽어보고, 말해보고, 생각해 본다고 합니다. 보는 것은 전체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고 깨닫는 일이며,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고 몸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자기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9절)이라고 말하는데, 이 때에 그가 한 말은 Egw, eivmi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어로 Egw, eivmi를 사용하는데, 출애굽기 3:14에서 야훼 하느님이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낸 “나는 나다”를 희랍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해하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변호합니다(30-33절). 이러한 그의 행동은 공동체로부터의 출교(22절)를 각오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내쫓김을 당합니다(34-35절). 그 후에 예수님을 만나서 직접 눈으로 보고, 예수님을 주로 따르며 믿었습니다(36, 38절).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상식적인가?’ 또한 ‘상식과 몰상식이 충돌하는 사회-정치적인 관계에서 억압으로 다가오는 상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고민은 ‘내가 지키거나 깨뜨리려고 하는 상식이 무엇을 위한 상식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상식이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를 바라며 나를 돌아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상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상식이자 권력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은 돈과 성공입니다. 사람들의 거의 모든 행위가 돈을 위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써서 공부하려고 매달리는 것도 돈과 성공을 향해 달려가기 위함입니다.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의 갈등과 전쟁이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돈이라는 상식을 깨뜨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17일에 돌아가신 권정생 님입니다. 어린이들에게 “강이지 똥” “몽실언니”로 유명한 권정생 님은 빌뱅이언덕의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인처럼 살면서도 모든 인세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여러분도 한가지씩은 기억하고 있는 님이 남긴 일화 하나하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이제 그가 이 세속의 삶을 마감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보내기 위하여 여기 모였습니다. 그의 이름 권정생, 이제 그 이름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지상의 평화와 통일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강자들의 폭력과 파괴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아니 사람들뿐 아니라 벌레와 새와 쥐와 개구리, 세상의 모든 약자들에게 진실한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존재를 가리키는 영원한 기호로 되었습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읽은 영결식 조사에서>
님의 책을 다 읽지 못했고, 님의 삶에 대하여 낱낱이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님은 세상에 대하여 자유인이었고, 모든 자연과 하나된 자연인이었습니다. 님은 진정 하느님의 일을 온 몸으로 행하는 이였습니다. 돈과 성공을 향해서 달려가는 세상의 상식을 깨뜨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위한 상식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님이 정호경 신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살아가면서 상식을 지키는 것이 편안하겠지요. 나의 말과 행동이 상식으로 통하는지를 돌아봅시다. 그러나 그 상식이 하느님 말씀에서 우리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면, 과감히 깨뜨립시다. 하느님의 일은 자연 속에 있으며, 부드러우면서도 해방을 향한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은 욕망으로 가려져 있던 눈을 떠서 예수님의 길을 깨달아 바로 보게 된 사람들의 일입니다.
확실한 고백
요한복음 9:1-12, 25 / 김삼환 목사
오늘 살아가는 이 시대는 정의 내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보는 눈보다 몇 배나 더 많습니다. 정말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는 일본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은 {상실의 시대}라고 하는 장편 소설을 내었습니다. 아사히 신문은 이 분을 천년동안 최고의 문학가로 꼽았습니다. 이 분이 자기 나라의 사람이니까 그런지는 몰라도 손을 꼽는 분입니다. 정말 이 시대는 상실의 시대인가? 모두 다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공허의 시대, 번민의 시대, 방황의 시대라 이렇게 모두 말을 합니다. 어떻게 정의를 해야 할지요? 영국 BBC방송은 앞으로는 남자 없이도, 정자 없이도 난자를 인체 세포 내에 염색체를 이용해서 수정시켜 여자가 여자를 낳는, 남자 없이도 동성연애자도 아이를 낳는 이런 시대가 되었다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이제는 꼭 어머니의 뱃속을 빌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팔에서도 머리에서도 다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명의 귀중함을 찾기가 어려운 이런 시대를 우리가 맞이했습니다. 앞으로 지식은 더 발달할 것이고 과학은 또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깜짝 깜짝 놀라면서 이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가하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고 유익하다고 다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지뢰밭에 더 이상 갈 수 없도록 위험 표시를 해놓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먹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먹으면 안 된다고, 너에게 큰 혼란과 저주와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 line을 넘어서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 인간의 자유와 행복과 만족은 넘어설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온다라는 거예요.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넘어설 때는 오히려 유익보다는 우리에게 고통과 파멸을 가져다주게 된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고 또 우리 인류는 지금까지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 안에 여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 만족이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문화든 지식이든 과학이든 제 각각 모든 면에 다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하고 싶으면 해야 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팔당댐에서 학생들과 여름 수련회를 했는데 그 위험 지대가 있는 line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한순간에 밑으로 빠져 내려가는 거예요. 제 생각으로는 이렇게 위험한 곳에 line을 한 4m 밖에다 쳐야 되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어요. 댐이어서 인지 절벽 밑으로 몸이 막 내려가는 거예요. line을 넘어선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주 안에, 은혜 아래, 말씀 안에, 주님을 믿는 그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잔칫상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 경험을 오늘날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가져야 부유한 것이 아닙니다. 다 알아야 지성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가져야 큰소리 칠 수 있고, 용기 있는 삶은 모든 것에 풍족해야만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있어도 오히려 더 약하고 비겁하게 되고 당황하게 되고 불안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믿음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우리로 신념을 갖고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안에 중심에 있을 때만 인간은 아름다움과 가치와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요사이 장마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보고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장마가 되면 유익이 없어요. 손해가 많아요. 가물 때에 피해보다는 장마일 때 피해가 훨씬 더 커요. 장마가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첫째로, 모든 과일은 맛이 없어져요. 수박, 참외, 토마토, 자두, 무슨 과일이든지 장마가 지면 맛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장마가 졌다 하면 수박을 사 먹지 말아요. 맛이 없어요. 단맛이 없어요. 수분이 많으니까 풍성하면 그만 맛을 잃어 버려요. 둘째로 병이 많아요. 장마가 지면 곡식들이 얼마나 병에 많이 걸리는지 몰라요. 고추든지 무슨 곡식이든지 병이 많이 들어요. 장마가 지면 병이 들어요. 셋째로 장마가 지면 잘 자라고 잎이 무성하지만 약해요. 다 쓰러져요. 무성하면 넘어져요. 참 이상하지요. 오늘 현대인들은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대인들은 맛을 잃어버렸어요. 오늘 맛을 가지고 살지 않아요. 가정에 맛이 없어요. 어머니, 아버지, 형제,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가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맛이 없어요. 가정이 무너졌어요. 가정을 모두 떠나는 거예요. 오늘 현대인들은 인간미가 없어요. 인격에 맛이 없어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까지 인간의 가치가 없어졌어요. 사실 우리가 밥 먹을 때도 음식 맛으로 먹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김치 하나를 가져다 놓아도 맛이 있는 시간이 식사시간이에요. 요사이는 자기의 맛이 없으니까 음식 맛을 찾아 헤매는 분이 있어요. 그게 물질을 먹는 것이지 식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맛을 잃어버렸어요. 오늘 현대인들은 병들었어요. 겉은 건강한 것 같고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다 병이 들었어요. 인격에 병이 들었어요. 윤리 도덕에 병이 들었어요. 양심에 병이 들었어요. 마음에 병이 들었어요.
저는 주일날 1부 예배를 마치고 기도를 해 드립니다. 긴급한 가정들을 만나서 기도를 해 드립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제일 많은 병이 옳지 않은 병이에요. 돌았어요. 학생들이 옳지 않은 거예요. 중 고등학생들이 옳지 않은 거예요. 두 눈이 바로 보지를 않아요. 멀쩡한데 키가 저같이 큰데 돌았어요. 아이들이, 어머니가 돌았어요. 부인들이, 남편들이 옳지 않은 거예요. 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 선진국은 80%가 정신적으로 비정상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을 수 있습니까? 정상을 놓고 봐도 다 비정상이라는 거예요. 요사이 어머니들이 채팅하고, 애인 만나고 그것이 정상이에요? 비정상이에요. 청소년들이 비정상이에요. 노인들이 비정상이에요. 자기 딸 같은 어린아이 데리고 청소년 성매매를 하는 것이 비정상이에요. 그런 사람이 80%가 되고도 남는 것이지요. 비정상이에요. 정신적으로 병들었어요. 인간이 병이 들었어요. 풍요로운데 병이 들었어요. 얼마나 또 약한지 몰라요. 잘 넘어져요. 용기가 없어요. 담대함이 없어요. 의지가 약해요. 마음이 약해요. 믿음이 없어요. 모든 것이 있으면 힘이 있는 줄 알고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힘은 안에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한 곳에서 인간의 힘이 나오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용기가 없어요. 담대함이 없어요. 오늘 많은 사람들은 힘이 없고 약합니다. 많은 분들은 "교회 갑시다"하며 전도해 보면 제일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돈 많이 벌어서 나갈께요."입니다. 돈 벌어서 나간다는 것입니다. 돈 벌어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 벌고, 배운 것 많고, 먹을 것 많고, 지식 많고, 가진 것 많고, 부족함이 없이 많은데 믿어지나요. 믿음이 생기나요. 이런 것이 없어야 잘 믿는데 말이에요. 다 있는 분 마음에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잘 살면 잘 믿는 게 아니에요. 믿음은 내 안에 있는 거예요. 내 심령 안에 있는 거예요. 세상의 헛된 것 안에 집어다 넣고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건 심히 우리를 약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내 중심에 자리 잡을 때만이 인간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용기 있는 담대한 삶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나의 살을 먹으려고 내게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향하여 진을 칠 지라고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히 거하리로다."
