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금) 이사야 51:17-23 찬송 582장
17.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18.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19.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20.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
21.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23.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개역 개정)
- 징계받는 선민을 향한 위로와 구원 약속 -
51:1-52:12까지는 선민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앞의 두 단락(1-8, 9-16절)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의를 좇으며
그분을 절대 신뢰할 때 선민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됨을 거듭 강조했다.
이에 오늘 말씀에서는 선민의 구원이 죄에 대해서는 징계하실지라도
택한 백성 자체는 결코 멸절시키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오직 그것 때문에 가능함을 강조한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먼저 17-20절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을,
21-23절은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거두시고 대적의 손에서
선민을 구원하시며 그 대적을 멸하실 것을 언급한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오묘한 조화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범한 죄에 대해서 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공의에 철저한 분이지만
한번 택한 자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반드시 구원하시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특히 19절에 나타난 고통받는 백성들을 향하여 동정을 보내면서도
징계의 손을 곧 거두시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공의와 사랑의 두 속성이 서로 갈등하나 모순 없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습3:5, 17)
사실 선민에 대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볼 때 대적에 대한 승리와 구원의 원동력이 된다.(엡2:4)
19절)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처참할 정도로 극심하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여기서 이 ‘두 가지 일’이란 뒤에 나오는 ‘황폐와 멸망’, ‘기근과 칼’을 말한다.
황폐와 멸망이 하나요, 기근과 칼이 둘이다.
여기서 ‘황폐와 멸망’이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이스라엘의 국토가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기근과 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의 침공으로 인하여 당한 굶주림과 살육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여기 ‘두 가지 일’이란 결국 ‘한 가지 일’
곧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다른 측면에서 말한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말미암아 국토는 완전히 황폐화되고 멸망하였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과 살육의 칼에 의해 죽어가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굶주림과 살육의 칼에서 겨우 벗어난 남은 자들은
모두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야만 하였다.
참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당한 고통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민족도 그들이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은 당하지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가하신 것인가?
당신의 은혜를 배신한 그들의 행위가 너무도 괘씸하여
그들을 이 땅에서 멸하기 위함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을 가하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은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커녕 그대로 방치할 경우
죄에 더욱더 물들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죄를 씻어내고 거룩하게 되어야만 한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신 것이다.
이는 마치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다.
그런데 흰옷은 쉽게 더러워지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흰옷을 다시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옷을 양잿물에 담가 뜨거운 물에 삶고 그 후에는 방망이로 두들긴 후에
물에 행군 다음 짜내야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는 수단으로 고통이라는 세탁의 방법을 동원하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러한 세탁 과정에서
비록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그로 말미암아 정결해져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와 재난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지향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범죄할 때,
때로 지나칠 정도로 보이는 혹독한 징계를 내리신다.
사람이 볼 때 그것은 완전한 심판으로 보이지만
그로 인해 그가 완전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완전한 멸망이란 없다.
물론 육적으로는 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육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극심한 심판 중에도 그의 영혼은 정결케 되어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혹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고통을 당할 때에는
그것이 우리를 정결케 하여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인 줄로 알고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돌이키며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6-7)