이 안전, 이 여유, 이 평안이 어디서 옵니까? 믿음에서 오는 거예요. 여호와가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능력이실 때 우리는 힘있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줄 믿습니다. 혹시 제초제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풀을 낫으로 베고 김을 호미, 괭이로 매고 그랬는데 지금은 농촌에서 제초제를 뿌려버립니다. 과수원에도 다 제초제를 뿌립니다. 다 죽어버립니다. 모든 식물은 다 죽어버립니다. 제초제를 무엇으로 만드는지 아십니까? 저도 몰랐어요. 제초제는 곡식에게 영양을 많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독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잘 못 들으셨어요? 다시 들어보십시오. 곡식에게 유익이 되는 영양분을 몇 배를 더 넣어 버리면 그게 독이 되어 죽어버리는 거예요. 모든 식물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이 주시지를 않아요. 어떤 교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여, 폭포수같이 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 폭포수 같이 부어 주시면 죽어 버려요. 그저 한 몫 쏟아 부어 달라고 하는데 쏟아 부으면 죽어버려요. 그래서 신앙생활 잘 하는 분들은 '하나님께서 나로 너무 부유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분은 건강한 나무, 건강한 생명, 건강한 가정이에요. 별로 노력하지 않는데도 쌓아두고, 넘치고 하면 그것은 독이에요. 제초제예요. 가정을 죽여요. 행복을 죽이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 인격을 파괴하는 거예요. 사람의 속에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을 귀히 여깁니다. 믿음이 홈런입니다. 믿음이 큰 산맥이에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등장시켜서 역사를 치료하고 역사를 이끌어 가도록 하시는 거예요. 기독교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블레셋의 골리앗이라고 하는 엄청난 장군이 이스라엘 국경에 와서 큰 소리를 지릅니다. "너희들 내게 나오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입니다. 이 장군과 싸워 이길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넘어가는 거예요. 옛날에는 싸움을 국가와 국가가 다 싸우는 게 아니라 일 대 일로 싸워 결정하는 일이 많이 있었어요. 각 나라의 장수가 나와서 장수가 지면 그 나라는 그대로 속국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다 죽는 것보다 경제적이지요. 그렇게 했으면 참 좋겠어요. 골리앗이 나와서는 소리를 치는 거예요. 네 나라에 나를 이길 자가 있으면 나오라는 거예요. 아무도 못 나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심히 온 나라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다윗이라고 하는 목동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해 본 일도 없고 구경한 일조차 없는 양을 치는 목동, 홍안 소년, 17살 난 이 소년이 그곳에 와서 봅니다. 골리앗을 봅니다. 골리앗의 키가 얼마인지 아세요? 제가 모르다가 이번에 성경공부 시간에 찾아보았더니 2m95cm예요. 창 자루가 베틀 채 같습니다. 가슴에 갑옷 무게가 60Kg이에요. 얼마나 큰 힘있는 장군인지 몰라요. 아무도 여기에 나설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1m75 인데 키는 조금만 더 커도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김포공항에 갔다가 마침 농구선수 박찬숙 선수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박찬숙 선수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안고 걸어 나오는데 그 선수의 키가 1m90 이예요. 저하고 15cm 차이에요. 대단한 키가 아니에요. 그런데 걸어오는데 보니까 소나무가 나오는 것 같아요. '사람이 아니야!' 흔들흔들 하면서 나오는데 세상에 1m90이 그렇게 클 수가 없는 거예요. 20cm 작은 분이 저와 같이 서면 얼마나 작은지 모릅니다. 커봐야 20cm 인데 그래요. 그런데 골리앗이 2m95cm 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놀래지도 않네요? 나설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어느 장군이 나가겠어요? 그러나 이 군인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 있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용기가 있어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담대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담대해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땅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염려하지 않아요.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보다 큰 힘은 없으니까요.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 말이에요. 다윗은 담대하게 나갔어요. "네가 믿는 것은 칼과 창 밖에 없느냐? 네가 믿는 것은 네 자신밖에 없느냐? 나는 내 힘이 아닌 하늘의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 건져 주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노라. 나오란 말이야..."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의 시험을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문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 시험을 어떻게 이겨내야 합니까?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면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시험에서 우리는 항상 승리할 줄 믿습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합니다. 큰 교회이어서 큰 교회는 아닙니다. 적어도 믿음만 크면 그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여도 믿음이 없는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힘이 없습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지 다른 것은 세상이 다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믿으려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을 물을 때는 "너, 예수 믿느냐?"고 해요. 예수 믿으러 교회 나가는 거예요. 믿는 사람이에요. 저 집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그래요. 교회는 믿으러 나오는 거예요. 다른 종교는 공을 드리러 가는 거예요. 믿으러 가냐고 하지 않아요. 여기는 공을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고 믿으러 오는 거예요. 여기는 믿음이 있어야 되요. 하나님의 교회는 믿어야 큰 일하고 믿어야 능력이 나타나고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거예요. 믿는 자를 하나님이 만나시고 찾아 주시는 거예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믿음을 중심으로 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 용기 있게 살아가는 담대한 능력 있는 권능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소경이 나옵니다. 거지입니다. 장님이면서 거지였어요. 길가에 있다가 우리 주님을 만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침을 뱉아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시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어요. 이 사람이 나음을 받았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보는 분들이 놀랍니다.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 다 놀랍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눈을 뜨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지 묻습니다. 모두 다 묻습니다. 너 어떻게 눈뜨게 되었느냐? 그러면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소경이었다"라는 거예요. "I am 소경"이라는 거예요. 교회는 웃으려고 나오는 거예요. 웃으라고 한 마디 할 때 웃어야지 끝까지 안 웃는 것도 좋지 않아요. 모두가 물으면 항상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고침 받았느냐? "나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고쳐주셨다"라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지나가시던 주님이 흙을 이겨 발라 주셨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셔서 씻었다는 거예요. 오늘 예수 믿으면서 많은 지식이 있고 많은 것을 알아야 잘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은 이 정확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것을 믿고 이것을 의지하고 이것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 크게 영광 돌리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한 진리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누가 나를 고쳤는지 누가 나의 죄를 사했는지 나를 구원했는지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지금까지 산 것이 누구의 은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람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누가 우리 교회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천 번 말해도 같은 말을 해야 돼요. 주님께서 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눈을 뜨게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을 유대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혼란이 오거든요. 그래서 부모들에게 가서 협박을 했어요. 그런 말하지 말라고… 죽인다고… 출교해 버린다고… 그러니까 부모들이 벌벌 떨면서 "저희들은 잘 몰라요.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이번에는 자녀에게 협박하며 물었어요. "정말 예수가 그랬어?" {그래요. 확실해요. 당신들도 그분 믿으려고 그러세요? 틀림없어요. 내가 구원함을 받고 고침을 받은 것은 주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셨어요.} 오늘 어떤 위기 속에서도 이 고백을 분명히 하고 이 믿음 분명히 하고 이 신앙만 분명히 하면 이 세상은 승리합니다. 소경으로 고침만 받았다면 예수님이 왜 이 사람을 등장시키겠어요? 소경으로 눈을 뜬 사람이 한도 없이 많아도 성경은 눈 뜬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에요. 병 고침 받은 사람을 성경에 기록하지 않아요. 믿음이 있는 사람! 누구든지 고침을 받았을 때에 믿음으로 간직하는 사람은 병 고침 받을 뿐만 아니라 주 예수 안에서 만대에 하나님께 복을 받는 줄 믿습니다.
신앙은 담대함입니다. 신앙은 용기입니다. 신앙은 고백입니다. 신앙은 삶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나에게 소중한 줄 압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가지고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임종을 맞이할 때 목사를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참 중요한 때이지요. 숨이 넘어갈라고 할 때 주의 종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앉고 임종을 맞이해 준 분도 있고 많은 분들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90%가 말을 못합니다. 이미 거의 다 말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서 묻습니다. 집사님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께서 나의 구주 됨을 믿습니까? 이 시간 천국 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당신의 구주입니다. 그러면 거의 다 말은 못해도 끄덕거려요. 반응이 와요. 중환자실에 있는 분도 산소 호흡기 다 꽂고 있어도 제가 가서 그 말을 하면 눈을 가늘게 뜨든지 반응을 해요. 왜 그렇습니까? 임종을 맞이해서 무엇을 믿습니까? 다 떠나갔습니다. 지식이 무슨 소용이며, 자식이 있어도 어느 누가 위로가 됩니까? 이 캄캄한 그의 앞날을 인도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어디에서 어떤 임종을 맞이하든지, 교통사고든 암이든 자연사이든 간에 사람이 이 땅을 떠날 때 무엇이 우리를 도와주느냐 말이에요. 누구하고 갈 것인가 말이에요. 재물이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평안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천국입니다. 천국 가는 지도를 주님이 주십니다. 천국 문을 여는 키를 주십니다. 믿음이 천국 문을 여는 거예요. 믿음을 가질 때 주님이 인도해 주시는 거예요.
해외 여행을 가서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권입니다.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두 번째는 가이드입니다. 가이드가 오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꼼짝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이곳에 있지만 저곳의 여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여권을 가지고는 이 세상을 승리할 수가 없어요. 만군의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믿으면서 이 세상을 살 때만 이 세상에서 모든 일에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즐겁게 여행을 하게 됩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하며 걸어가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가이드는 누구입니까? 성령이 우리의 가이드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가이드입니다. 우리는 아무 길로나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이 나그네의 길, 외국인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진리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지식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무관합니다. 어떤 행복도 다 떠나갈 것입니다. 떠나가는 줄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확실하게 고백할 때 주는 언제나 나를 돌보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내 믿음이 확실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확실한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책에 보면 이호준 씨가 글을 실었는데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분은 IMF 때 실직을 했다가 몇 년만에 다시 취직을 했는데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다가 너무 잘해서 서울 본사 발령을 받았어요. 본사에 와서 일을 하다가 새로 온 부장님이 매일 출퇴근을 시켜달라고 해서 힘이 들지만 매일 출퇴근을 시켜 주었어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용기가 없어 거절도 못하고 매일을 그 일에 매여 사는 거예요. 하루는 부장이 가는 곳에 함께 가서 술을 주는 대로 먹고 운전을 하다가 걸렸어요. 그만 운전 100일 정지를 당하고 벌금 70만원도 물었어요. 그 부장이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장이 책임지고 다른 곳에 근무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장이 이 일을 알고는 일과 시간에 술을 먹고 안되겠다 하여 목을 잘라 버렸어요. 부장이 와서 "이 사람아, 내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지만 사장에게 내가 그랬다고 하지는 마. 나 때문이라고 하지는 말아 줘. 나는 애들이 2명이고 먹여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네는 아직 젊지 않는가? 나는 나가면 갈 곳이 없지만 자네는 어디 갈 곳이 있지 않겠나?"라고 하니까 또 NO를 못했습니다. 결국 나와서 갈 곳이 없어 한강가에서 늘 술을 먹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문제가 여러 가지가 아니었고, 이 모든 문제는 내게 있었다. 내가 용기가 없고 내가 담대함이 없었고 내가 NO를 못했다'라는 거예요. 다 겁이 나니까. 이 말, 저 말 다 듣고…
여러분. 죄를 안 짓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돼요. 담대해야 안 짓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이 세상을 승리하는 거예요. 사업을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좋게 하다보니 사람이 죄를 짓고, 우리 인간이 가는 길에 이렇게 정지를 당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오늘 믿음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어려서 제일 멋있는 삶이 선배들이 저녁이 되면 언덕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멋있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또 기타를 치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한번 저래봤으면… 제가 나중에 학교 다닐 때 자취를 하면서 쌀을 팔아서 하모니카를 샀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저녁이 되면 학교 뒷동산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었어요. 해는 지고 어두운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을 불고 나니 세상에 제일 공허하고 허무한 삶은 밤에 하모니카 부는 삶이에요. 보기와는 전혀 달라요. 그리고는 또 기타를 배웠어요. 그리고 기타를 쳤어요. 나중에는 아코디언도 쳤어요. 다 혼자 하는 거예요. 다 사람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 같지요? 얼마나 허무한지 몰라요. 얼마나 공허한지 몰라요. 다른 사람 보기에 아름답지요? 저 별장이 보기에 아름답지요?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허무하고 공허한 것을 알아야 돼요. 저는 요사이 청소년들이나 많은 분들이 머리 염색을 지나치게 빨갛고 파랗게 하는데 여러분 1년만 가보세요. 그 자리에 오래 못 있습니다. 허무합니다. 이 세상 물질의 파도에 휘말려서는 안정도 자유도 행복도 없습니다. 내 안에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승리하고 내 자신을 이기고 길이 길이 영원히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종류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 이 사람의 죄입니까 ?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가서 씻소,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뜬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비뚤어진 바리새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번째로 불러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하고 말하였다.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들어 주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다.
가만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선생님이란 직임을 감당하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선생님이 아니고, 제자라고 해서 다 같은 제자가 아니며,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을 봅니다. 분명 같은 부류에 속해는 있지만 그 가운데는 존경받는 분이 있는가 하면 지탄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가에 따라서 어린아이들이 가슴에 큰 상처를 받고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도 보았고, 반면에 다른 아이들은 훌륭한 선생님 때문에 아름다운 꿈과 재능을 한껏 개발하게 되는 참으로 부러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생님의 인격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아이들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교회학교와 사회에서 다니는 학교에서 진실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의 영향이 그만큼 크고 중요합니다. 아마도 자녀들이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아이들의 생활과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과거에 학부모였거나 현재 학부모이신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님의 역할이 자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또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분명히 믿음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믿음이 있는가 ? 하면 잘못된 믿음으로 자기를 망하게 하는 믿음도 있고, 자기만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까지 힘들게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 먼저 위대한 믿음을 한 가지 예를 들면 미국 달라스 신학교가 지금은 유명한 신학교가 되었지만, 1924년경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학교의 설립자인 루이스 쉐퍼 박사와 동역자들이 학장실 문을 잠그고 학교를 처분할 것이냐 ? 라는 문제를 가지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쉐퍼 박사 옆자리에서 해리 아이언사이드 라는 교수가 기도하기를, "주님,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니십니까 ? 그 가축들 가운데 얼마를 팔아서 돈을 보내주셔서 이 학교가 빛을 갚고 학생들을 계속 양육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목동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사람이 학교 사무실에 와서는 말하기를, "저는 여기 사는 목동입니다. 저는 오늘 마차 두 대 분의 소를 끌고 시장에 가서 소들을 팔았습니다. 그 돈을 저는 다른 데에 투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 이것을 더 보람 있는 일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이 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돈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사무실의 아가씨는 그 돈을 받아 가지고 황급히 학장실로 뛰어갔습니다. 가니까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돈을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교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하기를,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돈을 보내주셨습니다"라고 했답니다.
■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르타고(Carthago)의 명장 한니발(Hannibal)은 언제나 자신의 부장 가운데 한 사람인 피로스란 (Pyrrhus,319-272B.C.)장군을 최고의 영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피로스란 장군이 아르고스(Argos)라는 지방을 침공했을 때에, 도시 중앙에 늑대와 황소가 싸우는 모습의 조각을 보는 순간, 엄청난 쇼크를 받고 갑자기 멍청해지더니 실성한 사람처럼 서서 우왕좌왕하다가 현장에서 적군의 화살에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역전의 용사요 전쟁터에서는 도무지 무서운 것을 몰랐던 영웅이 왜 그랬을까요 ? 그 해답은 피로스가 젊었을 때 듣게된 신탁 때문이었습니다. 피로스가 들은 신탁의 내용은, "그대 피로스는 늑대와 황소가 싸우는 것을 보는 날에 죽으리라"는 것이었고 피로스는 이것을 의심 없이 믿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로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 위크 (4월15일) 최근호에 의하면 미국 카톨릭교회가 사제들의 성추행 파문으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합의금을 내야할 뿐 아니라, 헌금과 성금이 끊어지면서 카톨릭교회의 재정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잘못된 믿음이 교회와 교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비단 미국 카톨릭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잘못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믿음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은 신자가 아닙니다. 같이 한 교회에서 10년을 믿고 20년을 믿었어도, 사람에 딸서 믿음에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요한복음 9:1-12의 말씀을 가지고 믿음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 이 사람의 죄입니까 ? 부모의 죄입니까 ?"라고 물었고,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후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러자 소경이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씻고는,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습니다. 이웃들과 그가 전에 소경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눈을 뜬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묻기를,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 ?"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했고, 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였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 형편을 진지하게 살펴보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담대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불치의 병이나 신체 장애자는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두고도 제자들이 주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 자기오니이까 ? 그 부모이오니이까 ?"라고 묻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사람은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인데, 그것이 본인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병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이렇다보니, 병자들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주류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온전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지탄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병자들 그리고 장애자들과 그 가족들은 참으로 불행하고 외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더니, 보지 못했던 그의 눈이 밝게 열려진 것입니다. 이제는 장애자도 죄인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도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소경이었다가 보게 된 그 사람은 굳세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보게된 큰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거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3절은 증거하기를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다기보다는 강제로 붙들어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은 안식일을 더럽힌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예수님의 흠을 트집 잡아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궁지로 몰고 가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철저하게 핍박하려고 결의한 것입니다. 여기서 '출교하기로 결의했다'는 말은 매우 무서운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말하는 출교에는 세 종류의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는 '네지파'입니다. 이것은 일주일 정도 징계하는 약한 파문이며 비공식으로 행했습니다.
둘째는 '니두이'입니다. '귑마타'라고도 하는데, 이는 30일 정도의 공식적인 파문입니다. 이 때 출교를 당한 사람은 다른 유대 백성들과의 교류가 일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예식에는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헤렘' 입니다. 이것은 영구적인 출교를 말하는데, 이 징벌은 유대사회에서는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벌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구적으로 출교를 당할 경우, 공민권은 완전히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는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엄한 벌이었습니다. 이 출교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처벌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사람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지만, 출교를 당한 사람은 동족인 말이 통하는 유대인과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헤렘'인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것을 트집잡아서, 이단으로 정죄를 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사회에서 내어쫓기로 결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붙잡아 놓고 묻습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느냐 ?' 소경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라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기를,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보게된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당장에 출교를 시켜버리겠다는 협박입니다. 만일 다시 보게 된 이 사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면 그는 영원히 유대 사회에서 매장될 수밖에 없고, 유대인과는 말 한 마디 나눌 수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유대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나 권리를 조금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사회로부터 쫓겨남을 당하는 위기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고, 담대하고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담대하게 대답하기를,"선지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이 다시 보게된 사람은 '당신들이 그분을 이단이라고 우겨도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출교시켜, 죽는 날까지 외롭게 살다가 죽게할지라도 나는 그 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참으로 담대한 믿음이요, 굳센 믿음이요, 흔들림이 없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본받고 배우고 따라가야 할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그렇다고 믿으시면 아멘) 이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기는 했어도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가 죽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출교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것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담대하게 믿음을 굳게 하면서, 자기에게 다가올 핍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지체가 높고 그 사회에서 권위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지금 소경이었다가 보게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핍박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선을 위한 열정이 있고, 선한 싸움을 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합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오'라고 바리새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30절 이하에서 이 소경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소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깨닫지 못하는도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거늘 당신들은 어찌하여 그 분을 믿지 못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소경을 보게 하고,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출교를 당할 상황 아래서 담대하게 이 소경이었던 사람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말은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너무도 용기 있고, 분명하게 자기 믿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린 것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고,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아주 선명한 증거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부끄러워 할 때도 많았고 흔들릴 때도 많았습니다. 내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적당히 타협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이 소경이었던 사람의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욕을 먹더라도, 출교를 당하더라도,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더라도 당당하게 나의 인생을 바꾸어주신 분이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 드러내는 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요,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제부터는 이런 신자가 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는 눈치를 보며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소경이었다가 보게된 사람은 출교 당할 것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마는, 그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통하여 예수의 흠을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그의 부모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묻기를 '눈을 뜬 소경이 너희 아들이냐 ?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게 되었느냐 ?'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부모가 대답하기를,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 아들이 보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는 '자신들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들이 왜 '예수가 고쳐주셨다'고 솔직하게 말을 못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고쳐주셨다고 하면 출교를 당할까봐 그것이 무서워서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고 정확한 답을 회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모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압니다. 유대 사회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실로 죽음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출교가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나 하나라면 죽을 각오를 하면 되겠지만, 토끼 같은 자식들의 눈망울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 하지만 여러분,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에게 가혹한 죽음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믿음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소경이었다가 보게된 사람의 부모의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들보다 더 두려워하고 더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환란을 만났을 때, 믿음의 시험을 당할 때에, 성령께서 내 믿음을 붙들어 달라고, 요동하지 않는 강한 믿음을 달라고,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그런 시험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고 있고, 영혼이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눈치를 보는 믿음이 아니라, 소경이었다가 보게된 사람처럼 담대하게 주님을 전하고 외칠 수 있는 영적 담력이 여러분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말로만 그럴 듯하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있는데,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아주 거룩해 보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운운하면서 예수가 바알세불에 사로잡혔다고도 하고, 바른 유대교인이 아니라고 정죄를 하면서, 거룩한 척을 합니다. 감히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참으로 망령된 짓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를 거룩과 믿음으로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하기를,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고, 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데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되 예수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조금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것을 보세요. 안식일을 운운하면서, 예수를 정죄 하고, 표적이 나타나자 표적을 행한 자는 무시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충고도 해 줍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틀린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죄와 허물이 없는 예수는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거룩해 보이고 말로는 공의로운 것 같은데, 실상 그 행동은 의로운 사람을 핍박하고, 허물없는 사람을 실족하고 넘어지게 하는 못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사람에게 말하기를,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고 하고, 쫓아내어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경을 출교 시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사람, 믿음을 굳게 지키고 담대히 예수를 전한 사람을 출교 시키는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명 야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순종한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악한 짓을 골라서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순진한 성도에게 상처를 입히고, 의로운 자를 출교 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처럼 신앙생활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마음,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용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구체적인 행함과 생활이 있어야만 합니다.이것이 없는 신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란 종교에 속한 종교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인은 이웃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 한번 자신을 진지하게 살펴보시고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세 종류의 신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과 같이 출교를 각오하고 담대히 주님을 증거 하는 믿음도 보았고,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는 부모의 믿음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거룩한 척, 믿음 있는 것같이 보이나 이면에서는 악한 짓을 골라 행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소경이었던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여러분 모두에게 소경이었던 사람과 같이, 나를 변화시킨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세고 담대하게 증거하고, 전하는 데,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보인다
김상복 목사
이번 주는 장애인 주간입니다. ‘장애인’ 하면 헬렌 켈러나 옥스퍼드 대학의 스티븐 호킹스 박사가 떠오릅니다. 한국인으로는 시각장애자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유학하여 지금은 부시대통령의 정책보좌관으로 있는 강영우 박사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 자폐아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말아톤’을 통해 장애인들에 대한 따뜻한 느낌과 정을 갖게 된 것은 한국사회에 큰 축복입니다. 이들은 장애인들도 장애를 극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러해 전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장애인 사역을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 가정에는 장애인이 있으면 집에 숨겨놓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분들에게 밝은 삶을 살게 할까 기도하던 중 마침 어느 장애인 가족이 저희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8살과 9살 정도 된 두 자녀가 모두 정신지체아였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워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환영하고 이 아이들을 시작으로 장애인 사역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주변에 장애아들이 있으면 교회에 데리고 나와서 그 아이들을 함께 사랑하고 좀 더 밝은 삶을 마련하도록 도와주자고 했습니다. 희망을 가졌습니다.
저는 매주 그 아이들과 부모를 찾아서 격려해주었는데 6개월 정도 후에 보니 그 가족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어디를 갔습니까?” “목사님, 요즘 그 가정이 마음에 시험이 들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가 목사님을 좋아해서 그 교회를 나가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나가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점점 교회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을 구박하고 못살게 굴어서 이제 우리 아이들이 교회 가기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른들조차 자신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 힘들어서 도저히 교회 나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가족은 이제 동네의 미국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 나가니까 어떠셨어요?” “우리 아이들이 그 교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환영하고 사랑해주는지 우리에게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미국교회와 저희 교회는 2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그 부모와 아이들이 느낀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요. “잘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십시오.” 저는 그 분들을 축복해주고 그 집을 나왔습니다.
한국 사회도 장애인에 대한 태도가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1990년에 제가 할렐루야 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2년 전에 장애인을 위한 ‘사랑부’를 조직해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기도는 미국에서 했는데 응답은 한국에서 받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부에서 섬기는 선생님들을 보고 너무 감격했습니다. 16년이 지난 현재 사랑부에는 56명의 장애아들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65명의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두 명의 선생님이 돌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사랑부 아이들과 부모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을 베푸는 선생님들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중에는 ‘사랑의 학교’에서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지원해주시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최근 사랑의 학교 학생들이 비누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최고 비누회사로부터 재료를 공급받고 제조 방법을 전수 받아서 만든 것입니다. 이 아이들도 가치가 있고 생산성이 있고 이 사회에 작은 공헌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길을 열어주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는 사업 중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의 학교 아이들에게 맡겨주세요. 이들이 학교수업과 함께 일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고 유익한 삶을 살도록 돕고 싶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가져 온 그 비누를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랑’이라는 브랜드인데 제가 제일 먼저 한 통을 사서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1층 로비에 아이들이 만든 비누는 물론 여러 종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내려가시면 아이들이 여러분께 차도 대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교회 안에 사랑의 학교와 사랑부를 두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대부분 “아멘!” 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암에 걸려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술고래에 골초여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삽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 인생이 공평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 태어나서 일하지 않고 돈을 펑펑 쓰면서 삽니다.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한 장애 때문에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나의 특별한 잘못이 아님에도 힘든 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 인생에는 두 가지 상황이 있더군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상황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저의 태도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놓고 불평불만하고 저주하고 욕을 해서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장애를 일으키는 인생을 살 수도 있는 반면 몸이 불편하고 환경을 감당할 수 없어도 마음의 태도 때문에 얼마든지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파월 장군이 학생시절에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건물 바닥을 쓸고 닦는 일이었는데 그보다 먼저 일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일하다 말고 빗자루를 잡고 서서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 이 회사는 왜 이렇게 월급을 적게 주는 거야.”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말없이 자기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1년 뒤 그 직장에서 다시 일을 하게 된 파월은 그 둘을 또 만났습니다. 불평하던 사람은 여전히 불평만 합니다.
“내가 이 직장을 다닌 지 몇 년째인데 아직 승진도 시켜주지 않아.” 다른 한 사람은 여전히 말없이 자기 일만 성실히 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 파월은 그 직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불평하던 그 사람은 이유 없이 몸에 장애가 생겨 회사를 그만두고 어딘가에서 고생하고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환경은 같았지만 태도가 달랐습니다. 뉴욕의 빈민촌에서 태어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던 파월은 그 일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건이 아니라 여건에 대한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 결국 파월은 흑인으로서 미국의 장군이 되었고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다음 미국 대통령 선거 때는 어떻게든 그의 이름이 거론될 것입니다.
장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때로는 무시 천대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제가 예언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잘 걷던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잘 보이던 눈이 보이지 않고 잘 들리던 귀가 들리지 않는 날이 옵니다. 누구든지 70, 80년을 살면 모두 장애를 갖게 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의 장애가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각장애자가 등장합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지녔던 그는 평생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만났습니다. 항상 그곳에서 구걸을 했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 그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장애는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든 부모든 조상이든 누군가의 잘못 때문에 장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앞을 못 보는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잘못 때문입니까?” 장애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당황합니다. 혹시 내 유전자에 장애요소가 있어서 이 아이가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인가, 아스피린을 먹은 것 때문인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죄의식이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본인의 죄든지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회설이라고 하는 힌두교와 불교의 사상이지요. 힌두교에 따르면, 달리트라는 최하층 불가촉천민(untouchable)들은 전생에 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며 살다가 죽어야 된다고 합니다. 전생의 악행으로 인해 천민으로 태어났으니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힌두교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들은 전생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이랍니다. 남자들은 전생에 괜찮았던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입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장애는 다 있습니다. 육체적 장애, 정신적 장애만 장애입니까? 성격의 장애도 있습니다. 비뚤어진 성격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고 어려움을 주는 인격 장애도 있습니다. 영적 장애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눈은 떴는데, 대학교는 졸업했는데 영적인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의 눈이 어둡고 육신의 귀는 밝으나 영의 귀가 어둡고 육신의 발은 활발하나 영의 발은 둔해서 일어나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영적인 장애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눈 먼 사람을 보고 그의 장애가 누구 때문인지 장애의 책임을 추궁합니다. 한국 사람은 조그만 잘못에 대해서도 책임추궁을 잘 합니다.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고 쫓아내려 하는 경향성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보다 한 술 더 떠서 눈 먼 사람이 눈을 뜬 것을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야단칩니다. 트집을 잡아서 장애인에게 더 큰 짐을 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까지 불러서 누가 고쳐주었느냐고 겁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째서 안식일에 눈 먼 자를 고쳤느냐?”고 예수님까지 추궁을 합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평생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떴으니 이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할렐루야! 당신 때문에 눈을 떴다니 참 수고가 많으셨다.” 이러지 않고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되는데 왜 사람을 고쳤느냐?” 하면서 짐을 더 얹어주었습니다. 앞에서 장애 아이들과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교회에 나왔는데 교회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그 가족을 더 힘들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제를 보고 그 원인을 추궁하지 않고 문제해결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자기의 죄도 아니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애든지, 문제든지, 시련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부정적인 사태가 생기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어두운 세계를 밝히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가 있으면 고쳐주고 낙심한 자가 있으면 격려해주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으면 눈물을 닦아주고 가슴이 아픈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어서 어두운 세계를 밝혀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문제를 밝히기 위해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주위의 어두움을 밝히며 살기를 원합니다. 따라하십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소금이 되고 싶은데…, 소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인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처럼 빛입니다. “네 선한 일을 사람들 앞에 보여서 사람들이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 주위에 어두운 일들을 두셨을지 모릅니다. 정신적 장애, 성격적 장애, 학습장애, 영적 장애, 경제적 장애 등 온갖 장애를 예수님께 가져오면 예수님께서는 그 어두움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흙에 침을 뱉어 눈 먼 자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진흙은 치유의 효능이 없는 흙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러 개의 못이 있었지만 실로암 못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누가 보냄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러분의 장애가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모든 장애를 실로암이신 예수님께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 분 앞에 가서 “주여, 내 눈을 밝게 하옵소서. 내 귀를 열어주옵소서. 내 발에 힘을 주시옵소서. 내 인생을 일어나 걷게 하여 주옵소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가져온 장애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해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분이 아니며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짐을 가볍게 하고 힘든 자에게 힘을 주며 낙심한 자를 일으켜주며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면 예수님께 가져오십시오. 그 분 발 앞에 내려놓고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간구하면 여러분의 눈이 뜨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어렵고 연약한 사람들을 삶에 빛이 나고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들을 주님께 안내하면 주님께서 그들의 어두움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김영규 목사
날 때부터 맹인 된 자
9장은 한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이야기입니다. 배경은 여전히 성전 부근입니다.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맹인이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1)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내력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세상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맹인들 중에 상당수는 중도 실명자들입니다. 중도 실명자들은 실명하기 전에 세상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생겼는지 기본적인 영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맹인은 기본 영상이 없습니다.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색깔이 어떤지, 사람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개와 고양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태양 빛이 어떤지, 하늘은 어떻고 구름은 어떤지 모릅니다. 볼 수 없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복음서에는 맹인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맹인은 영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본문의 결론부인 41절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육의 눈으로 세상은 보면서도 영적 세계를 못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 맹인입니다. 성경은 육적 맹인보다 영적 맹인에 주목합니다. 영적 맹인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구주 예수님, 성령의 역사, 천국, 지옥, 죄, 심판, 영생과 같은 영적 세계의 대상들을 볼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소리와 마귀의 소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 세계입니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모든 삶의 변화들이 다 영적 활동의 결과물입니다. 직장도, 사업도, 건강도, 인간관계도, 지식도, 사상도 모두가 영적 활동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영적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본 바도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는 맹인들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맹인을 바라보면서, 2천 년 전의 어떤 맹인 이야기로 듣지 마세요. 바로 오늘 영적 세계를 못 보는 내 자신을 향한 말씀인 줄 알고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길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 이 사람이 맹인 된 것이 누구 죄 때문일까? 제자들은 이 사람이 맹인이 된 이유를 어떤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았을까? 본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가? 당시에 어떤 랍비들은 어린 아기가 모태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5:22에 보면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태속에서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가 서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랍비들은 부모의 범죄가 자녀에게 나병이나 간질병을 가져온다 했고, 賢者가 요절하는 것은 모친의 죄 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질문을 한 겁니다.
우선 정죄적인 접근법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불행을 당하면 먼저 정죄합니다.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했나? 어떤 죄의 대가로 벌을 받는다고 단정합니다. 이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보편적인 본성입니다. 욥이 큰 재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위로 차 찾아 왔습니다. 그들은 욥의 불행을 보면서 단정했습니다. 욥이 필시 남모르는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께 크게 벌을 받았구나!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루아침에 10남매가 죽고, 가축 떼가 몰살당하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앓아눕는단 말인가? 세 친구는 욥을 추궁하고 책망했습니다. 어서 자백하고 회개하라! 그러나 욥은 친구들에게 반발합니다. 나는 누구 못지않게 정직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애를 쓴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런 불행이 다가왔다. 욥과 세 친구는 죄 때문이다 아니다 하면서 긴 논쟁을 벌입니다.
정죄적인 태도 이면에는 사랑이 없는 차가운 인간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차가움, 몰인정함! 남이 당하는 불행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명색이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맹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덤덤합니다. ‘불쌍하다’ 혹은 ‘도와주자’는 생각보다는 그저 ‘누구 탓으로 맹인이 되었는가?’만 묻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우선 구해야 합니다. 책임 추궁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것이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서 골고루 내리시지 않습니까?(마5:45)
남의 탓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무슨 재난만 일어나면 남을 탓합니다. 이게 다 누구 잘못이냐? 그러나 누구를 정죄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내 곁에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정죄하지 마세요. 먼저 불쌍히 여기세요.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
그러면 이 사람은 왜 맹인이 되었을까? 하늘 아래 우연은 없습니다. 머리터럭 하나까지 간섭하고 헤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을 앞을 못 보도록 하셨을까요? 일부러 앞을 보지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내 인생은 이럴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3) 무의미한 인생은 없습니다. 맹인이 된 것 조차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계시물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 사람이 맹인 된 이유가 본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본인이나 부모가 무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 없는 죽음이 없고, 허물 없는 고초도 없다.”(R. Ammi)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불행은 전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모의 죄나 본인의 죄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맹인이라는 큰 불행이 꼭 특정한 죄에 대한 형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에 무슨 일이 생기면, 특히 나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죄와 벌의 논리로 접근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행은 형벌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내 인생이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뭔가 업적을 남기는 겁니까? 아니면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겁니까?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내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고 내 인생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어떤 불행을 타고 났다 할지라도, 그 불행까지도 뭔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주님은 앞 못 보는 맹인 거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현재 가진 모든 조건은 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심지어 내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불행한 조건들까지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낙심치 말아야합니다. 가난하다고 낙심 말고, 불구라고 낙심 마세요. 사업에 실패했다고 낙심 말고, 시험에 떨어졌다고 낙심 마세요. 부모 갖지 못했다고 원망 말고, 사람 잘 못 만났다고 불평 마세요. 아무려면 맹인으로 태어나서 구걸하며 사는 사람만큼 불행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러므로 불행의 원인을 캐기 전에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왜 나의 삶을 주셨을까? 오늘 내가 당하는 불행은 무슨 일을 이루려는 계획이 있을까?
그러면 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려는 하나님의 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는 이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이로써 빛이신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 인생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은 내가 구원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된 일입니다. 다음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나타내게 된 일입니다. 본문의 맹인은 눈을 떴습니다. 보이지 않던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입니까? 그러나 육신의 눈을 뜬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 맹인은 눈을 떴지만 아직도 영의 눈은 어두웠습니다.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장면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그리고 점차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비로소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일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앞서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6:29)이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고 인간에게 최고의 특권이요 회고의 축복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하나님을 경배케 된 일! 하나님을 드러내는 인생이 된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나타내시는 최대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자녀가 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이적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오늘 이러한 이적이 여러분과 가족과 이웃에 나타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낮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
하나님의 일은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낮에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낮이란 언젭니까?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 동안을 낮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신 동안은 영적으로 낮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그때는 밤입니다.
빛의 역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눈이 나쁘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의 눈이 제아무리 좋아도 주위에 빛이 없다면 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에는 이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먼저 주님은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서 영적 세계를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어둠의 세상을 비춰주셔서 밝히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 마귀, 귀신, 인간 영혼, 천국, 정의와 불의, 죄, 심판, 구원의 길 등등. 그러나 주님이 떠나시면 도덕적 혼란이 오고, 영적 암흑이 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동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4절 말씀에는 두 가지 강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we, must)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내가’ 홀로 하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될’ 일!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 공동의 사명입니다. 성직자만의 사명이 아닙니다. 성도들 모두의 사명입니다. 둘째로, 영혼 구원은 시한부 사업이라는 사실입니다.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 예수님은 스스로 빛이시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가 계신 동안만 일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당시의 제자들은 6개월이 지나면 주님을 떠나보내야 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는 동안은 정말로 잠시 뿐이었으며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매우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은 가깝습니다.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는지, 언제 불현듯 마감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사람들을 구원해야합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그러면 이제 주님이 맹인을 어떻게 고치셨는지 살펴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6-7)
주님은 먼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셨습니다. 왜 진흙인지, 왜 침을 뱉었는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셨는지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기는 곤란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침을 눈병에 사용하거나, 진흙을 약으로 사용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본래 흙이란 창조 때에 사람을 만든 재료입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은 인간 육체의 고향입니다. 아마 흙은 인간에게 최고의 치료약인지도 모릅니다.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주님의 다양한 치료 방법입니다. 어떤 때에 주님은 말씀으로만 병을 고치셨습니다. 어떤 때는 손으로 만져서 고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흙이나 침 같은 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고치려면 무조건 약도 먹지 말고 의사에게 가지도 말고 이적으로 나아야만 된다고 주장합니다. 약은 하나님이 내신 것이 아닌가요? 의사의 손길은 하나님 수단이 아닌가요? 저는 인류에게 약을 주시고 의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의 모든 치료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다만 인간이 불치라고 판정한 병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식의 범주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이지 하나님의 세계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튼지 하나님의 다양한 치료 방법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실로암이란 히브리 말로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가? 역사적인 유래가 있습니다. 기원전 740년경 유다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받아,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기혼샘에서부터 성 안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터널을 팠습니다. 기혼 샘(처녀의 샘이란 뜻)은 지금도 수천 년 전과 다름없이 물이 철철 흘러나옵니다. 저도 이 기혼샘 입구에 들어가 보았는데 터널처럼 된 계단을 내려가면 물소리가 들립니다. 이 물은 히스기야의 터널을 통하여 533미터나 떨어진 실로암 못까지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기혼샘에서 솟아난 물이 실로암까지 보내진다는 뜻에서 ‘실로암’이란 이름이 붙었던 것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는 사도 요한에게는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실로암 못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실로암 되신 예수님께 가서 씻으라!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의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실로암 물에 씻는 장면을 세례에 비유하기도합니다. 이 소경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씻음으로써 영과 육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실로암이 되십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씻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모든 길이 밝히 드러나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은 조만간 마감됩니다. 주님이 떠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세요. 그래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눈을 떴느냐?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여러 가지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구걸하던 맹인이 눈을 떴다고 놀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거지를 닮았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 맹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그로라” 마치 예수께서 ‘내가 그니라’ 고 말씀하신 장면과 흡사합니다. 이 맹인은 분명히 눈을 떴습니다.
맹인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 질문이 재미있습니다. 누가 눈을 뜨게 만들었느냐고 묻지 않고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습니다. 눈을 뜨게 만든 주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떤 요행으로 눈이 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인 역시 마찬가집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 이 사람은 아직 예수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흙을 바르고 물에 씻은 것이 눈을 뜨게 된 원인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에 관해서 깨달아 가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묻습니다. “그가 어디 있느냐?” 맹인은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아주 멍청한 대화입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우리가 가장 먼저 물어야 될 질문은 “어떻게 눈을 떴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눈을 뜨게 했는가?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이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맹인도 군중들도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눈뜬 맹인에게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게 하신 목적을 찾지 못하고 눈을 뜬 수단만을 찾았습니다. 요한의 목적은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세요. 예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까닭은 그가 영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섬기는 본분에 이르게 하심에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세요!
오늘 실로암의 기적을 체험하자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항상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며,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오늘밤에도 은혜를 사모하여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왜 이 세상에는 질병과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으며, 죄와 죽음이 있는 것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을까? 이 문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관심사이며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괴로움과 불안은 어느 시대에나 또 어느 곳에서나 빠짐없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무신론자 까뮈는 말하기를 인생은 천치로 인하여 이루어진 잠꼬대이다.
허무주의자 쇼펜하워는 말하기를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행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하다.
또 불교에서는 인생은 무상무념이며 고해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망각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는데 길가에서 구걸을 하는 날 때부터 맹인 된 맹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선생님 이 사람의 맹인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맹인이 되는 것을 반드시 부모의 죄 때문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무의 죄도 아니고 다만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맹인은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눈을 씻으니까 눈이 떠져서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으로써 둘레가 약500m가량 되는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BC701년에 앗수르 나라의 산헤립이 침략해 왔을 때에 히스기야 왕이 침략을 막고 장기전에 대비하여 기혼 샘으로부터 400m의 수로 터널을 파서 예루살렘까지 연결하여 못을 만든 인공 연못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 눈을 뜨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걸하던 맹인이 멀쩡하게 눈을 떴으니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아니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하고 논란이 일어날 때에 본인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 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데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은 고통과 질병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인생에게 왜 질병의 고통이 오는가?
(1)죄의 결과로 오는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레26:14-16)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민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왕하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2)사탄 마귀가 갖다 주는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마17:15-18)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하시다.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막7:25-26)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욥2:6-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는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요9:2-3)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하여 오는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참혹하리만큼 연단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욥의 기도는 정말 우리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욥은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열 명의 자식들까지 다 죽은 후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욥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또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되어서 기와 조각으로 긁기까지 사탄은 욥에게 참기 어려운 고난을 주었지만, 욥은 끝까지 이기고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하여 연단을 시켜 병 고침은 물론 더 큰 축복을 주기 위함을 알 수 있으며, 훌륭한 목사님들이 불치의 병으로 끊임없는 연단을 받은 후에 고침을 받고 큰 그릇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목동들이 양이나 소를 몰 때에 양이나 소가 바른 길로 가지 않으면 목동들이 지팡이를 가지고 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연단의 매를 드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5)성경 말씀 중에는 죄를 짓지 않아도 귀신이 들리지 않아도 병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우리들 자신이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고, 불의의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육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늙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육체를 마치 질그릇에 비교를 합니다. 질그릇은 잘못 다루면 깨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육체는 6일간은 일을 하고 하루는 안식을 하도록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는데 욕심껏 주일날도 모르고 일을 하여 과로가 되면 반드시 병이 생기게 됩니다. 기계도 너무 많이 사용을 하게 되면 고장이 납니다.
마치 질그릇과도 같은 우리들의 몸이 어찌 온전할 수가 있습니까?
2. 눈먼 맹인의 실상은 어떠한가?
맹인은 시력을 상실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맹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맹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눅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성도들은 영안이 열려져야 영적 맹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영의 눈이 나면서부터 맹인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고 눈을 보게 된 사람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의 영안이 열리는 날 그 기쁨이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에 영안이 열려져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를 보고 그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하6장에는 엘리사가 아람군대에게 포위당하였을 때에 그의 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 저들을 지키고 있는 천군 천사들을 보게 하였습니다.
3. 예수님이 맹인을 어떻게 고치셨습니까?
(1)주님의 침과 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었습니다.
마가복음 10:46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똑같은 맹인이요 거지였던 바디매오를 고치실 때처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는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시지 않고 이와 같이 침과 흙을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성경 상 다른 두 곳에서도 침을 치료의 방법으로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막7:33-34)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막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실 때 몸이나 환부를 안수하시고 만지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눈먼 맹인이나 주변의 주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방법을 행하시므로 하여금 병을 고치시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민간요법으로 침을 외상이나 환부에 치료제로써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굳이 이것을 은유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침은 예수의 생명보혈을 뜻함이요 흙은 인간의 본질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흙과 하나님의 생기가 합쳐질 때 생령이 된 것처럼 예수님의 진액이요 생명이신 침과 흙이 합해질 때 닫혔던 눈이 열려지는 “에바다” 의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2)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맹인에게 실로암까지 가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장 그 자리에서 눈을 뜨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로암까지 가는 것은 「믿음의 행위」이며 실천하는 순종입니다. 마치 엘리사가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찾아 왔을 때에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사느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화만 가져가면 될 텐데 왜 쓸데없이 많은 돈을 드려서 밭을 사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지 꼭 예배에 참석을 해야만 되는가? 새벽기도를 꼭 해야만 하는가? 또는 꼭 십일조를 하여야만 축복을 받는가? 안 바치는 사람도 잘만 되던데! 때로는 우리 생각에 필요치 않게 생각이 되어도 하나님의 요구라면 싫어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청년들이 군대에 가고 싶어서, 군대가 좋아서 가는 사람 있습니까? 군대에 가야 하는 것이 나라의 법이요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싫어도 가는 것입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어찌 되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①우리 인간들은 살아가는데 온갖 질병을 포함해서 많은 고난과, 고통과, 질병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까지 참고, 인내하고, 애쓰고, 노력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②지금 내 자신은 눈먼 맹인과 같은 상태는 아닌지 자신의 믿음을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므로 빨리 자신의 영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아 멘>
③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를 가질 때 실로암 연못의 기적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바라기는 우리들 자신이 먼저 스데반과 같이 영의 눈을 밝히 떠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여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케 하여야 합니다.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들 주변에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장애와 하나님 영광
김남준 목사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나면서부터 맹인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맹인에 관해 질문 했고,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사이에서 장애에 관한 각기 다른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II. 장애와 제자들의 시선
A. 장애를 죄의 결과로 봄
제자들은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으로,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인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거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장애를 하나님의 저주로 본 것이다.
B. 정상인, 자기 의를 드러냄
이러한 생각은 정상인으로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저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맹인이 되었다면, 아무런 장애가 없는 자신들은 저 사람에 비해 자신이든지 또 부모이든지 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장애를 바라본 것이다. 사랑이 없을 때에 장애를 판단하는 모습이다. 남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마음 아파하고, 남의 아픔인데도 마치 나의 것인 양 절절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이 사랑인 까닭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하나의 가족으로 창조하셨다. 인종과 성별, 문화와 혈통과 상관없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서로에게 고백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계획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셨다. 교회는 처음 의도하셨던 인간 사회의 목적을 다시 구현하기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죄와 허물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가족 관계를 복원하시려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주셨다. 우리가 그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본받고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므로 한 몸을 이루며 살고, 또 선교를 통해 온 인류가 한 가족 되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처럼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III. 장애와 예수님의 시선
A. 장애는 죄 때문이 아님
예수님은 장애를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보셨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신명기 29장 15절과 창세기 12장 3절과 같은 구약에서도,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썼던 사도 바울도 저주를 언급했다. 신구약 성경의 증언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가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된다.
구약에 나타난 저주에 대한 내용, 특히 시편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적들의 저주를 탄원하는 기도는, 우선적으로 저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대적 때문에 훼방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저주를 말씀하실 때 이것은 신적인 경고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런 화법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사도 하지 않고 휙 등교해버리는 중학생 딸아이의 등에 대고 “야, 너 오늘 어제처럼 다른 데 가면 혼나. 너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와. 6시까지 안 들어오면 죽어!”라고 소리 칠 때, 강조점은 ‘죽어’가 아니라 ‘6시까지 꼭 들어와라’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어떠한 징계도 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얼마나 강하게 바라고 계시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B. 하나님의 일을 나타냄
오히려 이 장애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커다란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병을 고치심으로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셨다. 이 기적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영광의 기회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어떤 심정이 기적을 행하게 하셨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사도라 명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병과 약한 것과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셨고, 이 능력으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마음이 칼로 에이는 듯 아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병 자체를 없애지 않고 병 걸린 사람들을 돌보셨다. 가난 자체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도와주셨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도 하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이기시면서 까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장애가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심으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C. 예수님의 일을 우리가 함
예수님의 사역에는 참여가 불가능한 사역과 가능한 사역이 있다.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시는 이런 사역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해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기까지 불쌍히 여기신 이 사역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사역이다.
교회는 이웃의 장애를 한 몸인 교회의 약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고치려고 하지, 안질이 났다고 눈을 빼버리고 코가 막힌다고 코를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다. 자기 몸을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몸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그들의 장애가 바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섬김으로 드러낼 기회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영성이고 경건이다.
IV. 적용과 결론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사회적인 편견과, 장애를 죄악시하는 이 모든 사랑 없는 판단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에게 매일매일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이웃의 모든 장애를 자신의 아픔인 것처럼 여기며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살아가는 사회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유대인 같은 마음을 품지 말고 예수님 같은 마음을 품어 섬기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요 9:1-7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동냥을 합니다. “한푼 주십시오. 한 푼 주십시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자기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 부모가 죄가 많아서 그렇습니까?”당연히 그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병이 들면은 자기 죄 때문에 그렇던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니야.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깜짝 놀랄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 중에도 체험하는 많은 크고 작은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한 무대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촛불을 발명을 해서 아주 밝은 촛불을 만들었다고 큰소리 하면은 그 촛불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두울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밤이 와야 캄캄할 때 촛불을 켜야 효과가 있지 대낮에 촛불을 켜봤자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촛불의 밝기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는 밤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음료수를 만들어서 코카콜라 굉장히 마시면 시원하다고 하는데 그 시원한 것을 언제 체험시킬 수 있습니까? 목이 마른 한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다음에 갈증이 났을 때 마셔보면 시원한 것을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음식을 먹으면 배가 든든하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배가 부르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 먹여봤자 소용이 없어요. 헐벗고 굶주려서 배가 고프고 허기증이 난 사람에게 그 음식을 먹여봐야 배가 불러지고 튼튼한 것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어떻게 알아요? 등 따수고 배부르고 몹시 평안한데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증거될 수가 있어요?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배고픈 자에게 밥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물이 필요한 것이고, 어두운 곳에 빛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무대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속에 많은 고난이 하나님이 무대를 허락하셔서 다가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고난을 가져오지 않아요. 그렇게 말합니다. 마귀를 허락해 주어서 고난을 만들게 하시는 이는 배후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예
첫째로, 출애굽 때 홍해가 갈라진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게 할 때 홍해 저 윗편에는 갈대의 밭이라고 있습니다. 물이 얕은 갈대숲이 많은 갈대의 바다가 있습니다. 그 홍해수 윗편으로 인도해서 갈대의 바다를 그냥 맨발벗고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그런 요란스러운 역사가 일어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 홍해 저 북편에 갈대의 바다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지 아니하고 정 가운데 아주 홍해가 넓고 깊은 곳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태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와 같이 홍해가 창창하게 흐르고 멀고 깊은 곳으로 인도했을까요? 그래야 하나님이 홍해수를 가르는 기적을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해의 정면 아득히 깊은 곳을 택하여 그 홍해 가에 진을 치게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모세가 마음대로 홍해수 가운데로 이끌어 온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데리고 와서 장막을 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배를 타고 건널 수도 없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널 수도 없습니다. 물이 굉장히 깊고 저쪽 건너편과 이쪽에 굉장히 거리가 멉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그곳에 와서 천막을 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래야만 하나님이 홍해수를 가를 때 정말 하나님이 역사한 표적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연히 그렇게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다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8절로 9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로의 왕을 강퍅하게 해서 그 대군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장막친 그 홍해가로 습격해 오도록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무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람의 힘으로 못건널 홍해가에 진치게 하시고 난 다음 바로의 그 다음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해 오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어야 진짜 구원이 되고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천년만세로 우리에게 읽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무장이 되어 있지 않고 오합지졸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에 있는데 애굽의 바로가 대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해 오니 속수무책입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대항할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습니다. 이젠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땅을 치며 “모세야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에 데리고 와서 장례 지내게 하느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대를 만들어 놓으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낸 것입니다. 밤이 오게 하고 빛을 비취게 한 것처럼 배가 고프게 하고 밥을 주셔서 밥이 중요한 것을 알게 한 것처럼 목마르게 하고 물을 주어야 물의 중요함을 깨달아 아는 것처럼 그들이 적군에게 포위가 되고 앞을 건너갈 수 없는 바닷가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행해야 그게 진짜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 말하기를 "그것은 병주고 약주는 것 아닙니까?" 맞았어요. 병이 있어야 약이 낫는지 안 낫는지 알 수 있잖아요. 병이 있어야 약의 효과를 볼 수 있잖아요. 환경에 고난이 다가와야 고난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무대라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1절로 22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야훼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라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야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로 건너가는 것 보니 우리도 따라가자"고 그 대군이 바다 안으로 들어올 때 바닷물이 덮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물에 빠져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큰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 맨 가운데에 바닷물이 깊은 해변가에 천막치게 하고 애굽의 바로왕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해 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한 장면을 만들고 난 다음 바닷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땅을 건너게 하고 난 다음 다 건넌 후에 애굽 사람들이 뒤에 따라오니 바닷물이 덮쳐서 다 죽게 하고 이 기적이 얼마나 큽니까? 역사적으로 영원히 기록에 남아있는 기적 아닌 것입니까?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바닷물을 가르는 하나님을 믿고 알 수 있게 된 것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고난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좋은 기회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가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두 걸음 다가오십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충만히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등지고 멀리 나가면 고난은 고난대로 있고 해결할 하나님도 안계시고 절단이지요.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위해서 무대를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그 무대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고난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경제적인 고난에다가 사회적인 혼란, 여러가지 어려움, 북한의 도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또 촛불시위 여러가지 어려운 환난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 고난 동안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낼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리가 원망, 불평, 탄식하면 고난은 고난대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우리를 멀리 떠나 계시면 모든 것이 절망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다가올 때 고난을 영광으로 변화시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무대로 삼아서 그 영광을 나타내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때에 우리 한국의 교회들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나라가 시험과 환란 속에 빠지고 고통에 처했으니 하나님이 찾아와서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악을 변하여 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이 악이 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는 하나님 모든 어려움과 고난이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좋은 하나님 좋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2. 나사로의 부활에 관하여
둘째로,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나사로의 부활에 관하여 알아 보십시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누이들이 예수님께 연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저편에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으므로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 부탁을 받고도 이틀 동안이나 있는 곳에 계시면서 베다니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나사로가 죽도록 허락해 놓으신 것입니다. 병든 나사로를 구해 달라고 요단강 저 편에 계신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기별 했으나 일부러 이틀 더 머무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6절로 7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왜 예수님께서 왜 이틀을 더 머물고 계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왜, 죽어야 부활시키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산 사람보고 "살아나라. 살아나라" 하면은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살아있는 뭘 살아나라고 합니까?" 죽은 사람보고 살아나라고 해야 살아나서 기적이 일어나지.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도록 기다리시며 죽도록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무대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지요. 큰 불행이요, 큰 고통인줄 알고 탄식하고 통곡하고 먹지도 못하고 기절초풍을 할 정도가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어둠이 와야 빛을 비취듯이 죽어야 살리는 역사를 베풀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렸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이 있어야 되고,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훗날에 만인을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4절로 15절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도록 한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안믿는 사람도 죽을 병에 걸려서 모든 의학이 다 필요 없을 때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님이 고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 예수 안믿게 되나요? 반드시 믿지요. 사업이 망해서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앉아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에 처했을 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그 사람 평생에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찬미하고 감사하고 주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시련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무대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무대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로 44절에 좀 길지만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산사람 데리고 주님께서 구주인 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요. 죽은 사람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살려내니까 그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인 것을 증명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홍해수가 갈라지게 한 것도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홍해 가운데 못 끝날 처소에 이스라엘 백성을 진을 치게 하시고 애굽 군대를 와서 공격하도록 허락하시고 주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만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처럼 나사로가 죽도록 기다려서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도록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주님이 찾아와서 나사로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려 놓으시니 주님이 구주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만천하에 증명이 되고 오늘날도 우리가 이 기사를 읽고 마음에 힘과 용기를 얻고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고난의 무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함
셋째로, 고난의 무대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 한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죽은 것과 같은 고통에 넘어지는 이유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아무리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힘있고 복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생활과 환경에 고통이 다가와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서 이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가오는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깨달아 알게 하고 더 큰 은혜를 받고 더 큰 복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깨달아 알수록 더 큰 복이 되고 하나님을 체험 할수록 더 큰 은혜가 되고 하나님과 동행 할수록 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더 깨닫고 하나님의 더 은혜 깊은 속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영혼이 정말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한없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인데 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고난과 시련을 통하지 않고는 없단 말입니다. 등 따수고 배부른 사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주 등따수고 배부르고 평안한 사람 새벽기도 나오는 것 보았습니까? 아무리 새벽기도 나오라고 해도 "아이고 좀 더 자구요. 피곤해서 못나와요." 그런데 고통이 다가오면 피곤이 어디 있습니까? 밤새도록 고함을 쳐도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이 다가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배우가 아무리 연극을 잘해도 무대없이 어떻게 연극을 하는 것입니까? 무대를 먼저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배우가 와서 연극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권세와 능력과 영광이 많아도 나타나기 위해서는 무대가 만들어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데 그 무대가 바로 여러분이요,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이 나타나는 무대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을 나타나기 위하여 우리에게 무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 뒤를 돌아보니 전에 모르던 것이 많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제가 17살 때 폐병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나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었습니다. 한참 청운의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며 앞날을 향하여 달리다가 나만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낙오자가 되고 6.25사변 난 이후에 너무나 적변하는 사회 현상이라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도 할 수도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니 나에게 절망이 얼마나 엄청났습니까? 그러한 절망이 아니고는 우리 집에 두터운 불교 집안의 그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절대로 예수 믿는 것 허락되지 않습니다. 예수쟁이가 발걸음 한걸음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죽게 되니까 별도리 없지요. 완전히 죽게 되니까 그때야 "하나님 날 살려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와서 나에게 전도하게 되고 성경은 전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한없는 불행이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서 이제 73살이 되어서 내가 돌아보니 가슴에 환하게 보여요. 하나님이 다 작정 하셨군 “놀랬지? 깜짝 놀랬지?”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 보면 그때 내가 폐병 안 걸렸으면 예수 믿게 되지 않고 우리 집안 식구들도 다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목사도 안되고, 천하만국에 나가서 복음도 못 전했을 것인데 그때 폐병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그 폐병을 들리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은 무대를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무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저를 고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은혜를 받아서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종이 되고 말씀을 증거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세월이 지나가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그때는 원망스럽고 불평하고 탄식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뒤를 돌아보면 '야~ 하나님이 나에게 큰 복을 주시려고 영광을 나타내셔서 나를 만나고 나를 더 깊이 믿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구나!'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께서는 고난당하신 것은 다시 더 살리기 위해서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죽음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우리를 다시 살리는 역사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죽음을 체험하게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난당할 때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고난당할 때 마음에 확신과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고난 당하는 것이 우연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날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무대를 만든다는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큰 역사를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나타날 무대를 만든다는 확신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이러한 확신이 있으면 주님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처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크고 은밀한 일을 하나님이 다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비밀을 하나님이 딱 포켓트에 넣고 계시면서 우리가 부르짖고 고통 중에 외칠 때 그 카드를 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틀린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마음의 불신과 불순종의 돌문을 옮겨 놓아서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고난당하느냐. 왜 하나님이 나를 버리느냐. 왜 내게 고통을 갖다 주느냐. 하나님이 안살아 계신가보다. 아이고 믿음 다 포기해 버리자.”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우리 마음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돌문을 옮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돌문을 옮겨 놓듯이 우리 마음에 불신앙과 불순종의 돌문을 옮겨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때 고난 당할수록 새벽기도도 나오고 철야기도도 나오고 주일예배 드리러 나오고 기도원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이시여 빨리 나타나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고난이라는 무대를 나에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 하나님이 연출하여 주시옵소서.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부르짖고 찾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대를 만들어 놓으시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무대에 출연해서 크고 작은 능력을 나타내서 온 영광을 받으시고 박수갈채를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마가복음 11장 23절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믿음의 역사를 베풀면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휴 나는 믿음이 약하고 없는데요." "또 다시 그 말을 하십니까?"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들에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 했는데 아무도 겨자씨 보다 적은 믿음 가진 사람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다고 말씀했는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겨자씨 보다는 큰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는 소리는 다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팔을 주셨는데 팔이 없다고 안 쓰면 그냥 옆에 달려 있지요. 달려있는 팔이 되지 말고 팔을 주신 것을 알면 팔을 들고 쓰면 쓸 수 있지요. 믿음을 주신 것을 알고 그 믿음을 사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감사와 찬양하며 기적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과 동시에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없지요. 하나님이 안계신데 무슨 기적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실 때는 보통 찾아오실 때도 있지만은 기적을 타고 찾아 오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킬 것을 기대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 “사람이 야훼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너무 조급하게 부르짖지 말고 잠잠하게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감사하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도 “대저 야훼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저는 어릴 때 우리 집이 언양시내 하고는 멀었습니다. 장날 어머니가 장에 갔다가 오시면 어머니 기다린다고 길에 나가서 소나무에 올라가서 내내 늘 저 멀리 바라봅니다. 저 멀리서 여자만 나오면 '아이고 우리 어머니인가 보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도 어머님 걸음은 우리가 잘 알아요. 많은 여자들이 길을 걸어와도 "저것은 아니야. 저것은 아니야." 내 동생들이 "아이고 저기 어머니 오시나보다." "아니야. 어머니 아니야." "왜?" "어머니 걸음걸이가 내 머릿속에 꽉 박혀 있거든. 어머니가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면서 걷거든... " 어머니 걸음걸이를 보면은 “아이 어머니다. 우리 뛰어 가자.” 어머니를 향해 뛰어 갑니다. 그 기다리는 것 우리 형제들이 모여서 어머니 오기를 그렇게 기다린 것은 어머니가 시장에 갔다 올 때는 눈깔사탕이라도 사 오시거든요. 그것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기다리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어머니를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기다려야 눈깔사탕도 얻어먹지 안 기다리는 자에게는 눈깔사탕도 안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서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어려움 당하실 때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잠잠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큰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렇게 마음이 반갑고 기뻐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국 사이스 웰스의 한 작은 탄광촌에서 갱이 무너져서 14명의 광부가 갱 속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이 광부를 찾는다고 바깥에서 그 무너진 흙더미를 뒤지는데 어디에 갇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나흘 동안 파헤쳤으나 광부가 어디 매몰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포기하려고 하는데 조용한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여 보니까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리.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일평생 지나갈 동안 늘 보호 하소서" 찬송가 438장을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 찬송가 소리를 통해서 들리는 곳으로 파헤쳐 들어가니까 나중에 광부들을 발견했는데 그 사람 14명이 하나님 앞에 기다리면서 나흘 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못마시면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기다린 것은 다른 구조원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줄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면서 기다렸는데 그 찬송소리가 바깥의 구조원들을 이끌어서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한사람도 남김없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눈동자처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사하며 기다리는 자를 주님께서 때가 늦지 않게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미쁘사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고난을 주실 때라도 감당치 못할 고난 안주십니다.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고난 주셔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도하고 기다리고 부르짖어서 하나님 만나서 더 큰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좌우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무슨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야깃 거리를 들어서 우리가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직접 만나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야 돼요. 그 만나는 체험이 바로 고난을 통해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난이란 왜냐, 내가 깨어져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거든. 내 고집대로 내 중심대로 섰을 때는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어요. 내가 깨어지고 내 음성대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 고집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이와 같은 변화가 다가와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인데 그런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시험과 환란을 통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과 환란을 통하여 완전히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놓지는 결코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중국 양주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양주의 학자들과 일부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들에게 돌맹이를 던지고 선교사들을 죽이고 큰 시련과 환난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영국에 전파되어 결국 국가 간에 큰 문제로 확대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국 정부에서는 허드슨 테일러를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오히려 정부에서 허드슨 테일러를 박대하고 영국에서 보내는 선교헌금도 못보네게 해서 큰 시련에 빠졌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200여명의 선교사를 거느리고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재정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걸려서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최대의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떠나가자. 우리 철수하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겠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그때 사람들에게 호소하거나 탄원하지 아니하고 사무실 문을 닫고 엎드려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어려운 문제를 사람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부르짖는데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 죠지뮬러 목사님이 2천 파운드나 되는 큰돈을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냈었습니다. 아주 어려울 때 2천 파운드나 되는 거대한 돈이 와서 그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은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동안에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일하는 것을 모르던 영국의 많은 교회 성도들이 이것이 신문에 나고 사람들의 입에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나자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에서 나가서 중국에서 내지선교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회가 모아지고 헌금이 모아지고 전에 보다도 더 많은 돈이 모아져서 화가 변하여 큰 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큰 시련을 겪게 했는데 허드슨 테일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의지하니 하나님의 고난의 무대를 만드시고 난 다음에 영광으로 나타내 주셔서 전에 하던 선교사역 보다 더 큰 선교사역을 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베풀 수 있는 자원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그는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도 예비하셔서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여러분의 삶 속에 다가오는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몰라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여러분 나타나기 위한 무대를 만드신 것을 아시고 고난당하거든 하나님이 무대를 만드시는 분이요, 또 나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요, 날 만나게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기쁘게 하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따라 하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따라 오시고 체험이 오면 환난이 오면 뒤에 하나님이 따라 오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내 주시고 영광을 보여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암의 기적을 경험하자
요 9:1-7 / 양인순 목사
전에 경험했던 일입니다. 추운 겨울날 노회 사무실에 회의가 있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종로 5가에서 내려 대학로 쪽으로 나가는 지하도 계단 앞에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구걸을 하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그 자리에서 맹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날씨도 춥고, 배도 고파 보여서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몇 걸음을 더 가다가 안쓰러운 맘이 들어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맹인이 선글라스를 벗고 지폐를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까? 직감적으로 ‘저 분은 맹인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오늘도 속았네’ 생각하며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장난기가 동해서 그분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아니 앞을 보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안경을 벗으면 보이십니까?” 그랬더니 그 맹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맹인 행세를 하며 구걸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맹인이 유머 감각이 있습니다. “원래 여기서 구걸하던 맹인은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대신 도와주는 겁니다.” 그럼 당신 친구는 어디 갔습니까? “예, 저 앞에 있는 극장에 영화 보러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같이 웃고 말았습니다. 참 낭만적인 맹인 친구들 아닙니까? 이런 경우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맹인은 진짜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었던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장애인에 대하여 조상의 죄가 3-4대까지 유전된 결과로 보았습니다. 반면 사두개인들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장애가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도 맹인을 보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다같이 3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그 맹인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종종 선천성 장애인을 보거나 질병이나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분을 보면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물론 간혹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픔과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여주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에는 뜻이 있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까닭 없이 우리를 힘들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반드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하는 자를 볼 때 함부로 정죄하거나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요, 또한 자신도 언제 그런 상황에 직면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심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맹인의 장애 원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계십니다.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하는 귀찮은 존재로서의 맹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들과 같이 앞을 보는 자나 저렇게 천성적인 맹인이나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들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계획과 뜻이 있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뒷부분에 보면 오히려 앞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4-5말씀을 읽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자임을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지금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힘써 전해야 할 시간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어둔 밤이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금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됨을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빛은 더러운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본래 어둠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면 어둠 가운데 거했습니다. 죄악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 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빛의 자녀가 됐습니다. 더 이상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아직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자들은 빛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빛이 다가오면 거부합니다. 도망칩니다. 비난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비추는 곳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습니다.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의 자식들은 빛 가운데 나타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존재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은 빛을 모릅니다. 빛을 발견하고, 빛을 본 자들이 전해야 합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그 우물 안에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물 밖의 세상을 본 개구리는 세상은 참 넓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본 자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빛을 본 자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아니 말씀 한 마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 굳이 이런 수고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뜻은 ‘흙’과 ‘인류’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흙은 곧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정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됨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흙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습니다. 흙벽돌로 집을 짓고, 흙을 가까이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것이 콘크리트 더미 속에 삽니다. 그래서 각종 호흡기 질환에 아토피성 피부염이 만연합니다.
지난 주 하루 만에 강원도 오지인 법수치라는 곳을 다녀왔는데요 초등학교에 서울에서 온 학생들이 있답니다. 대부분 아토피나 호흡기 질환이 있는 아이들인데요 6개월만 그곳에서 살면 깨끗하게 치료된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분의 창조의 손이 머무는 곳에는 하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세상에는 불치병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했어도 못 고치는 병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창조의 손길이 임하면 고쳐지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손은 권능의 손이요, 치유의 손이요,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하시는 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 손이 우리를 만져주실 때 놀라운 회복과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에게 창조의 손길로 흙을 그 눈에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왜 예수님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당신이 직접 그 자리에서 씻겨주시던지 아니면 눈을 바로 뜨게 하시지 굳이 실로암으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 의하면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입니다. 이것은 ‘아포스톨로스-사도’라는 헬라어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맹인에게 사도와 같은 사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눈을 뜨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치유는 눈을 뜨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맹인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흙으로 덮인 눈을 씻습니다. 그 순간 눈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 그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지만 여러분이 맹인의 입장에서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과연 실로암은 어떤 곳일까? 실로암에 가서 씻으면 과연 눈을 뜰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실로암에 가지 않았을가요?
만약 그가 실로암에 가다가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므로 실로암 못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실로암’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실로암 못은 도대체 어떤 곳 이길래 날 때부터 맹인 된 자가 눈을 뜨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성 동문 밖에 기드론이란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기혼이란 샘이 있습니다. 이곳으로부터 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이는 곳이 바로 실로암 연못입니다.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이 바로 실로암 못입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고서는 눈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은 단순히 물가로 가서 씻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 가장 낮은 곳에 거하라, 가장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 맹인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가장 낮은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 하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실로암 못의 물이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명령을 따라 순종했을 때 그는 즉시 밝은 눈으로 지금 자신과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을 봤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이 내 곁에서 말씀하시고, 진리를 가르쳐주심에도 불구하고 어둠속에 빠져서 빛이신 주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내 곁에서 동행하시고, 말씀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맹인의 상태입니다. 눈은 떠서 보고 있지만 육신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신령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다시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사도를 부르시고 파송하시듯 우리를 주의 자녀로 부르시고 훈련시키셔서 다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으로 가라,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 가장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라.”
지금 우리들이 함께 하시는 주님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맹인처럼 실로암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난 주 <도루묵 신앙에서 벗어나자>는 제목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착각은 무엇입니까? 그는 탐심의 노예가 되어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으로 허망한 도루묵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들이 도루묵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결국 실로암으로 가야합니다. 전에 강원도 속초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실로암입니다. 그 실로암은 어딘지 아시죠? 바로 막국수 집입니다. 메밀 막국수에 동치미 서너 국자 넣고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할머니가 그만 두셔서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꼭 먹어보기 원하시면 물치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샘 메밀국수집을 찾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의 맛집을 찾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아가도 그곳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오직 내 영혼의 실로암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도루묵 인생을 청산하고, 영적 맹인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가장 낮은 마음으로 실로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 실로암 못가에 가야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영적인 눈뜸을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고, 새로운 역전의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솟구쳐오는 욕심과 욕망을 물리치는 비결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지금보다 더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고도를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이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우선 내가 먼저 높아지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모든 것이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인정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최근 몇 주 사이에 묻지만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지만 우리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여의도에서 칼을 휘두른 사람의 기사를 다 보셨죠? 그는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무시를 당했습니다. 동료가 어떻게 되든 자기 실적을 높여서 인정받고 승진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 그 마음에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퇴근하는 동료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른 것이죠.
이런 사회 병리적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서로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당시의 사회적인 약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던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표식은 바로 섬김입니다. 그 신앙의 성숙성은 바로 섬김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것은 곧 낮은 마음의 삶이요, 낮은 마음의 삶은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은 언제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겨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종이 아무리 주인을 잘 섬겨도 그 속에서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종을 섬기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군 부대에 충성스럽게 사역하는 군종 목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군인교회에 장교와 사병들이 잘 모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단장 집사님이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단장님에게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이번 주 교회 오실 때 정복차림에 모든 훈장을 다시고 오십시오. 그리고 교회 입구에서 누구에게나 인사를 정중히 하시고 주보를 나눠주십시오.” 실제로 사단장이 주일 날 아침 교회에 나오는 모든 장교에게 깍듯이 인사를 합니다. 사병이 와도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환영합니다. 그러자 병내에 소문이 쫘악 퍼졌습니다. “우리 다음 주에 사단장님한테 인사한번 받으러 가자.” 그래서 교회가 금방 부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등병이 아무리 군복에 각을 잡고 서서, 산이 울리도록 인사를 해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별 두 개의 사단장이 자기 부하나 사병들에게 인사를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섬김의 기적입니다. 높은 자가 낮아질 때 일어나는 실로암의 기적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많이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자는 초신자를 더욱 섬겨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리더십들은 먼저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먼저 미인대칭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웃음으로 인사하시고, 말을 건네십시오, 그리고 최고의 칭찬을 던지십시오. 그 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실로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그곳에 감동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나타납니다.
휴가 중에 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목사님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세계에서 맹인으로 병원장을 하는 분은 자기뿐이라고 자랑삼아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눈을 뜨고 사는 제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는 타인을 향한 따뜻한 배려가 있습니다. 낮은 자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기억해주십니다. 만날 때마다 밥을 사주시고, 애들 용돈까지도 챙겨주십니다. 그 한분의 섬김의 노력과 헌신이 실로암 안과병원을 건축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도 창립기념헌금 전액을 보탰습니다. 그 병원을 통해 이 땅의 수많은 저시력자들의 눈을 뜨게 합니다. 이제는 동남아 지역을 순회하면서 안과진료를 통해 어둠을 밝히는 실로암의 기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실로암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실로암 못으로 가십시오. 지금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십시오. 지금보다 더 낮은 마음으로 먼저 섬겨보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인생의 새로운 눈뜸을 통해 실로암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나 한 사람이 실로암으로 내려갈 때, 바로 나 한 사람의 작은 섬김이 가정을 회복시킵니다. 우리 성지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나 한 사람이 섬김을 실천할 때 우리의 일터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가슴 따뜻한 정이 넘치는 기적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높아지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놓고, 우리 함께 더 겸손하게 실로암 못으로 내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눈뜸을 경험하고, 새로운 기적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